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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디고 유니콘 원문보기 글쓴이: 봄날isu
왕, 전사, 마술사, 연인 (4)
제2부 남성심리해독:
네 가지 성숙한 남성고태형들(1)
5장
왕(王)
왕 에너지는 모든 남성에게 원초적으로 들어있다. 이 에너지는 신성한 아이가 미성숙한 남성 에너지 나머지 셋과 맺는 관계와 똑같이 다른 성숙한 에너지 셋과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첫째로 중요하고, 다른 나머지 고태형들을 완벽한 균형으로 포용한다. 양질의 생성력있는 왕은 또한 양질의 전사요, 긍정적인 마술사이며, 뛰어난 연인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에게 왕은 맨 마지막에 나타난다. 왕이 신성한 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경험이 풍부하고, 복합적이고, 현명하며, 신성한 아이가 우주적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반면 왕은 이기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양질의 왕은 “솔로몬의 지혜”로 현명하다.
신성한 아이가 특히 높은의자 폭군에서 “신”인체 하는 유아적 허세를 가지고 있는 반면, 왕의 고태형은 모든 남성에 내재한 남성형태로서 신으로 존재하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태초의 남자, 아담이며, 철학자들이 우리 모두 내부에 있다고 하는 앤트로포스(Antropos)라 불리는 것이다. 남자들에 있는 이 원초적 남성을 힌두교도들은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은 imago Dei“하느님의 모상”을 얘기한다. 프로이드는 이 왕에 대해 “태초의 무리의 태초적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러면에서 왕 에너지는 아버지 에너지이다.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왕이 아버지 고태형을 받쳐주고는 있지만, 아버지 보다 더 기본적이고, 더 확충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왕들은 언제나 신성시 되어왔다. 목숨이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왕권, 혹은 왕 에너지 자체가 중요했었다. 한 왕이 죽고 다음 왕좌를 계승할 왕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왕이 승하하셨다 : 왕은 무궁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잘 알고 있다. 동족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왕국(어떤 차원이든 막론하고)에 봉사하기 위해, 우주에 봉사하기 위하여, 잠시 동안이나마 왕 에너지를 구현하거나 왕권을 소유하는 목숨이 유한한 인간은 거의 교체할 수 있는 부분이며, 질서를 잡고고 생성력 있는 이 고태형을 이 세상과 인간의 삶 속으로 실어 나르는 인간 매개체이다.
제임스 프레이져 경과 다른 학자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고대의 왕들은 왕의 고태형을 구현해 내는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제의적으로 살해되었다. 중요한 점은 그 에너지의 생성력이 늙어 무능력해 지는 유한한 목숨의 인간에게 묶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왕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왕 에너지는 구체화되고 그 왕국의 사람들 생활 속에서 고태형으로의 왕이 새롭게 되었다. 사실상 온 세상이 새로이 되었다.
이런 양식제의적 살해와 재생은 기독교의 구세주의 왕,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얘기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이 에너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위험은 그들도 고대의 양식을 충족시키고 일찍 죽는다는 점이다.
3장에서, 소년기의 고태형의 “죽음”, 특히나 영웅의 죽음은, 성인 남자의 출생으로, 소년심리의 끝은 성인 남성심리의 시작임을 논했다. 그렇다면, 영웅청년기의 소년이 “살해”되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소년기에서 성년기로 전환하는 정점에 있던 한 젊은이의 꿈은 영웅의 죽음의 순간과, 새로운 남성적 성숙함이 결국은 어떠한 형태를 위하는지 보여 준다. 그것은 왕 에너지의 출현을 보여 주는데 향후 수년간에 걸쳐서야 완전히 실현된다. 꿈은 이렇다 :
「나는 고대 중국의 재수좋은 군인이다. 나는 많은 문제를 일으켜 오면서 많은 사람을 다치게하고, 내 자신의 이익과 혜택을 위해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혀 왔다. 나는 일종의 악당이고, 용병이다. 나는 지금 시골 숲속에서 중국 군대(황제의 부하들)에게 쫓기고 있다. 우리는 모두 활과 화살, 검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나는 숲 속으로 도망치다가 땅 속에 구멍, 동굴의 입구 같은 곳으로 숨기위해 뛰어든다. 그것은 긴 터널이다. 터널 속을 달린다. 중국 군대가 나를 보고 동굴 속으로 들어와 나를 쫓아 달린다.
터널 끝에서, 멀리서 보니 희미한 푸른 빛이 위에서 부터 비치는데, 바위의 틈에서 나오는 것 같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빛은 지하의 한 방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그 방에는 초록색 정원이 있다. 그리고 그 정원 한 가운데에 황금빛의 현란한 옷을 입은 황제가 있다. 내가 도망갈 곳이 없다. 군대는 뒤에서 다가오고 있다. 나는 할 수 없이 황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황제 앞에 무릎 꿇고 항복하는 외에는 별 수가 없다. 나는 인생이 끝나는 것 같은 지극히 겸허한 느낌을 받는다. 황제는 아버지의 동정심을 가지고 나를 내려다 본다. 내게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가 모든 것을 보아 왔고, 그 모든 것을삶의 모든 모험들, 가난, 풍요, 여자, 전쟁, 왕궁의 음모, 배반하고 배반당하고, 고통과 기쁨, 인간 삶의 모든 것들살아봤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가 나를 동정심으로 대하는 것은, 그의 모든 경험, 아주 오래고 오래 된 지혜로 인해서이다.
그는 아주 부드럽게 말한다. “너는 죽어야 한다. 세 시간 내에 처형될 것이다”, 나는 그가 옳다는 것을 안다. 우리 둘 사이는 묶여져 있다. 그가 이전에 내 자리에 똑같이 서 있던 것 같다;그는 이런 일들을 알고 있다. 커다란 평화의 느낌으로, 행복하게 조차 느끼며 나는 운명에 복종한다.」
그의 꿈에서 우리는 이 재수좋은 군인의 영웅적 소년 자아가 마침내는 그의 한계, 필연적 운명과, 황제 앞에서 만나는 것을 본다. 소년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내부의 원초적 왕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며, 죠세프 캠벨의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와 화해한 것이다.
유명한 심리치료사, 죤.W.페리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환상과 꿈에 나타난 인물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왕의 힘이 치유함을 발견했다. 정신병적 상황과 기타 심리적 한계 상황에서 신성한 왕의 형상이 환자의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달려나오곤 한다. 「신화와 광기 속의 갱생의 뿌리」라는 그의 책에서, 한 젊은 환자는 계속해서 고대 그리스의 원주를 그리면서 그것들을 자신이 “흰 왕”이라고 부르는 형상과 연결시킨다. “바다의 여왕”을 보는 환자의 경우에는 자신인 “바다의 여왕”과 위대한 왕의 결혼식을 보는 경우, 혹은 환영을 보는 환자를 구하기 위해 갑자기 교황이 개입되는 경우가 보고된다.
자기의 환자들이 묘사하는 것이 바로 고대 신화와 제전에 나타나는 신성한 왕의 형상과 일치하는 점을 페리는 깨달았다. 그리고 이 왕 에너지와 환자들이 접속되고 있는 한, 환자들이 개선되는 것을 보았다. 이 왕 안에는고대에서 고통중인 환자들의 환상과 꿈에서상당히 조직적이고, 명령적이고, 창조적으로 치유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페리는 보았다. 페리는 환자들의 환상에서 고대 신화의 혼란의 세력과 악마에 대항해 싸우는 왕들의 전투,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는 왕이 이 세상 중심에 영광되이 즉위하는 모습을 보았다. 페리는 깨달았다. 즉 왕은 사실상 자신이 “중심 고태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주위에 나머지 심리가 형성된다는 것을. 그의 환자들이 “의식의 고도를 낮추고” 의식하는 자아와 막강한 무의식의 세계 사이에 놓인 장벽이 내려졌을 때 창조적이고, 생성력 있으며, 삶을 강화시키는 왕의 형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광기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았다.
페리의 환자에게 일어 난 일은 중국 황제의 꿈을 꾼 젊은이에게 일어난 일과 유사하다. 유아적 자아를 버리고, 무의식 속으로 들어 가 왕과 만났다. 성인 심리가 나타나자 소년심리는 사라지고, 인격이 재정비되고 재구성된다.
성숙한(충만된) 왕의 두 가지 기능
왕 에너지의 두 가지 지능이 소년심리에서 성인심리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다. 그 첫째는 질서잡기이고 두 번째는 풍요와 축복의 조달이다.
왕은, 페리가 말했듯이, “중심 고태형”이다. 신성한 아이와 마찬가지로 양질의 왕은 세계의 중심에 있다. 중앙산, 혹은 고대 이집트인이 말하는 태고적 언덕 위에 위치한 그의 왕좌에 앉아 있다. 그리고 이 중앙 위치로부터 그의 모든 창조가 왕국의 맨 가장자리까지 기하학적 형태로 방사된다. “세계”는 왕에 의해 명령되고 조직되는 현실로 정의된다. 그의 영향권 밖에 있는 것은 비창조, 혼돈, 악마, 비세계이다.
이 왕 에너지의 기능은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에 대한 고대의 설명에서는 어디서나 보여진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는, 제임즈 브레스테드와 헨리 프랑크포르트가 예시했듯이, 무형태와 거대한 대양의 혼돈으로 부터 중앙 언덕 혹은 산의 형태로 이 세계가 생겨난다. 세계는 지혜와 질서의 신, 아버지 신인 Ptah의 신성한 “말씀”의 선포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성경에서, 야훼는 똑같은 방식으로 창조한다. 이 말은 사실상 우리의 현실을 규정한다 : 말이 세상을 규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계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 개념으로 조직하고, 오직 말의 뜻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에서 적어도 말은 우리의 현실을 만들고 우주적 실체를 만든다.
육지가 창조되자 태고의 언덕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중앙 질서로부터 모든 생명, 신과 여신들, 인간들, 그리고 모든 여타 문화적 성취가 생겨난다. 신의 계승자인 파라오의 출현으로, 신성한 왕에 의해 규정된 세계가 태고적 언덕 위 파라오의 왕조로부터 모든 방향을 향해 펼쳐진다. 이것이 이집트인들의 문명 탄생에 대한 설명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근간을 마련한 왕 중의 하나인 아카드의 사르곤은 왕국을 세우고, 문명을 일으킨 뒤 자신을 “사 구역을 다스리는 자”로 불렀다. 고대인들 생각에 이 세계는 중앙으로부터 퍼져나갈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4구역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로 나누어진 원이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그 자체가 중앙산의 이미지이다는 “4구역”을 향해 네 개의 나침판 방향을 향하고 있다. 고대 지도는 이 생각에 따라 도식적으로 그려져 있다. 고대 지중해 연안, 중국, 기타 다른 아시아 지역 문명도 같은 시각을 갖고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조차도 다른 대륙이나 문명과 접촉이 없었음에도 똑같은 시각을 갖고 있었다. 죤 나이하르트의 책 「검은 사슴 말하다」에서 수우족의 치료사인 「검은 사슴」이 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고리”로서 “붉은 길”과 “검은 길” 두 길로 나뉘어져 있으며 두 길은 교차하게 되어있다고 말한다. 두 길의 교차점이 세계의 중앙산이다. 그 산 위에서 위대한 아버지 신왕 에너지은 검은 사슴에게 수우족을 위한 일련의 계시를 알려준다.
고대인들이 자리잡은 중앙은 여러 곳에 있다 ; 시나이 산, 예루살렘, 하이에라폴리스, 올림푸스, 로마 등. 그러나 그 곳은 언제나 질서정연하고 기하학적인 우주가 사분된 곳의 중앙이었다. 우주의 중앙에는 언제나 왕신과 남자이 통치하는 곳이며 신성하고 조직적이며 창조적인 힘의 신성한 계시의 장소였다.
왕 에너지의 질서잡는 기능에 대한 견해가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고대 지도에서 보일 뿐만 아니라, 사막 인디안의 모래그림에서, 불교예술의 이콘에서, 기독교교회의 장미창문에서 뿐아니라, 심리분석 치료를 받는 현대인들의 그림이나 꿈에서 끈질기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주목한 융은 이러한 표현에 대한 이름을 티벹 불교에서 빌려와 조직하는 중앙을 “만다라”라고 불렀다. 치료받는 사람의 꿈이나 환상에 만다라가 나타날 때 언제나 치유하는 힘과 생명력을 주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언제나 쇄신을 상징하였으며, 페리의 왕 이미지와 같이, 그들은 인격이 좀 더 중심잡힌 방식으로 재조정되며, 좀 더 진정되고 통일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목숨이 유한한 왕을 통하여 이 왕 에너지의 질서잡는 기능이 하는 일은 왕국의 사람들을 위해 신성한 세계의 질서잡는 원칙을 구현하는 것이다. 인간 왕은 이 일을 법전을 편찬함으로써 한다. 그는 법을 만들고, 더 정확히는, 왕 에너지로 부터 그것을 받아서 국가에게 전달한다.
시카고의 동양협회 박물관에는 실물크기의 하무라비 법전(기원전1728-1686)의 기둥복제가 있다. 그 “기둥”은 실제로 위를 향해 가르키고 있는 거대한 집게 손가락의 형상으로, 실은 “잘 들어라! 이것이 가르침이다! 이것이 세상 일이 되어가야 하는 법이다”하고 말하고 있다. 이 거대한 손가락의 손톱에는 명상에 잠긴 하무라비의 그림이 있는데, 하무라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위대한 신 샤마쉬신들의 왕, 태양:남성의식의 빛의 최고의 상징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샤마쉬는 손가락이 주위에 쓰여진 법을 하무라비에게 주고 있다. 이 손가락은 고대인들이 신의 의지를 지칭할 때 부르는 “신의 손가락” 그 자체이다. 법전을 받고 있는 하무라비 그림은 태초의 혹은 고태형적인 사건항상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는으로 왕 에너지가 그의 인간 하인인, 목숨이 유한한 왕에게 평화와 안정과 질서의 열쇠를 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때에 상관없이 일어나는 이 일은 태초의 산, 시나이에서 야훼로부터 토라를 받는 모세의 얘기로 성서에 묘사되어 있다.
왕국과 그 궁정과 사원에, 그리고 인간의 법과 모든 사회적 질서관습, 전통, 언어로 표현되거나, 되지 않은 금기 등에 표현된 이 신비스러운 질서는 창조주 신의 질서 잡는 사고의 표출이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이것은 Path 신 혹은 “옳은 질서”라고 불리는 마트(Ma'at) 여신으로 번갈아 간주된다. 이 생각은 더 진전되어 성서의 잠언서에 지혜의 형태로서 초기 유태인들의 사고에 나타나며, 후에는 기독교인들의 그리스도 사상으로 발전되어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얘기하는 질서를 만들고 생성력있는 창조하는 말씀으로, 로고스로 진전된다. 힌두교에서는 이 고태형적 “옳은 질서”를 다르마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도(道), “길”이라고 불린다.
목숨이 유한한 왕의 의무는 이 우주의 옳은 질서를 받아 자기 백성에게 전하여 사회적 형태로 그것을 수용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살고, 그것을 자신의 인격 안에 육화하는 것이다. 인간 왕의 첫째 책임은 마-트, 혹은 다르마, 혹은 도에 따라서 사는 것이다. 왕이 그렇게 하면, 신화가 말하기를, 왕국의 모든 것창조, 세계이 또한 옳은 질서를 따라서 간다. 왕국은 번영할 것이다. 왕이 도를 따라서 살지 않으면 그 백성과 혹은 왕국 전체에게 하나도 옳게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왕국은 쇠락하고, 왕으로 대표되는 중앙이 허물어지고, 왕국에는 반란이 익어간다.
고대 이집트 역사의 중간 왕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예언자 네페르-로후는 마아트에 따라 살지 않은, 비합법적 왕의 통치 결과로 닥칠 사회적, 경제적 재앙을 묘사한다(오이디푸스의 불경한 통치 후에 일어나는 테베 왕의 충해를 상기시킨다). 네페르-로후는 말한다 :
레(Re창조주 신의 또 다른 이름)는 대지의 토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땅은 완전히 죽었다… 태양의 표면이 덮히어졌다. 태양은 비추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 강은 메말랐다… 좋은 것들은 진실로 다 파괴되었다… 좋은 것은 다 사라졌다… 동쪽에서 적들이 일어나고, 아세아인들이 이집트로 내려왔다… 사막의 야수들이 이집트 강에서 목을 축이고… 이 땅은 대혼란이다… 남자들은 전쟁무기를 집어 들어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남자들은 쇠화살을 만들고, 피의 빵을 구걸하고, 병자의 웃음을 웃는다. 사람의 마음이 자신만을 쫓는다… 서로 서로 죽이는데 뒤돌아 앉아 혼자 쪼그리고 있다. 아들이 적이되고, 형제가 원수가 되며, 자식이 아비를 죽인다.
그리고 나서 네페르-로후는 옳은 질서의 원칙을 구현할 새로운 왕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다. 새 왕은 이집트를 복구하고 우주를 올바로 잡는다 :
「그리고 나서」 한 왕이 오리니, 남쪽에 속한, 승리자 아메니가 그의 이름이다. 그는 누비아 땅 여인의 아들이다; 북쪽 이집트에서 태어난 자이며 그가〔힌〕왕관을 취할 것이다; 그가 붉은 왕관을 쓸 것이다; 그가 두 위대한 능력자를 결합할 것이다; 그는 두 주인이 바라는 바를 가지고 두 주인을 만족케 할 것이다; 들판을 둘러 싼 자가 그의 손아귀에 들 것이다… 기뻐하라, 그가 올 때의 사람들아! 인간의 아들이 그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리라. 악에 기우는 자와 반역을 꿈꾸던 자들은 그가 두려워 말을 잃었다. 아시안인들은 그의 검에 쓰러지고, 리비아인들은 그의 불길에 쓰러지리라… 생명과 번영과 건강의 통치자의 벽이 세워지리라!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이집트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리라!… 정의가 제 자리를 찾고 불의가 쫓겨나리라. 기뻐하라. 이 일을 보게 되는 자!
같은 방식으로 중국 황제들은 “하늘의 명”을 받아 통치하였다. 여기서 하늘은 다시 “옳은 질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였을 때, 반역은 도리에 맞는 것이며 새로운 왕도가 세워졌다. “왕이 승하하셨다; 왕은 무궁하다”.
왕의 성숙한 남성 에너지 영향 하에서 왕권을 행사한 도덕적인 왕은 첫 째로, 자신의 삶에서 질서를 살아냈고; 오직 부차적으로 그것을 강요했다. 자신의 왕국 뿐아니라, 왕국 외곽의 혼란이 공유되는 영역까지도 그렇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왕이 전사로서 “아시아인”과 “리비아인”에 대항하여 질서를 방어하고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덕적 왕은 왕 고태형의 지상적인 구현 및 하인으로서 역사적으로 이 일을 수행하였는데, 그것은 정신세계의 혹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심연의 무의식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 왔다. 바빌로니아 신 마르둑은 용 티아마트로 형상화된 혼돈과 싸워, 악녀의 군대를 물리치고 용을 살해하여, 그녀의 몸으로 부터 질서잡힌 세계를 창조해 내는 신화가 있다. 혼돈과 죽음의 쌍둥이 괴물, 얌과 못트를 살해하는 가나안사람 발의 얘기도 있다. 야훼(유태인의 신 여호와)가 용 베헤모트 혹은 테홈을 물리치고 그의 왕좌에 올라가 질서와 세계를 창조하는, 성서의 대관 시편에서 이 왕 에너지의 기능을 볼 수 있다.
아주 가까이 볼 수 있는 예는, 미성숙하거나 나약한 아버지 혹은 아버지가 부재하는 결손 가정에서 왕 에너지가 충분히 있지 않을 때 그 가정은 흔히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한다.
이 질서잡는 기능과 연계해서, 두 번째 치명적으로 왕 에너지가 표현하는 것은 다산과 축복이다. 고대인들은 언제나 다산을인간, 곡식, 가축 및 일반적인 자연환경을 막론하고신들의 창조적인 질서잡기와 연계지었다. 가부장제 시대 이전에는 대지의 어머니가 다산의 첫째 조달원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제가 우세하게 되자 다산의 조달원이 여성으로 부터 남성으로 그 중요성이 교대되었다. 이 교대가 간단한 것이 아닌 것이, 그 중요성이 완벽하게 교대되지 않았던 것이다. 고대 신화는, 생리학적 진실에 맞게, 여성과 남성의 통합이 진실로 생성력이라고적어도 육체적 선상에서는인정하였다. 그러나 문화적 사상에서는 문명과 기술의 창조와 자연환경의 정복에 있어서 남성적 생성 에너지가 가장 뛰어났다.
신성한 왕은 고대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우주의 생명력과 본능의 첫째 가는 표방이었다. 유태인, 기독교인, 모슬렘교도의 신이 여신과 함께 창조적인 협력관계를 보인 적은 없다. 신은 남성으로 생각되고 창조력과 생성력의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된다. 남성 신이 다산과 축복의 유일한 조달원이다. 현대의 많은 믿음들은 고대 가부장제의 믿음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다산과 축복을 공급하는 신성한 왕의 기능은 옛날 위대한 왕들의 신화에서 많이 나타난다. 정신세계에서, 위대한 아버지 신은 여신과 인간 여성과 성적 관계를 맺어 많은 자식을 출산한다. 이집트의 아문라 신은 하늘에 그의 후궁이 있었고, 제우스의 여성 탐닉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왕 에너지의 다산 능력을 나타내는 많은 신의 자식들을 생산하는 것은 성적행위 뿐만 아니다. 이 생성능력은 그의 창조적인 질서잡기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가나안의 바알 신은 혼돈의 바다의 용을 물리친 후, 그가 대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혼란한 바다로 하여금 비로, 강으로, 내(川)로 되게 명령한다. 이 명령행위(질서잡기)로 인해 처음으로 식물의 번성과 차례로 동물의 번성이 가능해 졌다. 그리고 신의 특혜를 받는 인간들에게 농사와 목축의 은혜가 가능해 졌다.
이집트의 “아톤(태양) 찬양”에 의하면, 세상에게 명령하여 번성하고 비옥하게 만든것은 아톤이다. 아톤은 이집트에 나일을 놔 주어서 새들이 갈대 밭에서 둥지를 틀고 아톤이 그들에게 내려 준 삶을 즐거이 노래하고, 가축이 자라고, 송아지들은 만족과 행복감에 꼬리를 흔든다. 아톤은 다른 민족들을 위해 “하늘에 나일”을 놔 주어서, 그들도 삶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했다. 그리고 아톤은 세상에 명령하여 모든 민족과 모든 언어가 각자 방식대로, 아톤의 계획에 따라 생명과 다산의 축복을 받게 하였다.
목숨이 유한한 왕이 하는대로, 그의 왕국의 질서도, 풍요도 따라 갔다. 왕이 정욕적이고, 성적으로 왕성하면, 자신의 많은 부인과 후궁을 거느려 많은 아이를 출산하면, 대지도 생명력을 가질 것이다. 왕이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강하며, 정신적으로 깨어있고, 조심성 있으면, 곡식이 잘 자라고; 가축이 늘어나며; 상인이 번영하고; 많은 애기가 태어나 그의 백성이 될 것이다. 비가 올 것이고, 이집트에는 매년 비옥한 나일이 홍수가 진다.
성서에서, 같은 생각이 유태인 왕과 부족장에게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야훼가 그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셨다; 첫째 야훼의 길을 걸을 것과(이것은 유태인의 도에 해당된다); 둘째, “많은 열매를 맺고 번성하라”, 즉 많은 아내와 아이들을 가지라는 것이다. 가부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면, 그 아내가 다른 여자나 후처를 취하여, 남편의 다산 기능이 계속되도록 하였음을 볼 수 있다.
다윗왕은 자기 왕국의 많은 여인들을 취하여 아이들을 많이 출산하였다. 요점은 이러한 왕들이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번창하면 그들의 부족과 왕국 또한 번창한다는 점이다. 인간 왕은, 신화가 말하는 바, 왕 에너지의 구현이다. 대지인 그의 왕국은 여성 에너지의 구현이다. 사실 왕은 대지와 상징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언제나, 왕의 질서잡는 생성적 행위의 정점은 첫 번째 여왕과 결혼하는 형식으로 대지와 결합하는 것이다. 자기 왕국의 모든 면에서의 풍요를 확보하는 길은 그녀와의 창조적인 협력관계에서 일 뿐이다. 다산의 형태로 왕국에게 창조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 왕 부부의 의무였다. 왕국은 왕실의 생성력을 반영할 것인데, 기억할 것은 왕실은 왕국의 중앙에 있다. 중앙이 그러하면 나머지 창조도 그러할 것이었다.
왕이 병들거나, 나약해 지거나, 무생식이면, 왕국은 피폐해졌다. 비가 오지 않았다. 곡식이 자라지 않았다. 가축이 생산하지 않았다. 상인은 교역을 못하였다. 가뭄이 대지를 황폐화하고, 사람들은 쓰러졌다.
그러므로 왕은 신의 세계왕 에너지의 세계로부터 이 세상으로 이어지는 도관이었다. 왕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 사마쉬 앞에 서 있는 하무라비 같았다. 그는 생명의 피가 인간세계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중앙 동맥이었다. 그가 중앙에 있으므로 해서, 왕국의 모든 것은(그로 인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것이다모든 곡식, 가축, 사람, 여자들. 어쨋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목숨이 유한한 인간, 다윗 왕은 아름다운 여인 바쎄바에 관하여 이 원칙을 뒤엉켜 썼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림자 왕에 대해 곧 이어서 다음 장에 논하게 만든다.
왕의 효용성을 통하여, 왕 에너지의 두 번째 기능에서 나온 것은 육체적 의미의 다산 혹은 일반적 의미의 창조와 생성력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축복이다. 축복은 심리적 혹은 정신적 일이다. 양질의 왕은 언제나 그럴 자격있는 사람들을 반영하고 확인했다. 왕은 그들을 접견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글자 그대로, 궁정에 배석한 사람들을 만나고, 심리적 측면에서는 그들의 가치를 알고 주목함으로써다. 양질의 왕은 양질의 사람을 발견하고 그들을 자신 왕국의 책임있는 위치에 승진 시키면서 즐거워 했다. 왕이 신민을 접견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자신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신민들 내부에서 바라는 왕 에너지를 그가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신민을 보고, 즐거워하며, 그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에게 마땅한 영예를 주기 위함이다.
고대 이집트의 왕 아케헤나톤이 자기 궁정 발코니에 서서 아버지 신 태양, 아톤의 후광을 받아 빛나는 가운데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에게 금반지를 던져주는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 있다. 남성적 태양의식의 빛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부하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생성적이다. 그는 그들에게 축복을 준다. 축복을 받으면 우리에게는 심리적으로 지대한 영향이 미친다. 우리가 자긍심을 느끼거나, 칭찬을 받거나, 축복을 받았을 때 우리 몸이 실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연장자들로 부터, 왕 에너지로부터의 축복에 굶주려 있다. 그들이 “철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굶주려 있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축복 받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왕이 봐 줄 필요가 있으며, 왕이 봐 준다면, 그들 내부의 어떤 것이 철이 들게 될 것이다. 그것이 축복의 효력이다. 그것은 치유하며 온전하게 한다. 우리가 가치를 인정받고 적합하게 타고난 재능과 능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상받을 때(어쩌면 파라오의 손에서 떨어지는 금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많은 고대 왕들은, 오늘날 “왕적인” 위치에 있는 많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양질의 왕의 이미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중앙 고태형은 우리 누구나로부터 독립적으로 계속 살아남아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삶 안으로 들어 와 굳건해지고, 창조하고 축복하며 모색하고 있다.
양질의 왕의 특징들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대 신화와 전설에 기초해서 볼 때 이 성숙한 남성 에너지의 자질들은 무엇일까?
충만된 왕 고태형은 질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 양태, 통합된 남성심리의 자질들을 소유한다. 그것은 혼란한 감정과 통제를 벗어난 행동을 안정시킨다. 그것은 안정감과 중심감을 준다. 그것은 활력, 생명력, 기쁨을 중계한다. 그것은 지속성과 균형을 가져 온다. 그것은 우리 내적 질서감을 방어하고 우리 실존의 목적과 존재의 통합성,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자신의 중심적 안정감,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남성 정체성에 대한 확신과 근본적인 확고함을 방어한다. 그것은 세상을 확고한 그러나 부드러운 시각으로 보게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약한 그대로, 재능과 가치있는 그대로 본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영예롭게 하고 고무시킨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안내하고 육성하며 존재를 만개하도록 한다. 그것은 시기하지 않으니, 자신이 왕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에 내재된 창조력을 격려하고 상을 준다.
왕 에너지가 전사와 결합되어 표출될 때, 그것은 공격적인 힘을 대표하는데 그것은 질서가 위협받았을 때의 필요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또한 내적 권위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지하고, 분별하고(왕 에너지의 마술사적인 면), 자신이 깊이 알고 있는 것을 행동한다.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그리고 타인을 기쁘게 하며(연인측면) 그리고 그 기쁨을 적절한 칭찬과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여 우리의 삶을 강화시킨다.
이것은 한 남자가 자기의 아내와 아이들이 번영하도록 필요한 재정적, 심리적 단계를 밟고 있을 때 그를 통하여 표출되는 에너지이다. 이것은 자기 아내가 변호사가 되기 위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자 할 때 아내를 격려하는 에너지이다. 자식의 피아노 연주회에 참석코자 직장에서 시간을 내는 아버지를 통하여 표출되는 에너지이다. 자기에게 대드는 부하직원을 해고시키지 않고 맞부딪치는 상사의 에너지이다. 회복기의 알콜중독자와 마약중독자들을 책임지고 맡아서 작업감독을 하며, 그들의 금주를 도와주고 남성적 지도와 육성으로 그들에게 힘을 길러주는 조립작업장 감독을 통하여 표출되는 에너지이다.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침착성을 잃고 있을 때 혼자서 냉정해 질 수 있는 당신을 통하여 자신을 표출하는 에너지이다. 이것은 혼돈과 투쟁의 시간에 침착함과 확신감, 그리고 격려의 말을 전하는 목소리이다. 이것은 심사숙고 한 후, 가정, 직장, 국가, 세계가 어지러울 때 명확한 결단을 내리는 에너지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평화와 안정, 순리적인 성장, 발전을 모색하는 에너지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과 자연세계를 위해서도 이를 모색하는 에너지이다. 왕은 왕국 전체를 돌보며 인간사회 뿐아니라 자연의 집사이기도 하다.
고대 신화에서 “자기 사람들을 치는 목자”이며 “정원사”이고 왕국의 식물과 동물의 관리자로 표명되는 에너지가 이것이다. 이것은 그 모든 것의 인권을 분명하고, 침착하게, 권위있게 긍정하는 목소리이다. 이것은 벌을 최소화하고 상을 최대화하는 에너지이다. 이것은 모든 남자의 내부의 태고적 언덕,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이다.
그림자 왕 : 폭군과 나약한 자
비록 우리들 대부분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이 성숙한 남성의 에너지를 경험하였어도아마도 우리가 잘 안정되어, 침착하고 중심이 잡혀있을 때나, 때때로 우리 아버지, 친절한 삼촌, 혹은 할아버지, 동료, 상사, 선생님, 목사로부터, 우리들 대부분은 또한 충만된 왕 에너지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여기 조금 저기 조금 그것을 느껴 본 적은 있지만, 이 긍정적 에너지가 대부분 남성의 삶에서 참혹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음은 슬픈 사실이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대체로 우리가 그림자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모든 고태형에서와 마찬가지 경우로, 왕도 활동적-소극적 양극 그림자 구조를 갖고 있다. 활동적 극단을 폭군 그림자 왕으로, 소극적 극단을 나약한 자로 부른다.
우리는 성서의 예수탄생 설화에서 활동하는 폭군을 볼 수 있다. 아기 그리스도의 탄생 직후 헤로데 왕은 아기가 이미 태어나, 바로 자기가 통치하는 이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베들레헴으로 군대를 보내 새로운 왕새 생명을 죽이려고 한다. 예수는 신성한 아이 였으므로 제 시간에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헤로데의 군대는 마을에 남겨진 모든 남아를 살해한다. 새로운 것이 태어 날 때마다, 우리 내부의 (혹은 외부 생활의) 헤로데가 공격한다. 폭군은 새 생명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시기한다. 그 새 생명은 그의 느낌에는 자신이 간신히 붙잡고 있는 왕권에 위협이기 때문이다. 폭군 왕은 중앙에 있지 않고 침착하거나, 생성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는 창조적이지 못하고 파괴적일 뿐이다. 자신의 생성력과 내적 질서에자신 구조자신감이 있었다면 자기 왕국에 새로이 태어난 생명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만약 헤로데가 이런 자질의 사람이었더라면, 자기가 옆으로 비켜날 때가 온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며, 그리하여 고태형이 새로운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서의 또 다른 사울 왕의 얘기도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다. 사울은 폭군에 사로잡힌 또 다른 인간 왕이었다. 새로이 지명된 다윗 왕에 대한 그의 반응은 예수에 대한 헤로데의 것과 똑같다. 두려움과 분노로 반응하며 다윗을 살해하려 든다. 예언자 사무엘이 야훼께서 그를 더 이상 왕으로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음에도즉 왕국을 위해 왕 에너지를 구현하지 못한다고사울의 자아는 왕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왕좌를 내놓기를 거부한다. 인간 폭군들은 왕같은 위치(가정이든, 사무실, 백악관, 크레물린이든 간에)에서 자신을 왕 에너지와 동일시 하면서, 자기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고대의 또 다른 예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 이다. 전 황제들이 전 지중해 연안 세계에 걸쳐 로마 상원과 신민들 위에 막대한 권력으로 군림하였고, 사후에는 신격화되기 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칼리큘라는 아직 지상에 있을 때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는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그의 광기와 학정과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향한 가학주의는 놀라울 지경이다. 칼리큘라라는 인간 안에서 그림자 왕이 폭군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설명한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책, 「나클로디우스」는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폭군은 타인들을 착취하고 학대한다. 그는 잔인무도하고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할 때는 감정이 없다. 타인을 경멸하는 데는 뭍이 없다. 모든 아름다움, 순수함, 강함, 재능, 생명 에너지를 그는 증오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미 얘기했듯이 내적 구조가 결여되었으며, 자신의 나약함과 그 나약함을 받치고 있는 자신의 잠재력 결여를 두려워하기실제로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속에 있는 그림자 왕 폭군이 자식의 즐거움, 힘, 능력, 활기로 인해 자식과 전쟁을 하게 만든다. 그들의 신선함, 존재의 새로움, 그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생명력을 두려워 하고 그것을 죽이려 든다. 언어로 목욕을 주고, 그들의 흥미, 재능을 경멸함으로써 이렇게 하거나; 반대로 그들의 성취를 무시하고, 그들의 실망에 나 몰라라 하며, 학교에서 좋은 시험 결과나 미술 작품을 가지고 집에 왔을 때 흥미없어 하거나, 지리함을 표현하며 그렇게 한다.
그의 공격은 언어나 심리적 학대에 한하지 않을지 모른다; 육체적 학대로 포함될 수 있다. 엉덩이 때리기는 매질로 변한다. 그리고 성적 학대도 있을 수 있다. 폭군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자기 딸을 성적으로 유린하거나, 자기 아들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유린할 수도 있다.
결혼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이 상담하러 찾아왔다. 치료를 시작한 직후 그녀가 묘사한 것은 성적으로 사악한 면을 가진 폭군에 의해 침범된 그녀의 가정이었다. 그녀가 12살 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 어머니, 여동생을 떠나 다른 여인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 다른 여인의 남편이 이 가정으로 들어왔다. 이 남자는 자기의 새 아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곧 어린 의붓 딸의 아름다움과 공격하기 쉬운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의붓 딸이 자기와 함께 자기를 요구했다. 곧 그는 딸에게 성관계를 요구했고, 응하지 않으면, 그들을 떠나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어린 딸의 어머니는 이 끔찍스러운 학대를 막을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아침이 되면 청소를 하면서 부산하게 굴었다.
다윗 왕과 바쎄바의 얘기에서, 바쎄바는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다. 어느날 다윗은 자기 궁전의 지붕 위를 걷다가 목옥하는 바쎄바를 발견하였다. 이 광경에 너무 흥분하여 그녀를 불러와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 이론적으로는, 왕국의 모든 여인은 왕의 소유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고태형에 속하는 것이지, 인간 왕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왕 에너지와 동일시 하였고, 바쎄바를 취할 뿐 아니라 그의 남편을 죽였다. 왕국을 위해서 다행히도 다윗에게는 예언자 나단이라는 형식으로 양심이 있었으니, 그는 다윗에게 와서 다윗을 고발하였다. 다윗의 훌륭한 점은, 고발의 사실성을 받아들이고 참회하였던 것이다.
폭군 왕은 우리들 모두 안에 때때로 혹은 우리가 한계 상황까지 밀려갔을 때, 우리가 지쳤을 때, 우리가 우쭐해 졌을 때 드러난다. 그러나 대체로 어떤 성격유형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소위 자기애적 성격 장애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실제로 우주의 중심에(자기들 자신은 전혀 중심이 잡혀있지 않지만) 있으며, 타인들은 자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을 반영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끝없이 반영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을 보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를 바란다.
폭군 왕이 특정한 생활방식, 특정 “직업”에서 조차도 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약 밀매인, 매음꾼, 마피아 두목들이 다 그 예다; 자신들의 지위를 확장하려고 존재하는데,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남을 희생한 대가로 자신의 복리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이해 추구는 사회 관습상 인정받는 위치에서도 볼 수 있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은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의 경험, 훈련, 자신의 희망 및 회사에 대한 희망에 관해서 대화를 풀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성취도, 자신의 세력, 자신의 봉급과 자기 회사의 좋은 점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 기업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일하는 회사에 대해 전혀 흥미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갈 길과 승진할 길만 찾고 있다. 이사진들은 자신들의 권위 하에 놓여진 “왕국”을 위해 좋은 관리자가 되는 것 보다는 자신의 경력을 쌓는데에만 정신이 쏠려 있다. 회사에 대한 헌신이나 진실한 충성심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 자신의 재정적 이득을 위해 회사를 매도하고, 회사원들이 흩어지고 무능력해지도록 희생되는 것을 기꺼이 보는, 요즈음 유행하는 “차익금을 노리는 회사매도”를 하는 사람이다.
폭군에 사로잡힌 사람은 비판에 대해 아주 예민하며, 비록 위협적인 위세를 부리기는 해도, 조그마한 말에도 쉽게 위축되거나, 우쭐 댄다. 그러나 그는 물론 이것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다. 잘 찾아보지 않는 한, 보이는 것은 분노 뿐이다. 그러나 분노 밑에는 자신의 무가치함, 상처받기 쉬운 취약성, 나약함에 대한 감성이 있다. 왜냐하면 폭군 뒤에는 왕의 양극단 그림자 중 다른 한 쪽인 나약한 자가 있기 때문이다. 왕 에너지와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으면, 그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낀다. 이 소극적 극단에 숨어있는 존재는 “나를 부러워 하라”, “나를 숭배하라”, “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라”는 외침에 굶주려 있다주위의 상사나 친구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는 것을 말한다. 패튼 장군은 그의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대해 숨겨진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영화 「패튼장군」에서 2차대전 중 야전병원을 순시하는 장면이 있다. 부상병들을 하나하나 찾아 위로하고 훈장을 준다(왕이 충만되었을 때 하는 일), 그러다가 “참호공포”에 시달리는 벙사에게 간다. 패튼은 무엇이 문제인가 묻는다. 그러자 병사가 신경이 마비되었다고 말한다. 생명을 주는 왕이라면 이 병사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정심으로 반응하였을 터이지만, 패튼은 대노하여 병사의 따귀를 때리고, 비겁한 놈이라고 부르며 병사를 창피주고, 학대하며 병원에서 끌어내어 전선으로 보낸다. 그 자신은 몰랐지만, 그가 본 것은 다른 사람 위에 반영된 자신의 숨겨진 두려움과 나약함이었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나약한 자를 얼핏 본 것이다.
나약한 자에 사로잡힌 사람은 중심감, 침착함, 자신에 대한 안정감을 결여하고 있으며 이것은 역시 그를 편집증으로 몰고간다. 헤로드, 사울, 칼리귤라 모두에게서 이를 볼 수 있는데, 밤에 잠을 자지 못하며, 궁전을 서성거리고, 자기 부하들의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을 고문하고사울의 경우는 자기 자식으로부터 조차도진정한 왕이신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받는다. 양극단의 그림자 왕에 사로잡힌 남자는 사실상 두려운 것이 아주 많다. 왜냐하면 그의 강압적인 행동은 자주 잔인성을 수반하는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같은 종류의 반응을 애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편집증이라고 해서 남이 다 자기를 잡으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말에 우리는 웃곤한다. 잡으려 들지도 모른다. 방어적이고, 적대적인, 당하기 전에 먼저 공격한다는 편집증이 자신의 내적 안정과 질서를 파괴하고, 자신의 성격과 타인의 성격을 파괴하며, 보복을 일으킨다.
자기 교회에 위기가 일어난 직후 한 목사가 심리분석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 일단의, 제대로 일을 못해 본 불만분자들과 심리학적 정신적 무법자들이 그룹을 형성하여, 그들 자신의 시기심에 의거하여, 이 목사를 파괴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밤에 신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꿈 속에서 목사에 반대하는 자기를 목사가 살해하려 한다는 것을 하느님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 자였다. 편집증은 감염된다. 이 “궁정 쿠데타”의 편집증적 주모자는 이 목사를 밤․낮으로 전화로 괴롭히고, 협박이 담긴 저주 편지로 들볶고, 설교중 큰 소리로 방해하고, 교회 모임에서 목사의 실패를 자기들이 가정한대로 폭로하였다. 이 목사는 자신의 왕 에너지와의 관계가 확고하지 못했던 관계로 서서히 폭군/나약한 자의 세력 하에 빠져들어 갔다. 목사는 교회정책에서 극도로 폭군적이고 독재적이 되어 갔으며, 교회운영에서 더욱 더 많은 권한을 독점하여 가면서, 자기의 “적”들을 교회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치졸한 술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목사는 밤마다 자신의 숨겨진 두려움과 나약함을 드러내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다. 쌍방의 편집증은 검은 핵구름을 일으켜, 목사와 신도들이 혼란과 속임수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이것은 목사가 그렇게도 가르치고자 했던 영적 가치들이 깡그리 없어진 세계로서그림자 왕의 또 하나의 승리였다.
우리는 높은의자 폭군의 유아적 행동양식에서 일어나는 폭군과의 관계를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신성한 아이의 경우 “허세”는 어떤 의미에서 정상적이다. 신성한 아이가, 아기 예수와 같이, 경배 받기를 원하고, 또 왕들에게서 조차 경배를 받는 것은 적절하다.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이것은 아주 어렵기는 하지만, 자신의 자식 속에 있는 신성한 아이에게 적당한 양의 경배와 확신을 줌으로써, 그들의 인간 아기가 “높은 의자”에서 순수히 편안하게 점진적으로 내려 와 이 세상으로; 신들은 인간들처럼 살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인간 아기가 신성한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 하지 못하도록 점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아이가 왕좌에서 내려오기 싫어하겠지만 부모들은 아이에게 애정의 확신을 주고 “한 번 내려 올 때마다 한 번의 뽀뽀를” 해주면서 끈질기게 인내해야 한다.
부모들이 아이를 지나치게 공경하며, 남자 아기의 자아가 고태형 밖으로 나와 형성되는 것을 도와주지 않으면, 아이는 그의 높은 의자에서 절대로 내려오지 못한다. 높은의자 폭군의 힘에 우쭐대면서 자신이 “씨이저”라고 생각하며 성년기로 들어간다. 이러한 사람에게 “세상에, 자신이 씨이저인 줄 알아”하면서 생각을 일깨우면, 그의 대답은 “에? 그게 어때서요?”하고 대답할 가능성이 아주 많다. 이것이 남자들 속에 그림자 왕이 형성되는 한 방식이다.
그림자 왕이 형성되는 또 다른 방식은, 처음부터 부모가 남자아이의 자부심과 영광을 공격하며, 아기를 학대하는 것이다. 신성한 아이/높은의자 폭군의 자부심(허세)은 찢어져서 아이의 무의식 속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 들어간다. 소년은, 결과적으로, 나약한 왕자의 세력 밑으로 들어간다. 후에 그가 “성인”이 되어 나약한 자의 세력 밑에서 기능을 할 때, 성인세계의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의 억눌렸던 허세가, 아주 생경하고, 원시적이고, 완전히 조절장치가 풀린 채로 강렬하게 폭발하여 표면 위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멋지게” 보이지만, 일단 “승진”되고 난 후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작은 히틀러가 된다. 이런 사람에겐 “권력은 부패한다 :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아주 정확하게 맞는다.
왕에게 접근하기
장차 인간 “왕”이 될 사람이 왕 에너지를 접하려면은 그 첫 째 임무가 그것으로 부터 자아를 동일시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왕의 통합된 충만과 분열된 양극단의 그림자 형태로 부터 소위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식적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성인 삶에서의 실제적인 위대함은, 허세와 우쭐거림과는 반대로, 왕 에너지와 다른 성숙한 남성 에너지와 자신과의 적절한 관계를 인식할 줄 아는 것을 포함한다. 적절한 관계란 별과 그 주위를 돌고있는 행성과의 관계와 똑같다. 행성은 행성계의 중심이 아니다. 별이 중심이다. 행성이 할 일은, 생명을 주지만 죽음도 다루는 능력이 있는 별로부터 적절한 궤도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생명과 복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행성은 그 생명을 별로 부터 얻기 때문에, 별을 “숭배”해야 할 개인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니면, 다른 이미지를 이용하자면, 성숙한 남자의 자아(ego)는그가 현재 어떤 지위나 세력을 확보해 놓았든 상관없이개인을 변화시키는 의지 혹은 동기의 하인으로서 스스로를 생각해야만 한다. 왕 에너지의 관리자로서 스스로를 생각해야 만 한다. 왕 에너지의 관리자로서 스스로를 생각해야만 하는데,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의 “왕국” 내에 있는 사람(무엇이든)들을 위해서이다.
고태형들의 양극단 그림자 체계의 “적극적” 및 “소극적” 양극 간의 차이를 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깨닫듯이 고태형적 구조를 삼각 혹은 삼위일체로 보는 방식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방식은 자아가 충만된 고태형과 자기를 동일시 하는가, 아니면 고태형으로 부터 자기 정체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동일시 할 경우, 그 결과는 자아가 과장되어, 유치한 단계에서 성장이 멈추게 된다. 극단적으로 고태형으로부터 자아와 거리를 두게 될 경우, 자아는 고태형에 접근이 박탈된 것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현실에 있어서는 왕의 기능장애 그림자의 소극적 극단에 잡히게 된다. 자아는 왕 에너지에 굶주린 듯이 느낀다. 권력의 근원과 동기의 “소유권”에 대한 결여감 혹은 박탈감이 언제나 이 고태형의 소극적 극단의 성격이다.
폭군으로서의 그림자 왕은 이러한 시각에 따라서 자신이 일어났기 때문에, 자아가 왕 에너지 자체와 자기를 동일시하게 되면, 전체 인격을 변화시키는 개입을 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가장 우선 순위이다. 한 남자의 자아가 적정궤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태형의 태양 속으로 떨어졌거나,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방대한 양의 점화 가스에 의해 훈제되어 버렸다. 모든 심리체제가 방대한 양의 점화가스에 의해 훈제되어 버렸다. 모든 심리체제가 동요되었다. (약화 되었다). 행성이 별인 체 한다. 행성계의 진짜 중심이 사라졌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횡령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아가 왕의 자리와 권력을 횡령하였다. 이것이 바로 많은 신화에서 볼 수 있는 천상의 반역으로서 벼락출세한 신이 최고 신의 권좌를 차지하려는 것이다(사탄이 하느님을 무너뜨리려한 것을 상기시킨다).
이 에너지에 접근하는 데 따르는 또 다른 문제점은, 생명을 주는 왕과의 효과적인 접촉을 잃어버렸다고 우리가 느끼는 때에 일어난다. 이런 경우는 의타적 성격장애라고 불리는 범주에 들어 가는데, 내적 왕 에너지를(자신도 내적 체험이 없으면서) 외부의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는 것이다. 자신이 투영한 왕 에너지를 가진 타인의 애정어린 관심과 함께 있어 주지 않으면, 무능력해 지고, 행동 할 수 없고, 침착하고 안정된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가정에서 남편이 부인의 기분을 너무 맞춰 주려고 애쓰며, 주도권을 행사할 때에 그것이 불러일으킬 아내의 공격적인 화풀이 때문에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경우이다. 아이들의 경우에도 일어나는데, 부모들이 아이들의 독립적인 의지와, 기호와, 목표를 충분히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들을 부모의 날개 밑에 접어 두는 것이다.
직장에서, 우리가 상사의 힘과 변덕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혹은 우리가 감히 동료 앞에서 재채기도 못한다고 생각할 때 일어난다. 더 큰 규모로는, 국가에서 국민들이 자신을 농노로 생각하고, 자신의 내적 왕 에너지를 “총통각하”에게 모두 넘겨주었을 때, 일어난다. 이 “포기 증후군”은 나약한 자의 품질보증서로서 “횡령 증후군” 만큼이나 재앙을 불러온다.
“포기 증후군”의 비참한 결과의 본보기는,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정복했을 때, 지금의 멕시코 씨티 근처의 오툼바 들판에서 일어났다.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은 멕시코 군대의 대 공격을 받고 한밤중에 도망쳐 6일 전에 멕시코 씨티에 왔다. 칠일 째 되는 날이 밝자, 지치고 두려움에 찬 코르테스의 패잔병들이 오툼바 들판을 내려다 보니, 대규모의 멕시코 군대가 저들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의 운명은 결정적이었다. 어찌됐든, 이어지는 전투에서, 코르테스는 멕시코 사령관의 깃발을 목격하였다. 코르테스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 적군들의 목을 베며 공격했다. 그가 멕시코 사령관에게 다다르자, 일격에 그를 살해했다. 놀랍게도, 즉각적으로 멕시코 군대는 혼란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페인 군대는 그들을 뒤쫓아 많이 살해했다. 전투의 조류를 기적적으로 바꿔 놓은 것은 군대가 자기네의 대장이 죽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들은 이 대장에게 왕 에너지를 집중해서 투자했기 때문에, 그가 살해되자, 고태형적 에너지가 자기들을 저버렸다고 믿었다. 지도자의 죽음과 함께 밑에 숨어있던 해제된 권한이 표면으로 올라와 무능과 혼란에게 항복했던 것이다. 멕시코 전사들이 그들 내부에 왕 에너지가 있다고 알고 있었더라면, 멕시코는 결코 정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내적 왕과 단절되어 자신의 삶에 대한 권한을 남에게 주었을 때,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대규모의 비극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왕으로 만든 사람들이 우리를 전쟁으로 이끌고, 우리의 가정을 학대하고, 대량 학살과 나치 독일이나 죤스타운의 참혹함으로 인도한다. 아니면 저들은 우리들 속에 있는 나약함에다 단순히 우리를 팽개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왕 에너지를 우리 자신의 내적 왕의 하인으로서 올바르게 접근하였을 때, 우리들의 삶에서 선량하고, 정의로운 왕의 자질들을, 충만된 왕의 자질들을 분명하게 보여질 것이다. 우리의 재수좋은 군인도, 자신 속의 중국 황제에게 마땅히 무릎을 꿇을 것이다. 우리의 불안 수위가 내려 갈 것이다. 중심이 잡히고, 안정된 감을 느끼고, 내적 권위로 부터 들려오는 자신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자신과 타인들을 반영하고,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을 깊게 진심으로 돌볼 수 있는 아량을 갖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 그들을 있는 그대로 완전한 인격체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정의롭고, 안정되며, 창조적인 세계를 창조하는데 핵심 참여자로서의 존재감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뿐 아니라, 친구들, 회사, 운동, 종교뿐 아니라 세계를 위해 개인적 헌신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영성을 얻게 되어, 모든 인간 삶의 기초가 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계명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 “너의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왕’으로 읽을 것)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