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Arc de Triomphe)
그대는 아직도 푸른 그대 유월 가슴에 묻고 사는 어떤 한 인간을 가졌는가?
다행이다. 살아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대 가슴을 비워두지 마라.
다만 이미 한 사람인 그대가 한 사람을 온전히 제 안에 모시기는 어렵다.
그것은 이미 제안에 둔 너무 많은 저(Ego) 때문이다.
Ego의 다른 말은 자아(自我)이다.
‘핸디캡 이론’이 있다.
공작, 극락조, 바우어 새, 꿩 등의 수컷의 면이 자못 장엄하여 그가 구하는 암컷뿐만 아니라 제 천적에게도 금방 눈에 띄어 스스로 위험을 초래하는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위험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형질의 우수함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보여주기 전술’이라는 것이다.
칼라하리 사막에는 '스프링 벅(spring buck)'이란 산양이 산다.
사냥에 나선 백수의 왕 사자가 이 스프링 벅을 쫓으면 스프링 벅은 도망을 치면서 훌쩍 도약하여 높이 튀어 오른다. 이것은 분명 그만큼 따라잡히는 위험한 행동이지만 배고픈 사자에게는 ‘저놈은 엄청 잘 달리는 놈이다. 쫓다가 내가 지쳐 아무 것도 잡지 못할 것이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작은 무리를 지어 평화롭게 풀을 뜯던 스프링 벅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면 앞에 선 양들이 풀을 다 먹어버려서 뒤의 양들은 먹을 것이 없게 되어 제일 앞에 나서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뒤에 쳐진 무리들이 앞으로 나가고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먹을 풀보다는 맨 앞자리만을 위해 내달린다. 그리하여 탄력을 받은 무리 전체가 무서운 속도로 뛰다가 앞에 절벽이 나타나면 내달리다가 모두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이다.
이를 스프링 벅 현상(spring buck phenomenon)이라한다. 부동산이나 증권시장 과열에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참으로 억울하고 불합리한 것 같지만 세상의 미인은 다 왈짜들이 차지한다. 이 또한 그들이 더 우수한 형질을 가졌을 것이라는 핸디캡 이론의 근거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미인을 보면 그녀의 주인은 깡패라고 얌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폭력성이란 것은 눈이 없어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무엇에 매여야 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종속 사상의 암컷들은 그것에 자신을 지불할 만한 대가라고 스스로 미화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다. 나는 소심하여 차분한 사람이다. 나는 깡패가 아니다.
유월 느티나무 밑에서 한 여인에게 물었다.
“이 유월에 숙녀께서 가장 가슴에 두고 싶은 남자는 누구인지요?”
그녀는 나처럼 차분한 사람이다. 그녀는 살뜰하게 내 남편이요 하지 않았다.
모든 물 위의 그녀와 물 밑의 그녀는 다른 것이다.
그녀는 ‘라빅’이지요.
“저 개선문의 라빅이 내가 품은 하나의 남자이지요.“
유월의 그녀는 비밀에 부친다.
머리 검은 짐승들의 그 이론에 따르면 라빅은 의당 깡패여야 한다.
내 아내의 물 밑의 그이는 아마 ‘임영웅’일 것이다.
암태면 송곡리 바닷가에는 매향비(埋香碑)가 있다.
질이 단단하고 치밀한 녹나무 같은 수령이 장한 향을 지닌 목재를 민물과 바닷물이 상존하는 기수역의 바다 뻘 속에 묻어 한 오백 년 지나면 인연이나 미움이나 회환 같은 덧없는 것들이 앙금을 버리고 탄화하여 나무의 맑고 청량한 기운이 향으로 남는 것이다.
명심하라.
여인은 저 하나를 위해 저를 버릴 수 있는, 만지면 향기가 묻어날 것 같은 남자 하나를 앙가슴에 매립하고 산다.
미쳐가는 조국에서 피신하여 파리에 숨어사는 뛰어난 외과의사인 ‘라빅’은 의사들이 돈 많은 환자를 마취하면 커튼 뒤에서 걸어 나와 환자를 집도하고 마취가 깨기 전 사라지는 ‘유령 의사’다.
그는 자살을 시도한 한 삼류 가수를 구해주고 사랑에 빠지나 그 신변이 탄로나 추방당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는 늘 싸구려 호텔의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칼바도스’를 마신다.
칼바도스는 유독 포도제배가 적당하지 않은 노르망디의 칼바도스 지역에서 나는 애플 브랜디이다.
그는 왜 그늘로 거기 사는가?
라빅이 어느 날 술집에서 한 독일인을 만난다. ‘하케’, 그는 라빅의 애인 시바를 고문하여 죽인, 결코 영혼의 문신처럼 지워낼 수 없는 히틀러의 게슈타포다. 너도 파리에 숨어들어 살고 있었구나.
하케는 지금의 라빅을 살리는 유일한 ‘레종 데트르’ 였다.
다행이 하케는 라빅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가 말한다. “전에 우리 만난 적 있던가요?” 새끼 디질라고.
갖은 노력으로 하케의 환심을 산 라빅은 원수를 어느 밤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고 숲이 많은 교외의 교회로 유인해 내고 차 안에서 그제야 알아보고 권총을 꺼내려는 하케의 머리를 준비해간 둔기로 쳐 숨통을 끊어 숲에 버리고 술집으로 돌아온다,
살인이란 자살마저도 잔인한 일이다.
명심하라.
여인은 자신을 위해 어떻게든 복수를 해 줄 한 남자를 가슴에 묻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 마지막 구절은 아마,
‘주위는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마저 볼 수 없었다.’였다.
이 유월에 다시 그 ‘개선문’을 읽어보려 한다. 내가 이미 수무 살의 내가 아니니 ‘라빅’ 그이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소설 ’사랑할 때와 줄을 때’에서는 역에서 배웅하면 안 된다며 전장으로 돌아가는 남자를 숨어 기차역에서 배웅하는 여자가 나온다. 그들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할 때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또 한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 그렇게들 산다. 아마 삶에는 사는 것만이 아닌 나를 다 하고 싶은 다른 무엇이 있나 보다.
레마르크, 그는 한 때 사내인 내가 매향(埋香)처럼 가슴에 묻었던 남자였다.
첫댓글 유월과 함께, '개선문'을 읽습니다.
좋은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