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좋은데.......”
친구는 흡족한 듯 싱긋이 웃었다.
“아마, 포크레인으로 배수로만 만들으면 될 거야”
“이 땅, 누구 땅이냐?”
“어........서울 사는 여동생........”
“여동생 부자구나.”
“부자긴.....미친 년이지......”
“무슨 소리야?”
친구는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필요도 없는 땅을 왜 사. 노후에 내려온다나 뭐라나. 지가 서울 생활 포기하고 내려올거 같아?”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여동생 욕을 했다. 친구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2 년 전, 부모님이 계시는 옥계 먼 친척이 돈이 급해, 자신의 더덕 밭을 헐값에 내놓았는데, 그 땅을 여동생이 사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땅 명의는 아버지 앞으로 해 놓을 수 있었지만, 1 년간은 의무적으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재작년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고추를 950 포기나 심어야 했다.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정성 들여 말리신 태양초 고춧가루를 원 없이 먹었지만, 그해 어머니는 심한 노동에 허리가 아파 고생이 심하셨다.
나는 대놓고 부모님 앞에서는 여동생 욕을 할 수 없었지만, 속으로 어머니 때문에 또 한번 여동생의 욕심에 부화가 치밀었다.
친구는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징역살이를 하고, 태백 탄광촌에서 나와 같이 노동운동을 하다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고, 그 후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돈 안돼는 복지단체 일이라든가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다.
다행히 부인이 피아노 학원을 해서 생활을 하였으나,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아 부인마저도 수입이 변변치 않았다.
친구는 동업으로 조경회사를 차렸으나,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나무를 심을 땅이 필요하다길래 문득 여동생 땅이 생각났던 것이다.
사실, 내가 여동생에게 욕을 퍼부어대었지만, 그 동안 여동생의 고생과 억척스러움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어쩌면 허술하게 살아 온 내 인생보다 치열하게 살아 온 여동생의 인생이 더 값진 것일지도 몰랐고, 나의 여동생의 땅에 대한 악감정은 내 보잘 것 없는 열등감일지도 몰랐다.
일본 유학 시절,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작은 학원을 운영하던 여동생을 불러, 보석디자인 공부를 시켰고, 유학에 실패한 나를 대신하여 여동생은 멋지게 성공을 하였다.
상명대 산비탈에 자취방을 얻고 인사동 골목 구석에서 디자인 사무실을 열어 모진 고생을 하여 지금의 성공을 이루었다.
한 살 아래 멋쟁이 동료 디자이너와 결혼을 하고 청와대 앞에 건물 통째로 디자인 샵을 열었다가, 지금은 자신의 건물을 사서 옮겼다.
부모님이나 나에게는 나무랄데 없는 여동생인 것이다.
내가 비록 여동생 욕은 하지만, 나는 여동생이 겪었을 일본 유학생활과 서울 생활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그럼, 서울 사람들 다 미친 놈들이겠네요.”
친구의 운동권 동료이자, 내 대학 강원대 축산과 선배의 농담 섞인 말에 다행히 어색한 분위기는 자리가 잡혔다.
옥계에 가서 여동생의 땅을 보고, 우리 집 옆 지하에서 친구와 친구의 동료와 술 자리를 가졌다.
친구나 친구의 동료나, 살아 온 과정은 비슷했다. 같이 감옥살이를 했고, 비슷한 단체에서 일을 했고, 생활을 위해 친구는 조경사업을 택했고, 선배는 시골 생활을 택한 것이 다를 뿐이었다. 소설가로 등단을 해서, 책을 몇 편 내고 시작한 시골 살이는 변변치 못했다.
새로운 작목을 할 때마다 실패를 했고, 그래서 농번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포크레인 기사생활을 십년 째 하고 있다고 했다.
“저는, 문학을 위한 문학은 하지 않을 겁니다.”
편두통 때문에 술을 못하는 선배와, 체질적으로 술을 못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나는 술 기운이 올라, 오랜만에 문학 이야기를 하였다.
“문학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문학하는 인간들과는 가능하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좋아요.
아무 쓰잘데기 없는 짓이죠.
그 시간에 차라리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작품에도 좋아요.”
오랜만에 학과 선배이자, 소설을 쓰는 사람과 만나 조금 흥분도 된 것 같았다.
선배는 내 말을 잘 받아 주었고, 자신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비슷하다고, 서로간의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열우당 386들 변한 거 같아요. 적어도 민중을 위해 그토록 투쟁한 사람들이 지금의 양극화에 대한 처방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대기업들의 편에 서 있는 느낌도 들고요.....”
“그들은 대학 시절부터 정치적이었죠.
학생회장이 되려고 그들은 운동권 노선을 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야기가 정치로 변했고, 내가 열우당에 가졌던 불만을 이야기 했을 때, 선배는 마지못해 내 말에 답을 해 주었다.
그들은 현재 삶이 피곤할 것이다.
어쩌면 과거 학생운동 시절보다 더 절실한 현실의 문제에 봉착해 있을 것이다.
당장 가족들 생계가 과거 광주 민주화 운동 보다 치열할 지도 모른다.
독재 정권 시절, 내 여동생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일했고, 열우당 386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차근차근 쌓아갔으나, 친구와 선배는 순진할 정도로 세상의 고민을 안고 살아왔다.
그 결과, 친구는 부동산 투기를 한 내 여동생 땅에서 삶을 구걸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고, 선배역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과거 운동권 시절의 패기를 잃어버리고 농한기 때는 포크레인 기사를 하게 된 것이다.
땅은 지독한 현실인 것이다.
땅은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세상에 대해 순수했던 그들이, 한 사람은 부동산 투기를 한 땅에 구걸해야 할 입장이고, 한 사람은 부동산 투기로 개발 붐이 일어나는 곳에서 포크레인을 몰아야 될 입장인 것이다.
땅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 현실이, 마치 우리가 꿈꾸고 있는 행복한 세상이 아득히 먼 곳임을 알려주는 것 같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는 않는다.
다만, 땅 만큼은 우리의 진정한 현실이 되고 순수하길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