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은 사람의 정에 대한 그리움
헐리웃의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이며 제작자이기도 한 폴 해기스는 2005년〈밀리언달러 베이비〉로 아카데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6년에는 자신이 각본, 제작, 감독을 맡은〈크래쉬〉로 다시 각본상을 수상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크래쉬〉는 그 해 시상식에서 주요 부분인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을 수상하며 기염을 토했다. 폴 해기스는 2007년에는 이라크 전쟁에 참여한 미군을 소재로 한 신작〈엘라의 계곡〉이라는 작품으로 이라전쟁이 인간의 영혼을 파괴시켜 괴물로 만드는 끔찍함을 조용히 항변하여 아직도 상존하는 미국의 치부를 고발하고 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인〈크래쉬〉는 미국의 L.A라는 삭막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로 많은 인물들의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얼키고 설키며 진행되고 있지만 감독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아주 단순하다. 이 영화의 주제인 인종 차별과 편견은 닫혀 있는 마음으로 인한 서로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소통 단절 때문이라고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살인사건 현장에 도착한 흑인 수사관 그레이엄은 자동차 충돌 사건으로 시비를 가리느라 고함을 지르는 광경을 가리키면서 옆 자리의 히스패닉 여형사 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충돌은 접촉의 느낌이야. 어디건 도시를 걷노라면 사람들을 서로 스쳐 지나게 되지. 그러나 우린 언제나 금속과 유리로 된 차 안에 갇혀 있으니까...내 생각엔 우리가 그런 접촉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서로의 차와 충돌함으로써 뭔가를 느끼는 것 같아.”
흑인 수사관 대니얼의 이러한 독백은 이 영화의 주제를 은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은 모두 빌딩과 자동차 안에 갇혀 마음의 문을 닫고 살기 때문에 사람의 체취와 정이 그리워진다. 자동차의 충돌(크래쉬)은 일종의 접촉이다. 인간의 정과 체취가 그리워 충돌 사고를 일으키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피부색이라는 인종과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구역으로 나뉘어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는 특히 사람의 체취와 정이 절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빈번한 충돌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물쇠가 아니라 문에 있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충돌과 갈등의 에피소드가 나열되고 있다. 백인과 흑인, 흑인과 흑인, 백인과 히스패닉, 히스패닉괴 아시아계 등 여러 인종들의 갈등이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제시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다양한 서브 플롯을 관통하는 메인 플롯은 흑인 수사관 대니얼, 백인 경찰인 라이언과 핸슨, 텔레비전 방송국의 흑인 PD인 카메론과 그의 아내 크리스틴, 멕시칸 열쇠수리공인 다니엘과 이란인 이민자 파라드, 그리고 백인 지방검사인 리차드와 그의 아내 진 등을 중신축으로 하여 플롯이 전개 되고 있다. 나머지 에피소드는 인종간의 충돌과 갈등의 양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을 받은 것은 이러한 서브 플롯과 메인 풀롯들은 그것들 나름대로가 서로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그것들이 충돌과 화해라는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게 구성한 편집의 감각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인종간의 차별과 충돌, 그것으로 인한 갈등은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은유하고 있는 경우가 바로 멕시칸 열쇠수리공 다니엘과 이란인 이민자 파라드의 충돌과 화해이다. 이 두 사람의 충돌은 같은 운명과 신세인 멕시칸과 아시아계의 갈등으로 인간의 닫혀 있는 마음을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열쇠수리공인 다니엘이 이란인 이민자 파라드의 가게 문의 자물쇠를 고치다 말고. 근본 원인은 문 자체에 있지 자물쇠가 아니라며 문을 수리하라고 요구하는 데에서 사건이 발단된다. 파라드는 다니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한 요구가 자신의 서투른 영어 실력을 빙자한 다니엘의 상업적 계략으로 오해한다. 다니엘은 영수증을 찢어 버리고 가버리지만 며칠 뒤에 파라드의 가게는 도둑의 침입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에 대한 일종의 묵시적 은유이다. 다니엘이 요구하는 문의 수리는 상호 이해의 키워드인 닫혀 있는 마음의 개방을 의미하고, 자물쇠는 갈등 해소를 위한 임시 처방을 은유하고 있다. 다니엘은 충돌과 갈등의 근본적인 치유의 방법을 제시하지만 파라드는 그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의 경우도 이 삭막한 도시에서의 삶은 늘 불안하다. 총소리 때문에 놀라 침대 밑에 숨어있는 딸에게 그는 자신이 다섯 살 때 만난 요정에게서 총에 맞아도 끄떡 없다는 투명 망토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투명 망토를 벗어 딸에게 입혀주는 거짓 마임을 통해 딸의 불안을 잠재운다. 파라드는 자신의 파산을 다니엘에게 돌리며 권총을 들고 그의 집 앞에서 서성거린다. 파라드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권총을 겨누는 것을 목격한 다니엘의 딸은 아버지를 방탄복인 투명 망토로 구하기 위해 그 둘의 사이로 끼어들다 파라드의총에 등을 맞는다. 그렇지만 죽은 줄 알았던 딸은 아무렇지도 않다. 집으로 돌아온 파라드는 자신의 딸 앞에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다니엘의 딸이 천사이며 자신의 구세주로 그들을 지키려고 왔다며 비로소 깊게 닫혀있는 마음을 열며 화해의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파라드가 쏜 총탄은 실탄이 아니라 공포탄이었음이 딸에 의해 관객에게만 밝혀진다. 이 두 사람의 시퀀스는 충돌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소통으로서의 닫혀 있는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라는 보편적인 명제로서의 주제를 은유적인 동화의 서사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양면성에 대한 섬뜩한 명암 대비
이 영화에서 갈등 해소를 위한 진정한 소통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시퀀스는 백인 경찰 핸슨의 경우이다. 흑인 강탈범인 앤소니와 피터에 의해 자신의 차가 강탈되는 위기에 처하자 텔레비전 방송국의 흑인 PD인 카메론은 이들과 과감하게 대결한다. 그는 경찰차가 출동하자 그 중 앤소니 만을 옆자리에 태운 채 현장을 빠져나와 질주한다. 결국은 백인 경찰들에 의해 포위되지만 카메론은 막무가내로 경찰들에게 욕설로 지금까지의 모욕적인 인종 차별 처사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한다. 경찰 경력은 약하지만 의협심이 강한 젊은 경찰 핸슨은 카메론을 자신의 친구라고 우기며 그를 보호해 주고 결국은 경고 처분으로 돌려보낸다. 그렇지 않았으면 카메론은 경찰들의 총알 세레로 억을한 죽음을 당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장면은 인종 차별을 배제한 진정한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핸슨의 또다른 시퀀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간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 이해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준다. 핸슨은 백인 구역의 동네를 순찰하다가 흑인 수사관 그레이엄의 가출한 동생을 길거리에서 태워준다. 두 사람은 인종을 떠나 진정한 이해와 화해의 제스쳐로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눈다. 그러다가 옆자리의 흑인이 웃자 핸슨이 그 웃음이 나를 비웃는 것이 아니냐고 경계의 빛을 보내자, 흑인은 사람 사는 세상이 웃긴다고 대답한다. 대답과 동시에 흑인인 주머니를 뒤져 무엇인가를 꺼내려고 하자 핸슨은 순간적으로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얼결에 총으로 그를 쏘아 죽이고 만다. 그러나 죽은 흑인 청년의 손에는 총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 들려져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핸슨은 청년의 시체를 고속도로 변에 유기하고 차는 불태우고 현장을 빠져 나간다. 마지막 장면에 죽은 흑인의 현인 그레이엄 수사관이 길바닥의 흙 속에서 성모 마리아상을 발견하고 그것에 입맞춤하는 것은 구원과 화해의 메시지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백인 경찰인 핸슨의 이러한 시퀀스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간 상호간의 이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낮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흑인을 구해주는 선의를 베풀지만, 밤에는 그러한 이해의 심연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그저 인종 차별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휩싸인 채 악의적인 관습을 자행하는 양면성을 핸슨의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통해 허망하게 제시하고 있다.
구원과 화해만이 충돌과 갈등의 근본적인 치유책
이 영화〈크래쉬〉은 제명 그대로 전반에서 중반까지는 인종 간의 총돌과 갈등의 에피소드가 제시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구원과 화해의 장면이 펼쳐진다. 백인 경찰 라이언은 전반부에 아버지에 대한 병원과의 갈등이라는 분노의 표출로 흑인 PD와 그의 아내를 불심검문하여 성적인 수치심과 모욕감을 준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고속도로의 전복된 자동차 속에 갇혀 있는 PD의 아내 크리스틴을 극적으로 구출해줌으로써 화해가 이루어진다. 또한 남편의 출세욕으로 인한 소외와 고독감을 히스패닉 가정부에게 표출하던 백인 지방검사의 부인 진은 가정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끌어안으며 화해의 눈물을 흘린다. 진이 계단에서 미끄러져 생사의 기로를 헤맬 때 그녀를 구해준 것은 남편도 백인도 아닌 히스패닉 가정부였던 것이다.
차량 강탈범인 흑인 청년 앤소니도 백인 경찰 핸슨과 흑인 PD인 카메론에 감화되어 태국과 캄보디아의 불법 이민자들을 자유의 품으로 돌려 보내고, 가족을 팽개친 채 일에만 매달리던 흑인 수사관 그레이엄도 성모 마리아상과 입맞춤을 하고, 백인 경찰 라이언도 병든 아버지를 끌어안는 것으로 충돌과 갈등을 넘어선 구원과 화해의 제스쳐를 보여준다. 그들의 구원과 화해를 축하해 주듯 삭막한 도시에는 눈이 내리고, 여가수 버드 요크의 주제곡인〈in the deep〉라는 감미로운 발라드의 호소력 짙은 선율이 배경으로 잔잔하게 깔리며 엔딩 타이틀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