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나를 알아주십니까?
시편 8:1-9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일이다. 한국교회는 이 날을 환경선교주일로 지킨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사랑하고 잘 보전하려는 마음을 모으는 날이다.
지금 성령강림절기는 천지만물이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계절이다. 여름은 그 푸르름이 왕성하고, 성장의 기운이 힘차다. 그런 소중한 생명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길 바란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노래한 말씀이 많이 있는데, 그 중 시편 8편은 가장 사랑받는다. 여러 해 전 색동가족이 함께 암송한 적도 있다. 함께 노래하듯 천천히 낭독해보자.
시편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노래이다. 시편의 찬양들은 대단히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공동체적이다. 시편은 ‘그때, 거기’의 사람들만의 찬양이 아니다. 시편은 ‘지금, 여기’ 우리들의 찬양이기도 하다.
낱낱의 사람들이 지닌 아픔, 한숨, 고통, 기쁨, 사랑 등은 어느 한 사람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 전체의 삶의 모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시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개인적인 아픔일지라도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함께 하는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감내해야 할 하나님의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편의 의미이다.
1)
시편 8편은 1절과 9절이 주제이다. 시작과 마침에서 반복하며, 강조한다. 다시 읽어보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우주 만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조물을 가리켜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간접계시’라고 말한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은 성경에만 복음을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들, 꽃들, 구름들, 별들에도 기록하셨다”고 하였다.
미국의 서부지역 북쪽에 위치한 시애틀이란 도시가 있다. 영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으로 유명하다. 이 도시 이름은 본래 인디언 추장의 이름이다.
1855년 미국의 플랭크린 피어스 대통령은 지금의 워싱턴주에 살고 있던 수와미 족의 추장 시애틀에게 미 정부에게 땅을 팔라고 요청했다. 그때 시애틀 추장이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100년이 지나 미국 독립기념 200주년에 알려졌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라곤 없습니다. 아무 데서도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며 벌레의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북미의 인디언들은 한낮의 비로 씻겨지고 소나무 향내가 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더 좋아합니다. 공기는 인디언들에게 아주 소중합니다. 짐승과 나무와 인간들이 똑같이 숨 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은 오랫동안 죽을병에 걸려 신음하는 사람처럼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당신의 신도, 우리의 신과 같은 신이라는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백인들일지라도 공동의 운명으로부터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시애틀 추장의 비감한 목소리를 통해 창세기의 아름다운 서사시를 다시 듣는다. 그는 우리에게 물질세계와 다른 또 다른 정신의 세계, 바로 창조의 세계로 인류를 안내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발견하는 일이다.
성경은 자연과학책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에 대해 경외감을 갖고 찬양한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 38:41).
시편에서 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주 창조든, 까마귀 새끼가 먹고 사는 일이든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주님의 손가락으로 가능했던 역사였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3).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지극히 광대하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미미하다.
- 제트기를 타고 여행하면 우리의 태양계로부터 가장 가까운 별까지 도달하는데 5백 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 현재의 기술로 우리는 지구 속으로 12Km 이상 더 깊이 구멍을 뚫을 수 없는데, 그것은 지구 중심까지 거리의 0.2%에 불과하다고 한다.
- 만약 은하계의 별들의 숫자를 1초에 하나씩 셀 수 있다면 그것을 모두 헤아리는데 얼마나 걸릴까? 무려 2,500년이다.
하나님은 저 광활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자연의 미물에게도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최고 주권자로 고백할 때 내 존재가 초라해지는 것이 아니다. 초라해지기는커녕 내 존재는 더욱 소중해진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흔히 몸을 소우주라고 한다. 내 몸은 33조 개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세포로 조직되어 있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기억과 생각은 머리 속 대뇌 표면의 140억 개의 신경세포가 조화롭게 기능하여 가능한 것이다.
뭔가 좀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 망원경으로 본 나는 티끌 중의 티끌도 못 된다. 뭔가 좀 부족하다고 기죽을 이유 없다. 현미경으로 본 나는 엄청난 은하계 중의 은하계이다.
세상이 만만해 보일 때 망원경으로 나를 보라. 세상이 벅차 보일 때 현미경으로 나를 보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내 마음도 지으신 분이다. 우주에 깃드신 하나님의 영광은 내 마음에도 함께 하신다.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라.
2)
시편 8편이 강조하려는 것은 우주 만물 가운데 인간의 소중함이다. 피조물로서 사람의 존귀함이 창조 속에 계시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주님,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나를 알아주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만큼 나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자존심을 내려놓게 하고 자존감을 키워 주신다.
바벨론 신화에도 창조 이야기가 있다. 태초에 사람은 신의 농토에 물 대는 일을 하는 작은 신들을 대신하는 노예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힘겨운 고역과 고통이 인간의 창조에 운명론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고대 중동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왕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피조물 중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남자와 여자나, 왕이든 종이든 차별이 없다. 누구나 공평하고, 평등하다.
시편은 장엄한 세계 속에서 본 보잘 것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토록 높이 평가하신다니 그 사실에 감격하고 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지위를 허락하셔서, 창조주 가까이로 다가서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 것이다.
나는 그런 존재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존귀한 존재이다. 만약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 때문에 좌절한다면 그는 무신론자와 다름없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깨닫고, 살아가면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불신자이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기가 하나님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어찌 나를 알아주십니까?’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알아주신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3).
나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드러난 존재이다. 이 사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이 소중하고, 특별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소로우의 일기>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사과나무와 떡갈나무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제비꽃은 제비꽃처럼 피면 되는 법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소로우가 추구해온 자연의 문제는 바로 인간의 문제요, 사람의 고유함과 존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누구나 에덴동산에서 왔다. 사람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3)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찬양한다. 그러나 지금 인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당장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일본은 물론 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나라들이 갈등이 커진다. 세계가 뒤숭숭하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원자력은 아직 적절한 핵 쓰레기 처리 기술이 없다고 한다. 화장실이 없는 집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핵오염수 방류와 같은 문제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정치적으로만 공방할 것이 아니라, 정말 인류와 자연 생물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문제이다.
우주는 위대한 건축물과 같다. 자연은 아름다운 정원이다. 독일에 유명한 쾰른대성당이 있다. 전면에 높이 치솟은 두 개의 종탑은 쾰른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둥근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창밖을 보면 종탑 맨 꼭대기까지 계속되는 다양한 돌조각이 아름답다. 그 정교함이 놀랍다. 그 높은 곳에서 과연 누가 그렇게 정교하게 조각을 했을까?
무명의 두 조각가가 종탑 꼭대기에서 일했다고 한다. 같이 일하면서 빈둥거리던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다른 이에게 말했다.
“저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도 개미만 해 보이는데, 그들이 이 높은 곳을 어떻게 볼 수 있다고 그렇게 세밀하게 조각하는가?”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나는 밑에서 누군가가 보아주기를 바라지 않네. 내가 열심히 조각한 이 작품을 보아주실 분은 바로 저 위에 계시다네.”
누군들 하나님을 의식하면 살면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알아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 그의 삶을 진실하게 한다.
지난 주간에 강원도 우리 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점심 무렵 영월 선돌을 방문했는데, 서강이 바라보이는 명승지로 유명하다. 그곳을 잠시 산책하다가 무심코 들른 청령포로 연결된 유배길에서 여러 가지 들꽃을 보았다.
뜻밖의 꽃을 발견하면 동행한 그이는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춘다. 마치 자연 콘서트장에 온 듯한 분위기다. 혼자 보기가 정말 아깝다. 어찌 평생 그 끼를 감추고 살았을까 싶다.
이번에 춤을 추게 한 꽃들은 ‘두메애기풀, 꼭지연잎꿩의다리, 털중나리, 뻐꾹채, 으아리’ 등이다. 누군가 이름을 붙여준 그 사람도 아마 탄성을 지르며 춤을 추었을 것이다.
자신을 알아준 꽃들은 어땠을까? 나를 발견해준 그 기쁨은 오죽할까? 그런 미미한 들꽃들에게까지 눈길을 준 사람의 존재를 지으신 창조주는 얼마나 흐믓해 하실까?
나 역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감춰진 들풀에 불과하다. 누군가 내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가 복되고, 아름답다.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나 원초적인 존재의 근원에 맞닿은 거룩함이 존재한다. 영혼이 머무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곳, 그곳은 초라한 내 삶에 존재하는 가장 신성한 공간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가 항상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 그리고 부부 사이에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