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용신선생 -
약속한 선배가 조금 늦을듯 하여 상록수공원에 있는 최용신 묘에 올랐다.
&&에서 수십년을 살며 근방을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한번도 찾아보지 않은 게 불가사의한데...
전시관 안내 선생 역시 웃으며 나같은 사람이 의외로 아주 많다고 하신다.
토박이 백발노인 일부가 당신이 바로 최용신선생의 실제제자였다고 말하는 걸 듣긴 했었다.
내 어릴 적 현충사같이 이곳 학생들에겐 참배나 소풍이 거의 연례행사일지 모르겠다.
다음날 잠시 인터넷 검색으로 발췌한 글이 아래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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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동아일보의 장편소설 공모에서 당선한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고등농업학교 학생인 박동혁과 여자신학교 학생 채영신은 모신문사가 주최한 학생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우수 대원으로 뽑혀 보고회에서 감상담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학업을 중단하고서 고향을 지키러 내려가기로 약속한다. 박동혁은 고향인 한곡리로, 채영신은 기독교청년회연합회 특파로 경기도 청석골로 각각 내려가 농촌사업의 기초작업에 들어간다. 두 사람은 각자의 형편과 사업의 진행 과정을 편지로 알리며 서로 의논한다. 두 사람의 동지 의식은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3년쯤 지나 후진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 때에 혼인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역경에 휘말리게 된다. 채영신은 과로와 영양실조로 점차 몸이 쇠약해지다가 학원 낙성식장에서 하객으로 초대된 박동혁이 보는 앞에서 맹장염을 일으켜 쓰러지고만다. 박동혁은 악덕지주의 농간에 휘말리다가 투옥된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채영신은 서울 연합회의 주선으로 요코하마로 정양 겸 유학을 떠나나 곧 돌아온다. 다시 일에 몰두한 그녀는 각기병에 맹장염 재발로 숨을 거둔다. 출감한 박동혁은 채영신의 죽음을 알고서 비탄에 잠기나, 곧 두 사람 몫을 해낼 것을 굳게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작중 주인공 채영신은 실제인물인 최용신을 모델로 해서 쓴 소설이란다.
최용신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농촌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순교자적인 활동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을 남김없이 태워 이 마을을 밝히도록 해주소서.'농촌 계몽에 나선 최용신이 1931년
샘골(안산시 본오동)에 도착해 올린 기도다. 신학교에 다니다 농촌운동에 뛰어든지 2년여, 경험이 쌓이고 자신감도 있었지만 주민들은 반응은 여느 곳과 똑같았다. '곰보 신여성'에 대한 편견도 없지 않았다. 이를 앙다문 최용신은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강습소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아낙네들과 들에 나가 농사도 지었다. 밤에는 한글과 산수, 재봉과 수예를 교육하는 야학을 운영했다. 자신은 굶주려도 학생들은 먹였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적극적인 참여로 바뀌었다. 샘골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를 짓고 공동 생산을 늘렸다. 주민들의 단결을 일제가 반길 리 만무. 110명이 다니던 강습소의 학생 수를 60명으로 묶어버렸다. 최용신은 정원 초과에 걸린 50여 명의 학생들을 버리지 않고 따로 야학을 차려 가르쳤다. 재충전을 위해 일본 고베여자신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6개월 만에 되돌아왔다. 누적된 영양실조와 중노동의 후유증이 각기병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최용신은 고향 원산에서 요양할 생각이었지만 샘골 주민들이 '누워만 있어도 좋다'며 모셔갔다.몸이 다소 나아지자, 활동을 개시했지만 이번에는 장중첩이 달려들었다. 죽음 앞에서도 그녀는 농촌을 걱정했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 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김군과 약혼한 후 십년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해 사업을 같이하기로 하였는데 살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 마라. 유골을 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5년 1월 23일 눈을 감았다.
'샘골의 성자' 최용신은 26세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심훈의 소설 《상록수》로 다시 태어났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얻은 최용신은 푸르디푸르게 살아 있는 것이다.
심훈 역시 소설 발표 다음해에 35세의 나이로 타계했으며
유서에 언급한 김군도 다른 여인과 결혼했으나 최용신묘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전설....
이런 저런 평가와 서평이 무슨 소용.....
육필은 쓴 이의 마음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선생의 실제 육필원고 일부
…..전략.....내가 사는 이 촌은 우리 조선에서 두메라고 부를 만한 벽촌은 아니외다. 서울서도 멀지 않은 서해안의 작은 산골짜기랍니다. 이 촌을 가리켜 근방에서는 교촌이라고 부르니, 그 까닭은 이 곳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20여년이 되었고, 그 영향으로 인하여 학술 강습소가 마을 가운데 제일 높은 곳에 있으므로, 이 촌을 가리켜 문화촌이라고까지 부릅니다. 이 강습소에는 근방 십여 동네의 아동이 모여오니 그 수가 100여 명이나 됩니다. 이 많은 아동의 가정 정도를 말씀하면 본 면은 호수가 1400이나 되나 그 중에 1년 수입 150원 이하의 호수가 910호나 되는 극히 빈한한 지방이므로, 이 강습소는 그 대중을 가르치는 데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중략.....
도시의 여러분이여! 당신들은 얼마나 행복스럽고 얼마나 안락하십니까?
여러분 중에는 하루 저녁 오락비와 한 벌 옷감으로 몇 백원을 쓴다 하시거든
우리 농촌의 어린이들은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 목이 마릅니다.
여러분이시여!
곡식을 심으면 일 년의 계가 되고 사람을 기르면 백 년의 계가 된다고 하였거든,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 겨레를 발전시킬 농촌의 어린이를 길러주소서.
뜻 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주소서. 1934.10.3
무덤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자주색 들꽃이 열댓그루 솟아올라 있었다.
두 선배와 만나 술 두병을 쓰러트리면서.......
얼마전에 세상을 떠나간 어떤 선배를 이야기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나보다 삼사십여년도 채 못살고 떠나가신 최용신 선생이 떠올랐다.
겨우 85년전이지만 선생님은 오늘의 조선현실을 내려다보며 무슨 심경이실지...
농촌의 아들딸들은 실종하여 관심거리도 아니게 되었지만
도시의 젊은이들이 저리 어여삐만 보이니 내도 늙었는가ㅜ
그리고... 유관순선생....김유정선생...소월선생...심훈선생...윤동주선생...
.....그리고, 김정희 대선생...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세상이 어려워진 후에야 참 선비의 진면목이 드러날지니...'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취해있을 시국이 아니라는.......
2018.9 잠파노
* 1973년경, 절세의 음악가 김민기가 발표한 노래인데 본래는 야학운동중 노동자의 결혼식 축하노래로 만들었다는데
1978?년 절세의 가인 양희은이 '거친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으로 바꿔 불러서
일약 민주화 운동에 편승해 크게 주목을 받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