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시> 연재 칼럼 5 (2024년 1월)
김민홍의 나쁜 생각(월간 시 1월 게재 원고)
보리로 쌀밥이 됩니까?
전설적인 교장이 있었다. 그 교장이 강남의 신설 사립 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자 막 고소득층에 진입하기 시작한 강남의 학부모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기대치에 전혀 못 미치는 진학 성적을 내자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다. 교장은 학부모들을 학교 강당에 모아놓고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연설했다 " 학부모 여러분, 보리쌀로 쌀밥이 됩니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전설적인 연설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필자의 젊은 교사 시절이었으므로 당연히 반발심이 생겼다. 일종의 인격 모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교장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이 난다. 아무리 유전자 조작을 해도 보리로 쌀밥을 지을 순 없기에. 이는 기대치에 못 미치는 사람들에 대한 절망에 가까운 실망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 위로하는 일종의 욕설과 조롱에 가까운 말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건강상의 이유로 쌀밥을 선호하지 않는 것이 대세여서 쌀 소비가 현격히 줄어들고 안 팔린 쌀들을 보관할 창고가 부족해 시골 폐교 운동장 등에 야적해 놓기도 한다고 한다.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쌀밥에 비유되던 소위 좋은 학벌과 스팩을 향한 욕망 들은 사그러지지 않고 있다는 것. 왜 이것만은 이리 변화 속도가 더딘 것일까. 건강에 조금씩 이상징후가 보이자 어느 순간 필자의 밥상에서도 기름기 잘잘 흐르던 쌀밥은 자취를 감추고 세상의 대세대로 보리밥이나 잡곡밥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명문 학벌 출신의 지도층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세칭 명문가 출신들이 대부분인 법조계와 재계, 정치계에서 요즘 필자는 쌀밥의 심각한 부작용을 읽게 된다는 것, 세상의 대세가 보리밥 잡곡밥으로 차려진 밥상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필자의 입맛은 여전히 기름기 잘잘 흐르는 쌀밥과 쇠고기무국에 잘 익은 김치다. 필자의 궁핍했던 유소년기를 거의 꽁보리밥과 맹물에 썰어 넣은 짠 오이지로 지냈기 때문에 쌀밥과 쇠고기무국이 로망이 된 탓일 수도 있다. 일종의 아이러니이겠지만, 자꾸 애정이 가는 사람들, 가족이나 친척 친구 혹은 기대치를 가졌던 몇몇 제자들에게서 보리쌀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필자는 아직 깊은 상실감을 떨쳐내기 어렵다. 필자 자신도 쌀밥이 되지 못하는 주제에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맛있는 보리밥을 짓는 레시피를 개발하던가 "쌀로 보리밥이 됩니까?" 라고 물어보는 훈련을 시작해야 할 듯하다.
혜화동 로터리
혜화동 로터리에 가면, 주유소도 있고, 우체국도 있고, 필자가 근무하던 옛 혜화여고도 지금은 초등학교가 되어 근처에 있다. 파출소도 있고,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중국인이 대를 물려 하는 중국집도 있고, 그 집의 짬뽕이 맛있다. 오래된 서점 이 층엔 옛 이름이 보헤미안이었던 찻집 엘빈도 있고, 그 보헤미안의 전 주인은 전원에 들어가 아름다운 카페를 열어 성공했다.
그곳에는 조병화 선생님도 계셨고, 장우 선생님도 계셨고, 김영태 선생님, 몇 년 전 100세로 돌아가신 황금찬 선생님도 계셨고, 혜화동 백작 윤강로 시인은 오랜 단골이셨다.
한국동란 중에는 이 근처에서 납북된 원로 유명 무명 예술인들도 많았다. 틈새 가게였던 왕대포집의 할머니도 벌써 돌아가셨겠지. 가끔 술 취해 할머니에게 패악을 부리던 손자도 잘 있는지.
혜화동 칼국수집은 아직 건재하고 그 앞 부산 오뎅집도 건재하다. 필자는 혜화동 로터리로 직장 때문에 출근을 하며 암 투병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곳이 내 투병 장소인 셈이다. 요즘은 혜화동 로터리에 자주 가진 않지만, 혜화동의 "혜" 자만 떠올라도 떠오르는 이름이 있고, 학교 운동장에 외롭게 서 있던 살구나무꽃도 떠 오르고, 혜화동의 옛 지명일 살구골도 떠오른다. 혜화동 비둘기는 요즘 눈에 잘 안 띈다. 아마 로터리 건너 대학로에 몰려다니는 젊은이들은 이곳을 잘 모를 것이다. 그들이 교과서에 배운 글들을 쓴 문인이나 미술책에 실린 화가들이 뭉쳐서 칼국수를 먹고 막걸리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던 곳이었음을. 하기야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