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16(월)
전주 막걸리 이야기를 쓴다고 한 지가 벌써 2년이나 지났다
사진만 찍어 놓고...
오늘 갑자기 쓰려니까 완전 용두사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쨌건....
지금부터 내가 쓰려는 전주 막걸리의 역사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자료까지
수집하고, 어른들의 고증을 듣고, 검증하고 하는 등등의 그런 거창한 역사가
아니고 단지 순수하게 내가 겪어본, 내 세대의 막걸리 이야기이다.
나는 전주 다가산 밑의 서완산동 552번지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를 들어 갈
무렵 전동과 교동의 경계인 전동 1가 233번지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간 집의 대문 바로 앞에는 주인을 구하고 죽었다는 충견의 개비석이
있었고 그 비석은 나중에 중딩, 고딩 말 짓 하고 다닐 때 늦은 밤, 담 넘어가는
발판으로 아주 유용했다.
우리 집은 318평이었는데 선친께서 풍수학상 집터가 아주 쎄다시며 100여 평에
안집과 정원을 조성하고 나머지는 건영정기화물에 임대를 줬다.
화물차의 그렁거리는 엔진 소리가 집터를 눌러 주기 때문에 좋다고...
그래서 차들이 담을 들이받아 넘어지고 금이 가도 그러려니 하고 아주 관대하셨다.
우리 집의 맞은편은 전동과 교동을 나누는 성당골목이 지금의 한옥마을 경기전 정문
앞으로 이어져 나 있고 나는 중앙초등학교를 그 골목으로 다녔다
무슨 서론이 이렇게 기냐면 우리 집이 위치해 있는 이 곳, (‘동양당약방 사거리’에서
‘건강탕 사거리’) 약 170m 사이에 막걸리집이 제일 많을 때가 12 곳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던 1968년 12월 5일이 내가 초등 6학년 때이다 초딩 때는 술에
관심이 있었던 시기가 아니라서 정확한 기억이 없고 가출을 즐기던 중 2, 2학기 때부터
약간씩 술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기억의 시작은 부근 왕대포집으로부터인데, 정기화물의 구루마꾼들과 남부시장의
좌판 장똘뱅이 손님이 많았던 관계로 막걸리 집은 잔술 파는 왕대포집이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동양당약방 사거리에서 본 예전의 막걸리 골목
저 칠성건재는 나 중딩때부터 있었으니 50년은 족히 되었네...
칠성건재 쥔 양반... 이 골목에서 몇 남지 않은 옛사람~
건강탕사거리에서 본 막걸리 골목.... 좌측의 인물이용원도 칠성건재와 더불어 제일 고령 가게이다
인물이용원의 윤수형도 한우물을 판 사람이다
머리감기는 꼬마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곳에서....
그 후 고딩 때는 막걸리집의 패턴도 순 왕대포집에서 진일보 한 듯 보였고
나도 떳떳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단골집도 생겼다
내가 좀 걸져 보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미성년자 단속이네 술 판매 금지네
그런 게 아예 없었다.
내 고딩 때 단골집은 우리 집 바로 앞의 ‘봉동집’이라는 막걸리집인데
이 블록에서 유일하게 아가씨, 그러니까 작부가 있었던 집이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야말로 작부라는 낱말이 전형적으로 어울리는 박양이 있었고,
앳돼 보이지만 눈썹을 길게 붙이고 화장을 짙게 한, 이름이 경아인 임양이 있었다.
몸은 호리호리 한데 가슴이 엄청 컸었다
이때의 아가씨들은 손님에게서 팁을 받는 게 아니고 주인으로부터 월급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한 자리에 고정으로 앉아서 시중을 들기보다 기분에 따라 좌석을 옮겨 다녔다
물론 손 큰 단골에게는 예외였지만...
어리고 돈도 없는 빈대였지만 그래도 내가 가면 임양은 나에게로 오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흐흐 큰 착각이었을까?)
예전의 우리집... 지금은 남문교회의 주차장이 되었다
그리운 봉동집 자리...
이때는 모든 막걸리집이 탁자가 있는 게 아니라 일자로 뻗은 시멘트 직육면체,
일명 다이가 주방과 손님 의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형태였다 규모가 좀 큰 곳은
그 다이가 기역자로 된 곳도 있고...
나중에 좀 세련된 막걸리 집은 시멘트 위에 타일을 입히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막걸리집이 겉으로는 비슷비슷 했지만 약간 성격이 다른 점이 있기도 했다
가령 안주가 지금과 비슷하게 걸게 나오는 집도 있었지만 가운데 젓갈이나 짠지 통을
두어 개 놓고 공동으로 먹게 하면서 왕대포를 아주 싸게 파는 곳도 있었고, 몇몇 곳들은
주인이 주모 역할도 아가씨 역할도 겸하기도 했는데 이런 집들은 파장하는 시간이 들쑥날쑥
하기 예사였다
지금 유일하게 하나 남은 버들집
14. 8. 6에 찍은 사진은 칠성건재였는데...
14. 12. 21에는 편의점으로 바뀌어 버렸다
몇십년을 바뀌지 않았는데 한옥마을 때문인가 광속으로 변해간다
내가 고 2때인가?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니는 4살 터울의 이종사촌형이 친구 3명과 왔었다
그때 구루마집(현재는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뀌고 장소도 바뀌어 남부시장 쪽에 간판이 걸려있다)
으로 안내를 하여 술을 마신 적이 있었는데 이 안주들이 다 공짜냐며 감탄을 연발하던 기억이 난다
‘건강탕 사거리’를 지나고 지금의 한옥마을 학인당을 지나고 교동집 사거리를 지나고
30~40m를 더 가면 좌측으로 ‘향촌주장’이라는 막걸리 제조장이 있었다
그 주장에서 이 부근 막걸리를 모두 대 줬는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짐자전거에
한 말(20리터)짜리 막걸리 통을 뒤에, 양쪽 옆에 거의 10여개를 매달고도 거뜬히 타고 가는
주장 배달꾼이 모습이다
그 때는 지금 같이 막걸리가 병으로 나오는 게 아니고 통으로 가져다주면 독아지에 받아서
잔술로 혹은 주전자에 담아서 팔았었다
십여 개 넘는 막걸리집들 중 내가 잘 갔던 집들을 떠올려 보면 단연 ‘봉동집’이 첫 번째고
‘구루마집’'총각집’ ‘현집’ 등등 인데 이 중 ‘현집’은 거의 90년대 초반까지 많은
단골들의 사랑을 받으며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물론 80년 초중반을 지나면서는 주종은 막걸리에서 소주나 맥주로 바뀌었지만...
70년대 중반 ‘봉동집’에 있던 임양이 자리를 옮긴다.
전주에서는 풍수 지리적으로 충을 맞아 좋지 않다는 지역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광주에서부터 출발하여 정읍을 지나 곧장 밀고 올라오던 기운이 구도청(완산경찰서 앞)를
통과하며 극에 달했다가 팔달로에 와서 딱! 막혀버린다
막히는 이유는 뒤편에 경기전이라는 조선 태조어전을 모신 유적지가 있기 때문인데 이유야
어떻든 풍수에서는 흉지로 보는 이런 위치에 술집이 생겼는데 임양이 이리로 옮긴 것이다
한 주인이 두 개의 술집을 열었는데 ‘만날때’란 약주집과 ‘정화집’이라는 막걸리집이다
들어가는 입구도 다르고 안에 홀도 따로 인데 뒤쪽 주방과 화장실은 붙어 있다
두 군데 모두 아가씨들이 여러 명씩 있었다.
길 건너 중간 쯤...
인연이 '정화집'자리이고... 옆 퀄트집이 '만날때'였었다
더듬어 보면 약주는 한 되에 350원을 받았고 막걸리는 150원을 받았다
물론 약주 안주와 막걸리 안주는 차이가 많이 났고,
우리야 약주는 엄두도 못 내고 주로 막걸리만을 마셨는데 그 한 되라는 것이 1.8리터 한 되가
아니고 째를 좀 낸 작은 스텐 주전자에 내왔는데 그 양은 1리터 남짓이나 되었다
그나마도 몇 주전자 내오다보면 양이 들쭉날쭉하니 아예 첫 주전자 나올 때 달력 걸린 못에
고무줄로 걸어서 주전자가 축~ 쳐진 밑 부분 벽에 젓가락으로 표시를 해 놓고 두 번째
주전자부터는 나오면 무조건 그 줄에 걸어서 표시된 부분까지 내려와야 통과시켰다
주전자 수는 주전자 추가 될 때마다 성냥골을 주머니에 넣어서 세어야 눈탱이를 안 맞았다
임양이 이리 옮기면서, 내가 따라 오면서 자주 오다보니 터득한 방법이었다.
내 기억에 전주의 막걸리집은 ‘정화집’을 마지막으로 서서히 쇠퇴해 간 것 같다
정화집을 마지막으로 약주집의 전성시대가 된다
그때가 80년대 초반을 지나서면서부터이다
그 약주집들 중 아가씨도 많고 유명한 곳을 몇 곳 꼽아보자면 위에서 말한 ‘만날때’를 위시하여
중앙시장 구소방서 맞은편 ‘설화집’ 현한국은행 맞은편 골목의 ‘버들집’ 대성동의 ‘하동집’
등등.. 그런데 그때는 왜 상호 끝에 꼭 집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아가씨들은 덕진연못 부근과 중앙시장 부근 맥주집 등등으로 스며들고 약주 파는 술집은
‘초밥집’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한식과 일식이 섞여진 퓨전으로 4홉짜리 맥주와
약주를 팔았고 안주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걸게 나왔다
초밥집은 한때 3~4년 반짝하다 스러진다.
이때 쯤 삼겹살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등심이라는 메뉴도 등장한다.
스텐드 바와 더불어 클럽이 생겨나고 클럽 한켠에 룸이 하나씩 생기더니 이내 룸 만 있는
룸싸롱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정겨운 작부는 사라지고 낯설고 새롭고 설레는(?) 호스티스가 나타난다.
이렇게 80년대 중반이 넘어간다.
그리고는 막걸리는 사라진다.
주제가 막걸리이니 만큼 10여년을 건너뛰어야겠다.
때는 바야흐로 1994~95년 쯤???
전주 삼천동의 한 골목에 ‘수목실내마차’가 생긴다.
고향이 전남 화순인 40대 초반 과부 정선희가 친구와 둘이서 동업으로 실내마차를 챙긴 것이다
상호는 친구가 어디서 잘 보는 철학관에게 지어왔단다
처음 생겼을 때는 그저 선희의 음식 솜씨만 믿고 시작을 했었다
그러다가 전주교도소 직원 몇몇이 단골이 되고 재소자 보호자와의 만남의 장소가 되면서부터
안주와 주종도 고급화가 되고 거의 땅 짚고 헤엄치 듯 요정 같은 실내마차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90년도 중후반 크게 기사화가 되었던 전주교도소 비리사건이 터지면서 이리저리
선희네 가게도 우박을 맞게 된다. 직원들의 발길이 끊기니 불특정다수의 영업이 아니었던 관계로
타격이 아주 심했다
장사가 안 되니 친구는 자기 일을 찾아나가면서 동업도 끝난다.
이즈음이 바로 97년의 IMF 시기이다.
행남이네가 예전의 수목막걸리...
이때 선희는 ‘수목실내마차’에서 ‘수목막걸리’로 상호를 바꾼다.
그런데 막걸리를 팔지만 고급 안주를 내던 가락이 있어 곧 죽어도 항상 최고의 재료에 안주도
바로바로 내는 습관이 있으니 한번 왔던 손님은 절대 못 잊는다.
어려웠던 때이니 만큼 막걸리를 찾는 사람은 하나 둘 늘어가고 시기적으로 필요충분조건이 딱 맞아
떨어진데다가 허름한 막걸리 집에서 덥벅덥벅 주는 안주에 웬만하면 다 놀랐다
언제 어느 안주를 만들어 내오는 지는 지맘이니 좋은 안주 먹는 복은 그야말로 복컬복
(복불복의 전라도 사투리)이다
테이블이 7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앞 사람이 먹고 간 테이블 청소는 거의 뒷사람이 해야했다
“야~! 사람 하나 써라~!!!”
그러면 하는 대답
“사람 쓸 돈 있으먼 안주 하나 더내것다~~”
그런데다가 이틀이 멀다하고 새벽까지 바닥 물청소를 해야 직성이 풀리고
젓가락 숟가락은 매일 삶아댔다
성깔 값을 톡톡히 한다.
2014년 여름의 선희
90년대도 다 저물어 갈 무렵엔 수목막걸리 앞에는 늘상 줄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야 술 박스 엎어놓고 길가고 어디고 아무데나 자리 잡고 앉아 술이고 안주고 다 가져다
먹을 정도로 이물었지만...
이때 늘 같이 다니던 친구 놈이 ‘떡판’이라는 별명의 덕중이다.
우리는 여기서 맥막 1:3의 황금비율을 만들어 낸다.
4리터 양은 주전자에 500ml 맥주 한 병과 750ml 막걸리 3병을 섞어서 먹는 것이다
막걸리의 틉틉한 맛이 순해지고 트림이 안 나온다
각자 한 주전자씩 마신 다음 당구 한판 치고 다시 와서 냉면기에 막걸리 750 한 초롱 다 부어
단칼로 누가 빨리 먹나 시합을 하고 소매로 입 쓰윽~ 닦고 헤어지곤 했다
그때부터 막걸리집의 주전자는 어디나 4리터 양은주전자 여야만 되었다.
이때는 삼천동 우체국 골목에 막걸리집이 단 하나밖에 없었다.
2000년이 되면서 ‘전주막걸리’를 시작으로 ‘용진집’(지금은 제일 유명해 진 집)이니 등등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수목막걸리집의 줄 선 손님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2015년)는 그 골목이 온통 막걸리집이다
그때 그 골목에 막걸리집이 생기면 거의 모두가 수목막걸리집을 벤치마킹 했다
그 결과 뜻하지 않게 돈을 번 곳이 있으니 바로 중앙시장의 ‘남해수산’이다
처음엔 시장 안의 그저 그런 생선 집이었는데 선희가 그 집에서 해물을 갖다 쓰니
모든 막걸리집이 그리로 몰려 지금은 중앙시장 최대의 생선도매 가게가 되었다.
명절이면 선희에게 최고급 의 대하세트를 선물하곤 했는데 내가 중간에서
많이 낚아채 갖다 먹었다.
지금은 중앙시장 최대의 해물전이 되었다
2000년 중반 선희는 수목을 넘기고 ‘번암막걸리’란 주조장에서 간판을 걸어주고
임대료를 내주는 조건으로 3배 이상 큰 데로 옮겨간다.
하지만 큰 재미는 못 보고 장사를 접고...쉬고... 주방 일만 보고.... 몇 년을 그러다가
최근에(2014년 11월) 삼천동 골목에 예전 상호로 다시 개업을 했다
개업날의 모습....
하지만 지금의 터줏대감은 ‘용진집’이다
한참 삼천동 막걸리집이 뻗어나갈 때 용진집 황여사와 선희가 TV에 출연한 일이 있었다.
정작 주인공인 선희는 말 한마디 못하고 황여사가 다 이러고저러고 하는데 마치 용진집이
원조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황여사가 7~8세 아래로 선희에게 언니 언니하며 잘 하긴 하지만
돈 버는 데는 황여사가 여시다
지금은 완전 역전되어있다
‘수목막걸리’는 선희는 주방을 보고 동업하는 한 여자는 홀에서 서빙을 하는데 예전의 추억속의
손님만이 간간이 있고...
‘용진집’은 인터넷에 뜨고 소문이 나서 번호표를 받아야 한다.
술 못 먹는 여자등을 겨냥하여 메뉴도 개발했다
이런 비싼(한 주전자 3초롱 기본 18,000원~20,000원) 막걸리집들이 이제 전주에 쫘악~ 깔려있다
서신동, 중화산동, 평화동....
나는 개인적으로 이제 이런 막걸리집은 안 간다.
외지에서 손님이나 와서 안내하면 모를까
너무 비싸기도 하거니와 안주를 따로 대주는 곳이 있어 여기나 저기나 안주가 거의 특색이 없다.
암튼 현재 전주 막걸리의 현주소는 3초롱에 18,000(±2,000)원하는 관광용 사또주안상이다
나는 그래서 요즘은 남부시장 안으로 간다
같은 시장 안에서도 3천원짜리가 있는가 하면 3병에 만원... 1병에 4천원 각각 특색도 있고 초식도
다르고 재미있다
그 보다는 정이 있다. 17년 전 수목막걸리에서와 같은....*
언론에 몸 담고 있었던 용진이란 친구에게서 수목막걸리에 대해 물어 온 적이 있었다
대강 답변을 해주니 며칠 후에 새전북신문에 기사가 뜬다
2015. 7. 28
용진이와 선희...
※ 2017년 6월경 삼천동 용진집이 쉬쉬하며 쥐도새도 모르게 주인이 바뀌었음 *
첫댓글 잘 읽어습니다 .
예전부터 안주가 푸짐하다는 전주막걸리 마시러 가고 싶은데 차를 가꼬가야해서 맘뿐이네요~
(이곳은 빛고을)
담에 가게되면 이 게시물을 한번더 읽고 가야긋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