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78
1월22일[설/연중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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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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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_dk-HGgSko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829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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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저 늘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충만한 기쁨 속에 살아가야겠습니다!>
설날이 다시 한번 더 있다는 것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신정 때 야심 차게 세웠던 좋은 결심이나 이정표가 슬슬 느슨해져 갈 무렵, 또 다른 설날인 구정을 맞이하니, 각오를 재정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니 말입니다.
차례를 지내고, 연미사를 봉헌하면서 먼저 떠난 우리 조상들과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 성경 말씀들은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다가올 마지막 순간을 잘 준비하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서 4장 14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복음 12장 40절)
오랜만에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병원측 서비스가 얼마나 자상하고 친절한지 모릅니다. 꽤 두툼한 볼륨의 노트 한 권 안에는 저의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아주 세부적으로, 항목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더군요.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짚어주고 있었고, 위험수위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보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유난히 제 눈길을 끄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볼 때 귀하의 기대 수명은 84세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84라는 숫자를 처음 대하는 순간, 아~정말 다행이다. 아직도 꽤 남았군, 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자고 일어나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왜 기대 수명이 94가 아니라 84인가? ㅋㅋㅋ 보시다시피 사람 욕심이라는 것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 많이 많지 않은 남은 날들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나 하는 새로운 과제가 제게 생겼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처럼, 그날은 언제인지 모릅니다. 기대 수명 84라고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저 늘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충만한 기쁨 속에 살아가야겠습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날그날 주님께서 흐뭇한 미소 지으실 그런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남은 날들이 그리 많지도 않으니 하루를 천년처럼 알차게, 보람되게, 후회 없는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주님께서 한 번 더 주신 보너스 설날 아침, 고마우신 한 수녀님께서 언제 쓴 글인지도 잘 파악이 안 되는 성모님 관련 졸시를 보내주셔서 공유합니다.
<새해의 어머니>
별이 사위어가는 새벽의 뜨락
어둠의 여운을 헤치고
새벽노을로 고이 오시는
새해의 어머니
생계를 위한 몸짓엔 살기가 흐르고
자신을 갉아먹어야 사는 암울의 시대
눈꽃의 순수를 머금은 당신의 미소는
내 오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줄기 청정한 바람입니다.
보십시오.
차마 버리지 못해
늘 끼고 사는 이 악습과
죽순같은 사욕과 슬픈 위선
회한과 부끄럼의 한해를
무량의 위로자이신 어머니‘
은총의 선물인 새해엔
칡뿌리 같은 삶의 고뇌와
방황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
이타와 천상을 추구하는
회심의 길을 걷게 하소서.
각고의 노력과 비상을 위한
숱한 우리의 날개짓이
아린 상처로 남는다 해도
거듭 새로남의 노력을
다하게 하소서.
가장 작고 소박한 삶을 엮으셨던
가장 크신 분의 어머니 마리아
새해의 날엔
작음에로의 투신을
계속하게 하시고
이 탁류의 세상
비참과 비겁을 딛고 일어서는
의연함을 주소서.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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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E7jTOFrN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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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준비하지 않는 이유: 인생을 공짜라고 여기기에>
오늘은 새해 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해를 시작하며 욤 키푸르라 해서 속죄 예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습니다. 한 해 축복 받기 위한 준비를 먼저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새해 많은 축복을 받기 위해 먼저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한 해 시작부터 잠자고 준비되어 있지 못하면 한 해가 축복일 수 없습니다.
먼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인생이란 어떤 삶일까요? 그저 생존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말년이 어떻게 될까요? 후회할 것이고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본래는 그러한 뜻은 아니라고 하나 조지 버나드 쇼 묘비에 새겨져 있다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얼마나 많은 후회가 있습니까? 우리는 왜 우물쭈물하게 될까요?
조폭 두목인 쓰촨성의 한룽그룹 류한 회장은 7조 원의 재산으로 전 세계 부자 순위 148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2014년 경쟁자 8명을 살해하는 등 11개의 죄목으로 조직원 4명과 함께 사형당했습니다. 집행관이 사형 집행을 위해 그의 어깨를 잡자 49세의 그는 갑자기 펑펑 울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면서 살고 싶다. 내 야망과 인생, 모든 게 잠깐인 것을, 그리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바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물처럼 그냥 흐르며 살아도 되는 것을, 악 쓰고 소리 지르며 악착 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 한마디 참고 물 한 모금 먼저 건네주며 잘난 것만 재지 말고 못난 것도 보듬으면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듯이 서로 불쌍히 여기며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살 걸 그랬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게 잠깐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흐르는 물은 늘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왜 나만 모르고 살았을꼬. 2015년 2월 사형을 기다리며.”
인생이 숙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무언가 받으면 부모에게 숙제 해야 하고 하느님께 무언가 받았으면 하느님께 숙제 해야 합니다. 인생에 공짜는 없습니다. 피아니스트 김용배 씨의 자전적 고백입니다. 그는 조선일보의 일사일언 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실내악 수업 학기 말 실기 시험 때의 일이다. 한 학기 동안 충분히 호흡을 맞춘 우리 삼중주 팀은 나름대로 자신 있게 시험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심사 교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주임 교수가 갑자기 피아노 옆으로 다가오더니 직접 악보를 넘겨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피아노계의 거장인 은사가 곁에 앉아 손수 악보를 넘겨 주신다니 황송하기도 하고 부담스러워 당황했지만 어쨌든 연주는 시작되었다.
한참 곡이 진행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정확히 악보를 넘겨주던 그 노교수가 갑자기 악보를 넘겨야 하는 부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악보를 넘기기 위해 손을 건반에서 떼어야 했고 연주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그 노 교수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연주 도중에는 온갖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네. 피아니스트는 그런 상황에 대비해 넘기기 직전의 한두 줄, 그다음 장의 한두 줄은 꼭 외우고 있어야 돌발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는 것이야. 100% 준비는 항상 부족하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우리는 왜 준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단순합니다. 거저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으면 보답할 이유가 없습니다.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 준비입니다. 어느 현명한 왕이 현자들에게 세상의 진리를 담은 책을 만들라고 명하였습니다. 현자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12권의 책을 왕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왕은 다시 한 권으로 줄이라고 했습니다. 현자들은 몇 달 뒤에 한 권의 책으로 요약해서 가져왔습니다. 왕은 그것도 많다며 한 문장으로 뽑아내라고 했습니다. 현자들이 진땀을 빼며 한 문장으로 뽑아 왕에게 바쳤습니다. 왕은 그들이 만든 문장을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바라는, 여러분들이 바라는 ‘세기의 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배우면 그동안 고뇌하던 모든 문제가 곧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현자들이 후세에 물려준 단 한 문장으로 된 세기의 지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가 사기를 맞는 이유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에 예외가 있을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받는 것이 있다면 그 속에는 반드시 숙제가 담겨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젖을 주고 키워도 제때 일어나 걷고 제때 말을 할 수 있고 또 제때 학교에 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 분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거저 받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거저 생길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저절로 거저 받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거저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러한 교만이 우리를 우물쭈물 살게 합니다.
만약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여러분에게 그냥 쓰라고 1억 돈다발을 준다고 해 봅시다. 앞뒤 안 가리고 덥석 받을 분 손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손을 못 드는 분이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공짜로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인생은 공짜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받았으니 말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저절로 생겨날까요? 그런 생명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거저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교만은 나를 막 살게 만듭니다. 결국 생존만 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숙제를 제출해야 할 때가 되면 후회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헛살지 않기 위한 그 가장 좋은 방법이 ‘십일조’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이 공짜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시며 당신이 주셨다는 부담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이 부담이 없으면 인생을 헛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해 시작하며 십일조를 봉헌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면 어떨까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은 내가 받는 90%도 공짜가 아닌 의미 있는 무엇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해를, 우리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악과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가장 확실한 장치입니다. 우리가 종임을 잊지 맙시다. 오늘 복음에서 깨어 있지 못했던 종들은 자신이 종인 줄 모르고 주인인 줄 착각했던 이들입니다. 봉헌하는 삶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느낄 때 우리는 부담을 느끼게 되고 삶의 의미를 찾고 그 숙제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인생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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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12월 31일 퀸즈한인 성당에서 송년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2019년에 뉴욕에 왔으니 어느덧 4번째 송년미사를 같이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2022년에 있었던 본당의 행사들을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여진이 아직 남아있지만 본당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신문사가 성당 옆에 있기도 하지만, 본당 신부님이 배려해 주어서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성당에 손님 신부님들이 많이 오시면 신문사로 모시기도 했고, 신문사에 손님 신부님들이 많이 오시면 제가 성당으로 가서 자기도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예전처럼 ‘고향의봄’을 함께 불렀습니다. 고향 땅을 떠나서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사연은 다들 다를 것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기도 했고, 차별과 무시를 당하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향의 봄’을 부르는 감회는 모두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도 3년 전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어머니가 한국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어머니를 위해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오늘 설날을 지내면서 ‘고향의 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어려서 고향 땅을 떠나 서울에서 살았지만 제가 태어난 고향 선산을 갈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80순이 되어가는 고향 큰 형님이 선산을 돌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집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집 뒤에는 산이 있습니다. 개울이 내려가는 끝에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5대조 할아버지는 박해를 피해서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김제, 정읍,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라서 포졸이 오면 도망가기 쉬웠다고 합니다. 집 앞 마당에는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32년 전 사제서품 받고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향 어르신들이 모두 오셔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오늘 설날을 지내면서 선산이 있는 고향, 제가 태어난 고향 땅이 그립습니다. 언제고 시간이 허락되면 고향 땅 선산에 가서 친지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친지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려 합니다.
낮선 땅에서 서글픈 노래를 불렀던 민족이 있습니다. 시편 137편은 그들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저는 이 시편을 성경보다 먼저 ‘보니엠’이라는 보컬 그룹의 노래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멜로디는 경쾌했지만 나중에 내용을 알았을 때는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아셨고, 다시금 고향 땅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설날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건강입니다. 몸이 아프면 산해진미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면 재물이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은 재물입니다. 재물은 우리를 풍족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친구입니다.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허전하기 마련입니다. 건강, 재물, 친구가 모두 채워진다면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설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을 듬뿍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인들은 또 다른 복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인들이 받아야 하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받을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참된 행복’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복이 주어질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입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2023년 설날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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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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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주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뵙는 것, 또는 주님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평화’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서로 복을 빌어 주는 인사를 하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부와 건강 등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복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신앙인의 복’입니다.
“그래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걱정거리들이 생긴다. 걱정 없이 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4-7)
여기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는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걱정거리들이 생기고, 걱정거리들 때문에 걱정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긴 하지만, 신앙인들은 걱정 때문에 숨이 막히는 일을(루카 8,14) 피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결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앙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그리고 유일한 무기입니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라는 말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하느님의 평화라는 뜻인데, 하느님의 평화를 받으면 모든 걱정을 초월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기도하면서(기도하는 동안)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게 되고, 그 평화 덕분에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그 평화는 걱정거리들에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신앙인들이 누리는 복이 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4-15)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인간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인간은 하느님 덕분에 허무를 극복하고 영원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라는 말은, ‘내일’이라는 시간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내일 일’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일’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셔야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내일 일’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우리 인생과 운명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일 일’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내일 일’을 바꿀 수 없다면, ‘오늘 일’도 무의미해집니다.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공로를 쌓는 것도 무의미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이유도 없게 됩니다. (죄를 지어도 책임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지만, ‘내일 일’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그것을 오늘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열심히 사는 것이고, 착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줄기 연기’는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잘난 체 하고 허세를 부리는 자들은 그 교만 때문에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은 감사로, 감사는 기쁨으로, 기쁨은 평화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입니다.(요한 14,6)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리어’ 라는 말은 ‘그러므로’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뜻으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이 말씀은 ‘재림’에 관한 말씀이지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받으려면, 잘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도, 은총도, 받을 준비를 잘하고 있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평소에 신앙인답게 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그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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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치 하나의 비유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두 비유가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내용입니다. 당시 혼인 잔치는 열흘 정도 이어지는 큰 축제였기에 그 사이 언제라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비유의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허리에 띠”를 매라는 말씀은 구약 성경에서 옷을 차려입는 것을 말할 때 쓰였으며, 띠를 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바로 할 수 있는 준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에는 ‘행복하여라’라는 행복 선언이 반복됩니다. 주인을 맞이하려고 늘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도둑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 비유는 사람의 아들이 도둑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비유의 핵심은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곧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집주인이 도둑에 맞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두 비유는 모두 종말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종말은 생각지 못한 때에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가르침은 ‘준비’입니다. 마치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호시탐탐 빈 집을 노리는 도둑에 맞서는 집주인처럼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종말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표상들로 묘사되지만 오늘 비유는 다른 면을 알려 줍니다. 곧 종말은 주인이 종에게 봉사하는 것처럼 기쁨과 행복의 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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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
<만나려면 인정해야합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이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 말 또한 비슷한 뜻으로 쓰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다릅니다. 쌍둥이도 똑같아 보이지만 외모에 미세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성격은 더욱 차이가 납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데에 있습니다.
설 명절입니다. 설에는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가족의 사연이 자주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까 봐 설에 아예 만나지도 않는 가족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가족이기에 서로에 대해 모르지 않음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상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다 보니.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가족과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내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지내지 못하는 가족에 대한 무거운 마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이고 잘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뮬며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 당연히 나와 깊은 관계 안에 있는 가족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것은 아무리 종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종의 마음 같아서는 주인이 언제 온다고 미리 언질이라도 주면 좋겠지만 그건 종의 바람일 뿐입니다.
현명한 종은 자신의 바람대로 해주지 않는 주인을 원망
하거나 나 몰라라 하며 기다리지 않는 종이 아니라. 언제일지는 모르더라도 반드시 주인이 돌아오리라 믿고 기다리는 종입니다. 복음은 이 현명한 종의 기다림이 주인과 좋은 재회로 이어졌다고 전하며 마침니다. 설 명절뿐만 아니라 언제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주보》 제24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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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홍성민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주인과 도둑>
설날인 오늘 우리는 한 해의 시작을 기뻐하며 서로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고, 또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과 가족들을 기억하며 서로가 한 가족임을 확인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있음은 긴장하며 경계를 세우라는 것만 아니라,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잊지 말고 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러한 것들을 잊고 삽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잊고 살고, 태어날 때 그토록 나를 기쁘게 했던 자녀도 원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또,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 에 감사하면서도 내 삶의 급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겨 고마움을 잊고 삽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 다시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삶에서 잃어버렸고, 잊어버렸던 그 소중한 의미들을 다시 찾고, 다시 회복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로 깨어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뒷부분에서는 갑자기 언제 올지 모르는 도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자기 삶 속에서 하느님 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마치 종이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깨어 기다리듯 하느님의 뜻에 깨어 있어야만 하느님의 원하시는 일을, 원하시는 때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악은 그런 우리에게 도둑처럼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다려야 할 우리에게, 미움, 증오, 시기, 질투 등을 던지고 갑니다. 그런 마음이 주어질 때 그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주인이 아니라 도둑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족끼리 오랜만에 함께 있다 보면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또 그 안에서는 수많은 마음이 오갑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마음이 내가 기다려야 하고, 따라야 할 하느님의 뜻인지, 아니면 악이 던져 주는 도둑인지, 잘 분별하여야겠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는 왜 다시 가족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떠난 부모와 조상들을 떠올리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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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류범선 루치오 신부님]
<최선을 다하는 한 해>
교우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나라는 참 좋은 것 같습니다. 1월 1일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했었는데, 음력 1월 1일인 오늘 또 한 번 똑같이 인사하면서 서로에게 복을 빌어 주기에 그렇습니다. 1월 1일에 다짐했던 것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설날인 오늘. 다시 새로운 다짐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해, 인생의 그림을 성공적으로 그리셨나요? 아니면 시작부터 인생의 그림을 망치고 후회와 번민 속에서 한 해를 마치셨나요? 혹시 잘 그리던 인생의 그림이 끝에 가서 그만 엉망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나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다시금 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누벼 놓은 낡은 한 해를 가져가시고 새롭게 삶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백지와 같은 한 해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배려와 따뜻한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새로운 한 해에 열심히 인생의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의 소명은 무엇인지를 먼저 식별해야 인생의 멋진 그림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어른들께서는 좋은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기대로 덕담해주십니다. 음력 새해 첫날인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덕담은 무엇일까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있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앞으로의 삶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끽하며 열심히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뒤로 미루지 말고 항상 깨어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오늘 입당송은 전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태 28,20 참조) 소중한 삶을 허락하신 하느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니, 삶은 그 자체로 거룩함이자 축복입니다. 내가 늘 만나는 사람들, 매일 내가 하는 일이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더라도 그 모든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이며 유일한 하느님 축복의 선물이기에 내 모든 정성을 아낌없이 쏟아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인 야고보서의 말씀 또한 지당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명이 길다고 해도 100세를 넘기기 힘듭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일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무일도 끝기도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칩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오늘이 마지막이 되게 해달라는 이 기도는 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바칠 수 없습니다. 오늘이 마치 마지막 날인 듯 진지하게 정성을 기울여 하루를 살 수 있다면, 정녕 매일매일이 깨어있는 날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그림도 멋지게 완성될 것이고, 주님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한 해를 늘 첫날처럼, 마지막 날처럼, 유일한 날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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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설에 벗에게>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야고보 4,13-15 (자만하지 마라)
사랑하는 여러분,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루카 12,35-40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설에 벗에게>
오늘은 설이니
주님의 축복이 되어
벗에게 스미어요
서러워서 설이라
설이 서러운 벗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주어요
낯설어서 설이라
설이 낯선 벗에게
든든한 곁이 되어주어요
새해가 선다고 설이라
설이 설레는 벗에게
벅찬 희망이 되어주어요
한 살 더 먹어 설이라
설이 버거운 벗에게
기름진 밑거름이 되어주어요
사려야 한다고 설이라
설이 조심스러운 벗에게
바른 길이 되어주어요
오늘은 설이니
주님의 축복이 되어
벗에게 스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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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의 기쁨을 맘껏 누리시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한 해의 첫날을 기리는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새로 온 날이 낯설다는 의미에서 낯설다의 어근인 ‘설다’에서 온 것으로 본 시각과 한 해가 새롭게 개시되는 날을 의미하는 ‘선날’이 설날로 바뀌었다고 보는 시각이 대표적입니다.
낯선 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설’입니다. 이렇게 낯설고 새로운 날에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예전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으로 힘든 날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는 멋진 날들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 어제와 다른 참 기쁨의 삶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지요. 여우가 길을 가다가 잘 익은 포도를 발견합니다. 이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먹으려고 폴짝폴짝 뛰어 보았지만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도저히 포도를 딸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의 노력 끝에 여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서 여우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갈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우가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포도를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떠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포도를 얻을 수 있다면 커다란 만족감을 얻게 되겠지만, 모든 노력으로도 얻지 못한다면 그 실망감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다 보니 포도를 먹지 못했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생각도 바꾸면 삶이 편안해진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좌절과 절망을 가져오는 생각은 안 됩니다. 또 불평과 원망을 가져오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뒤로 할 수 있는 지혜, 미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왔을 때 깨어있는 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고 명령하십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바로 미래의 삶인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과거에 갇혀 있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의 삶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이 새해 복을 더 충만하게 받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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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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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복 박'을 크게 마련하라>
오늘 독서 민수기의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아론과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라고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축복하면 당신도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설 명절에 우리는 전통적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론과 아들들처럼 여러분에게 축복하며, 다시 말해서 여러분에게 복을 빌어드리며 두 가지 덕담을 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여러분도 저도 축복하는 한 해가 되자는 덕담입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 축복은 우리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축복 곧 복을 빌어주는 것은,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남에게 복을 빌어줘야 복이 돌아오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실 남을 축복해야 남도 나를 축복해주니 복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도 축복해줘야 하겠지만 설사 복이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축복해주라는 말이고, 그것은 남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저주하는 사람보다는 축복해주는 사람이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축복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론과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하면 당신도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주님께서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바 있듯이
주는 됫박과 받는 됫박은 같습니다. 주는 됫박 따로 있고 받는 됫박 따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같은 <복 박>으로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것이며 같은 <저주 박>으로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겁니다.
둘째 덕담은 복을 많이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행복도 욕심부리지 말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여러분이 복을 많이 받아 많이 행복하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로 행복하라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행복이란 만족인데 이 정도로 만족할 줄 알 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고, 사실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복을 많이 받으시라고 하는 것은 지금 받는 복이 부족하다며 욕심부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많이 주시는 복을 내가 부주의하여 흘려버리거나 나의 복 박이 작아서 넘쳐버리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이 여러분이 <복 박>을 키우시라는 뜻입니다. 욕심은 버리고 <복 박>은 키우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이 많고 넘친다는 것을 믿는다면 비 올 때 빗물을 받기 위해서 큰 양동이를 마련하듯이.
새 해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아 올해도 행복한 여러분 되시길 빌며 세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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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주여, 당신은 대대로 저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은 제 좋아하는 시편이고 방금 부른 윗 화답송 후렴도 참 좋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시편 기도도 은혜롭고 위로와 힘이 됩니다. 설날 아침 미사에 잘 어울립니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이 잘되게 하소서.”(시편90,14.17)
오늘은 하느님의 축복이 넘치도록 주어지는 설날입니다. 설날이자 연중 제3주일이고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기도 합니다. 반갑고 고맙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30일 자의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해 매년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내도록 제정하셨습니다. 작년 하느님의 말씀 주일 때 교황님의 다음 강론 대목도 여전히 호소력을 지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예상을 폭로하며, 지나치게 인간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허물고, 그분의 참다운 얼굴과 그분의 자비를 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음을 기르고 새롭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영성생활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두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지 우리에게 계시하는 말씀을 중심에 둡시다.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말씀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참 기쁨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이 인간의 본질임이 다음 시편이 입증합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 말씀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참으로 축복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자녀’ 두 말마디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본질적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말씀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없이,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날 미사중 강론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야 할 꽃자리 하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 구체적 방법을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첫째, 감사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감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하느님 찬양이 살맛나는 인생을 만듭니다. 설날 저녁 성무일도시 후렴 둘의 곡도 참 흥겨웠습니다.
“우리 힘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자.”
“초승에 한보름에 우리네 축제일에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자.”
하느님 찬미,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 찬양해야 영혼이 삽니다. 영혼 건강에는 하느님 찬미, 찬양이 제일입니다. 아침성무 시편기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구절입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5,1-2)
찬양의 기쁨, 찬양의 행복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계속되는 축복속에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은혜로운 설날 미사중 당신 사제를 통해 우리 모두 하나하나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축복중의 축복이 평화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매일의 삶에서 평화의 증인이 되도록 하자”는 어제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당신 자녀들에게 복주시는 일이며, 주님의 복덩어리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며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우리가 자발적 기쁨으로 행해야 할 우리의 우선적 마땅한 의무입니다.
둘째, 겸손하십시오.
섬기십시오. 겸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뒤따라야 할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평생 주님 섬김의 배움터 삶의 자리에서 한결같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자만하지 마십시오. 무지한 이들이 교만하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로운 이들은 겸손합니다. 매사 세상에, 세상 사물에 집착함이 없이 초연합니다. 이탈의 참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도 이와 일치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실상을, 진상을 아는 자가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갈수록 주님을 닮아 지혜롭고 겸손한 삶입니다. 이래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열쇠의 답입니다.
셋째, 깨어사십시오.
준비하십시오. 유비무환입니다. 막연히 깨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주님을 기다리며 맡은 바 책임에 충실하며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오늘 이렇게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될 것이요 천상탄일의 선종의 복된 죽음일 것이니 내일은 전혀 걱정안해도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참으로 주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둔 신망애의 하느님 자녀들은 하루하루 깨어 기쁘게 삽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가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님인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행복하게 하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바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주어진바 거룩한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노파심에서 거듭 당부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아니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감사와 찬양’, ‘겸손과 섬김’, ‘깨어있음과 준비’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의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마침 가톨릭평화신문에 나온 ‘산다는 것’(김용해)이란 묵상시默想詩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니 이제 알게 되네요
세상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높아지려는
그 욕심과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나이가 들고 죽음을 보면서 이제 깨닫게 되네요
세상 산다는 것은 사랑이란 것을.
서로 아끼고 섬기고 서로 나누고 도우면서
그렇게 사랑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것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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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12,37)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에 들려오는 복음(루카12,35-40)은 '깨어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12,35-36)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12,40)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님들과 부모와 가족 친지들을 기억하면서, 살아 있는 가족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설명절'입니다.
'설명절이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고 있는가?'
그것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깨어 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기억의 인간'이면서 또한 '망각의 인간'이기도 합니다. 잘 기억하기도 하지만, 잘 잊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천년만년 살 것만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켜 줍니다.
"여러분은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돌아가신 영혼들을 기억하는 설명절에 그동안 우리가 잊고 지냈던 것과 믿는 이들의 궁극적 희망을 다시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적 희망(복)은 영원한 안식, 영원한 행복,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궁극적 희망은 그저 "아멘, 아멘!" 한다고만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지나가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산 이들, 항상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니 믿음 안에서 보면 지금 여기와 저기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6,27)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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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40)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새해를
맞이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다시 묻는
새해 첫날
새아침입니다.
살아야 할
생명의 시간은
참으로 큰
신비입니다.
보고 싶은
고향이 있고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걸어온 길이
마음의
신비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만큼
왔는지를
성찰합니다.
가장 따뜻한
마음의 설날이길
기도드립니다.
삶의 속도가
너무도 빠릅니다.
준비 없는
인격은 언제나
허망합니다.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부모님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지듯
우리의 삶은 이렇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속되는 것만이
아닌 가치있는
삶의 지속이길
기도드립니다.
깨어있음과
준비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인 우리들
삶이기에
하느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은
사랑에도 충실한
사람입니다.
희망은
하느님을 향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허락으로
이루어집니다.
간직해야 할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사랑입니다.
2023년
신앙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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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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