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하까이 1,1-8 루카 9,7-9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린 날 문구점에서 완구를 훔쳐서 집에서 장난감으로 조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린 아들을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족과는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감옥으로 보내 주십시오.’
어머니는 문구점 주인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그 뒤로 정직하게 살기로 했고, 지금은 한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합니다.
한의사로 수련하는 과정에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서 침을 놓아 드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버지는 정신을 차렸고,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씀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자식이 술 때문에 어려움을 겪자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되는 원인 자체를 없애시는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 하였고, 서예를 하였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족자에 시편의 말씀을 써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사제는 책을 통해서 마음의 양식을 얻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성서의 말씀으로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상하였습니다.
대녀들을 잘 챙기셨습니다. 집안 어르신들의 기일, 생일을 꼭 챙기셨습니다.
사제는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길을 보여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천상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행복이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하는 것,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들은 정말 헛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서는 말보다는 삶으로 예수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었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결국 꽃이 시들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진정한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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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식 토마스 신부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하까이 1,1-8 루카 9,7-9
현대인의 많은 질병 가운데 하나가 신경 정신 의학에서 말하는 불안 장애나 공황 장애,
강박 장애 등 불안과 스트레스 관련 질환이라는 연구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 이웃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내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요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함께 나누고 이해하며 사랑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유독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많다면,
스스로 성찰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나 배려 없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처럼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라는 물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는 헤로데를 만납니다.
일찍이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헤로데는 자기 자신도 요한도 몰랐기에 예수님도 어떤 분이신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헤로데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자신을 사랑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열린 존재입니다.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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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하까이 1,1-8 루카 9,7-9
주님의 집의 파괴자들
오늘 독서는 하까이서입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 상태인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집을 다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무라는 것이 오늘 얘기인데 프란치스칸인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특히 지난 9월 1일부터 프란치스코 축일인 10월 4일까지 교황님이 제정하신
"창조의 시기(Season of Creation)"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가 받은 소명은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허물어진 주님의 집이 무엇이냐 그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처음에는 그야말로 허물어진 성당들이었지요.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 허물어진 주님의 집은 고작 성당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이고, 더 나아가 가톨릭 신자나 그리스도교 신자뿐 아니라
이슬람 신자나 무신론자까지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거라고
깨달음이 확장되었지요.
그런데 깨달음의 확장과 주님의 집의 확장은 이제 인류를 넘어섭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애는 지구뿐 아니라 우주 끝까지 가고,
인류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갑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을 때
"가서"라는 말은 지나치고 "나의 집을 고쳐라."는 말만 중시했는데
깨달음이 확장되면서, 주님의 집을 고치되 "가서" 고치라는 말씀으로 알아 듣게 되었고,
그래서 형제애는 우주까지 그리고 피조물에게까지 가게 되었으며
주님의 집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이루는 것이 되었지요.
그래서 교황 프란치스코도 우리가 사는 지구를 <공동의 집>이라고 하고,
이 공동의 집을 우리가 함께 잘 가꾸어야 한다고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는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 에서 가져온 거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공동의 집을 보살피기는커녕 오히려 마구 파괴하고,
프란치스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에 대해 별 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하까이서처럼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그런데 우리도 그리고 프란치스칸들도 다른 환경 파괴자들처럼
공동의 집을 파괴한다는 말에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발끈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분들은 더 그러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지구를 살리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고, 그런 적극적인 의식 없으면 파괴하는 것이며,
깨달음과 의식이 프란치스코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가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고,
소비를 지금보다 현격하게 줄이지 않으면 저를 포함하여 모두 파괴자들이라고
저는 오늘 말하겠습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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