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의 시작.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허진호 감독이 가수 故김광석 씨의 활짝 웃는 영정사진을 본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영정사진을 스스로 찍는 어느 사진사의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는 영감을 얻어서 만들게 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광석이형 잘 지내시죠?
"이 영화를 유영길 촬영감독님 영전에 바칩니다."
1. [8월]의 첫 장면은 추모 자막이다. 2. 현장의 유영길 촬영감독과 허진호 감독.
[8월의 크리스마스](이하 [8월])는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이다. 허진호 감독이 자신의 첫 영화에서
유영길 감독에게 카메라를 부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아카데미 시절 은사였고, 박광수 감독 연출부 시절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촬영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유영길 감독이었다. 허진호 감독은
자연스레 [8월]을 부탁 드렸고, 다른 작품과 겹쳤던 일정 문제가 해결되면서 합류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유영길 감독은 "모르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수십 년간 현장을 지켰던 베테랑 촬영감독은 [8월]에서,
이전까지 찍었던 방식과 뭔가 다른 화면을 만들고 싶었던 것. "연출부 시절에 봤던 유 감독님과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단순한 숏의 앵글을 잡을 때도 오랫동안 고민하셨고, 특히 빛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고민하셨다."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
찍는 장면이 많은, 마치 스틸 사진의 연속 같은 영화였기에 유영길 촬영감독은 [8월]의 관건이 '빛과 구도'라고 생각했던 것.
자연광으로 원하는 빛의 느낌이 나오기까지 기다렸다가 찍는 경우도 많았다.
영화의 시작
1. 영화의 인트로. 2. 잠에서 깨는 정원. 멀리서 초등학교 운동장의 2학기 개학식 소리가 들린다.
첫 장면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시나리오에서도 이 부분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촬영하면서 찾아낼 수밖에 없었고,
허진호 감독은 '죽음과 관련된 일상'으로 시작하길 원했다. 그것이 바로 정원(한석규)이 잠에서 깨는 장면. 그런데 그렇게
시작하기엔 영화가 너무 무거워지는 느낌이 있었고, 이어지는 신에서 정원이 스쿠터를 타고 병원 가는 장면을 인트로로 사용했다.
편집에선 스쿠터 타는 장면 다음에 잠에서 깨는 장면이 나오지만, 스토리 상 시간 순서로는 그 반대다.
네 번의 운동장
[8월]엔 네 번의 운동장 전경이 나온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낮의 운동장, 어두워지는 운동장, 비가 개인 운동장, 눈이 오는 운동장.
허진호 감독은 이 영화의 운동장 풍경이 정원의 내면을 투영하는 심상이 되기를 바랐다. 병원에서 돌아온 정원은 운동장에 앉아
있고, 이때 내레이션이 흐른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 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 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일상은 어떤
의미일지 묻는 [8월]에서, 운동장은 평범한 공간이지만 정원에겐 뭔가 좀 더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초원 사진관
[위험한 관계](2012)에서 처음으로 세트 촬영을 했을 정도로, 허진호 감독은 현실적인 공간을 선호한다. [8월]의 중심 공간인
사진관을 찾기 위해 전국의 웬만한 사진관은 다 뒤졌던 감독과 스태프들은 결국 오픈 세트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군산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로케이션 헌팅 때 허진호 감독이 들러서 여러 장소를 보았던 곳이기도. 원래는 차고였던 곳을 헐고
사진관을 지었고, 원래는 작업의 용이성을 위해 현실의 공간보다 세트를 더 크게 짓지만 '초원 사진관'은 실제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최대한 현실감을 살려 만들었다. 촬영 때는 마치 연극 무대처럼 마을 사람들이 사진관 앞에 모여 사진관을 구경하기도.
그러다 한두 명씩 엑스트라로 등장하기도 했다. 리얼한 외양 때문에 가끔씩 진짜 시진관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들어와 증명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한편 유영길 촬영감독은 단조로운 공간을 조금씩 앵글을 바꿔가면서 지루하지 않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자연스러우면서도 정서적인 느낌에 대해 허진호 감독은 "숨통을 터주는 것 같은 앵글"이라고 표현한다.
공간의 여운
주인공이 빠져나간 공간(왼쪽)에, 아이들이 들어와서 뛰어다닌다.
초반 문상 장면엔, 이 영화의 느낌이 잘 살아 있는 장면이 있다. 화장터 앞 마당. 나무 밑에 앉아 있던 정원은 밥을 먹으러 간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주인공이 밖으로 빠졌지만 장면은 끝나지 않는다. 대신 그 빈 공간에 아이들이 뛰거나 놀고 있다.
이처럼 [8월]의 편집은, 어떤 장면의 여운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숏이 바뀐다. 하지만 처음 편집은 이렇지 않았다고.
지루할 것 같아 필요한 부분만 골라 빡빡하게 편집을 했더니 러닝타임이 너무 짧아졌고, 다시 숏마다 1~2초씩 붙였다고 한다.
인접한 장소들
[8월]의 중심 공간은 거의 다 연결되어 있다. 정원이 우연히 지원(전미선)과 만나는 골목 왼쪽엔 50미터 정도 가면 정원의 집이
있고, 200미터 정도 내려가다가 왼쪽엔 사진관, 그리고 그 근처엔 학교 운동장이 있다.
50번의 테이크
[8월]에서 가장 많이 반복 촬영한 장면은 어디일까? 의외로 간단한 장면이다.
마당에서 정원이 파 씻는 장면. 여기서 정원의 안경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카
메라에 담기 위해 50 테이크 정도가 소요되었다. 원하는 느낌이 안 나오자 유영
길 촬영감독은 어떤 오기 같은 게 발동했던 듯. 여기에 신인 감독의 패기(?)가
더해져, 결국 그 장면이 만들어졌는데…. 가는 솔가지에 물을 묻혀 안경에 떨어
트려 빗방울을 표현했다.
180도 법칙
관객의 혼란을 막기 위해 카메라는 두 사람이 대화할 때 180도 너머로 넘어가선 안 된다. 좌우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것이 '180도 법칙'인데, 정원이 동생 정숙(오지혜)과 마루에서 수박을 먹는 장면에선 앵글의 변화를 통해 아주
자연스레 이 법칙이 파괴된다.
정원의 집
스태프들이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다가 공이 넘어간 집. 공 꺼내러 갔다가 그곳을 본 스태프들은, 촬영은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마땅히 정원의 집을 구하지 못한 상황의 해결책을 찾았다. 그렇게 섭외된 공간은 개량 한옥 스타일의 집으로,
적당한 심도와 주변 풍경이 어우러진,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공간이었다.
한석규의 미소
정원은 죽어가는 사람이지만 영화 내내 미소를 잃지 않는다.
촬영 들어가기 전 허진호 감독은 한석규와 캐릭터의 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한석규는 "[일 포스티노](1994)라는 영화를
봤더니 우편 배달부 역을 맡은 배우(마시모 트로이시)가, 연기를 잘 하는 배우임에도 마치 아마추어처럼 연기하더라. 정원이라는 캐
릭터엔, 그런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원이라는 캐릭터엔 한석규라는 배우의 실제 이미지가 상당 부분
배어 나오게 되었고, 영화 내내 미소를 띠며 웃는 모습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해진 캐릭터에 배우가 맞춘 것이 아닌, 배우
와 현장에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 심은하의 다림 캐릭터도 같은 방식을 통해 만들어졌다.
지원과 정원
사진관에서 지원과 정원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롱 테이크 촬영이었다. 긴 시
간 동안, 연기가 아닌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고, 많은 테이
크를 갔으며 계속 대사를 고쳐가며 촬영했다. "오빠, 많이 아프다면서?" "아니
야, 나 멀쩡해…." 둘의 대화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김창완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는 허진호 감독이 좋아하는
노래. 좀 더 길게 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장면이다. 이때 정원의 내레이션
이 흐른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서먹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지
면서 지원이는 내게 자신의 사진을 지워 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
억으로 그친다."
촬영감독의 배려
다림이 선배와 함께 길 한쪽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을 때 지나가던 정원이 다가
가 아는 체를 한다. 간단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허진호 감독은 이 장면을 찍을
때 매우 힘들었다고. "촬영할 장소에 갔는데,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특히 그날은 방송국에서 취재도 온 날이었다. 스태프들도 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헤매고 있으니까, 유영길 촬영감독님이 '오늘 해가 안 좋으니까 내
일 찍자'고 하셨고, 그렇게 촬영을 접었다."
정원의 친구, 철구
정원이 친구인 철구 역에 이한위를 캐스팅한 이유는 하나였다. 허진호 감독은 그의 유머가 좋았다고.
하지만 영화 촬영을 굉장히 힘들어했고, 그래서 횟집 장면에서 허진호 감독은 그에게 거의 대사를 주지
않고 그냥 계속 음식을 먹도록 주문했다. 이어지는 노상 방뇨 장면에서 철구의 "어유… 되게 마려웠는데
안 나오네…"라는 대사는 실제 그의 당시 상황이라고. 이때 정원은 철구에게 "나 곧 죽는다"고 속삭이고,
두 사람은 2차를 간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흐른다. "결국 농담처럼 녀석에게 말해 버렸다. 이렇게 술에
취해 녀석에게 응석 부리며 웃고 떠들 수 있는 날들이 내게 얼마나 남아 있을지…."
한석규의 음주 연기
술에 취해 사고를 일으켜 파출소에 온 정원과 철구. 이 장면에서 정원은 영화에
서 유일하게 과격한 감정을 드러낸다. 한석규는 이 장면 연기를 위해 소주를 반
병 정도 마셨다고 한다.
NG 장면 활용
월급을 탔다며 사진관에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놀러 온 다림. 정원은 그녀의 사진을 찍어 주려 하는데, 이때 정원의 조작 미숙으
로 카메라의 필름 끼우는 부분이 살짝 어그러지고, 다림은 그 모습에 웃는다. 이 부분은 NG 장면이었지만,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사
용되었다.
김애라 여사
가족 사진과 영정 사진 찍는 장면에 등장하는 할머니 역을 맡은 김애라 여사는
1940년대 만주에서 연극 무대에 오르며 연기를 시작한 원로 연기자. [8월]은 그
분의 유작인데, 2001년 11월에 돌아가셨을 때 유족들은 마땅한 영정 사진을 구
하지 못했고 영화 속에 사용된 영정 사진을 받을 수 있느냐고 영화사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속 사진은, 실제 김애라 여사의 영정 사진이 되었다.
배경 포커스
몰래 아버지 방에 들어가 담배 한 개피를 훔쳐 나온 정원은 마루에서 담배를 핀
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포커스가 인물이 아닌 원경의 배경에 맞춰져 있다는 것
. 이것은 주인공의 내면을, 인물이 아닌 배경이나 사물에 투영해 보여주려는 의
도였다.
아버지와 아들
천둥 소리에 잠을 깬 정원은 아버지(신구) 방으로 들어가 옆에 눕는다. 그의 죽
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드러난 장면인데, 이때 자세히 보면 아버지가 침을
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NG가 아니라, 사실은 아버지가 자는 것이 아
니라 깨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설정이다.
VCR 작동법
아버지에게 VCR 작동법을 알려주다가 화가 나 나가버리는 정원.
허진호 감독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장면이다. 감독도 아버지에게 VCR 작동법을 알려 드리던 과정에서 화가 났던 경험이 있다고. 2분
40초 정도의 롱테이크인데, 죽음과 부딪혔을 때 나오는 그 어떤 감정을 표현한 신이다. 정원이 나간 후 아버지의 표정이 지닌 뉘앙스
는 매우 인상적인데, 허진호 감독은 이 대목을 보면서 "연기라는 게 영화에서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들
[8월]엔 간접적인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암시하는 대목들이 꽤 많다. 다림은 정
원에게 "아저씨는 사는 게 재밌어요?"라고 묻기도 하고, 정원은 다림에게 귀신
얘기를 해주면서 "사람이 죽어서 귀신 되는 거 아니니… 다림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이 장면은 정해진 게 아니라 갑자기 찍게 된
것이었는데, 핀 마이크가 하나여서 한석규는 대사를 할 때마다 심은하 쪽을 봐
야 하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베테랑 배우는 매우 자연스
럽게 소화한다.
창 안의 시선
[8월]엔 정원이 어딘가를 혹은 누군가를, 특히 창 안에서 바라보는 장면이 많다. 이것은 영화의 관조적인 느낌과도 일맥상통하는 부
분. 특히 병원에서 나온 정원이 다림을 마지막으로 보는 장면이 대표적인데, 사실은 사진관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이뤄진 촬영이라고.
배경을 조금 다르게 보이게 하려고 공중전화 부스를 가져다 놓았다.
죽음의 준비
편지와 사진을 정리하고 자신의 앨범을 본다. 다른 사람의 사진을 찍을 때 항상 그랬듯 장비를 점검하고, 카메라 앞에 앉는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는다. 대사 없이 진행되는 이 장면에서 정원은 살짝 미소를 짓는데, 촬영 전에 감독과 배우는 "안 웃어도 된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연기대로 가자"고 정했다고. 이 장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한석규는, [8월]에서 특히 이 장면은 완벽하게 정
원이라는 캐릭터가 되어 연기를 했다. 정원은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인 걸까, 아니면 그 어떤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여기서 한석규
는 정원의 편안한 죽음을 선택했다.
돌아온 다림
과연 다림은 정원의 죽음을 알았을까? 현장에선 심은하에게 일단 모르는 걸로 설정을 하고 연기를 주문했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다
림에게서 정원에 대한 "아, 내가 저 사람을 좋아했었구나"라는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이 열병처럼 왔다가는 과거의
사랑이었다 해도 말이다. 이때 정원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흐른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
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
깁니다."
깨진 유리창은 누가 붙여 놓았을까?
첫댓글 정독했다 내가 진짜 진짜 좋아하는 한국영화..!!!! 개인적으로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 클래식이 최고임... 내일 봐야지!!!
진짜 나도 제일좋아하는 영화!! 명작임.. 차분차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