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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
일제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31회 총회를 끝으로 해산시키고 1943년 5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조직했다가 해방직전인 1945년 7월에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기타 군소교단을 모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한다. 일본은 이미 교파교회를 극복하고 <일본 기독교단>을 출범시켰기 때문에 일제가 강제적으로 한국 교회를 일본 교회 산하에 두려고 한 것은 문제지만 교단연합체를 만든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해방 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해산하고 남한 중심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회 성격인 <남부대회>(1945년 11월 정동교회)를 소집했다. 남부대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데 하나는 '남부'라는 지역적 명칭이다. 이들은 통일 이후를 고려해서 한국 전체를 대표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의 잔재이기는 했지만 교단연합이 중요하다고 보고 장로교 감리교 연합체 성격의 총회를 이어나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1회 남부대회가 개회되었을 때 감리교 대표들은 감리교를 재건하겠다고 퇴장함에 남부대회는 실패하고 말았다.
1946년 6월 12일에는 서울에서 장로교 총회가 소집되는데 남한만의 총회이기 때문에 <남부총회>라고 부른다. 27회 총회에서 가결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 것도 이 때였다. 1947년 2차 남부총회에서 첫 남부총회를 1942년 31회 총회를 이은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32회 총회>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또한 전쟁중인 1950년 총회는 건너 뛰고 1951년 총회를 36회로 하면서 올해 2015년이 제100회 총회가 된 것이다.
교단명칭은 1949년 4월에 <대한예수교 장로회>로 개칭되었고 그 해 장로회 신학교도 다시 시작하게 된다. 한국 전쟁 후 학교명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로 굳히고 장로회신학교 신축을 위해 옛 조선신궁 부지를 불하 받기 위해 교섭을 해 오던 중 1959년 학교 재정 3천만환의 사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장 박형룡을 선의의 피해자로 보는 박형룡파와 비 박형룡파가 대립하게 된다.
결국 이 싸움은 에큐메니칼파와 NAE(세계 복음주의 협의회)파의 싸움으로 비화되었고 에큐메니칼 진영은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열었고 NAE 계열은 1959년 11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열면서 통합(에큐메니칼)과 합동(NAE)측이 분립된다. 통합 합동 모두 1912년 장로교 총회의 적자임을 주장함에 따라 올해 100회 총회를 연 것이고 장신 총신 모두 평양신학교의 적통을 주장하는 터에 두 학교는 지난 2001년 개교 100주년 행사를 열었다.
굳이 기장 마저 100회를 사용할 것 까지야
1940년 4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지금의 한신대 전신인 조선신학원이 개원된다. 해방후 1946년 남부총회(결과적으로는 32회 장로교 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의했다. 평양신학교의 재건에 회의적이었거나 남부총회라는 이름의 직영신학교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즉 남부총회가 조선예수교 장로회로 개칭된 33회 총회(대구 제일교회)에서 조선신학교 학생 51명과 김재준 교수에 대한 진정서가 접수된다. 1948년에는 당시 화려한 교수진을 자랑하던 조선신학교가 정규대학 인가를 받게 되지만 총회는 오히려 1949년 35회 총회(새문안 교회)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가결하고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합동 위원회를 조직한다.
그러나 전쟁중인 36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직영을 취소하고 이듬해 37차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졸업생에게 목사 안수 금지를 결의하고 김재준 목사 목사직 제명을 지시한다. 이로써 1953년 38회 호헌총회를 열고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분립하기로 선언한다. 한국기독교 장로회는 이렇게 출범하게 된 것이다.
총회에서 부당하게 대접받고 법을 지키자는 38회 호헌총회가 기장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장이 가진 개혁성을 감안하면 그들은 새롭게 총회를 시작했어야 했다. 이것은 기장이 한국 장로교의 적통을 이을 자격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친일과 신사참배, 근본주의로 점철된 한국 장로교 100년의 역사가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총회 회수를 이어 가기로 결정했냐는 것이다. 고신이나 대신측이 새롭게 회기를 사용한 것을 보면 기장이 1912년 첫 장로교 총회의 회수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장면이다.
고신 총회 65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옥고를 치른 한상동, 주남선 목사, 손명복, 조수옥 전도사 등이 해방 이후 출옥하면서 이들은 이전의 역사를 훼절의 역사로 한국교회를 재건하기로 한다. 그 일환으로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를 개교했지만 34회 총회가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노회가 추천서를 줄 수 없다'고 결의하자 분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1951년 36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 총대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2년 37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와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관계가 없다는 총회측의 재확인에 따라 경남 노회는 총회와 결별하고 제 1회 총노회가 경남 진주에서 소집되는데 이 때부터 고신의 회기는 시작한다. 그래서 올해가 65회 총회가 된다.
1955년 부산 송도에 고려신학교의 건물을 신축하는데 그것이 지금 고신대학교의 모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은 과거의 잘못된 전통과 단절하고 한국 장로교를 재건했다는 이유에서 100회 회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대신 교단은 왜 50회?
대신(대한신학교의 줄임말. 지금의 안양대학교) 교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치선 목사를 빼 놓을 수 없다. 1944년 서울 남대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치선 목사는 조국의 현실을 보고 항상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렸으며 김목사의 열정 때문에 남대문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해갔다. 1948년 김목사는 남대문 교회 안에 '장로교 야간 신학교'를 개교하는데 이것이 대한신학교(현 안양대학교)의 모태가 된다.
1950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대한신학교로 교명을 변경한다. 대한신학교는 신학 자체 보다는 성경공부와 전도에 관계된 과목이 많았고 심지어는 영농법과 침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과 미국 유학출신의 신학박사 김치선의 결정 치고는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중 피난가 있다가 1953년 말에 서울로 돌아 온 김치선 목사는 창동교회를 개척하는데 남대문 교회 교인들이 많이 옮겨 왔고 이 중에는 '박태선 전도관'(현재의 천부교)의 박태선도 있었다. 그는 김치선의 수제자에 가까웠는데 처음에는 김치선목사와 함께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니다가 결국 이단의 길에 빠져들게 되었다.
1959년 통합 합동이 분열되었을 때 대한신학교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교단이 없는 신학교는 폐교할 수 밖에 없다는 정부 방침 때문에 김치선 목사는 근본주의 기독교 단체인 I. C. C. 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의 마두원(P. R. Malsbury)목사(미국 성경장로회 소속)와 관계를 맺고 대한예수교 성경 장로회라는 교단으로 대한 신학교 강당에서 1961년 6월21일 제1회 총회를 개최하고 총회장으로 선출된다.
교단 초기에 총회는 정례적으로 열리지 않았고 김치선 목사가 별세하자(1968년 2월 26일) 1968년 3회 총회에서 I. C. C. C 탈퇴를 결정한다. 이어 1969년 6월 4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장 측으로 개칭 했다가 1972년 4월 7회 총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대신)로 개칭한다. 이후 총회는 연례적으로 열려 올해 50회 총회를 열었다.
백범 김구 선생과 김치선 목사의 관계는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백범은 남대문 교회에 출석하면서 김목사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백범의 아들 김신(6대 공군 참모총장)의 결혼 주례도 김치선 목사가 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김치선 목사는 이승만의 미움을 받아 새벽에 들이 닥친 경찰들에게 연행된 적도 있었다.
반면 대신측의 지난 회기 총회장인 이른바 '빤스 목사'인 전광훈은 교단 창설자의 이러한 역사를 모르는 듯 이승만 바로 세우기에 열심이다. 그는 서세원을 감독으로 하는 이승만 영화 제작을 위해 모금에 나서기도 했다.
대신교단은 신학교의 이름이 교단에 사용될 정도로 김치선 목사의 영향력이 절대적인데 전광훈 목사를 보면 이제는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고신측과 대신측이 기존의 장로교 역사와 단절하고 새로운 역사를 써나간 사실은 분립의 과정이야 어쨌든 자신들의 색깔을 내세웠다는 측면에서 인정해 줄만하다. 통합 합동은 그렇다고 해도 기장까지 꼭 1912년 1회 총회를 계승한다고 고집해야 했을까? 다시 묻고 싶은 질문이다.
편집부 / <뉴스 M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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