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즈카르야 8,20-23 루카 9,51-56
루카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나 마태오 복음서와 비교할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자세하게 다룹니다(9,51―19,28 참조).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중심에 속하는 부분의 첫 번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마치신 예수님의 시선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하셨는데, 이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파스카 사건을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24,25-27.46 참조). 9장 51절은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을 향하여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먼저 사마리아인의 고을을 방문하십니다.
그러나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부당하셨듯이(4,16-30 참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의 첫 방문에서도 사마리아인들에게서 환대를 받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한 사마리아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을 내려 사마리아인들을 심판하여야 한다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9,22.28-36.44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반대자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전하는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기를 바라시는데,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낍니다.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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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식 토마스 신부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즈카르야 8,20-23 루카 9,51-5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마치 구약의 엘리야가 적들에게 벌을 내린 것처럼
(열왕기 하권 역사서 1장 10절-12절 참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여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두 제자를 꾸짖으시고는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이루시고자,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뒤에 필리포스를 통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선포
(사도행전 8장 5절-25절 참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직 당신의 사명을 이해할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흔히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거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때 상대방과의 관계는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메마르게 됩니다. 단비로 다시 땅이 촉촉하게 젖어 들 듯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시고 행동하실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가 될 수 있으며, 그 기도의 응답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면 오늘 복음의 두 제자처럼 예수님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매정한 마음이 아닌,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마음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며 소금임을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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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즈카르야 8,20-23 루카 9,51-56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최초의 조선인 정도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선을 시작한 사람은 태조 이성계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힘과 신진 사대부의 지혜가 결합하여 고려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조선을 시작하였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힘과 신진 사대부의 지혜를 결합 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사람이
정도전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조선의 ‘틀’을 설계한 사람이 정도전이라고 합니다.
정도전이 이루고자 한 세상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왕은 국가를 다스리지만 국가는 백성이 주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왕이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장 먼저 느끼고,
백성들의 즐거움은 가장 나중에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정도전의 생각은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17세기 서양의 사상보다 200년 앞선 통찰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에 마음이 아팠고, 백성들의 정성에 감사했습니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혁명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3가지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재상이 국가를 운영한다는 ‘재상론’입니다.
재상은 청렴하며, 경륜이 높은 자들 중에서 왕이 선택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국가를 운영하면 어진 왕이고, 지혜로운 왕이면 좋지만 왕 중에는 어린 왕도 있고,
어리석은 왕도 있고, 무도한 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국가의 운영은 재상들이 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언로가 막히면 안 된다는 ‘언론’입니다. 젊은 선비들이 강직하게 재상의 허물을
비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 막히면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먹고,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를 수 있을 정도로
예의를 알도록 ‘토지개혁’을 이야기
경자유전의 법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토지는 국가가 소유하고, 백성들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며
그 수익의 일부분을 국가가 세금으로 걷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오리라.”
즈카르야가 생각하는 주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그 나라가 어떤나라이기에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올까요?
통치자들이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통치자들이 백성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나라가 아닐까요?
통치자들이 백성들의 소리를 외면하고 강압과 억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백성들의 고통을 경청하고, 백성들이 바라는 것을 주는 왕이 아닐까요?
소수의 권력자들이 부를 독점하고, 백성들을 가난으로 내모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더 이상 굶주림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나라가 아닐까요?
정도전은 권력의 다툼에서 밀려나 죽고 말았습니다.
정도전이 이루고자 했던 나라는 조선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국민을 섬기는 정치는 21세기인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는 권력자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가 가진 강한 군사력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가 앞세운 계명과 율법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대사제가 가졌던 권위와 권력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외면한 십자가와 희생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용서와 나눔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 권력자들의 힘, 군중들의 야유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나라’를 세우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세례를 받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나의 가족이, 나의 공동체가 평화의 마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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