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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출 3: 1-8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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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우라는 19세기를 살았던 미국의 지식인은 아주 독특한 삶의 행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하버드 대학>을 나온 수재였으나 세상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대신에 자기가 자라난 고향의 자연으로 돌아가서 글을 쓰며 평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고향의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월든’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5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며, 삶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만든 오두막집을 소개하면서 자기의 집에는 의자가 세 개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둘은 우정을 위한 것이며. 셋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각각 의자의 용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준비한 세 개의 의자는 그가 추구하는 숲 속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하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고독을 위한 첫 번째 의자는 복잡하고 분주한 현실의 생활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며 살아가는 그의 내면적인 모습을 잘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친구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 우리들에게는 또 있습니다.
우정을 위하여 준비한 두 번째 의자는 비록 그가 세상을 등지고 숲 속에서의 삶을 택하였지만, 오랜 친구들과의 깊은 교제가 삶에 얼마나 유익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앉아서 여러 다양한 삶의 주제를 가지고 덕담을 나누며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삶의 차원도 있습니다.
사교를 위하여 준비한 의자가 바로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다지 깊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날씨라든지 취미생활이라든지 건강과 같은 주제로 상식수준의 대화를 교환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삶이 있습니다.
어떠신지요?
우리의 삶이 소로우가 말하는 세 개의 의자를 준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을까요?
만일 다른 의자를 준비해야 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을 위한 의자여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맴돌다가 그냥 가시지 않도록 곁에 앉으셔서 이야기도 나누시고, 음식도 드시고. 주님이 머물러 계실 자리를 마련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한동안 그런 사진과 글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던 어떤 직업적인 사진가가 기도한 후에 찍었다고 하는... 눈이 듬성듬성 녹아있는 벌판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살펴보면 수염이 나고, 깊은 눈을 가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지는 그런 흑백 사진이 있고, 거기에는 그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식탁의 주인이시고, 말없이 우리의 대화를 듣는 분이시다...’
제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 흑백 사진과 글을 보고 있으면 주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곁에 계신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그 사진은 더 이상 우리들에게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참 막연한 시도일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앉으실 의자를 마련하는 일, 주님이 정말 오실까? 주님이 오셔서 그 의자에 앉으려 하실까? 그렇게 바쁘시고 상대할 사람도 많으실 텐데 그런 주님이 내가 주님을 위한 의자를 준비했다고 해서 여기까지 찾아오실까?
설혹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하여도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여러 가지 의구심 같은 것이 생기게 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서도 그런 기대감이 생기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정말 나를 찾아오실 것 같은... 그리고 그 시간은 참으로 나에게 운명처럼 소중하고 영원히 기억될 것 같은... 오늘 이렇게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리며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이런 기대감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여러 사람이 앉을 의자들... 그 의자들 중에서 하나쯤은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이 그 자리에 앉아주실 거라 기대하며 준비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일이 우리의 삶에 참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경험하는 주님!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삶이 내용이나 모습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 큰 아이에게 전화를 하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런 가사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으면 ‘도대체 얼마나 인생을 살았다고 벌써부터 이게 아닌데...’ 이런 노래를 듣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공감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지금 너의 모습이 예전에 네가 꿈꾸던 바로 그 모습이냐?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예전에 네가 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일이냐?... 이렇게 나의 오늘에 대하여 성찰한다면 사실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게 아닌데..’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들을 잘 말하고 있지 않은가? 좀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공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모세를 읽었는데 모세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요?
v.1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인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이렇게 성경은 모세가 직면한 현실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이렇게 양 떼나 몰고 다닐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모세 자신도 자기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무엇인가 큰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모세를 그렇게 사용하시리라고 계획하셨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출생부터 남다르지 않았습니까?
다른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은 다 죽어야하는 때에 믿음이 좋은 특별한 부모를 만난 덕택에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인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자라나면서 더 이상 숨겨서 기를 수가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그의 부모는 그를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바르고는 그 곳에 모세를 담아서 나일 강에 띄어 보냅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냥 지중해로 흘러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누군가가 그를 건져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를 건져낸 손길이 다름 아닌 이집트의 왕 바로왕의 공주였습니다.
공주는 그 아이가 히브리인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데리고 가서 자기 아이처럼 기르게 됩니다. 아버지가 죽이라고 명령한 그 아이를 딸이 죽음에서 건져내고 그를 키우다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참 오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에서 건져내다’라는 뜻을 가진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도 바로 그 공주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세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가만히 지켜보던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유모노릇을 하면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웁니다.
세상에 이렇게 모든 일이 척척 맞아 떨어 질 수가 있는 것인지... 모세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을 분아니라 한 편으로는 이집트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어머니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모세야 말로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바로 그 사람처럼 보여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이 아닐까요?
모세 자신도 그렇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무엇인가 남다른 공헌을 하여야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나이 40세가 되어서 비로소 자기의 뜻을 펼치려 하였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냉담하였고, 그는 이집트 사람을 죽인 죄를 짓고 광야로 도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집트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광야를 전전하다가 미디안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그의 양을 돌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야 해결되기는 하였지만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어찌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가 있는 것인지요?
모세는 이러한 자기의 심경을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짓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2:22) 그 심경을 표현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게 아닌데...’
“미디안 광야에서 양이나 치려고 내가 이제껏 공부하며, 미래를 준비한 것은 아닌데 나의 삶은 이렇게.내가 생각했던 꿈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구나... 내가 머물고 싶었던 그 곳에서 나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구나...
아마도 그는 오늘도 몸은 미디안에 머물고 있지만 그 마음은 이집트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자기의 부모 형제들에게 향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모세에게는 간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중한 기회를 그는 하나님께 나가면서 얻게 됩니다.
‘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v.1)
저는 이 대목을 마음에 새기고 곰곰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모세가 왜 하나님의 산 호렙을 향하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이곳이 어디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를 않습니다.
시내산이라고도 하는 이 호렙산은 후에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 부터 십계명을 받은 곳이기도 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곳을 찾아갑니다.
양 떼를 끌고서 말입니다.
혹시 좋은 풀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시내산이라고 할 때에 이 시나이라고 하는 말은 가시덤불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내산이란 다른 말로 하자면 가시덤불 산이라고 해도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시덤불을 양에게 먹이기 위해서 이곳을 찾는 다는 것은 좀 이치에 맞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곳에 오기 위해서 모세는 광야를 갈로질러야만 합니다.
그 광야가 얼마나 넓은 곳인지는 알 수 없어도, 우리는 호렙산을 찾는 모세가 단지 양들에게 더 좋은 풀을 먹이기 위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가 이곳을 찾았던 까닭이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산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호렙산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산’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싶어서... 비록 나이가 많고... 모든 것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은 살 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심경을 시원하게 말씀드리기라도 하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좀 어떻게 해주시기를 간청하고 싶어서... 오늘도 양 떼를 몰고 길을 나섰지만... 문뜩 이런 생각이 간절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광야를 지나고... 그리고 여기... 하나님의 산 호렙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양 떼를 이끌고 광야를 가로질러서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아가는 일. 생각해보면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었겠지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나의 삶이 달라질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양 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아 갑니다.
모세에게는 이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설혹 그곳에 가도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게라도 한 번 해 보자... 그래야만 나의 삶이 언제 끝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모세는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의 열망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일상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은 일은 그의 삶 가운데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그것은 그의 삶을 온전히 새롭게 하여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가시덤불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내산은 그 이름처럼 듬성듬성 가시덤불만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었겠지요.
요즈음 사람들이 시내산이라고 믿고 찾아가는 곳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햇살은 내리쪼이는데... 온통 바위산이고 듬성듬성 가시덤불만이 자라고 있는 곳... 발붙일 곳이라고는 찾기가 힘듭니다.
순간적으로 모세는 ‘내가 잘못 찾아 왔구나... 공연히 헛고생만 했어...’ 감자기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자기처럼 지쳐버린 양 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서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온 몸에서 힘은 다 빠지고... 눈앞이 캄캄해 집니다.
“어떻게 집에 까지 돌아가지... 걱정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려 하다가 가만히 살펴보니 떨기가 불이 붙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날이 뜨거워서 그러려니 했었는데 예사롭지 않은 광경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보니 틀림없이 떨기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그렇다면 떨기가 불에 타서 없어져야 할 텐데 그것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떨기에 불이 얹혀 있는 것 같은 형국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놀란 모세는 이 신비한 광경을 좀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불이 붙는 떨기를 향하여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떨기 가운데서 하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모세야, 모세야!’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누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아무도 없는 호렙에 왔다는 것을 도대체 누가 알고 있을까?
그런 분은 오로지 하나님 밖에는 없다는 것을 모세는 순간적으로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들은 모세를 통해서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모세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지 벌써 40년이나 지났는데도 말입니다.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잊어버린 사람으로 간주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모세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야... 모세야...’ 하시면서 먼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이지요.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내면에 정말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하나님이 해결하여 주시지 않는다면 자기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양 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서 이곳까지 왔을 때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먼저 그곳에 오셔서 그를 기다려 주시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든지. 우리가 항상 소망과 가능성 가운데서 살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론 아주 무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살도록 그냥 방치하실 수 있을까? 나에 대해서 이토록 무관심 하실 수가 있을까?”
때로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하여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때라고 하더라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v.6)
아마도 모세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기의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었겠지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셨기에 가능한 그런 인생을 그들은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실 때 거기에는 “내가 너도 너의 조상들처럼 지켜보고 있고, 인도하고 있다...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러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참 어려운 시절을 살면서 그냥 그렇게 살다가 먼지처럼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들의 삶을 남다르게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긴 침묵의 시간도 있었고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고 그들을 찾아오셔서 남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인도하여 주시고 책임져 주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제 지금 그가 서 있는 ’여기‘는 그의 삶 가운데서 참으로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곳은 답답하고 지루하던 그의 일상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바뀌는 자리였습니다.
가시떨기에 붙은 불을 보면서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처음에 그의 여기는 단지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v.3)
어째서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하여 과학적인 호기심이 담긴 질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대하면서 가질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단순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던 가시떨기 거기에서 그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고쳐먹게 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단지 일상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던 여기. 비록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곳까지 오기는 하였지만. 어쩌면 그는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자기를 향해 다가오시고 자기를 만나주시리라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기에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지?’ 여기도 단지 일상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지금 서 있는 여기 그 곳은 이제 하늘의 향하여 문이 열리는 거룩하고 신비한 장소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이미 ‘어째서’라는 질문은 사라졌습니다.
참 궁금한게 많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따지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그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단지 거룩함 가운데서 머물러 계시는 하나님 앞에 신을 벗어던지고는 겸손하게 엎드릴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는 온통 두려울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서 있다니 이런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다니...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우리는 이 후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집트의 바로에게 가라고 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을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세는 할 수 없다고 보낼만한 사람을 찾아서 보내시라고 그렇게 거절하였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으며 바로를 찾아 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감당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이것이 모세가 가지고 있던 꿈이었습니다.
오래 동안 그렇게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일... 모세가 정말 원하던 그 일을 하도록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불러 주십니다. 물론 그 일이 참으로 어렵고 힘이 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 자신도 그가 그토록 그리던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얼마나 행복하였을까요?
그래도 모세는 참 행복했고 멋진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가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모세처럼‘여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여기 말입니다.
여기 호렙산은 모세가 정말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찾아 온 여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는 거룩함만이 있는 곳입니다.
어째서라는 물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모세를 무겁게 만들고 있던 모든 삶의 고민과 모든 상처들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통해서 누리지 못하던 참된 평화가 그에게 찾아듭니다.
자기의 얼굴을 가리게 만들었던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 그것은 마치 거역할 수없는 소용돌이처럼 그 마음속에서 요동치면서 그를 송두리채로 뒤흔들어 놓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정말 기뻤고 자신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이제는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바로 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절박하고 답답할 때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으로 우리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내가 원하던 그 삶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가게 하여주는 힘이 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불은 붙었으나
출 3: 1-10
우리는 이제 대한 민국이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해방된 지 어언 53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세월이 물론 많이 지나간 탓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정신 속에서 민족 정신이 말살되어 가고 있다고 탄식하는 소리들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강제로 말살하려고 하였으나 그 정신을 없앨 수 없었는데 지금의 우리의 현실은 스스로 우리의 민족정신을 파괴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마음이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방 반세기를 넘어 서면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옳을 줄 믿습니다.
1939년에 시작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모두 700만 명에 이룹니다. 누가 언제 어디로 어떻게 끌려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그리고 이들의 피해 보상은 고사하고 원통하게 죽은 시신조차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한 채 53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 예로 일본 홋카이도에서 강제 동원되어 죽은 조선인 노동자의 숫자는 홋카이도 철도에 깔린 굉목보다 더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꽉 짜여진 군대식 생활과 가혹한 노동, 견딜 수 없는 민족 차별과 쉴 새 없는 폭력,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 갔습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조선인들은 파업이나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붙잡히면 오로지 고문과 죽음뿐이었습니다. 붙잡혀 고문 끝에 살해당한 조선인들은 절벽 아래로 내던져지거나 작업장 근처에 집단으로 가매장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홋카이도에서 죽어 간 조선인 숫자는 약 30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여성들은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야수 같은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름하여 위안부라고 불리움을 받은 우리의 할머니들이 지금도 힘없는 항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끌려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린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의 신음 소리가 있습니다. 동토의 땅 사할린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 한지 53년이 되었어도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 만리 머나먼 땅에 묶여 버린 사할린 한인 동포들! 일본 사회의 냉대와 법적 차별 속에 외국인 아닌 외국인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재일 동포들! 이루다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1940년대 본격화된 공출은 곡물 유출보다 더욱 가혹하여 삼림과 지하자원, 식량인 쌀, 심지어는 교회와 절에 매달린 종이나 집안의 솥과 숟가락. 젓가락까지 약탈해 간 무자비한 강도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생필품마저 빼앗겨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찧어 먹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광복 53년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우리는 망각 속에 흘려 보내고 있습니다. 일제의 강제 동원에 앞장 선 자들은 일본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지도층 인사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순교자의 피가 강을 이루었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한 동네에 교인들을 교회에 불러모아 놓고 사방에서 못질을 하고 예배당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이고 "제발 아이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을 아이와 함께 총을 난사하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화성군 제암리 교회의 참상입니다.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순교자의 피가 헛되지 않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 응징하시고 이 민족을 해방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53년이 흘렀습니다.
도무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민족의 아픔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 민족은 다시금 IMF라고 하는 민족적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경제 식민지 국이 되었습니다.
정치권은 지금 표류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불꺼진 항구와 같이 희망이 다 사라진 듯이 보입니다.
지금 이땅은 수해로 농토를 잃고 재산을 잃고 귀중한 목숨을 잃고 망연자실해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도 싸움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작 떠내려 가야 할 집은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이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습니다. 300여명에 이르는 국회의원들이 하루에 2억이라는 국민이 낸 현세를 축내면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민생은 제쳐 두고 당파 싸움이나 일삼는 사람들을 다 쓸어 버려야 한다고 까지 하고 있습니다. 지금 수백만 명의 실직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고, 가정들이 깨어져 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의 절정에 이르러 울 기력조차 없는 때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도자 모세를 세워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모세가 호렙산 근처에서 자기의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의 눈앞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가 스러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타지 않는 것입니다. "왜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스러지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이상해서 점점 다가가는데 갑자기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를 통해서 이 민족을 구원하리라"고 하시는 소명을 주시며, 고통하는 민족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Ⅰ. 먼저 생각할 것은 고통 중에 있는 민족에게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부르짖고, 탄식할 때에 그 소리를 들으시고, 고통의 현장에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시작하십니다.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들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고통 당하고 있을 때! 고난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단6:10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자 느브갓네살 임금이 그들을 뜨거운 풀무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세사람인데 그 안에는 몇 사람이 있었습니까! 네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단3:25)"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머리털도 타지 않게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지금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 숲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Ⅱ.이 민족이 떨기나무입니다.
떨기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가시 덤불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떨기나무가 무엇입니까! 고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애굽의 노예가 되어 삶의 소망도 없이 소모품과 같이 비천한 운명 속에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 민족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볼 때 떨기나무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Ⅲ.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 불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이 불은 핍박과 환난의 불입니다. 찬송가 376장에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벧전 1: 6-7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 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바로에게 불과 같은 시험을 만났습니다. 지금 이 민족이 불같은 시련을 만났습니다. 이 IMF의 불꽃이 지금 야단이지만 그러나 이제 시작에 불과 합니다. 앞으로 실업자들이 얼마나 더 늘어날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깨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핍박과 환난 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 4: 20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 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애굽에서의 생활을 불 가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Ⅳ.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를 않습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으면 타야 되는데 불은 맹렬히 타는데 나무가 스러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통과 환란과 핍박이 불 같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마치 다니엘의 세친구들이 풀무에서도 살아 나온 것처럼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살아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되 끝까지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신앙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롬8:35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 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 신앙이 있기 때문에 그가 또 이렇게 웨쳤습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
고 고백하면서 담대하게 승리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Ⅴ. 불꽃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출3:4-6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이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를 배우게 됩니다.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고난의 때입니다. 내 인생이 가시떨기 같을 때! 불같은 시험과 괴롭고 답답한 일을 만났을 때! 그때가 곧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라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때를 만났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원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날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8:2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이 시련의 광야를 만난 것은 우리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묵묵하게 이 시련을 인내함과 생각함으로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나간 날의 이 민족을 생각하면 잿더미 위에서 번영의 금자탑을 쌓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사치하고 방탕하고 쾌락을 일삼고 향락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나라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 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 깊고 위대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인격이 연마되고 신앙이
빛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8.15 광복절 53주년을 맞이하여 오늘의 우리 민족이 이 말씀을 통하여다시 한번 지금까지의 지나온 과거를 뒤돌아 보고 지금 오늘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철저한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시고 다시금 축복의 손을 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기억하고, 다시는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삼가야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한 순간도 빠짐없이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앞으로 우리들의 남은 생애를 오르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다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다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명에는 보너스가 있다
출 3:1-10
이런 이야기로 사명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제인 애담스(Jane Adams, 1860-1935)는 시카고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났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어서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척추에 병이 생겼습니다. 고치기 힘든 병이었습니다.
의사의 권고로 휴양 차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런던 관광을 하던 중 우연히 빈민굴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땀흘리며 헌신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명이 임하였습니다. 소위 calling이 임한 것입니다. 번개같이 임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다.>
그 후 그는 시카코로 돌아 왔습니다. 빈민굴에서 봉사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시카고 빈민굴의 낡은 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빈민들의 탁아소로 개조하였습니다. 가출 소녀의 숙소로 만들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시카코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헐 하우스(Hull House)입니다.
75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을 때까지 척추병으로 고생하면서 봉사하였습니다. 쓰러지는 그 날까지 일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
본봉외에 더 주는 것을 보너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실 때에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보너스로 더 붙여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사명에는 보너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40세에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였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와서 40년을 양을 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제는 머리에 백발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이 80이면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묘자리도 보아 두어야 하고 유언장도 정리하여야 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양을 치는 데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불이 붙었는데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모세가 다가 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라는 꿈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내리셨습니다. 40년간 양이나 치던 목자에게 200만명을 인도하라는 명령을 엄청난 사명의 명령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5번 거절하였습니다.
첫 번째 거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두 번째 거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3:13)
세 번째 거절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4:1)
네 번째 거절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다섯 번째 거절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
이렇게 모세가 다섯 번이나 거절하자 하나님은 놀을 발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출4:14)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에는 거절은 교만입니다. 부족하고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최선을 다 하겠다는 자세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실 대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보너스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모세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꿈부터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지 않고 꿈을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 꿈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요, 그 꿈을 받은 사람이 바로 사명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쓰실 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쓰실 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에도 이방인이 바울에 의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꿈을 주셨습니다. 양을 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꿈부터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하리라”(10)
하나님은 사명을 주실 때 보너스로 꿈부터 주십니다. 그 꿈이 불이 되어 도저히 그 일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꿈입니다. 모세는 80살에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꿈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바로에게 갈 정도로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에 왕이 어린이 날을 맞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싶은 것 한 가지씩만 말해라. 오늘은 무엇을 말하든지 그 것을 준다.>
모두 다 한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을 받아 들고 좋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은 소원을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왜 가만히 있니? 소원이 없니?>
아이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도 소원이 있어요?>
임금님이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무엇이니?>
아이가 말했습니다.
<저는 임금님이 되고 싶어요.>
임금님은 마침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임금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실 때 꿈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빌2:1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실 때 꿈부터 주시는 분입니다. 사명자에게 보너스로 주는 선물은 꿈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사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입이 둔하여 일을 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출4:14)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같이 일할 동역자를 반드시 붙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일에는 반드시 동역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말에 둔하니까 말을 잘 하는 아론을 붙여 주셨습니다.
모세는 재산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가지고 오라고 할 정도로 많은 물질을 가진 사람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훌 이야기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훌이 어떻게 되었는 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뒷 이야기 미드라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할 때 훌이 금송아지 만드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금송아지 만드는 사람들이 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훌 이야기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섬기는 순교자도 붙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실 때 사명도 보너스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잠언 기자는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1-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전혀 예상하지도 못 하였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바울이 빌립보로 무조건 전도하러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그 집에서 빌립보 교회가 개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면 사람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능력도 같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는 양이나 치던 목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하겠다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니 뱀이 되었습니다. 뱀을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빼니 문둥병 손이 되었습니다. 다시 품속에 넣었다가 빼니 성한 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통하여 기적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로 그 후 14가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려고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의 사명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하나님의 사명자들에게 이미 그 일에 맡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믿으면 믿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중앙 아프리카 선교를 하다가 매우 호전적이고 사나운 원주민들에 둘러 쌓여서 아프리카 선교 16년중 가장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오늘 밤 어두울 때에 이 곳을 빠져 나가야 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요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그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그 날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1856년 1월 14일
나의 마음은 몹시 혼란스럽다. 나는 이 넓은 지역에 대하여, 그리고 내일이면 나의 목숨을 빼앗을 지도 모를 저 많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그 분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다. 그 분은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땅끝까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가장 완전하고도 가장 능력있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 분이 나를 이 곳에 보내셨을 때에는 분명히 무슨 목적이 있다. 아무 목적도 없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 리가 없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게 오늘 밤 이 곳을 빠져나가 살려던 계획을 포기한다. 나와 같은 상황에 빠진 사람은 모두 도망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진실로 나는 오늘 밤 하늘의 달과 별을 관찰하며 여기에 그대로 누워 있을 것이다. 설령 이것이 마지막 밤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 평온하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서 전도하였습니다. 드디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를 변화시켰습니다
주님은 사명을 주신 자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보너스로 허락하여 주십니다.
방금 신학교를 졸업한 젊은 목사가 큰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천 명쯤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새로오신 목사님을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어떤 부인이 젊은 목회자에게 다가가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경험도 없으신 목사님이 어떻게 천 명 교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이지 궁금합니다. 힘드실 것같아요.> 젊은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온 것은 천 명 성도를 기쁘게하여 드리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직 단 한 분 예수님만 기쁘게 해드리면 모두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저에게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시명을 주신 자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보너스로 허락하여 주십니다.
4.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동행의 복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하여 일을 시키실 때에는 반드시 동행하여 주시는 분이 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안과 병원장이 고백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교통 사고로 눈꺼풀이 크게 찢어진 어린 딸을 아버지가 안고 황급히 응급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소녀의 상태를 살핀 후 소녀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찢어진 곳을 몇 바늘 꿰매야 하는데 따님은 마취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마취하면 눈이 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바늘로 상처를 꿰맬 때 참을 수 있겠니?>
이 때 소녀가 말했습니다.
<아빠가 내 손을 붙들어주면 참을 수 있을 것같아요.> 아빠가 딸의 손을 꼭 쥐어 주었습니다. 상처를 꿰매는 동안 아픔을 참으며 한 번도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손이 딸을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세의 손을 40년 동안 꼭 잡아 주신 것처럼 여러분의 손을 오늘부터 꼭 잡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느 아버지 고백입니다.
퇴근 길에 집에 오는 데 아들이 친구와 엎치락 뒤치락 엉켜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상대 아이는 자기 아들보다 크고 힘이 센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아들위에 올라 타고 돌로 내리 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달려간 아버지가 다급히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아!> 그 순간 돌로 치려던 아이는 훔칫하며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힘차게 뒤집기를 하였습니다. 역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위기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마귀와 우리가 두치락 거리며 싸울 때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내 자녀야!> 불러 주실 때 우리는 역전할 수 있습니다.
축복중에 축복은 동행의 축복입니다. 동행의 복은 가장 큰 복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꿈부터 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사람을 주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능력을 주십니다.
4.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동행의 복도 주십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렵니다.
1955년 어느 가을이었습니다. 미국 오레곤 주 유게네라는 마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 날 그 곳의 신문에는 마을 회관에 종교영화집회가 있다는 광고가 났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서로 아는 사람들이라 즐거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한 농부 부부도 참석했습니다.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그 날의 영화는 한국전쟁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중에 생긴 고아 이야기, 그리고 미국 병사들과 한국 여인 사이의 혼혈고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손길을 찾는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났습니다.
농부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농부야. 우리 같은 농부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며칠 지났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날의 영화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부부는 기도하였습니다. 사명이 왔습니다. 그들은 농장의 일부를 팔았습니다. 직접 한국에 왔습니다. 혼혈고아 8명을 양자로 미국으로 데려다 길렀습니다.
이 사실이 마을신문에 사진과 함께 기사로 나가자 각 곳에서 그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혼혈고아를 양자로 맡겠다는 연락들이 왔습니다. 이 농부 부부는 농토를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부부는 1만 6천여명의 전쟁고아를 각 가정에 맺어주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유명한 홀트 복지회 주인이 되는 해리 홀트입니다.
모세도 홀트도 처음에는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일단 사명에 몸을 담그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