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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וַיֵּשֶׁב 바예쉐브" : 12월 셋째 주 토라포션 in 5783
창37:1-40.23(To), 암2:6-3:8(Haft), 마1:1-6,16-25(Brit), 눅4:14-8:56(신약), 대하10:1-16:14(Ke), 삼하19:15-24:25(Ne)
2부 예배 고세중 목사님
창37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하누카가 정말 이방인들에게 위대한 절기라는 것을 아시는가? 놀랍게도 하누카 절기는 타나크에 없다. 이방인들이 말하는 구약 성경에는없다.
요10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게 하누카의 결론의 메세지이다. 요10:22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수전절이 하누카이다. 지금 같은 겨울이다. 이게 주님께서 하누카를 절기로 지키셨다는 증거이다. 성전 안에, 하누카, 불빛되신 주님이 계신 것이 성취인 것이다. 캄캄한 추운 때에 주님께서 솔로몬 생각에서 하누카 때 거니셨다.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그들이 깜깜한 어둠 가운데 있기에, 그들 앞에 있는 마쉬아흐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불빛이 비추고 있는데,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일, 마쉬아흐,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샬라흐, 사61:1의 존재임을 다시 상기시켜줬는데, 이들은 그것을 전혀 보질 못했던 것이다.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양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볼 눈이 없다는 것이다. 마쉬아흐를 알아보는 눈이 없으니까, 마쉬아흐의 메세지를 들을 귀도 없는 것이다. 수전절 그날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게 하누카 때 있었던 예슈아의 스토리이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의혹, 의심, 혼돈, 이런 것들을 제거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1. 바예쉐브 : 11(12)+22 = 내 안(בי) + 너희 안(בך) -> 에하드의 길
바예쉐브 주간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바이슐라흐의 11년에 비하면 22이라고 했다. 11(12)라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 (בי)를 이야기하느 것이고, 내가 너희 안에(בך)를 합친 숫자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주님과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가? 하나가 되는 것은 나와 아버가 하나인 것과 함께해서, 완전한 에하드의 길이다. 본질적인 하나님의 의도는 너희 안에,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완전히 야사브하기 위한 영적 의미의 사건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헤세드(아브라함) / 게부라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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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샤마
- 야곱 : 티프에레트
* 루아흐 : 영의 생명
- 요셉 : 예쏘드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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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페쉬 : 육의 생명
- 다윗 / 라헬 : 왕국, Kingdom
네페쉬의 왕국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다윗이다. 이 네페쉬를 루아흐로 끌어올리는 영의 생명인데, 주님 루아흐의 생명을 채워달라는, 이방 교회에서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루아흐 생명에 도달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루아흐의 생명이 바로 요셉이다. 이 요셉은 예쏘드, Foundation, 기초이다. 많은 배우신 것이기에 잠시 상기시켜드리는 이유는, 이 요셉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 그림을 항상 기억해야하기 때문이다. 요셉의 교훈, 성취를 통해서 우리는 영의 생명의 기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있다.
네페쉬, 왕국의 생명은 다윗이기도 하고 라헬이기도 하다. 라헬로부터 요셉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요셉의 생명이 네샤마 생명이 되는데, 네샤마는 야곱이다. 티프에레트이다. 요셉의 생명이 야곱 안으로 포함되기 때문에, 톨도트 야아코브가 되는 것이다. 왜 요셉의 이야기인데, 야곱의 족보라고 하는가? 끝으로가면 하나님의 계보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그림을 항상 기억하고 계셔야 한다. 세피로트의 열 개의 그림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네샤마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헤세드가 있고, 왼쪽으로 가면 게부라, 아브라함과 이삭이 있는 것이다.
올라가는 이 여정 자체를 슈브, 회개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려면, 네페쉬 -> 루아흐의 관문, 예쏘드가 되는 요셉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영의 생명이 확정이 되는 것이다. 요셉의 어떠함이 우리 안에서 구현되지 아니하면, 거꾸로 이야기하면, 많은 것들을 알고 추구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육의 생명 가운데 남는 것이다. 굉장히 슬픈 이야기이다. 제가 얼마나 많은 열심을 냈다고 할지라도, 선교사로 별 것을 다 했더라도 네페쉬의 단계에 있었지, 루아흐로 넘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토라를 아는 자들, 토라를 실천하는 자들만 알 수 있는 기회이다. 무지의 암흑 가운데 갇히기 때문이다.
2. ישׁב 야사브 : 요드 + שׁב 슈브 = (שׁ)육신의 파괴 or (ב)성전을 건축
하나님의 요드, 하나님이 뭘 하시냐면, 슈브, 쉰과 베트는 육신을 다 부수는 것이기도 하고, 성전을 형성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육신을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육신이 파괴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전은 세워지지 않는다. 이 육으로부터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칼 같이 구분해서 다 버려내야 한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이것이 참 어렵다.
얼마 전에 50세 이상 시니어 모임을 했다. 이 50+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카톡방 인원이 66명이 되어버렸다. 목사님 부부들을 빼버리면 60명이다.
ס 싸멕 : 60
ס 싸멕은 כ 카프와 ו 바브의 합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손으로 못을 박는다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지를 받는다. 요셉이 하나님의 카프 가운데 못을 박혔기 때문에, 하나님의 싸멕을 받는 것이다. 키슬레브 월은 싸멕이다. 카프와 바브는 26인데, 싸멕이라는 글자에 야훼의 숫자가 다 들어있다. 키슬레브월에 하나님의 지지를 받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지지를 받아서, 승천 원리를 잘 배울 수 있다면, 정말 우리는 영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네샤마의 단계에도 뱀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네샤마 생명의 하와에게 뱀이 접근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뱀의 목소리이다. 우리가 네샤마 생명을 즐긴다고 하고, 모든 생명으로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끌어내리는 중력의 역할을 하는 것이 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렘1: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뽑고 파괴하며 파멸한다. 쉰, 부수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건설하고 심게 하였다. 베트, 바나이다. 파괴하고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원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육에 대해서 파괴되어야 한다. 육신이 파괴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육신을 다 파괴하셨는가? 파괴가 완전해지면, 슈브가 완전해지면, שׁבת 샤밭이 온다. 진정한 안식이다. 회개를 완전한 수준까지 도달하게 한다면, 육신적인 것들이 완전하게 파괴되는데 도달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샤밭 샬롬할 수 있게 된다. 샤밭 때마다 노래를 부르는데, 어느면에서 예언적 선포이다. 완전하게 파괴된 사람이 많지는 않다. 아니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안식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을 알려드리겠다. 샤밭의 비결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나를 점검하는 것이다. 세 가지를 항상 점검하셔야 한다.
* 안식을 위해 점검해야 할 세 가지 : 혼동 / 순종, 선택적 순종, 부분적 순종이라고 한다 / 고집
1) 유다 이야기 = 불일치 = 스스로 속음 (ר)
제가 고씨이다. 바예쉐브에 안착해서 안심하고 살려면, 이 세 가지를 반드시 날마다 점검하며 살아야만, 마침내 잘하면 샤밭에 실제로 도달할 수가 있다. 혼동의 이야기는 사실 이 주간에 들어있는 유다의 이야기이다. 유다는 혼동에 빠졌다. 유다의 마음은 자기 막내동생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나는 그렇게하려고 안됐는데, 그렇게 되버린다는 것을 아는가? 혼동이 빠진다. 자기의 지식과 들어오는 말씀의 불일치이다. 유다가 거십에 갔다고 한다. 속임수, 혼동, 이런 뜻이다. 스스로 속인 것이다. 스스로 속는 것은 레쉬의 문제이다. 자기 생각으로 볼 떄, 저건 아닌 것 같은데!? 자기 생각과 토라의 말씀의 진리의 선포가 불일치하면 그때부터 혼동스러운 것이다
내가 살아봤더니. 이것은 육의 이야기이다. 토라의 선포를 듣고, 저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 혼동이 쑥 들어온다. 특히 50+, 인생 좀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정신이 번쩍 난 이유가 있다. 50, 60의 고독사가 3370명이라고 신문에 났다. 고독사의 원인을 아는가? Disconnection, no hope, 단절되어있고 소망이 없으면 고독사한다. 교회로부터 관계가 단절되어있으면, 루아흐로의 바브가 깨지면, 우주로 날아가서 바드가 되어버린다. 단독자 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혼동에 빠지면 우주로 날아가버린다. 그냥 화면으로 예배드릴께? 말씀 다 듣고 있어? 이게 지름길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안 보이는 분들에 대해서 상당히 신경을 쓰는데, 이분이 진짜 괜찮은가? 그때부터 그분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것이다. 목자, 리더, 아버지들은 여러분들이 안 보이면, 그때부터 그 사람 생각 때문에 잠을 설친다. 본인은 모른다. 본인은 혼동스러워서 나 좀 시간을 가질께. Leave me alone, 나 좀 놔둬. 단독자의 부르짖음이다. 앞으로 나 좀 놔둬, 이 이야기를 지워버리시기 바란다. 이 말이 단독자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우주 미아가 되는 캡슐이 기다리고 있다. 그 캡슐을 타고나면 우주로 날아가니까 처음에는 좋다고 하지만, 조금 지나면 주변이 깜깜해서, 내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다시 돌아가려는데 찾을 수가 없다. 그게 혼동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부분적 순종이다. 순종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내 순종은 사실은 불순종이다. 유명한 사울왕의 이야기를 알 것이다. 내가 보기에, 내가 이렇게 선택해서, 내가 제사를 드렸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가 그를 버려.. 라고 하신다. 순종한다고 한다. 저 순종 잘 했다고 하면서, 자기가 순종한 이야기만 기억하는데, 아버지들은 순종하지 않은 것을 기억한다. 이 비밀을 아시는가? 나는 순종했다고 하는데, 왜 아버지는 나한테 순종 안 했다고 하지? 너는 나한테 순종한게 하나도 없어. 지금까지 그렇게 순종했는데요!? 아니야, 없어.
자기 기준의 순종을 습관화하게되면, 절대 자기 기준으로 순종을 결정하면 안된다. 그러면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게 낫다. 부분적 순종, 자기 주도적 순종은 불순종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린다. 순종은 아버지 기준, 토라 기준, 절대 기준이어야 한다. 너무 힘들다. 힘든거 안다. 요셉도 유다도 힘들다. 힘드니까 나갔다. 찬송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 나이 되도록 모르겠는가? 왜 나가겠는가? 그래서 벌어진 일이 뭔가? 유다의 두 아들, 에르와 오난, 유다가 다말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 어린 며느리, 자기 눈에 보기에 창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떡했을까?
2) 유다의 회귀 by תמר 타마르 : 완전한 죽음
유다의 회개, 돌아온 슈브는 By 다말, 다말을 통해서이다. 타마르는 완전한 죽음이다. 마르, 너무너무 쓴 것이다. 유다는 혼동 가운데 빠져서 이방 가운데 단독자로 나갔는데, 그가 단독자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창녀같은 며느리 다말 때문이었다.
창38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도장 + 끈 + 지팡이 : 그의 모든 것 -> 다말 : 의
유다가 그것을 알아본 것이 무엇인가? 도장, 끈, 지팡이이다. 그의 모든 것인데, 그의 모든 것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권위, 재산, 이것들이 다말에게 있다. 그것을 알고, 그는 나보다 짜딕, 의롭도다. 유다의 내면에는 의를 추구하는 깊은 소망이 있었는데, 의롭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멀어진 것이다. 혼동 가운데 빠지는 이유는, 나름 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앙, 지식, 이런 것들을 의라고 생각했는데, 토라에서 그 모든 것을 반전시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동 가운데 빠진다. 나는 억울해 죽겠는데, 네 문제라고 들으면 화가 난다. 술 취한 남편을 오랫동안 참아줬는데, 이건 너의 문제야!? 어떻게 혼동이 생기지 않았는가? 육으로 살아온건 나고, 잘못한건 저놈인데 왜 나한테 야단치는거야? 토라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기까지 정말 어렵다. 나름 그 안에서 의의 싸움이다. 그는 다말에 의해서 구원받았다. 이것을 인정하니까, 그 유명한 페레쯔가 나온다. 이스라엘의 왕의 할아버지가 여기서 나온다. 이스라엘의 회귀의 패턴이다. 유대인들이 의인, 짜디크가 되는 패턴이다. 도장, 끈, 지팡이이다. 누가 갖고 있는가? 다말이 갖고 있구나. 십자가의 죽음을 취하면, 그것을 보면서 그가 나보다 의롭도다. 거기의 의를 인정하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3) 예수 메세지 : 회개 + 천국 -> 이때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래서 회개의 메세지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나눠야하는 복음의 메세지가 어디서 출발해야하는가? 마4:17에서 출발해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때부터 비로소. 아무나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부터인데, 이때가 언제인가? 신약은 단어 하나도 놓치면 안된다. 이때가 언제인지 알아야 한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요한이 잡혀야 한다. 우리 안의 요한이 잡혀야 한다. 요한의 활동이 체포되어야 한다. 단회적인, 지속성이 없는 것이다. 단편적인 신앙이다. 복음주의에서 굉장히 위험한 것이 단편적인 것이다. 이 사람이 생의 어느 순간 예슈아를 영접했어? 그러면 이 사람은 영원히 사는 거야라는 생각이다. 연속성이 없다. 예슈아를 영접했는데, 왜 생명이 없는가? 침례 요한이기 때문이다. 침례 요한이 잡혀서 단편 신앙이 끝장나서, 연결성, 바브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연결성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예슈아가 누군지 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한 사람이다. 그래서 침례 요한을 박살내는 설교를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침례 요한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단편적 신앙의 소유자들이다.
단편 신앙 : 요한 체포 + 마귀의 유혹 + 흑암 --> 회개
그런데 사실 요한이 체포되기 전에 이 4장에서는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부터라는 것에 포함된 것이 마귀의 유혹, 떡이 변해서, 이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게 바벨론 신앙이다. 형통 신학이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거야. 기적은 일어나고, 또 일으킬 수 있다. 저는 이 사역의 시간을 걸어왔기에 알 수 있다. 그러면 거기에 중독되어서, 그 사람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가져와서 헌금을 가져와서 부자가 된 교회들이 있다. 아주 부자 교회가 된 어떤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깜짝 놀랐다. 연로하신 당회장 목사님이 얼마나 탐욕의 메세지를 전하는지 기절하는 줄 알았다. 형통 신학의 사람들은 탐욕인지 모른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거부냐, 많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부자가 못된 사람은 신앙이 부족해서 그렇다.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한다.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흑암의 때, 깜깜한 흑암의 때이다. 하누카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누카의 Mentality, 깜깜함의 멘탈리티에 있는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큰 빛, 아주 작은 빛이다. 이게 조건이다. 이 사람들에게 요한이 체포되고, 마귀의 바벨론 신앙을 극복해서, 깜깜함의 무지함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의 메세지를 선포하신 것이다.
불신앙 / 불순종 / 불의
그것이 슈브이다. 모든 혼동으로부터 벗어나서, 절대 순종을 하는 고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혼동은 불신앙이고 불순종과 고집은 불의이다. 펄쩍 뛴다. 이 관점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느냐를 보면,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상황이 그렇다.
3. 요셉 Story
1) 미움 / 시기 = 살인 = 배경 / 운명
이제 소망의 이야기를 보자.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과 시기를 받았다. 채색옷, 하나님의 꿈,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그것으로 인해서 형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았다. 저기 꿈꾸는 자가 온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형제를 질투하면 반드시 저기 꿈꾸는 자가 온다, 저를 죽이자. 시기는 그 자체가 살인이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미워하는 것이다. 너무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들을 볼 때 느끼는 것 같은 사랑의 감정, 생각, 관계를 벗어나고 됐어, 그 사람은 나랑 안 맞아. 라고 벽, 거리두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해서 너희가 나를 미워하면이란, 진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도록 사랑하지 않는 것이 미워하는 것이다. 이게 주님의 말씀이다. 누군가를 향하여 사랑이 아닌 멀어지고자 하는 감정, 생각이 있고, 그 사람과는 됐어, 라고 한다면, 그게 미움이고 살인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형제를 향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죽이는 것이다. 엄청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것이 요셉에게 주어진 배경, 운명이다. 만약 내 안에 미움이나 질투가 있으면, 나에게서 나가는 메세지는 생명이 아니라, 사망이된다. 시기의 마음이 있으면, 생명의 전달자가 될 수 없고, 사망의 전달자로 빠져버린다. 경험해보신 분이 계시는가? 반드시 그 당사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다. 당사자에게 시기하는 이유를 멋지게 포장해서, 너 이런거 알아!? 라고 상대방에 대한 결점, 너 혼좀 한번 나봐라, Provocation, 찌르는 것이다. 약점을 말해주면, 모든 사람들은 나 알아. 라고 하는거 아는가? 몰라서 약점이 아니다. 우리의 관계 안에 약점을 지적해주면, 모르는 줄 알지만, 나도 알아. 됐어. 라고 하지, 순순히 잘못했다, 교정할게라고 하는거 봤는가? 나도 알아, 그런데 안돼. 라고 한다. 아버지가 말해도 안되는데, 형제가 말하면 되겠는가? 나도 알아 됐어, 이 이야기는, 됐어, 너랑은 끝이야. 이다. 안된다.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요일,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다.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다. 굉장히 극단적 도전이다. 우리는 너무 힘들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고통받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이렇게 셋팅된 절대 진리 때문이다. 절대 진리를 믿기 포기하면 상관없지만, 그것은 토라를 모르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토라의 의식 시스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익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절대 진리가 무서운 것은,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그 모든 문제와 결과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예슈아가 절대 진리라는 것은 의심하고 부정하는 순간, 그것으로 인한 결과는 다 나에게 온다. 이게 절대 진리의 무서움이다
막15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시기, 미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살인자를 놓아주고, 마쉬아흐를 죽이는 것이다. 거꾸로 간다. 시기가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정말 더 무서운 것은, 아버지 야곱은 그를 그들에게 보낸다.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낸다.
창37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쉐켐은 등이다. 든든한 것이다. 세겜에 갔다가 디나가 겁탈당했는데, 형들은 세겜에 가 있다. 아버지의 양들을 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들에게로 보내리라고 한다.
2) 야곱 : 보냄 to 죽음
히네니, 내가 여기 있나이다. 쉽게 말하면, 죽음의 구덩이로 보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야곱이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건 정말 숙제이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셉을 신뢰하기에 매니저 삼아 보냈겠지만, 야곱을 티프에레트의 생명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네샤마의 생명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보낸 것이다
어제, 죽음 가운데 던져지는 것에 대한 설교를 들으셨을 것이다. 요셉은 죽음 가운데 던져진 것이다.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우리를 죽음의 구덩이 보내신다. 심각한 도전이다. 황 집사님이 죽음의 구덩이로 던져진 간증을 하셨다. 이것이 미움과 사랑의 충돌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으니, 이게 성취이다. 야곱이 요셉을 보낸 것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 가운데 보내는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을 보내실 떄,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신다. 보내심의 원리이다. 가서 죽어라.
그래서 우리는 자꾸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순열이에게 다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을 다 이겨내는 비결이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고난인데, 승리 비결이 있다
3) 승리 비결 : 위로부터 + 아래로부터
우리가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두 군데서 온다. 위에서와 밑에서 온다. 위에서 오는 것이 봄부터 여름까지의 절기가 위에서의 서포트이고,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 그것을 반사하는 작은 불빛, 키슬레브월의 불빛이다. 우리는 너무 잘 안다. 요셉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았다
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격려의 에너지는 충분하다. 하나님이 손으로 감싸시는 카프 에너지는 절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들이 이것만 깨달아도,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에너지와 보호의 손길을 의심하면, 이미 불신앙의 문은 열려버린다. 내 눈으로 사망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소망이 올 곳은 없다. 괜찮다. 어디서 소망을 찾는가? 루아흐의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한테 가면 된다. 그래서 아버지 아버지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으면 루아흐가 아니다. 영의 생명, 성령 충만, 아무리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단독자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기 좋자고 하는 것이다. 성령 운동의 가장 큰 단점이 자기 도취, Holy laughter, 깔깔 떼굴거리고 웃는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예언도 하고, 별별 것을 다 한다.
저는 그런거 많이 경험했다. 아프리카 형제들은 말도 못한다. 기도해주면, 소위 카리스마 교회에 나타난 모든 형태가 다 있다. 귀신이 나가고, 구르고, 노래부르고, 하는데 So what? 하나님의 은혜는 위로부터, 그리고 정말 필요한 것은 아래로부터이다.
창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아래로부터 : "완전무죄추구의식" (NSBG : No Sin Before God)
아래로부터라는 것은, 완전 무죄 추구 의식이다. 이게 가능할까? 영으로 하면 No sin before God, 내가 몰라서는 죄를 지을지 몰라도, 내가 아는 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이게 의인, 요셉이다. 그래서 요셉을 짜딕이라고 한다.
죄를 왜 지을 수 밖에 없냐면, 알면 알수록 나는 죄인이구나밖에 없다. 토라를 많이 배울수록, 이것이 죄구나. 이것이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구나. 그래서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라는 것은 죄에 대한 많은 성찰, 의식을 가지고선 자기를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완전무죄추구의식을 가지고 사역을 했지만, 나에게는 죄 덩어리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있을 때, 나의 불신앙, 불순종, 불의, 이것들을 발견해낼 수 있게 한다. 토라 배우면서 계속 하시는 것이 그것이다. 요셉은 그것을 기쁨으로 여겼고, 자연스럽게 여겼기에, 자연스럽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겠나이까. 여자 하나 해서 악이 아니라, 모든 악은 하나님 앞에 악이다. 조만한 것이라도, 내가 큰 죄라고 여기는 의식, 이것이 나에게 심겨지면 말이다. 예슈아는 죄를 지었나, 안 지었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추구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요8장에 음행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떠나갈 때, 가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다. 완전무죄추구의식을 가지고 살아라. 그것이 기쁨이 되면, 이 절기의 기쁨이 되면, 아래로부터 빛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추구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나에게서 작은 빛이 나오는 것이다. 하누카의 빛은 완전무죄추구의식을 가진 사람이 땅에서 요셉같이, 눈 앞에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아무도 인지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인지하면서, 어찌 이 큰 악을 행하리요. 완전무죄추구의식을 가진 의인이다. 요셉은 이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만약 이것을 고통으로 여긴다면, 종교인 것이다. 수도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오히려 즐기는 것이다. 와~ 죄가 보이네!?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뱀의 속삭임, 의심, 불안이 보인다. 그것이 다가와서 말하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 할 때, 이 뱀 새끼야 라고 한 것이다. 토라를 모른채 하는 위로의 말은 뱀의 말이다. 그래서 토라를 더 공부해야 한다. 요셉으로부터 이것을 배우시기 바란다. 그러면 요셉은 틀림없이 기초가 되는 비밀의 문을 열어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통과하여 야곱의 족보에 올라갈 수 있게 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시작이지만, 단편,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되는 것이고, 마침내 네샤마의 생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완전무죄추구의식, No Sin Before God, 완전무죄를 즐기시기 바란다. 성령이 충만하게 해주실 것이다. 새로운 바람이 불려질 것이다. 이것이 성령 충만이다.
* 기도
완전히 부서지지 아니한 나, 내가 이런 혼동 가운데 있었구나. 내 생각과 하나님의 토라의 지식이 충돌한 부분들이 있다면, 거기서 스스로를 부술 결정을 하시기 바란다. 나의 관점으로 순종했다면, 이것은 부분적 순종이고 불순종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안돼.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변화시키겠어? 이것은 고집이라고 하고, 이 아본을 불의라고 한다. 불신, 불순종, 불의를 부수시기 바란다.
요셉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승리한 사람, 그래서 우리에게 예쏘드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 우리가 영의 사람, 성령 충만의 사람이 되도록 열어주는 오늘의 교훈을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우리가 영의 사람이 되어, 마침내 티프에레트의 사람, 야곱의 족보에 들어가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오늘 다말을 통하여 유다의 회개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봅니다. 우리가 불신 가운데, 불순종 가운데, 불의함 가운데 빠지지 아니하게 하시고, 완전무죄추구의식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요셉의 길을 따라서, 우리가 야곱의 톨도트에 들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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