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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이승만의학살과 노무현의사과!
11. 06. 08. ~ 12. 04. 03. 아이엠피터 글 편집
제주도는 현재 제주도 이승만 별장을 복원하여 이승만 기념관을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역사 유물은 그 사람의 업적에 상관없이 보존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복원과 기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유명무실하게 낡아서 개보수가 필요한 이승만 별장을 수리해서,이승만 별장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저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이승만 기념관 건립은 절대 불가합니다.도대체 왜 제가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이승만 별장 복원이 아닌)반대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1947년 제주도 3.1절 기념식에 총성이 울립니다. 기념식에 참석한 양민들을 향한 경찰 발포는 제주 4·3사건의 시작이 됩니다. 그날 6명이 죽은 이 사건의 발단은 폭도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경찰의 위기감 뿐이었습니다. 이 발포를 시작으로 제주 전역에는 파업이 일어났고, 경찰과 미군정은 이들을 폭도로 몰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면서, 서북청년단을 앞세워 강경 진압을 하게 됩니다.
4월3일, 무장대는 한라산에 봉화를 올리고, 일제히 제주 지서 12개를 공격하였고, 이 사태는 1954년 9월까지 무려 6년 동안 계속됩니다. 여기서 무장대가 남로당 중심이 되었다고, 그동안 한국 현대사는 제주 4·3사건을 빨갱이 좌익분자들의 무장 봉기로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제주 4·3사건은 굉장히 복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일본에서 돌아온 귀향자에 대한 실직, 미군정의 폭정과 서북청년단의 횡포와 약탈, 그리고 부족한 생필품과 고물가, 친일 경찰의 변신 등, 수없이 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울린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남로당 무장대를 향한 토벌이 아닌 제주양민에 대한 학살이라는 증거는 3만여명의 피해자 중 33%가 노약자와 여성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 당시 자료를 보면, 무장대라고 잡혀 온 사람 대부분이 죽창이나 쇠스랑을 들고 있었고, 이들이 무장대에 합류한 이유는 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의 폭력과 횡포를 피해서 산으로 피신했다가, 잡혀온 경우였습니다.
우리가 양민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과 관계 없이, 폭정을 피해 도망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대부분은 좌익 사상을 가진 남로당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총과 칼이 무서워서 산으로 도망간 순진한 백성이었습니다.
해방이 되었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남과 북이 따로 정부를 수립한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되었는데 왜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 했습니다. 일본군이 도망가고, 미군이 들어왔는데 식량 사정과 물가는 치솟고 못 살겠습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먹을 것을 달라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빨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주 4·3사건의 본질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정치권의 분열과 제주도에 가해진 폭정, 그리고 서북 청년단의 무자비한 폭력과 약탈이 만들어지면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 속의 아이와 여성들이 어떻게 남로당원이며, 저들이 무슨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입니까?
그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요구했고, 독립된 조선이 분단되지 말고, 같은 나라가 되길 희망했던 사람이 무슨 죄가 있고, 얼마나 악독한 사상범이었다고 총을 쏘고, 칼로 목숨을 앗아갑니까?
제주 사건이 속칭 빨갱이들만의 무장 봉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최초 무장대 350명을 포함해서 최대500여명 밖에 무장대 병력은 없었는데, 사상자는 3만여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실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망했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그 이유는 양민을 학살하고, 바로 화장하여 동굴 속에 묻어 버린 사례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 당시 제주 사는 사람 10%가 사망했던,이 엄청난 사건의 주범은 과연 누구일까요?
제주 4·3 평화 기념관에도 선명하게 전시된 내용이 바로 이승만의 "가혹하게 탄압하라" 비공식적으로 "반항하면 제주도민을 다 죽여도 좋다"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즉,제주 4·3사건에서 무참히 제주도민을 살해 지시 명령을 내린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었습니다.
왜 이승만은 제주도민에게 이런 가혹하고 인간말종의 명령을 내렸을까요?
1948년 5월10일 제헌국회를 위한 총선이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열렸지만 문제가 되었던 단 2석의 선거구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제주도였습니다. 이승만에게 제주도는 소중한 국민이 사는 땅이 아닌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얼룩을 묻히고, 미국을 향한 그의 충성심에 수치심을 주었던 지역이었습니다.
가혹하게 탄압을 하고, 모두 싹 쓸어야 하는 곳이, 이승만이 생각한 제주도였습니다.
제주 4·3사건에 남로당이 개입한 증거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게 잡아도 천명 이내의 인물들만 체포,사살해도 되었지만, 물경 3만여 명이, 그것도 노약자가 30%나 포함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승만 정권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독재자이며 인간 사냥꾼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친일파로 구성된 정부, 그래서 그 정부를 지키기 위해서 반공을 부르짖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았던 이승만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국부이자 대통령이라 칭송을 받습니까?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제주 4·3사건에 대해 제주에서 정부 차원의 사과를 했습니다. 이는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동시에, 억울한 국민의 아픈 상처가 대통령에 의해 회복되는 대사건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그저 제주도민 위로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제주 4·3사건의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는 의지에서 시작되어 1999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조사는 2003년 3월 29일 조사위원회의 보고서 확정으로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토대로 제주 4·3사건이 국가 권력의 잘못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사과를 한 것입니다.
이승만 별장을 복원하는 일에는 별 의견이 없습니다. 독재자로 자신의 정권을 위해 국민을 죽였던
인물이지만 대통령이었다는 과거 역사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별장은 별장으로 그냥 깨끗하게 수리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념관은 절대로 안 됩니다.
이승만 기념관에 제주도민을 3만여명이나 학살한 주범이라고 써 놓겠습니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그 기념관에 써 놓고, 제주도민에게 보여 줄 것입니까?
제주 4.3 평화기념관 예산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데 이승만이 단 두 번 다녀갔던 별장을 복원하여 이승만 기념관으로 만드는데 20억 원을 지출하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다시 죽이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제주 4·3사건은 가해자를 찾아서 범죄를 추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민 그 누구도 가해자를 찾아 그들을 징벌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그들의 명예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잘못된 역사를 왜 우리는 그냥 지켜봐야 합니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고개 숙여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던 사실을, 우리 국민과 정치인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국가의 법에 따라 조사를 했고, 그 결과를 따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공평한 법으로 진실을 밝히고, 진실에 따라 대통령도 고개 숙일 줄 아는 나라.
이런 대한민국이 우리가 사는 나라의 기본이자 원칙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진실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살게 하고 싶습니다.".......................아이엠피터
<그리고 계속되는 아이엠피터의 글>
어제 마당에서 화단을 정리하다가 탄피가 나왔습니다. 저희 집은 근처에 군부대도 없고, 제주도라 6.25 전쟁을 겪지 않은 지역인데 탄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탄피가 나온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는 마을이 제주 4.3 사건 당시 지독한 격전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1957년 제가 사는 송당 마을에 한 남자가 체포됩니다. 그는 제주의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이 시작되고 계속된 토벌대에 의한 초토화작전으로 1956년, 대부분 빨치산이 토벌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원권은 귀순과 협박 압력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다가, 1957년 결국 송당마을에서 체포됩니다. 그의 체포로 제주에서 빨치산 활동은 막을 내립니다.
송당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중산간도로라고 합니다. 제주도는 해안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한라산 밑으로 마을들이 형성되어 밭농사 등을 재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그래서 도로명칭도 중산간동로 이런 식으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 희생자 지도입니다. 빨간색이 진할수록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지역입니다. 지금의 제주 공항 근처에 희생자가 많은 이유는 아래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중산간마을 부근은 희생자가 많은데, 오히려 제가 사는 송당마을은 이상하게 희생자가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마을을 전면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즉 송당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마을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마을은 대부분 소각되었습니다. 원래 송당마을은 상동,중동,하동이 있고 주변에 마을들이 많았던 대규모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큰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고 초토화되었습니다.
송당마을 왼쪽으로 희생자가 많은 색깔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개된 송당마을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오름 등으로 피신했다가 학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육지에도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마을을 소개하는 작전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지와 제주의 초토화 작전은 성격이 다릅니다. 육지는 어디로 갈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지만, 제주도는 말 그대로 섬입니다. 그래서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제주 해안가에서 떨어져 산간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평화롭게 살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거친 바다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 큰 부락을 유지했던 터전이 하루아침에 모두 초토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직도 제주 4.3사건을 좌익들의 무장봉기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논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말도 못하는 아기들이 좌익입니까? 그들이 빨갱이입니까? 제주 4.3 사건의 문제점은 좌익은커녕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무지하고 순박한 양민들과 심지어 아이들과 여자들이 대거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점입니다.
중산간마을이 소개되면서 남아 있던 마을 사람들은 빨갱이로 처형당하는 것이 무서워,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한번 입산자는 무조건 빨갱이로 구금,학살 당하는 일이 빈번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산으로 들어간 유격대장 김달삼과 토벌군 9연대장 김익렬은 점점 깊어져 가는 대립과 학살을 막기 위해 "4.28 협상"에 어렵게 합의를 합니다. 그 당시 합의 내용을 보면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행위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무장대와 김익렬 9연대장의 합의 내용을 보면, 합의를 하고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고 산발적 충돌까지도 이해하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무장해제와 하산이 주목적으로 이 협상안대로 하면 제주 4.3 사건은 조기에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렵게 합의한 이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4.28 평화협상이 순조롭게 합의되고 난 사흘뒤에, 제주 오라리 마을 민가 수십 채가 불에 탑니다.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경찰의 비호 아래 마을에 방화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왜 평화협상이 체결되었는데 방화를 했을까요? 바로 이 협상을 깨기 위해 조직적으로 방화하고, 무장 폭도가 자행한 습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미군정은 강력한 토벌 작전을 합니다.
순박한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김익렬 9연대장은 이 방화사건이 폭도가 아닌 우익청년단의 소행이라고 울부짖었지만, 결국 그는 9연대장에서 해임되고 제주도민 3만 명이 학살되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됩니다. 그 장본인은 미군정의 사주를 받은 박진경 연대장이었습니다.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 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제주 4.3사건의 본질을 말했던 김익렬 연대장의 이야기 |
무장대의 숫자도 별로 없고 대부분 민간인이었던 이런 상황을 미군정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전수행중인 지휘관의 보고도 무시하고 강경진압을 위해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시켜버렸습니다. 미군정에게 대한민국 국민은 죽여도 되는 그런 하찮은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제주공항 근처에 희생자가 많았던 이유는 바로 "정뜨르 비행장"라고 불렸던 이 지역에서 1949년 군법회의로 249명이 처형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에 불순분자로 분류된 양민 500여 명이 집단 학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국전쟁 전에 대부분 좌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주요인물들은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500여명의 사람이 불순분자와 좌익, 간첩이라고 잡혀왔는데,이들은 그저 좌익의 가족이나 입산자의 어린 아들,딸과 부인들이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본질은 좌익이 아닌 사람을 좌익이라고 명칭을 하고 심지어 그 가족까지 모두 죽였다는 엄청난 학살이라는 점입니다.
제주에 내려와서 제주 4.3사건을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근현대사를 공부함으로 대한민국이 어떤 역사적 잘못을 자행했고, 그 잘못을 반성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실수하거나 대립하지 않는 평화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주에서 육지로 유학을 가는 사람은 굉장히 똑똑하고 지식인 계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주에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제주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똑똑하고 용감했던 사람은 일제시대에 죽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그들의 자녀와 지식인은 제주 4.3 사건 때 모두 죽었다"
어제 마당 한켠에서 발견한 탄피를 보면서, 혹시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을 잡기 위해 발사되었던 토벌대의 총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원권이 잡혔던 곳이 제가 사는 송당마을 부근인데, 그는 초토화된 송당부근 자신의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오원권은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산에 들어갈 때 8개월이었던 아들이 지금은 10살이 되었을 것이다. 빨리 보고 싶다. 부친은 지금 83세다. 부친을 모시고 아들놈하고 농사나 지어 나가면서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
똑똑한 지식인은 일본군에 의해 죽고, 그나마 남아있던 지식인은 이승만과 미군에 의해 죽고
그 가족들은 아직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 친일파와 친미파가 아니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리는 세상이 아직도 자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발견한 탄피가 끝나지 않은 굴곡진 대한민국의 모순을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아이엠피터.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 제주도 4.3 사건 위령제에 한 번도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행사나 지역주민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대규모 행사에 대통령이 취임 이후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도대체 이명박 대통령이 제주도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주도 4.3 사건의 핵심 인물로 이승만을 저는 꼽습니다. 그것은 제주 4.3 사건이 그당시, 한국의 불안한 정치 현실과, 좌우익의 대립, 그리고 정권을 지키기 위한 한 남자의 야심에서 비롯한 사건이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이승만은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여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지켜냈습니다.
제주도 4.3 사건의 본질에서 우리는 또 한 명의 남자를 통해 한국의 보수 세력의 우스꽝스러움을 제대로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남자는 바로 유재흥입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잘 나가는 사람은 친일파가 대부분이었기에, 유재흥도 일본 육사출신입니다.
제주도 4.3사건이 터지고 1949년 3월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 지휘관으로 대령 유재흥이
내려옵니다. 유재흥 대령은 제주도에 내려오자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실시합니다. 3월12일부터 4월12일까지 유재흥은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과장되었다는 미군비밀문서에도 무장유격대가 250명인데 유재흥은 전과로 무장 유격대 2,435명을 살해하였고, 동조자는 무려 3.600명을 생포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임한 이후 한 달동안 올린 전과(?)라는 사실은 그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증거입니다.
제주도민을 학살하는데 탁월한 전과를 올렸던 유재흥은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정말 부끄러워야 할
업적을 올립니다. 바로 1개 사단 해체, 2개 군단 해체를 하게 만들고, 미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갈 수밖에 없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전작권을 미군이 가지고 갔던 이유가 바로 유재흥 때문이란 사실은 군인들이 치를 떨 만큼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6.25전쟁 당시 의정부를 뚫림으로 북한군의 서울입성이 단 사흘만에 가능케 하였고, 중공군이 오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군기 빠진 후퇴를 벌여 1.4 후퇴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 유재흥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그는 3군단장 시절에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누구나 숨기고 싶은 현리전투에서 사단장 통솔과 부대지휘를 하지도 않고 정찰기를 타고 후방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패전을 거듭하고, 부대 해체를 하게 만든 지휘관이었지만 저토록 승승장구했던 그가 바로 대한민국 보수 세력의 역사입니다. 이런 그가 전시작전통제권 반환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대한민국의 진정한 보수와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도는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주 4.3사건 당시에 한번에 학살된 집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 동네가 몽땅 한날한시에 끌려가서 죽었던 일은 제주에서는 너무도 흔한 사건이라, 제사를 한꺼번에 마을 전체가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주에는 유명한 관광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광지마다 제주도민들에게는 너무나 아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정방폭포, 다랑쉬오름만해도 그 안에 유골과 시체가 겹겹이 쌓였던 곳입니다.
문제는 제주도민들은 이런 아픔의 역사를 그동안 소리 내지도 못했었습니다. 제주에서 축제를 하며 즐겁게 웃다가,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자, 경찰이 출동했던 과거의 역사는 제주도민이 얼마나 한과 설움을 가슴에 담고 말도 못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제주도 4.3사건 희생자는 빨갱이였기에 누가 왜 죽었는지를 자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고, 지식층도 아닌 그저 평범하게 살았던 양민이고, 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주인들에게 제주 4.3사건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형제가 왜 죽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피맺힌 절규입니다.
제주도 4.3사건은 제주도민에게 반세기 동안 숨겨야 했고, 고통당했기에 제주도민 대부분은 정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 염원이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시작 노무현 대통령 당시 제주도민들에 대한 사과로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제주 4.3사건의 억울함이 바로 제주 4.3사건이 아직도 대한민국 모두에게 잘알려지지 않았고, 당시 제주도민을 학살했던 가해자 보수 세력들의 제주 4.3사건 흔들기입니다.
제주 4.3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한 번도 제주 4.3사건 위령제를 가지 않았고 내일도 가지 않을 예정입니다. 제주도에 이명박 대통령이 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에 제주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대구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주었던 제주 4.3사건의 사과를 더 이어나가
달라고 제주도민의 열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국방부는 제주도 4.3사건은 대규모 좌익반란이라고
규정하고 교과서의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국방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잇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제주 4.3사건 관련 예산은 계속 줄어들고, 제주 4.3사건 추념일 지정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그리고 대통령은 한 번도 오지 않고....
제주 사람들은 제주 4.3사건에 대해 흉하다고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제주
4.3사건은 숨겨야만 했던 과거이고, 숨길 수밖에 없는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주는 타지역에 비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살고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던 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주 4.3사건 당시에 서로를 죽여야 하고, 마을 사람끼리 고발을 해야 살아남았습니다.
아픈 역사는 아직도 제주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외지에서 들어온 가해자들은 제주 4.3사건이 빨갱이들이 벌인 일이라고 법원에 계속 제소를 하고 패소를 했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내 엄마가 왜 억울하게 죽창에 찔려서 폭포 밑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왜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물으면 안 되었는지 알고 싶었고, 그 일에 대해서 진실과 사과를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주도민들은 제주 4.3사건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원하지 않고, 보상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사는 나라의 대통령이 따뜻하게 위로를 해주고, 손을 잡아주길 바랄 뿐입니다.
국민에게 사과하는 대통령과 국민의 아픔 앞에서 웃었던 대통령
누가 국민을 사랑했던 사람인지, 우리는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오지 않는 대통령을 통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제주 4·3을 말하는자, 국가보안법으로 처단하라! |
제주에 살면서 제주 4·3을 말하는 이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금기어이자,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구속될 수 있는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면 ‘설마?’ 라고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1990년 치안본부 대공3부는 '제주민주항쟁' 관련 출판물을 발행한 출판사 대표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이적표현물 제작,배포등)으로 구속 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1989년 8월 서울지검남부지청은 제주 4·3을 '항쟁'이라고 규정한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서울 목동중학교 김맹규 교사를 국가보안법 등의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전교조 소속이었던 김맹규 교사의 구속 사건을 가지고 동아일보 등 언론은 전교조 교사들이 의식화 수업을 했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1997년 제주 4·3을 다룬 영화 '레드헌트'가 인권영화제서 상영불허를 받았습니다. 이런 불허 방침에도 인권운동가 서준식 씨는 서울 홍익대에서 열린 '인권영화제'에 상영을 했고, 정부는 '이적표현물'이라고 규정한 근거를 들어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를 적용하여 서씨를 구속했습니다.
'레드헌트'라는 영화는 당시 2회째였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차례나 상영했던 작품인데, 단지 제주 4·3을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상영불허는 물론, 상영했다고 구속까지 됐던 것입니다.
1979년 제주 4·3을 다룬 소설이 나왔습니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순이삼촌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신군부에 의해 보안사에 연행돼, 남산 서빙고에서 사흘 동안 온갖 모욕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순이삼촌은 불온서적으로 금서가 됐습니다.
(참고로 제주에서 '삼촌'은 동네 아주머니,아저씨를 지칭하는 것처럼 동네 먼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을 말합니다.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하기 때문에 순이 삼촌도 주인공의 이웃 아주머니를 말합니다. 순이삼촌은 제주 4·3 학살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아 정신적 후유증으로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자, 국가 권력에 의해 어떻게 한 인간의 영혼이 파괴되는지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주 4·3을 표현한다는 것은 국가보안법으로 엄히 다스릴 범죄였으며, 이는 수십 년 동안 제주 4·3을 말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가족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연좌제라니!! |
제주는 유난히도 조작간첩 사건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했습니다. 그것은 4·3 당시 혹독한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한 사람이 많았고, 도피한 재일교포와 그 가족을 조작간첩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사례가 '조작간첩 강희철' 사건입니다.
'강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지난 75년 부친이 있는 일본 오사카로 밀항했다가 81년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한국으로 송환됐다. 강씨는 부산 보안수사대에서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86년 4월28일 경찰에 연행돼 85일 동안 불법감금된 상태에서 수사를 받은 뒤 관공서와 기관, 학교 등의 위치를 북한에 알렸다는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강씨는 12년 동안 복역한 뒤 지난 98년 8·15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한겨레 신문 2006년)
제주지방법원은 2008년 재심을 통해 강희철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연좌제는 예전 역모를 처벌하기 위해 삼족을 멸한다는 유래에서 시작된 제도입니다. 사실 연좌제는 1894년 대한제국의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으나, 공식,비공식적으로 연좌제는 계속 대한민국 사회에 통용됐습니다.
2000년 제주 4·3 도민연대는 '연좌제 피해관련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 놀랍게도 응답자의 86%가 연좌제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신원조회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의 감시, 사관학교와 공무원 임용시험 등에 피해를 겪었다는 이 설문 조사가 2000년까지 나왔던 결과는 제주 4·3이 얼마나 제주도민들을 족쇄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녔는지를 보여줍니다.
제주 4·3을 조사하면 할수록 이것은 만행이자 학살이라는 결론밖에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젖먹이들이,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이 그리고 여자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죽창에 찔러 죽어야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죽어야만 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을 빨갱이라고만 부를 뿐이었습니다.
빨갱이 새끼……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침뱉고 발길질하고
그리고 아무나 찢어죽여도 좋은 빨갱이 새끼였던 것이다.
나는 왜 빨갱이 새끼로 태어났을까.
그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없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뱉는 빨갱이 가 되어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풀기빠진 헛바지처럼 주늑들게 만드는것일까...
(김성동, 「엄마와 개구리」중에서)
아직도 끝나지않은 상처!! |
제주공항이 보이는 벌판에 제주 4·3 당시 학살당한 양민을 발굴했던 시점의 사진입니다. 저 멀리 제주공항이 보이고 포크레인을 동원한 대규모 발굴에서 수백 구의 유골이 나왔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제주 전역에 이렇게 발굴되지 않은 유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불과 김대중 대통령이 있었던 시기에도 제주 4·3이 해결되지 않아 제주도민들은 돈을 모아 특별법을 제정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이런 아픔과 한을 풀어준 사람이 바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1999년 제정됐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라며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이런 두 대통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제주4·3을 빨갱이들의 반란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 발생하여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이영조 전 새누리당 후보, 전 진실화해위 위원장)
새누리당의 박근혜 위원장을 박정희 독재의 유산이라고 부르자, 연좌제라고 들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좌제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지, 어찌 독재자가 국민에게 뺏은 재산과 정치 유산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입에 올릴 수 있습니까?
새누리당 박근혜 위원장은 제주에서 겨우 50분만 있다가 갔습니다.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는 오늘 제주4·3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참석합니다. 누가 제주도민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뻔한 사실입니다. 그녀에게는 이명박 대통령처럼 제주4·3 위령제에 올 마음도 필요성도 못 느낍니다. 그것은 그들이 빨갱이 타령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속성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공동체가 멜싸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말이야. 이념적인 건 문제가 아니야. 거기에 왜 붉은 색을 칠하려고 해? 공동체가 무너지고, 누이가 능욕당하고, 재산이 약탈당하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친구가 고문당하고, 씨멸족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쟁이란 당연한 거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현기영 작가)
노무현 대통령은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하며,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위원장은 제주도민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비가 이승만처럼 독재권력을 휘둘러 자신의 권좌를 지켰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제주에는 조상이 다른 일백 서른 두 명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조상은 일백 서른 둘이요 자손은 하나다'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동네 사람들이 한꺼번에 학살당했던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단어입니다.
대통령을 잘 만나면 수십 년간 빨갱이로 몰렸던 억울함이 풀리고, 대통령을 잘못 만나면 멀쩡한 국민이 빨갱이로 둔갑돼 죽창에 찔려 죽고, 불에 타 동굴이나 구덩이에 묻힙니다.
역사가 알려준 이 교훈을 제주도민들은 이번 총선과 대선에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주4·3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첫댓글 우선 사진이 안 보입니다 시라소니가 이 일에 개입 했다고 하면 서북 청년단원으로개입 해께네요 글쎄요 시라소니 개입여부 난 아직 잘 모르게네요 시라소니는 그냥 싸움꾼이지 남에게 지시 받고 할 사람이 아니라는것 그리고 현재 기득권 가진 친일역적 그들의 뜻에 위배 되면 무조건 종북 이고 빨갱이 입니다 진짜 빨갱이는 민족주의나 합리적인 사고 행 하면 빨갱이라고 합니다
서북지역(황해도.평안도 특히연백평야)해방전 친일지주 또는 마름들) 출신들 특히평양기독교 친일세력을 죄외하고는 모든논란은 한낫개소리에 불과합니다.
제주 4.3 항쟁사건 당시에 7살 9살 어린이가 빵갱이라서 죽이고 얼굴 잘 생긴 처녀는 당시의 진압군에 몸 주면 살고 안 그럼 빵갱이라 죽이고 진압군 작전장교인가 이름은 잊어지만 이 놈이 마약 중독자라서 하루에 한명씩 안 죽이면 잠 못 잔다는 정신병자들이 많았음
서북청년단과 시라소니는 전혀 관계없는걸로 알고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