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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어거스틴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 이해
이 글은 문병호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어거스틴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구체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제시하고 있다
1. 들어가는 말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의 기독론에 대한 조명은 그리 활발치 않다. 삼위일체론을 비롯하여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등은 그의 인식론과 윤리관 혹은 문화관 등과 더불어 인구에 회자하는 바가 많으나 그의 기독론을 별도로 다룬 글은 드물다. 기독론을 다룬 몇몇 글들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에서 다루어진다. 그의 사상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기독론은 별도로 조명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초대교회의 교부신학과 중세신학의 가교(架橋)로 여겨지며, ‘원천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은 어거스틴의 길(via Augustini)을 다시 모색하자는 뜻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어거스틴주의(Augustinianism)의 부활이었다.
종교개혁이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인식론에 기초한 중세의 이성수위(理性首位)를 거부하고 신앙수위(信仰首位)를 주창하는 가운데 이성의 인식적 역할을 강조했다고 볼진대, 어거스틴은 그 선구적 위치를 점하는 교부로 자리매김 된다. 어거스틴이 일생동안 수행한 마니주의자들(Manichees), 도나투스주의자들(Donatists), 펠라기우스주의자들(Pelagians)에 대한 신학적 변증이 가장 신학적이면서도 논리적 호소력을 지닌 것은 그의 이러한 면모 때문이었다.
펠리칸이 말한 바, 어거스틴은 힐라리(Hilary of Poitiers, 310-367)를 이어 서방의 기독론을 한 단계 격상시킨 “가장 창의적인 해석자”였다. 어거스틴은 정통기독론에 서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한 인격 양성의 위격과 대리적 속죄를 상세하고 명쾌하게 개진하였으며, 서방전통에 서서 성령의 출래에 있어서의 필리오케(Filioque)를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히 개진하였다.
학자들은 어거스틴이 서방의 전통에 서서 동방신학자들과는 달리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의 단일성에 치중한 반면 신인양성의 속성교통과 그와 관련된 페리코레시스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관심을 쏟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이 종교개혁자들 특히 개혁주의자들에게 계승되어 그들의 기독론이 이러한 부분에 취약함을 노정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치 어거스틴의 기독론이 칼케돈신경의 배후가 되었던 갑바도기아 교부들이나 알렉산더의 키릴(Cyril of Alexandria, 376-444) 등과는 괴리가 있는 반면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0)의 경향을 잠재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어거스틴은 교리사적 의미를 갖는 당대의 기독론 논쟁에 직접 휘말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불후의 대작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신격(deitas)에 관한 삼위일체론적 논의가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에 관한 기독론적 논의에 기초해서 교호적으로 행해지며, 다수 그의 변증적 작품들에 뚜렷이 노정되는 바, ‘오직 그리고 전적인 은혜로 인한(gratia sola et tota)’ 성도의 영원한 선택과 구원서정(救援序程)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교리가 그가 지상의 생애 동안에 다 이루신 대리적 속죄의 의를 전제하는 가운데 개진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어거스틴 신학의 요체를 그의 기독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를 위격적 연합과 그에 따른 신인양성의 교통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어지는 제 2장에서는 어거스틴의 신경적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기독론 체계를 전체적으로 고찰하는 가운데 우리의 논제가 지닌 의의와 가치를 파악한다. 제 3장에서는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성육신을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살펴본다. 여기에서는 영원한 나심 곧 성자의 신격과 역사상 나심 곧 성육신의 상관성과 위격적 연합에 따른 신인양성의 속성교통에 주목한다. 제 4장에서는 이러한 속성교통에 따른 중보자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의 비하와 승귀의 상태 가운데 어떻게 수행되었으며 그가 다 이루신 의가 어떻게 성도에게 지금도 전가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제 5장은 결론에 할애된다.
2. 사도신경에 기초한 기독론 체계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여러 논쟁들을 거쳐서 수립된 어거스틴 신학의 근간이 되는 오직 그리고 전적은혜 교리를 지탱하는 주축(主軸)으로서 그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오직 그리스도(solo Christo)’에 따른 성경해석을 들었다. 어거스틴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만나게 되며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고백으로 새겨진다는 사실을 줄곧 강조하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로마서 10장 8-10, 17절을 상기하게 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하여 “즐기는 것”과 “사용하는 것”을 구별한다. 전자는 하나님 자신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내적으로 새기며 그 말씀대로 자신을 형성시켜 나가는 열매(fructus) 맺는 지식을 의미한다.
후자는 전자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단지 무엇을 지각하고 인지하는 외적 지식을 뜻한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을 믿고 그 믿음으로부터 성자의 성육신에 이르는 지식에 “frui”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내적 고백의 지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신앙고백서와 신앙교육서라고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기독론 자체를 체계적으로 다룬 별도의 작품을 저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종의 신앙고백서라고 볼 수 있는 『믿음과 신경(De fide et symbolo)』과 일종의 신앙교육서라고 볼 수 있는 『라우렌티우스에게 보내는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교본』을 통하여우리는 이를 일목요연하게 조망해 볼 수 있다. 이하 이 두 작품을 함께 다루는 가운데 우리는 어거스틴의 기독론이 사도신경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라우렌티우스에게 보내는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교본』에 나타나는 기독론의 체계를 살펴본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요 1:14)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육신이 취해졌다는 것(a divinitate carne suscepta, non in carnem divinitate mutata)”을 뜻한다고 단정한다. 이 부분에서 “육신”은 부분이 전체를 표현하는 방식(제유법, synecdoche)으로 사용되어 “몸”을 지칭한다. 그의 “몸”은 우리와 동일하나 그것은 “모든 죄의 오염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본성”이다. 그는 “본성상(natura)”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은혜로(gratia)”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종으로서 우리의 자리에서 모든 역할과 사역을 다하셨다. 그는 자신을 비우셨지만 여전히 아버지와 “동동하신(aequalis)” 아들이시다. “그는 그만 못하게 되셨으며 동시에 동등하게 남으셨다(minor est factus, et mansit aequalis).” “말씀으로서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사람으로서 그는 아버지보다 적으시다(propter Verbum aequalis Patri, propter hominem minor).”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본질로 계시는—곧 신성으로 계시는—제 2위 성자의 한 인격 가운데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인성이 취해졌다.
그리하여 말씀과 사람의 한 인격이 되셨다. 두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므로 사람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본성상”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은혜로”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그 자신이 우리를 위한 은혜의 원천이 되시고자 함에 있다. 어거스틴은 성육신을 인성이 신성에 취해진 사건으로서 이로부터 우리 인성이 신성에 동참할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죄사함을 받고 자녀로서 거듭나는 의를 전가받는 구원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세례의 인침으로써 부각된다. 이러한 인침은 새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죄를 떠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의 삶 가운데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는 거룩한 삶을 사는 은혜에 전부 미친다. 이는 오직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 어거스틴은 성도의 구원 과정에 미치는 이러한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장사, 부활, 승천, 재위(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재림의 사건에 부합하며, 단지 “신비주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단지 주관적이지 않으며 객관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론 체계는 『믿음과 신경』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다만 이곳에서는 성육신의 의의 및 가치와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계가 더욱 심층적으로 다루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간상(ex tempore)” 시작이 없으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genitus) 만들어지지(creatus) 않으신 분이시다. 그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으로서 종의 형체(forma servi)를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다(빌 2:6). 그는 본성상(natura)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하나님의 은혜로(gratia)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그가 영혼과 육체의 “순수한(integrum)” “전인(全人, totum hominem)”이 되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은 물론 육체와 함께 인성을 이루는 영혼 역시 그 무엇으로도 “더럽혀지지(maculata)” 않았다.
그리스도의 “비하(humilitas)”는 이러한 신인양성의 인격 가운데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드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원의 의를 다 이루심에 있다(빌 2:8). 그가 죽으시고 장사되심은 그와 함께 우리가 죽음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ad vitae novitatem)” 부활할 것임을 드러낸다. 이것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심을 뜻한다(롬 8:17).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의 거룩한 땅으로 오르심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살 것을 확정하셨다. 주님의 몸이 “하늘의 처소에(coelesti habitationi)” 적합하게 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흠이 없는 몸으로 변화되었다. 더 이상 세상의 연약함과 지상의 결핍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순수함과 온전함을 지닌 “영적인 몸(spirituale corpus)”을 지니게 되었다. 주님이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어떤 몸의 자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법적 권세를(judiciariam potestatem)” 지니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자를 심판하시는 것을 뜻한다. 재림은 다름 아닌 그 완성을 의미한다.
이 두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어거스틴의 기독론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성육신을 다룸에 있어서 한 인격 가운데 일어난 신인양성의 연합 그 자체보다 그가 성부와 성령과 동일본질이시며 동등하신 분으로서 우리와 동일한 영혼과 육체의 인성을 취하셨음을 부각시킨다. 둘째,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본성상”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은혜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 되셔서 그 무죄함과 순수함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음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아들의 영원한 나심인 성자의 신격(deitas)과 역사상 나심인 성육신(incarnatio)이 함께 조명된다. 셋째,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가 다루어진다. 비록 비하와 승귀의 두 상태(status)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아들이 다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사는 구원서정의 전(全) 은혜를 누림을 부각시킨다. 넷째,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에 계심과 재림을 심판의 권세라는 측면에서 다룬다고 해서 그가 단지 초대교회의 사탄배상설을 지지하는데 그치고 대리적 속죄를 개진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하에서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다른 작품들을 통하여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본다.
3. 영원한 나심과 역사상 나심: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
어거스틴은 성육신을 다룸에 있어서 단지 철학적이거나 사변적 관조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도의 구원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주안점을 두었다. 사람은 타락 이후 사망의 형벌에 속하고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해서 더 이상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를 지니지 못하므로, 죄가 없고 인식하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이 순수하며 완전하여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 가운데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libenter) 인격적 순종을 드릴 새로운 사람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첫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posse non peccare)” “죽지 않을 수 있는(posse non mori)”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죄를 지을 수도 없고(non posse peccare)” “죽을 수도 없는(non posse mori)” 분이 오셔야했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어거스틴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무죄한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의 아들로 오셔야 될 필연성(necessitas)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는 주님의 성육신이 은혜에 따른 것이듯이 우리의 거듭남도 그러함을 강조한다.
[주님의] 그 탄생은 절대적으로 거저 베푸시는 은총에 따른 것으로서 인격의 하나됨 가운데 사람을 하나님에, 육신을 말씀에 결합시키는 것이다! 선행은 그 탄생을 뒤따른다. 선행은 그 탄생에 대해서 아무 공로가 없다. 그러므로 그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취해져 인격의 하나됨을 이루는 인성이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으로 죄를 지으리라는 우려는 결코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취해진 인성은 그 자체로 어떤 사악한 뜻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중보자를 통하여 그가 그의 피로써 죄로부터 구속하신 사람들을 영원히 선하게 만드심과 자신이 택하신 그가 죄로부터 조성되지 아니하셨으므로 결코 죄 가운데 계실 수 없으며 항상 선하심을 드러내신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창조되신 것도 아니고 일시적으로 나신 것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그를 피조물과 동일시하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창조하다(creare)”가 아니라 “형성하다(condere)”는 단어가 적합하다. 그는 “피조물(creatura)”이 아니시므로 “피조된”이나 “피조”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 영원히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취하심으로써(homine indutus)” 우리가 하나님께 이를 길이 열렸다. 그는 영원한 지혜(sapientia aeterna)로서 “본성상(natura 혹은 naturalis)”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신격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과거형이나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고 현재형으로, “스스로 있는 자(Qui est)”라고 일컫는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서 성자의 두 나심(duae nativitates)이라고도 불리는 영원한 나심—‘Filius est genitus a Patre(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다)’—과 역사상 나심 곧 성육신(incarnatio)—‘Deus manifestatus in carne(육신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다루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두 나심이 있으니 하나는 신적이며 하나는 인간적이다. 전자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음을 받았고 후자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롭게 되었다. 모두 놀라운 것이니, 전자는 어머니 없이 후자는 아버지 없이 되었다.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셔서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빌 2:7-8). 여기서, “자기 그 자신은 하나님의 본체로는 자기 자신보다 크실 뿐만 아니라, 그러나, 종의 형체로는 또한 자기 자신보다 작으시다(in forma Dei etiam ipse se ipso major est, in forma autem servi etiam se ipso minor est).”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보다 크신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으로서 자기 자신보다 작은 사람이 되셨다. “이렇듯 그는 하나님의 본체로 사람을 지으셨고, 종의 형체로 사람이 되셨다(Proinde in forma Dei fecit hominem; in forma servi factus est homo).” 그는 피조물이 되심으로 창조주이심을 그치지 아니하시고 영원한 창조주로서 피조물이 되셨다. 그리하여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중보의 직분을 수행하셨다. 성부는 성자보다 크시나(요 14:28) 성부와 동일하시다(요 10:30).
어거스틴은 이러한 진술이 삼위일체론적이며 동시에 기독론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긴다.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서는 아버지와 구별되시고 동일하시나, 인성에 따라서는 아버지보다 작으시다. 그 인성에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 기도드리시나, 신성에 따라서는 그 기도를 함께 받으신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이렇듯 아들은 아버지보다 작으시므로 간구하시지만 아버지와 동등하시므로 아버지와 함께 들으신다(Ex hoc enim rogat, quo minor est Patre: quo vero aequalis est, exaudit cum Patre).”
어거스틴은 빌립보서 2장 6절의 “하나님의 본체”는 삼위의 동일본질을, 2:7의 “종의 형체(morfh, dou,lou)”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위격을, 달리 말하면, 각각 “하나님의 아들(神子, Filius Dei)”과 “사람의 아들(人子, Filius hominis)”을 지칭한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면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씀(고전 2:8)이 불가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종의 형체”를 “사람의 아들의 형체(forma filii hominis)”로 특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어거스틴은 “종의 형체”를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위격에 뿐만 아니라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나 그 위격적 특성에 있어서 구별되는 자성(子性, filiatio)을 지니신 성자의 인격에도 적용시킨다는 점이다.
곧, 이를 삼위일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기독론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어거스틴이 빌립보서 2장 6절의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 성부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어거스틴은 성육신하신 주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사람이시나 영원히 동일하신 한 인격이심을 강조하는 가운데, 성육신한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볼 때, 그것이 성부와 성자의 삼위일체론적 관계를 지칭하고 있는지 한 분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고 있는지를 올바로 분별해야 함을 지적한다. 예컨대, 아버지가 자기 속에 생명이 있듯이 아들에게도 이를 부어주셨다거나(요 5:26),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거나(요 5:19), 아들의 교훈은 아들의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거나(요 7:16), 하는 말씀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관계되므로, 이를 신성과 인성의 관계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긴밀하게 다루면서도 양자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긴밀성은 성자의 인격이 영원히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부각된다. 어거스틴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보내심을 받았다(est missus ille qui in ea carne apparuit)”는 말과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으신 분이 보내셨다(misisse ille qui in ea non apparuit)”는 말이 모두 한 인격을 지칭한다고 보는 바, 이는 성자가 보내심을 받았다고 해서 성부와 동등됨을 버리지 아니하셨음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의 인격(persona Trinitatis)”은 “성부의 인격(persona Patris)”에 뿐만 아니라 “성자의 인격(persona Filii)”에도 항상 돌려진다는 점을 들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딤전 2:5) “신성의 하나됨을 통하여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의 동참자(aequalis Patri per divinitatis unitatem, et particeps noster per humanitatis susceptionem)”가 되심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중보자(mediator vitae)”로서 “우리를 고치는 치료약(noster medicina emendationis)”이 되신다는 사실은, 아버지와 다를 바 없이 아들 속에도 생명이 있다는(요 1:4; 5:26; 요일 5:11)—그리하여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시라는(요일 1:1)—사실을 도외시하고는 다루어질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요일 5:12).
4.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한 인격 양성론
어거스틴은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인격을 논하기 전에 그가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정한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나는 스스로 있는 자(Ego sum qui sum)”라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출 3:14).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모든 것을 함께 보시고, 인식하시고, 뜻하시고, 행하신다(요 5:19). 그 동일하신 아들이 육신을 취하심으로 사람의 아들이 되셨으므로, 그가 신인양성의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바가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와 충돌되거나, 배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아들은 오직 “아버지의 말씀(Verbum Patris)”과 “아버지의 가르침(doctrina Patris)”으로서, 우리를 위한 “빛(lumen)”과 “진리(veritas)”와 “영생(vita aeterna)”이 되시기 때문이다. 성자에게 고유하게 돌려지는 위격적 특성이 사람이 되신 그의 신인양성의 인격에 동일하게 돌려진다. 그리하여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에 따른 그리스도의 중보가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성도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데 이르게 한다(요 10:30; 롬 8:17; 히 1:21).
어거스틴이 성자의 인격과 신인양성의 중보자의 인격이 동일함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구원론적 동기에 기인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그 서장(序章)에서부터 두 나심을 말하는 요한복음의 가르침으로부터 주로 도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승리자시며 패배자(victor et victima)”시고, “제사장이시며 제물(sacerdos et sacrificium)”이시며, “목자(pastor)”시며 “양”이시라는 사실이 부각된다.
그 요체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서 우리의 주(dominus)와 종(servus)이 되신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아버지와 동일하신 주시나 우리를 위하여 종이 되셨다. 이는 오직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그 분에게만 돌려질 수 있다. 어거스틴은 여기에 기독론의 핵심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우리가 제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앙고백의 신앙교육을 다룬 글에서조차, 성육신을 어떤 교리적 조목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정통기독론이 개진하는 위격적 연합 교리는 성육신에 있어서 영원히 신성으로 계시는 성자의 인격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그 동일한 한 인격 가운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인격(persona)은 구체(具體, concretum) 혹은 기체(基體, suppositum)로서 주체(主體, subjectum)가 되나, 신성과 인성의 본성(natura)은 각각의 고유한 속성들을 지닌 추상(abstractum)으로서 독자적으로 인격이 되지는 못하고(anhypostasis) 언제나 인격 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에 서서 어거스틴은 위격적 연합을 성육신 교리의 핵심으로 개진한다. 중보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라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그의 인성에 따라서는 타락한 피조물을 회복시킨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람을 지으신 분이 사람이 되셨다고 한 것이나 “그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지으셨다(ipse creavit matrem suam)”고 한 것이 이를 전형적으로 대변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그가 중보자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사역을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secundum formam Dei)”와 “종의 형체에 따라서(secundum formam servi)”라는 말을 수사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부각시키는 다음에 현저히 나타난다.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요 1:3).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 자신이 여자에게서 나셨다(갈 4:4).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그 자신과 성부는 하나이시다(요 10:30).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가 오신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하심이었다(요 6:38-39).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는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다(마 26:38-39).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다(요일 5:20).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성부에게 있는 것은 다 그의 것이며(요 16:15),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 말씀하신다(요 17:10). 종의 형체에 따라서, 그의 교훈은 그의 것이 아니요 그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요 7:16).
여기에서 우리는 “동일하신 분이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고, 동일하신 분이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동일하신 분이 참 하나님이시고 이성적인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 사람이시며, 동일하신 분이 신성에 따라서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에 따라서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며”라는 칼케돈신경의 성경적 용례를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처음”이시며(요 8:25, 불가타), 창세 전에 지혜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며(잠 8:22; 골 1:15, 17), 천지를 지으신 분이(창 1:1; 골 1:16), “종의 형체에 따라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교회의 머리”(골 1:18)가 되셨다.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 성부와 동등하신(aequalis) 분이 “종의 형체에 따라서” 성부보다, 성령보다,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 작으시다.
어거스틴은 이를 “정칙 규범(canonicam regulam)”이라고 일컫는다. 본성상(natura)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은혜로(gratia)”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두 나심에 대한 어거스틴의 언급도 이를 확정한다. 한 사람이 이전의 어떤 공로도 없이 사람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인격 가운데 연합되었다. 사람의 아들이셨던 바로 그 인격이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바로 그 인격이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셨다(idem ipse esset filius Dei qui filius hominis, et filius hominis qui filius Dei). 그의 인성을 신성에 받아들이면서 은혜는 그 자체로 그 사람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서 죄가 들어 올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동일하신 한 인격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 영원한 인격이 인성을 취하심(asssumptio) 곧 위격적 연합을 성육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다만 주목되는 것은 그가 일종의 수사학적인 반복(rhetorical reiteration)의 기법으로 “하나님의 본체”와 “종의 형체”를 두운(頭韻)으로 삼아 이를 설명하는 경우, 전자와 후자가 각각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지칭하는 외에 성육신 전의 그의 인격과 성육신 후의 그의 인격을 지칭할 때도 있어 모호함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어거스틴이 “그는 종의 형체로 못 박히셨지만, 영광의 주가 못 박히셨다”고 말하는 경우, “종의 형체”는 인성을 지칭함이 분명하지만 “영광의 주”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영원하신 성자의 인격을 지칭하는지 모호함이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입장은 그가 칼케돈신경의 정통기독론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이후 비잔티움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 485-543)가 체계적으로 전개한 enhypostasis와 anhypostasis의 교리에 대한 정교한 전개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5. 위격적 연합과 신인양성의 속성교통
성육신의 비밀은 위격적 연합에 있다. 그것은 신성이 인성을 “직접적으로(directe)” 취하는데 있지 않고, 양성이 “간접적으로(indirecte)” 인격에 의해서, 인격 가운데 연합을 이루는데 있다. 칼케돈신경은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연합되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양성은 속성교통을 한다. 개혁신학자들은 이를 세 가지로 파악한다.
첫째 종류(genus)는 ‘은혜의 교통(communicatio gratiarum)’ 혹은 ‘은사의 교통(communicatio charismatum)이다. 이는 성육신으로 인성이 얻는 ‘연합의 은혜(gratia unionis)’를 뜻한다. 인성이 모든 피조물보다 높아지므로 이는 ‘탁월함의 은혜(gratia eminentiae)’라고도 칭해진다. 둘째 종류는 ‘속성의 교통(communicatio idiomatum)’ 혹은 ‘특성의 교통(communicatio proprietatum)’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그의 신성과 인성에 속한 모든 속성들이 그의 한 인격(una persona) 곧 한 기체(基體, suppositum)에 돌려짐을 뜻한다.
셋째 종류는 ‘사역의 교통(communicatio apotelesmatum)’ 혹은 ‘작용의 교통(communicatio operationum)’이다. 이는 신성과 인성에 따른 일들이 그 자체로는 서로 양립할 수 없지만 모두 동일한 한 인격에 돌려짐을 뜻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세 가지 종류의 교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자신의 저술들을 통하여 이를 여러모로 천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어거스틴은 성육신을 다루면서 성자 자신이 자신의 인격 안에 영혼과 육체의 몸을 세우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 인격 가운데 취해진 인성은 우리의 인성과 동일하나 우리가 지니지 않은 고유한 존귀함을 지님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은혜로(gratia)”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aedificatio corporis Christi)”은 위에서 말한 ‘은사의 교통’에 해당한다.
성육신에 있어서 신인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결혼의 연합(conjunctio nuptialis)”이라고 칭하고, 동정녀의 몸을 마치 “신방(新房, thalamus)”과 여기며, “신랑과 신부(spnsus et sponsa)”가 하나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이를 방증(傍證)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은사의 교통’을 타락으로 인한 무능하고 부패한 인성이 회복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유일한 길로 여긴다.
신인양성의 교통의 두 번째 양상인 ‘속성교통’은 신성과 인성에 각각 속한 속성들을 칼케돈신경에서와 같이 “신성에 따라서”와 “인성에 따라서”로 특정하되, 모든 속성들을 한 인격에 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 전형적인 예를 우리는 위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와 “종의 형체에 따라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통하여 이미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거스틴에게서 소위 초(超)칼빈주의(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를 발견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주님의 성육신을 설명하면서, “그가 계셨던 곳을 떠나지 않으시고 오심(venire non recedendo ubi erat)”과 “오셨던 곳을 버리지 않고 떠나심(abire non deserendo quo venerat)”을 말하거나, “그 말씀이 우리의 지각에 드러나셨으나 그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셨다(prolatum est sensui nostro, nec recessit a Patre suo)”고 하거나, “보라 그는 여기에 그리고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Ecce hic erat, et in coelo erat)”고 하는 경우가 그 예(例)가 된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주님의 인격은 모든 곳에 계시나 인성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음을 말하는 “ubique simul totus sed non totum”을 여기에서 거론하고 있다.
신인양성의 교통의 세 번째 양상인 ‘사역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 사역과 관련하여 현저히 드러난다. 주님이 인성에 따라서 우리의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셨지만 그 주체는 신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인격이라는 사실이 이와 관련하여 특히 강조된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어떤 불의를 씻어버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큰 겸비함을 드러내고자(magna commendaretur humilitas)” 하심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말과 그의 다음 말은 이를 뚜렷이 드러낸다.
우리를 의로 삼고자 그 자신이 죄가 되셨다. 우리의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 안에서. 이렇듯, 그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죄가 되셨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대속이 원죄와 본죄를 씻는데 다 미치며, 그 의는 우리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은혜가 됨을 강조하는데, 그 배경에는 그것이 한 인격 속에서 신인양성의 교통 가운데 일어나는 사역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 있다. ‘속성의 교통’에서 현저히 나타나는 소위 초(超)칼빈주의는 ‘사역의 교통’에도 나타나는 바, 그리스도는 “말씀, 행하심, 죽음, 삶, [지옥에] 내려가심,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우리에게 돌아오신다고 일컫는다. 예컨대, “그는 떠나셨다. 그러나 보라 여기에 계신다”고 승천을 설명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듯이 성도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의와 가치가 여기에 있다.
6. 결론: 어거스틴 구원론의 기독론적 기초
어거스틴의 회심은 기독론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단지신적인 도움을 받아서 필멸의 존재가 불멸에 이르고자 애쓴 “뛰어난 지혜를 지닌 한 사람”으로 알았다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는 말씀의 “비밀(sacramentum)”에 이끌려 “보편적인 신앙(fides catholica)”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서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시는 주님이(딤전 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찬미하시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안을 때 비로소 위로를 얻고 젊은 날의 방황과 온갖 철학적 편을 그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거스틴은 성육신을 제 2위 성자 하나님을 주체로 하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사(同事)로 말미암는, 신인양성의 중보자의 인격이 형성되는 사건인 동시에 그 자체로 구속사건이 됨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성육신 자체가 믿음으로 성경계시를 수납하여 구원에 이르는 인식론적 기초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성육신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연합함과 더불어 우리의 인성이 그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됨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뜻에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육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데 작용하는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작용하는 그것이 유비적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가 단지 한 인간으로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신과 같이 되었다는 그릇된 영-기독론에 서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가 추구한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은 오히려 이를 가장 현저하게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워필드가 말하듯이, “종교개혁을 우리에게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이 그의 사랑에 있으며 그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역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무조건적 예정과 절대적 사랑과 전적 은혜가 함께 논의된다. 어거스틴은 오직 그리고 전적인 은혜의 구원론을 개진함에 있어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우선 착념한다. 마리아의 몸이 마치 신방과 같아서 신랑과 신부가 그 안에서 하나가 됨을 성육신으로 이해하고, 그 가운데 대리적 속죄의 의의 완성과 전가(轉嫁, imputatio)를 설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과 성육신한 성자의 신인양성의 인격이 하나(una)이며 동일(eadem)하다는 사실, 성육신이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이라는 사실, 신인양성의 교통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안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어거스틴의 신학 전체에 뚜렷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에게서 정치한 기독론적 전개와 진술을 찾기는 어렵다. 구체와 추상, 인격과 본성, 비하와 승귀에 대한 면밀한 구별이 없다. 인격이 아닌 신성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표현이 나타나기도 하고, 영혼(anima)을 인성과 동일시하기도 하며,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사람을 취하셨다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하여 마치 한 인격이 또 다른 인격을 취한 것과 같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칼케돈신경의 한 인격 양성의 위격적 연합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비하와 승귀의 양상에 대해서 면밀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 주체가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 계신 한분 그리스도로서 그 인격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동일함을 분명히 적시함으로 자신의 입장이 정통기독론의 입장에 서 있음을 드러내었다.
중보자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해서도 어거스틴은 포괄적인 진술에 머물 뿐 체계적이고 세부적인 고찰은 피한다. 당하신 순종(obedientia passiva)와 행하신 순종(obedientia activa)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찾아 볼 수 없다. 성도의 성화와 관련해서도 그리스도의 피만이 강조될 뿐 그가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의가 거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거듭난 생명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전체 구원과정에 역사하는 유일한 의가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에 관한 어거스틴의 식견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여러 측면에 비추어, 우리는 “어거스틴이 칼케돈 이전의 칼케돈주의자(a Chalcedonian before Chalcedon)였다”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구원론적 의미를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 관점에서 추구한 신학자였다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분리했다고 비판하는 라너(Karl Rahner)의 주장이나 어거스틴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논구하는 과정에서 삼위의 인격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립하는데 실패했다는 군톤(Colin Gunton)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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