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가도
작가는 민화라는 주제를 끌어안으며 작품의 과정 속에서 재발견하고,
그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듯하다.
그 현재의 의미는 곧 작가가 숨 쉬고 지나온 지금의 일상이며,
그 일상은 책과 사물을 통해 구체화되고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글 : 長江 박옥생(미술평론가,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2011. 12. 1 - 12. 18 갤러리예담]
[갤러리 예담] 서울 종로구 삼청동 26-2 T.02-723-6033
1. 테라코타 책가도: 고전에서 일상으로
테라코타 책가도가 만들어지기 까지 흙은 몇 가지의 삶으로 변환된다. 흙이 성형이 되면 건조되고 다시 가마에서 구워진다. 구워진 흙은 화판에 부착되고 성형된 흙의 형태에 맞추어 화판도 정교하게 잘려진다. 그리고 터지고 갈라진 부분은 메우고 수정되어 그 위에 아크릴로 밝고 경쾌한 색조로 채색된다. 작가의 테라코타 작업은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흙의 육중한 무게감과 건조된 흙이 빨아들이는 안료는 명징한 조형과 밝고 경쾌한 발색에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흙의 무게감과 조형은 조각과 같은 남성적인 힘과 3차원의 환영을 주고 있으며, 발색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명도는 동양 채색화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이 여러 번의 채색을 올리는 과정에서 도달하게 되는 정신적인 깊이와 승화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사물 하나하나의 형상과 의미들이 숨을 쉬는 듯 움직이고 강조되고 있다. 이는 곧 조각 같고 회화 같으며, 고전이면서 현대가 미묘하게 만난 새로운 책가도의 탄생인 것이다. 작가의 책가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폭넓게 읽어낸 서책들이다. <엄마를 부탁해>, <식물의 정신세계>, <성경>, <오래된 미래>, <내 이름은 빨강>, <농담>, <아직도 가야할 길> 등, 이들 책들은 모두 우리에게 익숙하게 읽혀져 오거나 명저로써, 작가가 오랜 시간을 책과 함께 지낸 시간의 증표이자 작가의 삶 속에 숨 쉬는 일상의 흔적들이다. 테라코타 책가도는 범우주적인 시간과 세계의 모습이 주저리주저리 보따리를 펼치고 사랑, 소망, 꿈, 행복과 같은 삶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렇듯 작가는 민화라는 주제를 끌어안으며 작품의 과정 속에서 재발견하고, 그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듯하다. 그 현재의 의미는 곧 작가가 숨 쉬고 지나온 지금의 일상이며, 그 일상은 책과 사물을 통해 구체화되고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2. 사물의 의미
작가 이지숙이 테라코타 책가도를 새롭게 탄생시키듯, 민화는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과 조형성을 검증받으며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민화 가운데 책가도는 조선의 성리학적 정치 이념과 궤를 함께 하며 적극적인 수용과 인기를 보인 그림이다.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에는 정조가 화공에게 명하여 책거리를 그리게 하여, 자리 뒤에 붙여 두시고 책 읽을 여가를 내지 못할 때에는 그 때마다 그림을 바라보고 즐거워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역원근법은 책이나 책상위의 사물들이 가까운 것은 작고 먼 것은 크게 묘사되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위가 더 길게 그려진 사각형 형태로 그려진다. 쌓아올린 서갑이나 꽂혀진 모란꽃들에서도 동일하게 위가 더 강조되고 있다. 또한 사물 하나하나들이 뚜렷한 형상을 유지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지는 다시점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주목하는 <에녹의 서>의 구절 “우주의 모든 것은 제각기 고유한 혼과 정령을 가지고 있다”와 동일한 것으로, 책가도의 사물들은 곧 그들 고유의 혼을 담고 있으며 작가는 그 사물들이 가진 의미와 가치들을 찾고 음미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문명이 발생할 당시 이미 사물에는 영원한 본질, 변하지 않는 본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철학적 인식의 기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 정신적이고 무의식적인 민화의 조형성에는 일상에서 발견한 사물의 의미, 그 본질적인 근원성을 탐구하고 음미하는 우주적인 정신의 세계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3. 흙 그리고 진리(眞理)를 향하여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존재론적인 사물의 의미는 흙으로 빚어 완성되고 있다. 작가에게 흙은 민화의 조형성을 넘어서는 자신의 인생을 닮고 또한 닮아가야 하는 인격적인 존재로서 다가온 듯하다. 따라서 작가는 불에 구워 낸 흙이 줄어들고 터지고 휘어지고 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바로잡고 수정하며, 자신이 원하는 형상으로 고쳐 나아갈 때 인간의 삶의 여정을 보는 듯 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규정되지 않은 흙의 거친 본성을 지키기 위해 불에 굽는 테라코타로 그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작가가 흙의 본성에 매료되어 있으며 자신이 발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세계의 본질이 흙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흙은 고향이며 기원이며 본질이며 시작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흙은 어느 것보다 더 강력한 기원과 본질로 회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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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머문 여름-식물의 정신세계,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채색, 122x72x3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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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머문 여름-내 이름은 빨강,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채색, 79x84x3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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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머문 여름 - 엄마를 부탁해,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채색, 77x55x3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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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머문 봄-매화와 성경,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채색, 86x79x4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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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머문 여름-오래된 미래,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채색, 74x68x3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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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 머문 봄-매화와 농담, 테라코타 위에 아크릴채색, 88x83x3cm,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