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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그 가난한 판자촌은 배호가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귀국해 보낸 유년의 공간이다. 채석장의 절벽은 높고, 연못은 깊었다. 잠시 산 부산에서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상경해 외삼촌 악단의 견습으로 시작한 배호의 음악인생, 그의 노래가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청계천 언저리를 천천히 지나간다.
나는 대중가요에서 가장 완벽한 음을 구사한다는 가수 배호의 천재성을 지금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가요 팬의 한 사람이다. 미아리 고개를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배호를 따라가 본다. 거기에는 우리 가요사의 또 하나의 별 반야월 선생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 포연 자욱했던 통한의 ‘6·25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미아리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아로 새겨진, 쓰라린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길목이다
시원하게 뚫린 미아리고개는 이해연이 애절하게 부르던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아니다
남산을 한 바퀴 돌며 배호를 추억하는 일로 전설의 가객을 마무리 짓기에는 허전했다. 그의 출생이 궁금했고, 세상을 일찍 버린 스물아홉이 애달팠다. 그를 미치도록 사랑한 사람들이 기록한 평전을 들추며 창신동을 찾는다. 도심에서 가장 가까웠던 달동네 창신동은 채석장터의 절개면으로 인해 아주 하늘 가까이거나 땅바닥에 붙어사는 동네였다.
터널이 생기고 땅속으로 6호선 지하철이 고려대학교 쪽으로 이어지기 전, 창신동은 낙산에서 삐져나온 동망봉으로 가로막힌 외딴 골짜기였다. 땅 뙤기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먹고 살기 위해 모여들던 60~70년대 이전부터 살기 어려웠던 동네였다.
바위언덕 위 하늘에 걸린 집은 창신동의 흔한 풍경이다(창신동)
중국에서 돌아온 배호일가, 창신동 시대
배호의 아버지 배국민도 귀국열차를 타고 중국 산동성 지난을 떠나왔다. 택시 사업을 하며 광복군의 특수임무를 수행했던 아버지의 신병은 이미 깊어 배호의 유·소년 시절은 병수발과 함께 지나간다. 궁안말에 사는 소년 배신웅(배호의 본명, 아명은 배만금)은 간이 나쁜 아버지를 위해 선지피를 얻으려 주전자를 들고 숭인동 도축장으로 뛰어 다녔다.
아무리 효자라도 아이는 아이다. 골목을 뛰어 다니는 아이들은 안양암의 바위와 창신국민학교 뒤 채석장 근처도 놀이터로 삼았다. 길 건너 숭인국민학교는 1만2000명의 학생들이 3~4부제 수업을 해야 하는 아시아 최대의 콩나물시루 같은 학교였으니 위험, 안전 따위를 따질 제가 못되었다. 지금은 헐어버린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의 화강석도 모두 창신동에서 발파한 것이었다. 채석 발파는 그 후로도 이어져 배호가 공부하던 창신국민학교까지 돌이 날아오기도 했다. 채석으로 깊이 패인 곳에 물이 고여 아이들이 빠져 죽기도 했다는 연못에는 공공복지관이 들어서 있다.
배호가 다닌 창신국민학교 동문에는 트로이카 여배우 문희의 이름도 보인다. 사람이란 무릇 입에 풀칠도 해야지만 입성도 챙겨야 하니 청계천의 반경 1km 남짓한 창신동이야 말로 ‘봉제 골목’이 되기에 적격이었다. 요절한 가수 김광석의 집터로 가는 길도 마도매, 걸거리, 시야게, 패턴 따위의 낯선 단어들이 유리창에 붙어 고객을 부른다. 모두 재봉틀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만 아는 용어다.
추억의 창신동을 관청은 용케도 잘 조립해 놓았다. 전설적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과 가장 한국적이라는 서양화가 박수근이 살았던 예혼은 가난했던 창신동을 위로해 주고 있다. 전태일 의 이름이 창신동 언저리에서 기념관으로 살아난 것도 옷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삼박자가 이루어지던 청계천변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여공들이 밤낮없이 돌린 미싱소리는 옷감의 먼지와 함께 폐병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제 그 여공들도 나이가 들어 온 데가 쑤시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배운 게 뭐라고 아들딸 놓고도 여전히 창신동 언저리를 떠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자, 배호의 어떤 노래 한 곡을 골라 볼까. 마니아들이 특히 사랑하는 <그 이름>이 떠오른다. 배호의 가계가 보여주는 광복군의 우국충정과도 맥이 닿아 있다는 평전의 해설은 이 노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 이름> 배상태 작사·곡, 배호 노래, 1969. 아세아레코드
그리고 보니 이 노래는 그저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라 하기에는 통이 크다. ‘옛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병석의 아버지와 함께 광복의 공간에서 사라져간 선구자와 선열을 그리워하는 노래로도 확장이 가능하다. ‘옛 사람’ 속에는 떠나간 ‘그녀’ 이상의 존경의 대상이 들어 있기에 사나이의 통곡도, 탄식도 스케일이 다르다. 경성역(서울역)에서 만주로 보낸 ‘당신’처럼. 해병대를 제대한 배상태가 동생처럼 아끼는 배호의 집안 내력을 알면서 만든 흔적이 선연한 노래다.
마도매, 걸거리, 마이깡 같은 낯선 단어는 봉제1번지 창신동에서 통하는 말이다(창신동)
화강암 절개지 아래 연못이 있던 자리엔 공공건물이 들어섰다.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된 중앙청)에 사용된 화강석도 창신동 산이다
황학동에서 밀려나온 동묘 골동품거리. 만물잡화가 추억의 난전에 펼쳐져 있다(숭인동)
먹방 유튜브로 자신을 생중계를 하고 있는 청년이 7개의 삼각김밥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흥인동)
신평화, 동평화, 청평화 상가는 ‘메이드 인 창신동’이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를 만나는 접점이다(흥인동)
1964년, 배호가 김인배 악단에서 드럼을 치고, MC를 보던 천지호텔 나이트클럽 자리, 이제 퇴락한 호텔에 달린 ‘천지’라는 이름이 버거워 보인다(광희동)
가난한 서울의 또 다른 상징 청계천, ‘천지캬바레’와 뮤지컬 ‘천변캬바레’
동묘 앞에는 추억의 골동거리가 북적거린다. 지하철 공짜 손님들로 역은 붐비지만 적자일게 뻔하다. 헌책, 싸구려 옷과 잡화류가 난전을 차지하고 있다. CD와 테이프까지 이미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찾지 않는 물건들도 당당하게 나와 있다. 뉴트로의 바람 속에서 젊은 사람들도 구제물건을 헤치면서 메이커의 흔적을 찾는다.
동묘 앞은 황학동 골동거리가 재개발에 밀려나 청계천을 건너온 이주단지다. 누가 마련해준 공간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갈 곳 없어진,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을 한뼘씩 펼쳐 놓은 노점이다.
원래 청계천변 창신·숭인·용두·답십리는 널빤지를 잇대어 다닥다닥 집을 지은 ‘한국 현대사 최대의 판자촌 벨트’다. 국방색 군복 따위에 검정물을 들이던 염색집도, 숭인동, 마장동 도축장도 모두 염료와 핏물을 흘려보내려 청계천변에 들어선 거다. 청계천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탁(汚濁)을 흘려보내기 위해, 민초의 삶을 위해 몸 바친 물길이었다.
흥인문을 중심으로 한 청계천은 평화라는 이름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동평화, 청평화, 신평화 어디가 어디까지인지 이곳에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면 정확하게 자리를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든 탑이 두타와 밀리오레다. 중국의 저가물량 공세 속에서도 속도전으로 살아가는 곳이 평화시장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동대문 전차종점과 고양군청이 있던 자리, 옛 덕수상업고등학교 터를 지나 ‘천지호텔’을 찾아간다. 검색에는 ‘뉴천지호텔’이 나온다. 을지로5가 133번지다. 국립중앙의료원 맞은편 을지로 뒷골목까지 찾아가 보는 것은 배호의 흔적 때문이다. 1957년 김광빈 악단의 드럼수로 시작하여 부평 미8군 나이트클럽 ‘55YESCOM’에서 드럼를 치던 것이 17세 배호였다.
배호는 독립해서 ‘배호와 그 악단’을 결성하기 전, 1964년에 천지클럽캬바레에서 김인배 악단에 소속되어 드럼을 치며 사회를 보았다. 이미 그의 드럼 실력과 노래의 멋은 장안에 알려지기 시작해 퇴근길에 “맥주 한잔 하지”라는 말 대신 “배호 한 번 보러갈까”라는 말이 유행했다. 4층짜리 건물은 차마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퇴락해 있다.
다시 청계천을 건너 종로4가 로터리에 들어서면 연지동 방향 건물사이로 ‘두산아트홀’이 보인다. 여기에서 2010년 초연된 뮤지컬 <천변 캬바레>가 떠오른다. 배호 노래를 중심으로 한 대중가요 19곡이 질펀했다. 음악평론가 강헌과 박현향 작가가 대본을 쓰고 최민철이 주연을 맡았다. 캬바레 웨이터 춘식과 미국으로 시집가는 여가수 미미의 이야기는 1960년대 흔했던 무단 상경 청춘들의 스토리이자 코믹과 눈물이 짬뽕된 신파다. 스윙과 재즈 리듬이 겉멋을 건드리며 <두메산골>에서부터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커피 한 잔>, <서울야곡>, <거짓말이야> 까지 출연자의 노래는 조금은 어설프지만 ‘천변캬바레’는 ‘천지캬바레’의 현신임이 틀림없다.
<청계천의 밤> 김준규 작사·곡, 남일해 노래, 1990, 오아시스레코드
이 노래 또한 맨주먹으로 상경한 춘식의 주제가라 해도 전혀 어색할게 없는 그 시절 풍속도와 도 맞닿아 있다.
금융의 중심 을지로의 옛 이름, 황금정
서울 중심의 가로축 도로 가운데 가장 변화가 적은 곳은 을지로다. 간혹 걷다 보면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향수가 절로 일어나는 거리이기도 하다. 일제 치하 을지로의 이름은 황금정(黃金町)이다. 오늘날의 명동인 본정(本町)과 함께 남산자락의 일인들이 활개 치던 영역이기도 했다.
이 이름도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 근처에 이르는 구리개 고갯길에서 따왔다. 구리개는 ‘구리빛 나는 진흙’이라는 뜻이다. 이를 한자로 동현(銅峴)이라 했고 그 이름이 황금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름 따라 간다’고 을지로에는 금융기관의 본사들이 몰려 있고 상업의 중심지다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황금에도 눈이 있다’는 말은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배호의 <황금의 눈>도 마니아 사이에서는 널리 애창되는 노래다.
<황금의 눈> 정성수 작사, 김인배 작곡, 배호 노래, 1966. 지구레코드
욕망의 도시 서울로 모여든 군상들의 이야기는 같은 제목의 영화 <황금의 눈>의 주제가로 만들어졌다. 그 당시 최고의 유흥장으로 사랑받았던 캬바레에서 연주하는 노래로 적격이다.
1966년 김강윤 감독 작품으로 남양영화사(국제극장 개봉)가 제작하고, 박암, 김지미, 독고성, 장민호, 김희갑 등이 출연했다. 일등항해사 서훈(박암)이 약혼녀의 피살로 용의자로 몰리자, 여자 탐정(김지미)과 함께 기어이 진범을 찾아내 황금에 눈이 먼 세태를 응징한다는 해피앤딩의 영화다.
대학로의 색깔은 해묵은 적벽돌을 닮았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산으로 떠나간 뒤 마로니에 공원은 문화공간으로 다시 자리를 매겼다(동숭동)
이른 아침부터 구걸하는 청년, 엎드려 얼굴은 가렸다.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은 그가 넣어 놓은 본전이겠다(동숭동)
신문을 보는 사내들의 조형물이 방패를 들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세상에 대한 방어의 의미라고 봐도 무방한가(동숭동)
다시 만나고 싶어, 혜화동 그 거리에서
을지로를 가로질러 청계천을 건넌다. 옛 동대문경찰서(현 서울혜화경찰서)와 전매국이 있던 뒷골목을 지나면 원남동 사거리다. 지금은 창경궁으로 이름을 되찾았지만 일제가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서울시민의 유일한 위락공간이었다. 2000여 그루의 벚꽃이 피면 하루 25만명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고, 춘당지에서 보트를 타는 청춘남녀들이 부딪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서울의 깊은 밤은 적막해서 충신동까지 동물원의 맹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었다고 토박이들은 전한다.
지금 서울사대부설여중이 있는 자리는 경성공업전습소와 중앙시험소가 있던 자리다. 대학로라는 이름도 경성제국대 법과대학이 의과대학과 길 하나 사이로 마주보고 있던 시절에서 비롯되었다. 광복 후 이름을 바꾼 서울대학교가 늘어나는 몸피를 견디지 못해 동숭동시대를 마감하고 1972년 관악산 자락으로 옮겨가기까지 마로니에 숲은 서울대 교복과 뱃지를 향한 선망으로 가득했다. 이제 문리대 본관 적벽돌 건물만 남아 서울대의 그 시절을 증언할 뿐이다.
또 하나의 살아있는 흔적은 ‘학림다방’이다. ‘since 1956’은 전쟁의 상처에 진물이 흐르던 때를 말한다. 외벽에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적혀 있다. 스타벅스가 점령한, 깔끔한 커피가 대세인 틈새에 쓸쓸하게나마 건재하고 있는 학림다방이다.
이미 상업화의 바다가 되어버린 ‘대학로 문화’ 속에서 ‘학림’은 피난할 수 있는 외딴 섬이다.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가면 최루탄 자욱한 우리들의 70~80년대를 불러내 접견할 수 있는 낡은 테이블이 있어 소중하다. 이쯤해서 귀에 익은 노래 한 곡을 들어본다. 비음이 섞인 매력 있는 허스키 보이스를 가진 가수 최유나의 <밀회> 2절에 ‘혜화동’이 등장한다.
<밀회> 김순곤 작사, 방기남 작곡, 최유나 노래, 1983, 현대음향
시적 감각이 남다른 작사가 김순곤이 귀한 만남의 장소로 혜화동을 정한 것은 1절의 ‘광화문 그 찻집’과 맞닿아 있다. 그 광화문은 오늘날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깃발로 충돌하고 있는 ‘이념의 광화문’이 아니다. 서정이 넘치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을 돌아 신문로 새문안교회 언저리에서 멈추는 광화문이다. 최유나의 ‘혜화동 그 거리’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함께 거닐며 옛사랑의 주름진 얼굴을 비로소 쓰다듬어 보는 자리다. 맺지 못할 인연의 쉼표를 잠시 찍을 수 있는 여백이다.
혜화동 로타리는 옛날처럼 조촐하다. 신호등이 차더러 잠시 쉬어가라고 하는 걸 빼면 달라진 게 없다. 이 로타리는 천주의 은혜가 가득한 공간이다. 혜화동 성당과 동성고등학교의 기운이 서려있다. 필리핀 사람들이 일요장터를 여는 것도 성경 말씀 아래 모이는 주님의 은총 덕이다. 고향 말 타갈로그어로 안부를 묻고 한 주일의 지친 일상을 털어내는 필리피노의 자연발생적 시장이다. 4·19 때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문을 박차고 고등학생으로는 처음 시위에 참가한 용기를 자랑하는 동성고등학교 정문 앞이다.
그 건너편에 있던 소피아 독서실은 70년대를 지나온 고시생들에게 추억의 자리다. 서울법대와 성균관대가 가까이 있기도 했기에 고시 합격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당이었다. 최루탄 냄새 속에서도 고시공부에 몰입해야하는 청춘들이 스스로 영혼을 유폐하던 공간, 입신의 사다리에 올라타기 위해 살을 꼬집으며 잠을 쫓던 처절한 반 평짜리 박스였다.
가사 어디에도 ‘혜화동’이 등장하지 않지만 ‘동물원’이 노래 부르는 <혜화동>(김창기 작사·곡, 박보람 리메이이크)에는 어린 시절 추억을 찾아 혜화동으로 가는 청년들이 탄 덜컹거리는 전철이 있다. 그들에게 돈암동 종점으로 가기 위해 힘겹게 삼선교 언덕을 오르던 전차의 기억은 두어 세대쯤 전의 낡은 흑백 필름일 뿐이다.
혜화문 근처 도로를 건너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고단한 외국인 근로자에겐 구원의 십자가이리라(삼선동)
혜화동 큰길 담장에 핀 넝쿨장미. 도심에서도 여백이 있는 길이다(혜화동)
젊은이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반짝 세일. 나이든 사람들에겐 낮선 기다림도 청춘에겐 익숙한 일상이다(혜화동)
학림다방은 동숭동 시절 서울대학교를 추억하는 여전한 공간이다. 1956이란 숫자에는 어쩐지 전쟁의 상흔 위에 포연이 감돈다(혜화동)
혜화동 로타리에는 필리핀 장터가 일요일마다 열린다. 혜화동 성당과 천주님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 장을 열게 허락해 주고 있다(혜화동)
내 기억 속의 목로주점, 혜화동 <석굴암>
또 하나 소환하는 기억의 모퉁이에 혜화동 <석굴암>이 있다. 복원된 혜화문 근처 방공호에 있던 목로주점 ‘알타미라’이다. 대학생들이 싼 맛에 가는 이 컴컴한 굴속에는 늘 촉광이 흐릿한 백열등 아래 대여섯 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깍두기와 전을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부딪던 청춘의 주석(酒席)이다. 한 번 휘두르면 3명이 쓰러진다는 전설의 주먹 허버트 강이 혜화동 언저리에 놀던 자리다. 석굴암을 생각할 때마다 이연실의 목로주점이 떠오르는 것은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는 빼어난 묘사 때문이다.
<목로주점> 이연실 작사·곡, 이연실 노래, 한국음반, 1981
이 멋진 노랫말은 한편의 시다. 군산여고를 나온 홍익대 미대생이었던 이연실이 작사·작곡했다니 그녀는 그림뿐이 아니라 시적 재능도 뛰어났음이 분명하다. 1975년 가요계의 대마초 파동에 휩쓸려 잠적했다 돌아온 그녀지만 팬들은 여전히 고운 목소리로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는 그녀의 권유에 미소를 지으며 풋풋한 감성에 감탄한다. 강원도 어딘가에서 초야에 묻혀 산다는 소문만 아득할 뿐이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점집에 의지하는 갑갑한 세상
전차도 힘이 들어 넘을 수 없는 미아리고개가 막 시작되는 언덕 좌우에는 점집의 깃발과 철학관 간판이 즐비하다. 1966년 시각장애 역술인 이도병이 서울역 앞 양동 맹인역술인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돈암동 전차종점에 가까운 미아리고개 아래로 이사해왔다. 길거리에서 시작하여 80년대는 한때 100여명의 앞 못보는 역술인이 몰려들었고, 돈을 벌어 집도 사서 눌러 앉았다.
“영혼은 북으로 드나든다. 서울의 북북동은 영혼의 길, 북두신앙이 기대는 방위다. 사람의 영혼, 운세를 다루는 길과 맞아떨어지는 방위가 북쪽이다”라고 시각장애인역리학회 심남용의 증언이다. 미아리고개 정상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가 있다. 돌에다 새긴 비석이 아니라 철판에 가사를 용접으로 파낸 독특한 조형물이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1956, 오아시스
이 노래는 남편과 아내의 생이별을 주제로 하지만 미아리에 살던 전설의 가요시인 반야월이 6·25 난리통에 둘째 딸 수라를 잃고 찢어지는 가슴으로 민족의 아픔을 이입하여 지은 노랫말이다. 거기에 한국 가요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이재호가 곡을 붙인 불후의 명곡이다. 미아리를 온 국민에게 알린 공으로 말하자면 이 노래만한 것이 있겠는가. 요즘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미스트롯의 ‘진’에 오른 송가인이 정통 트로트의 진수를 보여주며 바로 이 노래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노래비를 물어물어 찾아가서 나는 탄식했다. 노래비 앞에 가건물을 지어 막아 놓은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의 무신경 때문이다. 이 단체는 서울시 보조를 받는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의 수혜자다. 미아리고개에 예술극장이란 간판을 달게 된 게 솔직히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 덕분이 아니란 말인가. 조석으로 노래비 앞에 예를 올리지는 못할망정 이 무슨 무례이며 몰염치인가.
노래비에 적힌 가사만 해도 그렇다.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이라고 했지만 원래는 ‘꼭꼭 묶인’이 원 가사다. 물론 발음이 편하게 그리 부른다지만 반야월이 생전에 늘 지적했던 대목이다. 한 술 더 뜨는 노래를 들어보자.
<신 사랑 고개> 정의송 작사·곡, 금잔디 원창
이제 창자를 끊어 내는 슬픔이라는 ‘단장(斷腸)’의 의미를 아는 세대가 사라져 가는 풍경이라고는 하지만 이 노래는 반야월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대노했을 게 분명하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어느 구절이 울며불며 매달리던 눈물고개이던가. 포로가 되어, 납북되어 끌려가는 남편을 안타깝게 발을 구르면서도 어찌할 수 없어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으로 통곡하는 이별이 아니던가. 아무리 통통 튀는 이즈음 노래라고 하지만 인고의 세월을 그래도 견디며 어린 자식을 홀로 키워낸 아내이자 그 시절 어머니를 얕잡아 보는 사설(辭說)이다.
미아리고개를 가로지르는 육교에서 바라보는 미아리는 그저 편안해 보인다. 미아리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살던 마을이었다. 가수 임희숙이 살던 미아리, 전라도 광주에서 가수가 되어 보겠다고 상경한 김연자가 살던 미아리가 그랬다. 배호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도 미아리였다. 병세가 짙어져 입·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했다. 앰뷸런스 속에서 막내 외삼촌 김광빈의 무릎을 베고 세상을 떠났다. 1971년 11월 7일 스물아홉 살의 일이다. 저기 단숨에 미아리 고갯길을 올라오는 긴 차량 행렬이 현대사의 벼랑을 피눈물로 지킨 보람이라면 그나마 위안이 될까.
세계 음식축제가 열리고 있는 성북천 복개도로. 대사관저가 몰려있는 성북동 덕분이다(성북동)
미아리고개 아래 돈암·동선동에는 철학관 간판과 점집 깃발이 펄럭인다(동선동)
미아리예술극장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비를 막고 세운 가건물. 누구 덕에 극장이 들어선 것인가. 화가 나다 못해 기가 막힌다
낙산 위 한양도성에서 본 서울 남산 자락(창신동)
조용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