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풍경을 담다
마산의 추억
한국관광공사 청사초롱 2018. 2 vol.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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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박경일(문화일보 여행전문기자)
‘마산(馬山)’이란 지명은 과거의 것이다.
어색하지만 정확한 행정 명칭으로 부르자면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다.
창원이 마산, 진해를 빨아들여 거대 통합시가 되면서
마산은 고작 창원통합시에 속한 두 개의 구(區) 이름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마산의 위세는 그야말로 당당했다.
‘가고파’의 쪽빛 바다
여기 마산을 배경으로 한 두 곡의 노래가 있다. 하나는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곡 ‘가고파’이고, 다른 한 곡의 노래는 록그룹 노브레인이 부른 프로야구단 ‘NC 다이노스’의 응원가 ‘컴 온 컴 온 마산 스트리트’다. 이 두 곡의 노래처럼 마산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또 있을까?
‘가고파’는 마산에서 나고 자란 노산 이은상이 가사를 붙인 가곡이다. 이 노래에서 마산은 따뜻한 남쪽 고향 바다의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반면 응원가 ‘마산 스트리트’는 정반대다. 록그룹 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가 고향 마산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는 이 노래에는 ‘콜라빛 나는 바닷물이 흐르고…’라는 가사가 있다.
같은 마산 바다를 두고 두 노래 가사가 보여주는 간극이라니……
‘가고파’가 그리는 마산 바다는 197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풍경이다. 세금으로 거둔 쌀이며 진상품을 모아둔 조창이 들어섰던 조선시대부터 마산은 번성했다. 당시만 해도 마산에는 경상도에서 가장 큰 장이 섰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식 청주를 빚는 공장이 7곳에 달했을 만큼 번성했다. 마산 도심의 산책로에서 만난 노인들은 ‘모래를 잡아 뿌리면 새파란 야광충들로 바다가 푸르게 빛나던 시절’의 마산 이야기를 했다. 해방 이후에는 결핵 요양원에 수감된 문인과 피란 온 예술가들로 마산에는 문학적 향취도 그윽했다. 백랑, 컨티넨탈, 비원, 외교구락부, 콜럼비아 찻집…… 이게 다 마산에서 번성했던 다방과 사교 클럽들이다.
‘마산 스트리트’의 콜라빛 바다
노브레인이 부른 ‘마산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콜라빛 바다는 1970년 마산이 수출자유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기업들이 앞다퉈 몰려오던 시절의 풍경이다. 한일합섬, 한국철강, 무학으로 대표되는 기업들이 번성하면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마산의 전성기가 이어졌다. 출근길 노동자들의 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퇴근 무렵이면 도심 창동 일대는 인파로 흥청거렸다.
열악한 작업 환경과 낮은 처우에도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이들은 오동동 일대의 횟집에서 막걸리 몇 잔에 고된 노동의 시름을 달랬다. 당시 마산의 명물은 어시장 부근에 판자로 바다에 반쯤 걸쳐진 횟집들이었다. 물 위에 떠있는 집들이 홍콩을 연상시킨다 해서 ‘홍콩빠’라고 불렸다. 형편이 좀 나은 이들은 오동동 거리의 요정을 찾았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로 시작하는 ‘오동동 타령’은 마산 오동동 요정 거리 권번 기생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였다.
성장과 번영의 시기를 거치면서 마산 앞바다는 오·폐수로 오염됐다. 환경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깨끗한 바다보다 먹고 살 것이 더 중요했던 때였다. 응원가 ‘마산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콜라 빛 바다’가 바로 그때의 풍경이다. ‘깨끗해진 마산 바다를 모욕한다’는 주장에 응원가 ‘마산 스트리트’는 한때 퇴출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아직도 계속 불리고 있다. 마산 바다가 쪽빛을 되찾았지만 말이다.
고향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
마산의 쪽빛 고향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여러 곳이지만 그 중에서 압도적인 곳이 바로 무학산 자락의 부엉산 학봉이다. 교방동 서원곡 유원지에서 임마누엘 수도원 방면으로 비포장길을 살짝 들어서면 체육시설이 놓인 작은 공원이 있는데, 거기서 학봉으로 오르는 짧은 등산 코스가 있다. 학봉 못 미처 전망 좋은 자리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공원에서 출발하면 여기 정자까지는 20분이면 넉넉하다.
정자에 올라서면 마산 앞바다의 경관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여기서 보는 낮의 쪽빛 바다 경관도 좋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해 질 무렵의 화려한 야경을 보는 게 훨씬 더 낫다. 낮은 처마의 산동네 주택가의 노란 불빛과 빌딩 숲의 흰 불빛이 밤이 깊을수록 또렷해지며 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은 절로 탄성이 나온다.
발 품을 팔지 않고도 마산 앞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문신미술관이나 미술관 뒤편 언덕 위의 추산 근린공원의 회원현 토성이다. 여기서 굽어보는 마산만 경관도 나무랄 데 없다. 문신미술관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이 1980년 고향인 마산으로 돌아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미술관을 만들기 시작해 1984년 개관한 미술관이다. 미술관에는 브론즈와 스틸 작품이 스케치, 석고 원형 등과 함께 전시돼 있는데, 야외 전시장에서 마산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미술관 뒤편의 옛 성터는 고려 때 지어진 토성의 자취인데, 토성 정상 부근에 최근 누각을 세워 두었다.
마산, 도심의 추억과 풍경
마산의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창동과 오동동 일대다. 마산의 지나온 과거의 풍경이 이곳에 다 모여 있다. 쇠락한 도심을 살려내기 위한 재생사업을 진행하면서 창동 골목은 예술과 추억을 테마로 단장됐고, 골목을 둘러보는 도보 길이 곳곳에 생겼다. 술값만 내면 안주가 끝없이 나오는 통술집을 지나는 ‘소리길’도 있고, 어시장 주변의 ‘복 국 거리’와 ‘아귀찜 거리’를 둘러보는 길도 있다.
길이 여럿이지만 서로 이어진 골목이라 굳이 지도를 펼쳐 들지 않아도 방향 감각만 유지한다면 빠짐없이 다 둘러볼 수 있다. 창동을 보는 몇 가지 요령. 하나는 창동 아트센터 앞 아고라 광장에서 걷기 시작할 것. 기준이 되는 출발지점이 있어야 방향 감각을 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바삐 서둘지 말라는 것. 경험에 미뤄보면 바삐 움직이면 필시 길을 잃는다. 일단 걷기 시작했다면 감(感)을 믿고 눈길이 끌리는 대로, 발길이 닫는 대로 걷는 게 요령이다.
창동 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건 이런 것들이다. ‘삼성당 문고’판 책과 낡은 LP 따위를 파는 헌책방, 종업원 없이 주인이 손수 음식을 차려 하루 30명 손님만 받는 식당, 간판에서부터 연륜이 묻어나는 59년 된 제과점, 새알심을 넣은 뜨끈한 팥죽을 내는 팥빙수 집, 한때 피란민처럼 손님들이 몰려 ‘6·25’란 이름을 갖게 됐다는 떡볶이 집……
동선을 더 넓히면 1950년대 요정이 즐비했다는 요정 골목을 지나 50년 동안 1만 3000쌍의 무료결혼식을 치러줬다는 신신예식장을 만나게 된다. 요정 골목 인근 보쌈 집 앞에는 3·15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첫 시위가 시작된 3·15 의거 발원지가 있고, 정부 마산지방 합동청사 인근 부두에는 1960년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혀 숨진 김주열의 시신을 인양한 지점임을 기록한 추모비가 있다.
호반 숲길과 돌탑, 그리고 낙조
마산에는 또 바다와 도시 풍경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빼어난 풍경을 가진 명소들도 곳곳에 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팔용산을 끼고 있는 봉암 수원지다. 수원지와 해병대교육장으로 쓰다가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활용해 탐방로를 놓은 곳이다. 수원지를 끼고 호수를 한 바퀴 도는 50분짜리 산책로는 침엽수림의 초록이 수면에 펼쳐지는 고요한 숲길이다.
팔용산 반대편 사면의 양덕동에는 마산보건소에 근무하던 인근 주민이 1993년 산사태로 굴러 내려온 돌로 13년 동안 쌓았다는 700여 기의 돌탑 군락도 있다. 돌탑이 무어 볼 게 있겠냐 싶지만, 한 사람의 혀를 내두를 만한 정성과 노고가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수효의 돌탑 군락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마산 9경(景)’의 하나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바다를 끼고 있음에도 이렇다 할 해안 풍경이 없는 마산에서는 덕동 사궁두미 마을의 일출 풍경도 빼놓을 수 없다. 고깃배를 묶은 밧줄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포구 뒤로 등대가 서 있는 자그마한 섬이 있는데, 해는 그 너머의 능선에서 올라와 바다를 온통 시뻘겋게 달군다. 해가 수면을 차고 올라오지는 않지만, 내만의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위로 떠 오르는 해의 붉은 빛이 자못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