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풍습과 동성애 만연 속에 선수들도 발가벗고 뛰어 우수 선수들의 땀을 병에 모아 마법의
약으로 팔기도
올해는 올림픽의 발생지인 올림피아가 있는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역사적인 해인만큼 고대 올림픽에 대해
알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올림픽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올림피아에는 기원전 2800년께부터 인류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000년 즈음에는 올림피아는 천둥과 번개의 신인 제우스의 성전이 되었고, 기원전 776년 열린 최초의 올림픽
경기는 제우스 제단까지 달리는 종교의식으로 벌어졌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은 그 후 4년마다 한 번씩, 단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무려
1,200년 동안 계속됐다.
올림픽은 그리스인들의 축제였다. 따라서 그리스인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지만 노예와 여자들에게는
제약이 있었다. 경기는 8월 중에서도 보름달이 떴을 때 개막됐다.
참가 선수들은 훈련과 검사를 위해 한 달 정도 일찍 도착해야만
했고, 검사는 ‘헬렌오르데카이’라고 불렸던 올림픽 심판이 맡았다. 심판들은 선수들이 불명예스러운 짓을 하는지, 열심히 훈련하는지를 꼼꼼히
지켜보고 경기 참가 여부를 선수에게 알렸다. 올림픽 기간에 올림피아는 방문객들로 넘쳐났다.
수십만 명이 세계 곳곳에서 몰려와 성전
근처의 숲과 들판에서 야영하며 올림픽 경기를 지켜봤다. 이집트·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오늘날 프랑스 지역에 해당하는 ‘마르세이’ 그리고 러시아 남부
해안인 ‘올비아’에서도 찾아왔다.
그리스인들은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전쟁중에 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는데, 서로
싸우던 도시국가 사람들마저 올림피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올림픽 기간중에는 관람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휴전협정이 맺어지기도
했는데, 그 기간은 통상 3개월 정도였다. 전투를 가장 잘 한다는 스파르타 사람들이 제의한 휴전이었기에 휴전이 깨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장
사나운 적들끼리도 평화롭게 만나고 경쟁할 수 있었던 장이 바로 올림픽이었다.
전쟁중에도 올림픽 경기
사람들이 올림피아로 몰려든 것은 꼭 올림픽 때문만은 아니었다. 군중들 자신을 알리기 위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소크라테스·플라톤 등의 철학자들도 군중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철학을 군중들에게 설파했다.
세계 최초의
전문 역사가였던 헤로도토스는 제우스 신전 뒤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지은 저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의 명성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신전에 전시된 예술 작품들을 보기 위해 올림피아를 찾는 이들도 있었다. 방문객들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신전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전 내부의 조각상들 주변은 사자 모양의 분출구 수십 개로 장식됐다. 신전 외부에는 맨 꼭대기에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담은 기념비적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렇게 수많은 조각상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것은 제우스
조각상이었다. 제우스 신전에 안치돼 있었던 이 조각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다.
제우스의 몸은 상아로 만들었다. 이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황금빛 상아가 사용됐다. 제우스의 왕관은 상아와 흑단나무 그리고 보석으로 장식됐다. 제우스의 주름 잡힌 옷에는
아름다운 금박을 올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술의 극치라고 일컫는 제우스 조각상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화려한 것은 신전뿐이
아니었다. 올림피아에 있던 많은 건물들은 다양한 컬러로 섬세하게 칠해져 있었다. 여기에 182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레오니디안’도 있었다.
‘레오니디안’은 부자들을 위한 초일류 호텔이었다. 방문객 수십만 명 중에서 이곳에 묵을 수 있었던 사람은 특별하고 정말 대단한 단
‘50명’뿐이었다.
오늘날 올림픽에서는 개막식이 가장 화려하지만, 고대 올림픽의 첫날은 종교적 정화와 경고의 날이었다. 선수들은
손에 번개를 쥔 제우스상을 바라보며 서약을 했다. 공정하게 경쟁하고 규칙을 준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약을 위반했을 때는 가혹한 벌이 따랐다.
당시에도 뇌물을 주고 승리를 얻으려고 했던 선수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영원히 불명예스러운 선수로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올림픽 경기에서는 돈이 아니라 발의 속도와 육체의 힘으로 승리를 얻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승리의 월계관을 얻기 위해 때로는
피를 흘리기도 했다. 경쟁을 뜻하는 그리스말은 ‘아곤’이다. 아곤은 고뇌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아곤의 개념은 운동경기에서 중요했다.
고통과 투쟁과 괴로움이 포함된 투쟁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다. 달리기·원반·레슬링 등 모든 경기가 옷을 입지 않고 치러졌다. 고대 올림픽이 누드로 치러지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기원전 720년. ‘오시퍼스’라는 육상 선수가 있었다. 그는 달리는 도중 허리싸개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벗고
뛸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그 날의 우승자가 된 것이다. 이후 다른 선수들도 누드로 뛰기로 결심했고, 이러한 관습이 점차 퍼져나갔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에서는 누드나 동성애가 부끄럽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교육받았던 훈련 장소를
뜻하는 ‘짐내지움’이 누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고대의 올림픽 선수들은 누드로 경기를 치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남자와 어린 소녀 그리고 처녀들에 국한됐다. 기혼여성은 경기 관람을 철저하게 금지당했다.
기혼여성의 경우 경기 장소와 가까이 있는 알티우스 강을 건너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이 규칙을 위반한 대가는 죽음으로, 접근 금지
구역에서 붙잡힌 기혼여성은 신전을 굽어보는 절벽에서 던져졌다.
기혼여성들은 경기 관람 불가
그렇다면
어린 소녀와 처녀들은 왜 관람이 허용됐을까. 그것은 어린 소녀와 처녀들에게는 발가벗은 남자들이 겨루는 경기장이 성교육의 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혼여성들은 남성의 성기를 보면 안 되었지만 처녀들은 최고의 남자가 목표였기 때문에 경기에 참가한 그리스 최고의 남자들을 보는 것이 당연했다.
처녀들은 관전뿐만 아니라 시합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를 기념하기 위한 ‘호리아’라는 경기였다. ‘호리아’는 세
가지 단거리 육상 경기로 이루어졌다. 각각 어린 여자아이, 10대, 처녀 등이 참가하는 경기로, 트랙을 일주했다. 이 경기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처럼 훈련받은 스파르타의 여자들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누드로 경기하지 않고 오른쪽 젖가슴을 드러내는
‘카이톤’이라는 옷을 입었다. 젊은 여자들의 경기는 일종의 의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자신들의 가치와 정신을 공식적으로 내보이는 자리였다. 여자
경기는 남자 경기가 없는 날에 열렸다.
그 날은 올림픽 개막 세번째 날로, 올림픽을 절정의 순간으로 이끄는 의식과 축제의
날이었다. 이 날 정오에 열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제우스를 찬양하기 위해 황소 100마리 정도를 도살했다.
제물은 태운 다음 제우스에게 바쳤는데 그 양이 아주 적어 상징적 의미만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 99%는 요리를 만들었다. 저녁에
모든 사람들이 이 고기를 먹었다. 관중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고 하니 그 축제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간다.
경기장 양 측면의
경사진 곳에는 4만5,000명의 열광하는 관중들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올림픽은 1년 중 가장 뜨거운 8월에 열려 관객들은 모자를 쓰지 않은
채 땡볕 속에서 관람했다는 점이다.
이유는 뒷사람이나 주위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 관중들은 의자에 앉지
않고 풀밭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풀 위에 앉는 고대 민주주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의자는 모두 12개뿐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의자에는 심판들이 앉았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로 열렸던 올림픽 경기에서 승자는 무엇을 받았을까. 그들은 제우스 신전 뒤에 있는
올리브 나무에서 자른 올리브 가지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초전이었고 진짜는 고향에 돌아간 뒤에 받았다.
아테네에서는
승자에게 평생 무료 식사를 보장했고 승리한 경기 각각에 대해 11만달러 정도의 용돈을 지급했다. 그리고 영웅으로 신처럼 숭배됐다. 선수들의 땀은
비싼 상품으로 팔렸다. 사람들은 선수들의 땀이 뒤섞인 흙을 모아 병에 넣어 보존했다. 그 병의 땀은 마법의 약물로 팔려나갔다.
올림픽 至尊 ‘밀로’
전설적인 선수들로는 올림픽에서 여섯 번 연속 우승한 레슬링
선수 ‘밀로’가 있다. 그가 전성기일 때는 어찌나 무서웠던지 경쟁 선수들이 스스로 기권하고 패배를 감수할 정도였다. 밀로의 힘은 가히
초인적이었다고 한다. 고대 문헌에 밀로는 다 자란 황소를 경기장 주변에서 끌고 다니다 도살해 하루에 다 먹어치웠다는 기록이 있다.
힘으로 유명했던 또 한 명의 선수는 ‘폴리다무스’였다. 기원전 408년 판크라티온 경기에서 우승했던 폴리다무스는 경기 이외의 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맨손으로 싸워 사자를 죽였는가 하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이륜 전차의 뒤를 한 손으로 잡아 멈추게 했다고 전한다.
육상 선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는 ‘레오니투스’로, 그는 신과 같은 속도를 지녔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레오니투스는 네 번의
올림픽 경기에서 매번 3종목에서 우승했다고 한다. 그의 고향 로드에서 그는 신처럼 숭배되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올림픽 기록은
멀리뛰기 선수 ‘파일로스’가 갖고 있다. 그는 110회 올림픽에 참가했다. 당시 넓이 뛰기의 길이는 약 15m였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기록보다
무려 6m 정도가 더 먼 거리다. 그런데 15m도 부족해 파일로스는 그 착지 장소를 뛰어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뛴 길이는 약 16.7m로
힘이 너무 강해 착지할 때 두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
올림픽 선수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1,200년 간이나 계속됐던
올림픽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위대한 고대 올림픽은 5세기초 두 번의 큰 지진이 올림피아를 삼켜 버리면서 사라지게 된다. 6세기
무렵에는 홍수가 올림피아를 덮쳤다. 모든 것이 6m 두께의 먼지와 진흙에 묻혔다. 그러다 1829년 최초의 발굴이 시작되면서 올림피아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올림피아에서 1,200년 간이나 타올랐던 올림픽 성화는 4년마다 올림피아에서 새롭게 채화돼 다음 올림픽
개최지로 운반된다. 2004년 올림픽이 바로 그 곳, 올림피아가 있는 아테네에서 열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