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육성 사업’의 일부 심사위원은 올해 초 KAIST가 지원한 과제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지난해 1차 사업에서 많이 탈락한 ‘인문사회 분야’를 지원하고자 실시한 2차 사업에 KAIST가 학과 신설(논리학과 과학철학과, 과학기술정책과)을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인문사회 분야의 학과 신설이 이공계 인재 육성을 위해 국고 지원을 받는 KAIST의 정체성에 부합하는지를 두고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이견이 오갔다. 결국 이 과제는 최종 선정되지 않았다.》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총장 사퇴 논란을 계기로 특수목적대학교의 설립 취지와 정체성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과거 과학기술부가 설립한 KAIST, 산업 역군 양성을 위해 1980년대에 도입된 산업대, 예술 교육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담당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이 대표적인 특수목적대다. 이들은 정부가 ‘선택과 집중’에 따라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고 예산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KAIST에 편성한 예산은 기관운영비와 특수사업비 등을 모두 합쳐 2008년 1150억 원, 2009년 1400억 원이다. 최근 추경으로 580억 원이 추가돼 올해는 약 2000억 원이 KAIST에 투입된다. 이 중 등록금 지원에 쓰이는 학사사업비는 295억 원 정도다. 식비와 학자금도 일부 지원된다. 중상위권 일반대가 학생 1인당 교육비로 연평균 1000만 원 정도를 투자하는 데 반해 KAIST는 4500만 원 정도로 자체 평가하고 있다.
예산 지원 이유는 KAIST 학생들이 국가 성장동력을 키울 이공계 핵심 인재로 성장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KAIST에 인문사회과학부가 존재하고, 금융전문대학원(MBA)과 문화기술(CT)대학원처럼 이공계 인재 양성과 연관성이 떨어지는 대학원이 늘어나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교과부 관계자는 “광주과기원(GIST)과 달리 KAIST는 방계 분야가 생겨나 모든 부문에 국고를 지원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문의도 들어온다”고 말했다.
국민 세금으로 공부하는 KAIST 학부생들이 의학·치의학 전문대학원에 대거 진학하는 데 이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까지 진출하는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올해 첫 신입생을 뽑은 25개 로스쿨에 KAIST 학부 출신은 45명이 진출해 9위를 기록했다.
한예종은 1990년 설립 계획 공포 당시 명시한 설립 취지를 놓고 안팎의 견해가 갈리고 있다. 설치령의 설립 목적은 ‘예술 실기를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것. 정부는 이를 근거로 한예종이 예술 이론 교육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2005년에 한예종에 석박사 과정을 만드는 법안이 추진되자 50여 개 대학이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한예종은 실기 교육을 위해 설립된 학교인데 이론가 양성을 위한 석박사 과정을 만들면 안 된다”고 반대하기도 했다. 한예종은 기술과 예술 교육의 학문 융합을 위해 내년에 통섭원을 개원하려 했지만 문화부는 올해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하지만 시대 변화와 학문 발전에 따라 설립 취지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예종의 미술 전공 학생은 “외국의 유수한 예술학교들은 이론과 실기를 접목해 시대 흐름을 앞서가는데 우리만 20년 전 설립 취지를 고수하라면 발전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산업대는 시대 변화에 따라 아예 일반대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1980년대 산업인력을 양성하고 전문계고 출신의 평생교육을 담당하라고 만든 개방대는 16년 만에 산업대로 이름을 바꾼 데 이어 최근 잇달아 일반대 전환을 추진 중이다.
초기 산업대는 전기, 전산 등 산업 관련 학과로 특성화가 됐지만 지속적으로 인문, 사회 관련 학과를 만들면서 종합대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하지만 산업대라는 이미지 때문에 일반 4년제 대학에 비해 60∼80%의 낮은 등록금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외면하는 것이 전환의 이유다. 일반대학원을 둘 수 없고, 산업체 출신을 우선 선발해야 하는 등 규제가 많은 것도 불만이다. 과거 정부가 재정지원 사업에서 주던 인센티브도 거의 사라져 일반대와 경쟁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이에 따라 서울산업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산업대가 내년에 일반대로 전환하기 위해 실무작업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