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찰리 파커’라 불리는 이봉조
그는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대중에게 깊이 각인시킨 인물이자 한국 가요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명곡을 작곡한 걸출한 뮤지션이다.
일찍이 음악적 천재성을 인정받고 300여 곡의 노래를 작곡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 그의 나이 56세, 1987년 여름 끝자락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 대중음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이봉조. 재즈 본고장인 미국의 뮤지션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그가 가요사에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 색소폰이 좋다. 나의 길을 가련다
1960년대에 TV가 귀하던 시절, 저녁 무렵이면 동네 사람들은 TV가 있는 집으로 스스럼 없이 모여들었다. 특히 서울지역 방송이던 TBC(동양방송)의 ‘쑈쑈쑈’는 내로라하는 유명 가수들이 출연하는 오락 프로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화려하게 펼쳐지는 무대 뒤, 오케스트라가 자리하고 색소폰을 비스듬히 맨 채 지휘를 하던 한 남자. 노래 중간 중간 눈을 지그시 감고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색소폰을 불던 사람. 그가 바로 TBC 경음악단장 이봉조(1931-1987)다.
1931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이봉조는 진주에서 성장하였다. 남강이 흐르는 빼어난 풍광의 도시, 역사적인 예향, 진주는 훗날 그에게 풍부한 감성과 음악적 영감을 심어준 고향이나 다름없다.
이봉조의 일생에는 두 사람의 스승이 있다. 이재호와 엄토미. 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이봉조는 당시 이 학교의 음악교사로 재직하던 이재호를 만나게 된다. 이재호는 이봉조의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맨 먼저 발견하고 그를 색소폰이라는 ‘매직 월드’로 이끈 인물이다.
이재호의 권유로 학교 밴드부에 입단하여 처음 색소폰을 접하게 된 이봉조는 이때부터 미국의 재즈에 관심을 가지고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과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등 거장들의 연주를 들으며 색소폰의 마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진주에서 하숙하던 당시 색소폰 때문에 쫓겨나 여러 집을 전전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 다른 스승은 1950년대 최고의 재즈 뮤지션인 엄토미다. 이봉조는 집안의 심한 반대로 음악과는 전혀 거리가 먼 한양대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한다. 졸업 후 서울 시청 소속 토목과 공무원으로 잠시 적을 두는 등 의외의 이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색소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그 무엇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대학교 3학년 때 김광수 악단에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연주를 하는가 하면 미 8군을 기웃거리며 연주할 기회를 찾던 중 엄토미를 알게 된다.
이봉조는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프로 색소포니스트로서의 기량과 자질을 전수받는다. 이재호가 고교시절 이봉조의 천재성을 발견했다면 엄토미는 그의 천재성을 완성시킨 스승인 셈이다.
1959년 이봉조는 김광수 악단에 정식으로 입단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전개한다. 1967년 이봉조 악단(6인조)을 결성하고 같은 해 MBC 전국경음악단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 이를 계기로 TBC 경음악단장을 맡으며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 한국 가요에 재즈를 입히다.
가요계의 마이더스 작곡가 이봉조
현미, 김추자, 정훈희. 1960년과 1970년대를 관통한 시대의 ‘디바’들이다. 이 세 명의 여가수를 발굴하고 그녀들을 위해 곡을 쓰며 스타로 발돋움하게 한 이가 바로 이봉조다. 그뿐인가. 최희준, 차중락, 남일해, 펄 시스터즈, 조영남 등 이른바 ‘이봉조 사단’으로 불리는 톱스타 군단을 이끌며 주옥같은 노래를 발표했다.
그는 1960년대 트로트, 70년대의 록과 포크라는 지극히 단순한 한국 가요의 계보에 재즈를 도입하고 접목시킨 인물이다. 특히 보사노바풍의 부드러운 리듬(보고 싶은 얼굴), 재즈의 흥을 불어넣은 멜로디(맨발의 청춘), 이국적이며 감미로운 선율(무인도, 꽃밭에서, 떠날 때는 말없이)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영화음악(잃어버린 태양, 통금 5분 전,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과 드라마 주제곡(꿈은 오늘까지만, 사랑이 가기 전에)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을 계속해, 대중은 이봉조의 노래에 열광했고 발표하는 곡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 한국가요를 국제무대로 이끈 천재 작곡가
산레모 가요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그리스 국제가요제, 칠레 국제가요제 등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전 세계인들의 관심 속에 국제가요제들이 많이 개최되었고 수상곡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곤 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그룹 아바(abba )다.(1974년 제 19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워털루’로 대상을 수상)
1970년, 아시아 최초로 동경에서 열린 제 1회 동경 국제가요제에는 39개국에서 총 580편의 곡이 출품되었다. 프랑스의 ‘줄리엣 그레코’, 이탈리아의 ‘미나’, 미국의 ‘엘라 피체랄드’ 등 각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가수들이 참가하여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가운데 이봉조가 작곡하고 정훈희가 부른 ‘안개’는 당당히 예선을 통과, ‘월드 베스트 10’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한국의 언론들은 우리 가요가 국제가요제에서 예선을 통과한 사실만으로도 흥분했고 실황으로 중계했으며 동경국제가요제를 보기 위해 전 국민이 TV앞으로 모여 들었다.
이봉조가 발굴한 신인가수 정훈희가 고운 한복을 입고 등장하고 이어 색소폰을 맨 이봉조가 그녀를 따른다. 청아한 정훈희의 목소리에 실린 ‘안개’와 이봉조의 호소력 짙은 색소폰 연주는 관중의 마음으로 흘러들어가 두 번의 박수갈채를 받고 한국의 가요는 비로소 국제무대에서 성공적인 첫 데뷔를 하게 된다.
이듬해 이봉조는 ‘너(정훈희)’, 1973년에는 ‘나의 별(현미)’로 그리스 국제가요제에서 연달아 입상하고 남미 칠레가요제에 ‘좋아서 만났지요(1974, 정훈희)’, ‘무인도(1975, 정훈희)’, ‘꽃밭에서(1979, 정훈희)를 출품하여 입상의 영광을 안는다.
한낱 변방에 머무르던 한국 가요는 이봉조의 천재성을 발판으로 세계무대에서 최고의 실력자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K-pop 열풍의 초석이 다져지게 된 셈이다.
■ 안개 속으로 떠나 전설이 되어 돌아온 색소포니스트 이봉조
꿈속에서인 듯 속삭이며 아련히 전해지는 색소폰 연주가 인상적인 이봉조의 대표곡 ‘안개’. 도입부에 이봉조가 연주하는 색소폰 소리가 밤거리에 번져나는 안개처럼 웅성대며 다가오는 ‘밤안개(번안가요)’. 이봉조의 곡은 유독 안개와 관련이 깊다.
정훈희가 부르는 ‘안개’가 티 없이 맑은 고음이 칠흑의 어둠을 가르고 아스라이 피어나는 새벽안개와 같다면 현미의 허스키하고 호소력 품은 ‘밤안개’는 애수와 도회지의 고독이 진득이 깔린 어둠 속의 안개다. 닿을 듯 잡히지 않는 꿈인양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허망한 안개의 존재는 이봉조의 생애를 응축한 상징과 같다.
이봉조는 음악가로 색소포니스트로 당대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한순간 명예와 부를 누린 인물이지만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쓸쓸한 말년을 보내며 외로이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것이 한순간 꿈처럼 사라짐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며 인간 존재의 허무를 가슴에 안고 안개처럼 사라진 이봉조. 하지만 한 숨 한 숨 색소폰에 담은 그의 열정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봉조의 대표곡 '안개'는 사실 '헤어질 결심'이 나오기 55년 전 개봉된 한국 영화에도 주제가로 쓰인 적이 있다. 김수용 감독이 작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심지어 제목까지 '안개'였다. 당시 정훈희가 녹음한 나긋나긋한 버전은 배우 윤정희가 작품 속에서 립싱크로 불러 처리됐다.
반면 박찬욱은 정훈희와 송창식이 함께 부른 듀엣 버전을 자신의 영화 마지막에 흐르게 했다. 그는 영화를 만들며 과거 송창식과 윤형주가 결성한 트윈폴리오의 '안개' 버전도 있었단 사실을 알고(이 사실은 영화에서도 직접 언급된다) 결국 두 버전을 한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 쪽을 택한 것이다.
듀엣 녹음을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는 박 감독은 녹음 현장에서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다고 하는데, 어쩌면 고인(이봉조)이 살아 그 현장에 있었어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나는 괜한 상상을 얹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