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헬로우! 남경
(남경 현무호에서 한 컷)
올해 두 번째 향하는 중국. 5월에 시안을 다녀왔었다. 그리고 이번에 택한 남경. 중국을 열 번 넘게 다녔는데 역사적으로서나 의미로서는 그만인 시안을 여직 안 간 것은 시간을 벌며 아껴 둔 것이란 표현이 맞다. 중국을 어느 정도 안 후에 가는 것이 온당하다 싶었다. 그만큼 가고 싶었던 곳이 내게는 시안이었다. 그 덕분에 비록 4박 5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중국의 3천 년 역사를 두루 느꼈고 진시황이란 걸출한 위대한 폭군을 진지하게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택한 것이 남경 여행 4박 5일이다.
긴 가래떡을 뽑아내듯 ‘진시황 시대 탐구’라는 역사 기행 글 집 초안을 막 끝낸 터라 긴장으로부터 돌파구가 필요했다. 사실 비행기 표를 석 달 전에 예매해 둘 때는 진나라로부터 바톤 터치로 초한지를 염탐할 목적이 컸다. 그래서 작정한 곳이 남경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방과 항우 그리고 한신이란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제일 가까운 공항이 바로 남경이다. 남경에서 회안으로 버스를 타면 한신의 고향이 나오고 또 숙천을 가면 황우가 그리고 패현을 가면 유방이 있다. 그런 연유이기에 정작 남경은 내게는 기착지에 불과한 곳이었다.
오가며 그냥 거치는 남경쯤으로 생각해둔 것이다. 그런데 입장이 급선회했다. 몇 개월간 진시황의 학정에 시달리다 보니 초한지고 뭐고 여행길에 오를 때 쯤은 너덜너덜해져 그냥 편하게 쉬고 싶었다. 뭐든 집착하고 진을 빼면 지친다. 누구든 늘 긴장해서는 살 수 없는 노릇, 소인배의 몇 달의 노고가 그럴 진 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처지로 수십 년간 큰 땅덩어리 아우르며 자리 보존한 진시황은 정말 위대한 폭군임에 틀림이 없다. 나 같으면 하라도 안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불로초에 흥청망청 취하고 환락에 빠지는 것도 이해할 만도 하다. 스트레스 풀고 중심을 잡는다는 게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 폭군의 집념과 열정 덕에 후세들이 빛 보고 관광의 번영을 천대 만대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서안(시안)은 축복받은 땅이다. 하지만 남경은 그렇지못하다. 비련의 여주인공같이만 느겨진다.
아무튼 들러리 남경에서 졸지에 홀가분한 쉼의 곳으로서 대변신한 남경인 것인데 그만한 즐감의 장소가 되어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앞선다. 광고물에 남경을 그럴듯하게 소개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관광길에서 늘 마주치는 우리나라 말과 똑같은 행선지는 흡사 각색된 연극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홀가분함에는 자연스러움이 제맛이다. 거기에 기대를 아예 안 하니 한층 더 남경으로서는 유리할 것이다. 흥행은 어쩌면 대박이 될 수도 있다.
드디어 2019년 10월 12일, 3인은 길을 나섰다. 3인 모두 다닌 직장은 같은데 태생 다르고 색채 각각인 3인이다. 3인 3색 과연 우리는 과연 동색이 될 수 있을까. 이번 남경길은 모두 초행이고 이렇게 모인 3인 조합도 처음이다. 1인은 연장자로서 정사(우두머리) 겸 화공(사진 전문/ 종전 직업은 저명한 원자력 박사)으로서 이번에는 마두 역할도 어쩔 수 없이 겸해야만 한다. 또 1인은 부사겸 재정관으로서 우리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워낙 꼼꼼하고 알뜰살뜰해 돼지고기 한 점 제대로 얻어먹을 수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그런 사람이다. 알다시피 중국에는 열병으로 현재 돼지가 씨가 말랐다. 그리고 바로 내가 그들을 쫓아 쫄쫄 쫓아 나선 형국이다. 굳이 내 소개를 하자면 중국은 열 댓번 다녀오긴 했는데 중국어는 하나도 모르는 사나이다. 굳이 사나이라 표현한 것은 무데뽀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나는 큼지막한 숫자만 박힌 계산기 하나만 달랑 들고 다닌다. 여행은 무전취식이 아닌 바에 돈 쓰러 다니는 길이다. 얼마요? 나는 말 대신 계산기를 들이민다. 그럼 상술에 도가 튼 중국인은 물어볼 것도 없이 좌판을 세차게 두들긴다. 그러면 나도 이에 질세라 깎은 금액을 누른다. 그렇게 왔다갔다 몇 번 하다 흥정이 맞아 떨어지면 둘 다 웃음이 나온다. 만인의 공통어가 웃음이 아닌가. 나는 이것이 여행의 참맛이라고 말한다. 말로 소통이 가능하다면 재미가 없지 않을까. 이번에도 나는 계산기를 지참했다. 그야말로 이것은 만인의 소통도구다.
내가 수많은 여행길에서 느낀 것 중 중요하다 싶은 하나는 운이라는 거다. 운을 잘 타고 나야 한다고들 하지만 여행처럼 운에 좌우되는 경우도 없다. 운동회 때 비 오는 그런 지독한 풍광이 불운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나는 그러기에 여행 전 반드시 운기조식을 한다. 한 마디로 이번 여행 잘되어달라고 비는 요식행위와도 같다. 그것만 믿는다고 제대로 될까. 준비도 철저해야 한다. 어디로 갈 지에 대해서는 치밀한 정사 나리가 알아서 해주기로 했으니 별문제가 없다싶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마음가짐이지 싶다. 화난 일이 있어도 웃자. 힘들어도 참자. 그리고 희생과 배려. 그렇다고 해도 다가올 일들은 미지에 예측불허인지라 나머지는 운에 기대 볼 수밖에는 또 없다.
이상하게 첫 일이 매끄럽게 잘 풀리면 거듭 잘 풀리는 것 같고 그러면서 매사 순조로워진다 싶다. 일진이 안 좋으면 거듭 애를 먹인다 싶기도 한 것이 다 우리의 운에 걸린 일상이다. 이사 가는 집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선사하는 것이 바로 술술 잘 풀려라! 하는 강조성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 첫 번 째 단추가 잘 꿰진 것도 같았다. 7시 40분 시간 맞춰 대덕문화호텔 앞에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는 짐칸에 가방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방을 넣는 사람들이 우리 밖에 없고 공항을 갈라치면 으레 기사가 내려와 안내역할을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순간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역시 아니었다. 그냥 서울로 가는 버스. 체면 챙긴답시고 그냥 올라탔다면 아마 우리는 서울 강남에 하차했을 것이다. 물론 남경도 강남은 맞다. 중국이라서 그렇지. 우리 문화 속에 전해져 오는 강남 즉 ‘강남 갔던 제비’라든가 ‘친구 따라 강남간다’ 등에서의 강남은 서울 한강 남쪽이 아니라 ‘중국의 강남 지역’ 즉 양자강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을 숭상하던 조선 시대 사대부들에게 있어 중국의 강남이란 곳은 너무나 살기 좋고 풍광도 아름다운 마치 이상향과도 같은 곳으로 인식되어졌기에 우리 문화 속에 ‘강남’이란 단어가 뿌리를 내렸다. 그러니까 그 시대 중국 강남은 1970년대의 우리가 말하는 미국 뉴욕과도 같은 곳이었다. 비행기 타는 것도 언감생심이던 그 무렵 뉴욕에서 거주했거나 또는 다녀왔다는 말만 해도 우와, 저 친구 진짜 대단하다고 쳐주던 그런 풍조가 있었다. 왜 강남이라 하면 소위 끝내주는 곳으로 알려지게 된 것일까? 중국에선 강남이라 하면 으레 연우강남이라 말한다. 안개 자욱하거나 아련하게 서리고 실비 보슬보슬 내리는 강남땅이란 말이다. 오늘날 화이허 남쪽과 양자강 일대의 저습지인 쑤저우나 자싱, 항저우와 사오싱 등지를 예로부터 중국에선 강남이라 했던 것이다.
이 지역은 양자강 하류로서 고온다습한 벼농사 지역이며 일대 전체에 수량이 풍부하여 연못과 늪이 많은 지역이다. 그러니 안개가 잘 낄 것이고 비도 잦은 곳일 수밖에 없다. 수묵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 연무 보얗게 서린 촉촉한 풍경, 강 위로 배 한 척이 한가롭게 떠있는 그림은 바로 중국 강남을 묘사한 것이다. 중국 수묵화에 강남 풍경이 자주 그려진 이유는 중국인들이 그만큼 강남을 동경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중국인들은 강남을 그토록 동경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수도 베이징이 위치한 중국 북방 일대 정확히 말하면 화북 지역은 무척이나 건조하고 비가 드물어서 당연히 안개 낀 풍경을 보기 어려웠다는 점, 아울러 북방은 밀이나 수수와 같은 곡식을 수확하는데 강남 일대의 벼 생산에 비하면 그 수량이 현저하게 적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기에 화북 지역 사람들은 감기나 폐 기관지 질병에 잘 시달렸고 식량 사정도 사실상 강남 일대에서 나오는 쌀을 북쪽으로 운반해서 먹고 살았다. 그러니 화북 지역 사람들에게 강남 지역은 그야말로 공기 습윤하고 경치도 좋으며 식량도 풍부한 이상향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게다가 강남은 소주의 바단은 맑할 것도 없고 특히 여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른바 항저우 미인이 그것이다. 진시황도 순시 한답시고 미녀에 빠져 머물다 돌아오는 길에 객사하지 않았던가.
중국 사람들이 이처럼 강남을 좋아하다 보니 조선 시대 모화사상에 젖어있던 우리나라 사대부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중국 강남에 대한 강한 동경심을 품게 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암은 열하에서 자칫하다가는 청나라 황제로부터 문책을 받을 상황(라마교의 핀첸라마를 만나라는 엄명, 당시 조선은 불교를 금해서 만나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이다.그래서 연행단은 안 만나려고 버텼었다)에 그렇다면 나는 저 아래 귀주땅으로 귀양가면 좋겠다고 오히려 헤벌레 했었고 가보지도 않은 진강에 금산사를 얘기 주워들어 이런 곳이다 하고 써놓을 정도로 관심이 극에 달했었다. 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조선 시대에 중국 강남을 실제로 다녀온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일례로 중국에서도 인정했던 일류 명사 추사 김정희, 다시 말해 해외 물을 많이 먹었다고 알려진 그 양반마저도 베이징을 한 번 다녀왔을 뿐 중국 강남을 돌아볼 기회는 없었다. 최부 선생이 제주도에서 험한 바닷길에 표류하다 얻어걸려 그야말로 좋은 구경하고 온 격이다. 조선의 동지사등 연행단은 주원장이 개원한 명나라 수도인 남경을 영락제가 북경으로 옮긴 것에 대하여 속으로는 엄청들 욕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삭막한 북경(당시는 연경이라고 불렀다) 보다야 자연경관 수려한 강남이 백 번 낫지,
그러게 최부 선생은 아예 강남과 강북의 비교표까지 만들어성종 대왕한테 보고 했었다. 중국인들 조차도 말만 꺼내면 강남 경치를 떠들어대는데 정작 가볼 수가 없는 곳이 중국 강남이었기에 더더욱 강남이란 곳은 부풀려지고 뻥튀기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저 강남 경치를 담은 수묵화나 보면서 ‘아, 이렇게 멋지단 말인가!’ 하고 탄식이나 했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었다. 권력을 쥔 사대부들이 중국 강남을 동경하다보니 그것이 아랫것들에까지 이르면 그야말로 중국 강남은 천국 그 자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리 문화 속에 강남이란 개념 혹은 단어가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강남제비는 정작 겨울에는 강남이 아닌 훨씬 더 남쪽인 베트남이나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 일대에서 겨울을 난다. 그럼에도 중국 화북 지방 사람들이 제비가 겨울이 되면 중국 강남 지역으로 갔다가 춘삼월이 되면 돌아온다고 한 것은 가고픈 곳의 기다림과도 같은 마음을 듬뿍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강남도 지금은 그 시절 꿈에 그리던 기다림의 땅 마냥 땅 값 비싼 살고 싶은 일번지가 되었다. 바로 우리가 조선선비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진짜 강남을 보러 가는 것이다. 서울 강남 행 차가 떠나고 1분 정도 지나 또 다른 버스가 왔다. 一瞬, 바로 우리의 一顺은 순탄했다. 그렇게 무난히 우리는 인천공항을 빠져나갔다. 곧 남경이다. 우리는 과연 순탄한 여행을 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