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땅에서 2박 3일
정월 대보름과 우수절기를 지났으나 비 소식은 간 곳 없고 새벽 공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두툼한 파카로 중무장하고 행사용 음료수를 잔뜩 실은 체 북유성(남세종) 나들목을 통하여 남녘의 고향 땅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구미에 잠시 들러 중형을 모시고 차 안에서 이번 2박 3일 동안 치러야 할 행사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의를 하였다. 1935년에 태어나서 어려운 세월을 견디어 내신 둘째 형님은 아들딸, 손자, 증손자까지 곁에 두시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4년 연상으로 고인이 되신 큰형님의 뒤를 이어 집안의 대들보이시며 재종 반 중에 제일 큰 어른이시다.
영천 선산에 도착하니 굴착기와 전기톱 소리가 아침 공기를 뒤흔들고 있었다. 고향 마을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는 집안 동생들이 교대로 공사 감독을 하고 있었다. 모두 임진란에 창의하신 남계공(휘 응현)의 후손들이다. 지난달 종중총회에서 의결된 남계원 조성사업을 오늘에야 수행하는 과정이다. 남계원은 종종에서 관리해오던 여러 곳의 산소들이 이곳 양지산 입향조(휘 여성, 남계공 고손자)산소 옆 한곳에 마련되는 추모공원이다. 경주 손씨 족보 대계로 8세이신 남계공을 비롯하여 입향조(12세)의 증손자가 되는 15세에 이르기까지 33인을 이곳 남계원에 모신 셈이다. 지금은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그래도 묘사(墓祀) 때는 ‘이곳에서 얼굴들을 볼 수 있겠지’라는 바램으로 추모공원을 조성중이다.
남계원은 크게 삼단으로 이루어진다. 상단에는 증) 의빈부도사 남계선조 고비 합장 봉분을 만들고 상석과 망주석, 그리고 비석을 세울 공간이다. 기존의 남계공 비문(청송 소재)과 숙부인의 비문(배골 소재)을 국역한 새 비석이 제작 중이다. 중간의 단은 남계공 후손 서른 한분의 백골과 진토를 잔디밭 아래 묻어두는 소위 자연장의 방식을 취했다. 봉분이나 표지석이 따로 없으며 외관상 평편한 잔디 공간이다. 하단은 넓은 공간으로 대형 재단석과 명단석을 설치코자한다. 명단석에는 고와 비를 서열대로 하되 휘(고인의 이름)과 생졸년 그리고 선후 관계와 기존 묘소 위치를 기록하기로 하였다. 조성사업에 즈음한 고유문을 읽고 봉분 안에는 마련된 옷 두 벌과 남계실기 한 권을 매장하였다.
산소조성은 굴착기 기사와 잔디를 심는 인부들의 공동작품이었다. 별로 부지런하지 못한 잔디 작업 인부들에게 점심과 중참, 술 담배까지 사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했다. 굴착기가 땅 고르기를 하는 사이사이에 조금씩 일하고 마냥 휴식을 취하는 5인조 인부들이 비생산적이었지만 이것도 장례문화 일부라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한편 남계원 조성 작업 소식을 전해 듣고 각처에서 찾아와 준 문중 대소가에 덕담을 보내며 막걸리와 음료수를 권했다. 많은 분들의 성심과 노력으로 남계원의 멋진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해 그늘이 양지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각종 석물을 놓는 다음 행사는 추후 날을 잡아 공지키로 했다.
형님과 나는 내일부터 있을 다른 작업 때문에 가까운 거리의 모텔과 식당에서 여장을 풀고 철거기사와 이틀간의 생가 철거 작업 일정을 조율하였다. 저녁을 마친 후에 피로가 몰려왔지만 오랜만에 찾아준 고향의 친지와 친구들이 마냥 반가웠다. 대전서 가져간 술과 음료수를 마시면서 지난날의 추억과 현 시국담을 늘어놓았다. 생가 철거 후 관리에 대한 조언도 받았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에 피로가 엄습하여 따뜻한 온돌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모텔식당에서 백반을 단단히 챙겨 먹고 읍내 용역회사 인부들을 데리러 갔다. 어제 남계원 조성 시 인부(굴착기 기사가 데려옴)와는 다르기를 바라며 생가에 도착하니, 벌써 이(李) 기사는 작업 중이었다. 산소 뿐 만 아니라 주택 철거를 많이 해 본 베테랑이라 주인의 구체적인 주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마을 출신이라 소통이 잘 되었고 철거 인부들도 열심히 일을 해주어 나중에 따로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철거되는 생가를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고해 보았다. 부모님이 큰아들을 낳자 이듬해 여름 조부모님(괴암공)이 뒷밭에 터를 잡아 지어주신 이집은 해당화집, 송정재사로 불리면서 명맥을 유지해왔지만,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노후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몇 해 전인가 고옥을 고치어 보존을 해볼까도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차라리 새로이 짓는 것이 낫겠다는 중론으로 일단 철거 멸실 신청을 하였다. 선친 소유로 되어있는 건축물 대장의 말소 신고도 필요한 단계였다.
먼저 생가를 둘러싼 고목들을 정리해야 하는데 옛날 생각이 너무도 생생하였다. 어린 시절 감나무에 올라가서 묘기를 부리다가 떨어진 일, 발가락 무좀이 심해 뽕나무 뿌리 삶아서 효험 보던 사연, 봄마다 가죽나무 잎 따다가 전 부쳐 먹던 일, 대나무 숲에서 숨바꼭질하던 장면, 뒷담 밑에서 뿜어나던 골담초 향기 등 갖가지 추억이 되살아났다. 철거 소식을 들은 동네 아낙들(특히 귀촌 아낙들)은 꽃나무 얻으러 몰려들었다. 작업에 방해가 되긴 했지만, 우리 집 꽃나무들이 잘 살아가길 바라며, 우리도 옆 밭에 해당화 목련화 뿌리들을 일부 옮겨 놓았다. 그러나 오래된 단감나무 한그루와 뽕나무 고목 한 그루는 그 자리에 두기로 했고, 골담초 뿌리와 뽕나무 뿌리는 따로 잘라서 약제로 쓰기로 했다.
안채가 헐릴 때는 먼저 어머님 모습이 떠올랐고, 6.25 전쟁통에 유탄을 피해 대청마루 밑에서 강아지처럼 숨어 있었던 기억도 났다. 사랑채가 사라질 때는 자주 드나들며 학문과 시국을 논하시던 옛 어르신들과 당시의 일군들도 생각이 났다. 형님은 저보다 더 많은 추억을 가지고 계시리라. 소년 시절 전쟁 통에 버려진 총알과 무기를 큰형님과 함께 집안에 감추어 두다가 아버님에게 혼난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안채 대청 대들보에서 나온 상량문에는 임신년(1931년) 7월 19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인터넷 검색 결과 섭씨 42도까지 올라간 엄청난 무더위에 이 집 짓느라 비지땀 흘리며 수고하신 옛 어른들이 떠올랐다. 초가집으로 시작되어 시멘트 기와로 바뀐 지붕은 철거 후 폐기물 운반 처리되었고, 서까래 등 나무들은 재활용품으로 옆 밭에 쌓아 놓았다.
다음날 철거가 막바지에 갔을 때 사랑채 부엌에서 갑자기 큼직한 오소리 네 마리가 튀어나와 달아났다. 놀란 김에 얼떨떨하고 있는데 굴착기 기사는 400만 원 손해 봤다고 아쉬워했다. 오소리 기름은 화상에 특효약이라 고가에 암거래 된다는데 어쨌든 환경 보호 동물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이제껏 우리 집에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지내는 동안 잘 지냈다고 인사라도 하고 가야지, 글쎄 월세(?)는 못 낼망정. 이래저래 생가를 철거하면서 만감이 교차하고 에피소드도 많았다.
88세의 고옥은 어느새 사진 몇 장만 남긴 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문패(추곡길 255-9) 하나와 나대지 126평의 토지대장만 남아있다. 백지상태에 멋진 새집을 그려보며 2박 3일 만에 구미를 거쳐 대전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남계원과 생가의 다음 작업을 구상하느라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남계원의 석물보다 생가의 가설 건축물(관리 사무소 등)축조가 시급하다. 밭에 야적한 고서와 유물들을 보관하려면 우기 전에 조치를 해야만 한다. 한편 남계원 잔디를 생각하면 하루 속히 비가 와야겠는데 다행히 오늘부터 비가 남으로부터 북상한다고 한다. 짚신장사와 우산장수를 아들로 둔 어미의 심정이 이럴지도 모르지.
2019년 3월 10일 새로워질 남계원과 해당화집을 그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