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79
1월23일[연중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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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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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3HZPzVIGXs (이창영 이레네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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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성모독죄>
한 젊은이가 오랜 기도와 고민 끝에 수도회에 입회한다거나 신학교에 들어간다고 결정하면 크게 기뻐하면서 격려와 박수를 쳐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반응이 180도 다릅니다. “딱해라. 무슨 문제가 있나?” “왜 저러지? 뭔가에 단단히 홀렸나보다!”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이후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활발히 사목활동을 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특별한 모습에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인격과 메시아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미쳤다고 결론을 내리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예수님을 강제 귀가 시키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항상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반응은 충분히 수긍할만한 반응이었습니다. 자신들과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가까운 친척인 예수님, 사촌동생이자, 조카, 형이요, 오빠였던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대단한 모습으로 돌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잠잠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친척으로서 걱정스런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는 율법학자들의 시선은 걱정스런 친척들의 시선과는 완전히 구별됩니다. 그들의 시선은 꼬일 대로 꼬였으며 악의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도 하였다.
유다 사상에 따르면 수많은 마귀들을 통솔하는 마귀들의 ‘보스’이자 ‘대(大)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의 이름은 ‘베엘제불’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어둠의 통치자’ ‘악의 통치자’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대마귀와 결탁해서 다른 새끼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마귀들을 내쫓고 있는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대마귀와 손을 잡고 마귀를 쫒아내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큰 죄요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어리석은 율법학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한 마디 던지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탄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존재로, 그리고 당신은 오로지 하느님의 힘으로 사탄을 굴복시키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 힘의 소유자요 관리자임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쫓으시는 사건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공생활로 인해 마귀의 세력은 점점 소멸되어 갈 것이며 언젠가 당신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훼손시키며 성령을 모독한 율법학자들의 미래는 암담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스르는 죄는 단순한 죄, 일회적인 죄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주 고집스런 영혼의 태도입니다. 끝까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수용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영예와 능력에 대항하며, 하느님의 구원행위와 맞서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인간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하느님과 완강히 맞서게 될 때, 하느님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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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정받기보다는>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가난하고 괴상하고 성질 사나운 괴짜로 살았습니다. 아마 아버지의 품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번은 자신의 자화상을 고갱에게 보여주었을 때 자화상이 실물과 닮지 않은 것 같다고 했더니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그 자른 모습의 자화상을 다시 그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총으로 자신의 생을 젊은 나이에 마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림의 천재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그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돈 주고 사려고 해도 살 수 없는 명작들이지만 그가 살아있던 당시엔 단 1장의 그림만이 팔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예술을 한다는 것에 대한 한계를 느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그의 그림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해바라기를 주로 그린 ‘아를’이란 동네에 살고자 하였을 때 자신을 친구로 맞아준 ‘카밀’이라는 소년입니다.
소년은 자신이 부자라면 고흐의 그림을 모두 사주겠다는 말을 했고,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바라기를 꺾어 병에 꽂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해바라기 화분’이란 유명한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고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친구 카밀을 위해 그의 온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습니다. 우체부인 카밀의 아버지, 어머니, 17살의 형, 아직 아기인 막내 동생, 그리고 11살의 카밀 룰랭까지. 이렇게 그 유명한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화’와 ‘룰랭 가족화 시리즈’가 완성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고흐는 아를 사람들로부터 심한 따돌림을 받았고 결국 그 곳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을 받아준 유일한 친구 카밀을 뒤로 한 채. 어쩌면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는 곳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 그의 죽음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를에서의 14개월 동안 고흐는 무려 150편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팔리지는 않았지만 신나서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가장 짧았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와의 이별, 그렇게 반 고흐는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벙어리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군중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이 못마땅해 합니다. 마귀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합니다.
기적을 보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주면 인정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 이유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십니다. 나자렛에서 많은 기적을 하실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고향에서는 예언자가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흐는 단 한 어린이에게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나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람에겐 돈이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자신을 인정해 주더라도 그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나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예수님까지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자신들이 먼저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인정받지 못하는데 어찌 남을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남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먼저 인정해 줍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인정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충분합니다. 남들을 인정해주다가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예수님이 와도 받아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도 좋은 점을 발견하고 그 좋은 점을 지켜주기 위해 안 좋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자동차 왕 헨리포드는 ‘격려는 위대한 자산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경험에서부터 우러나온 격언입니다.
포드가 ‘자동차’라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 엔진을 개발하고 있을 때, 속칭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내를 제외한 그의 가족들도 포드를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에디슨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에디슨은 포드의 설명과 개발 중인 엔진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걸작이군! 이것은 분명 중요한 발명이네. 내가 보기엔 자네는 이미 해낸 거나 다름없네.”
에디슨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뒤에도 몇 년이 흐른 후에 엔진은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포드는 평생 동안 ‘에디슨의 격려를 들었던 때’를 생각하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제대로 된 칭찬을 듣는다면 2달은 밥을 안 먹고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격려는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먼저 격려를 받고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이들은 인정하거나 격려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도 인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격려를 통해 어떤 이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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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는 강론의 서두에 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안녕’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어로 ‘How are you, Good morning!’과 같은 말입니다. 어른들에게 하는 인사로도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문안의 인사입니다. 가끔 어르신들이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제가 강론 때 ‘안녕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은 처음 보는 분들에게 하는 인사도 아니고,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늘 성당에 잘 오셨다는 ‘환영’의 인사입니다. 그러고 나서 편안하게 오늘 성서 말씀에 대한 강론을 시작합니다. 안녕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이별’입니다. 영어로는 ‘Good bye, See you later!’와 같은 뜻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지지만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말입니다. 저도 친근한 사람들에게 ‘안녕 다음에 또 봐요.’라고 인사하곤 합니다.
2023년 새로운 한해를 같이 시작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12월 31일에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뉴욕 동북부에서 함께 지내던 백운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도 12월 30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 2023년을 같은 공간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안녕, 이별’은 없기 때문입니다. 위령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나도 천국성인도 에서 그대들과 같이 만나 영원한 복을 즐기게 될 것을 바라고 있소. 그대들을 정답게 껴안아 주겠소. 틀림없으니 그리 몹시 슬퍼 마시고 큰 사랑을 가지고 천주를 섬기도록 힘쓰시오. 그렇게 하면 죽은 후 영원히 주님 앞에서 서로 만나 끝없는 즐거움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요.”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독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고, 성령을 모독하는 삶을 산다면 권력을 지녔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많아도 우리는 안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병중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안녕할 수 있습니다. 박해의 칼날 위에 있어도 우리는 안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활할 몸이요, 하느님의 살아계신 성전인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인 몸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속량된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주님의 몸이요, 성체도 주님의 몸이요, 하나로 일치를 이루는 몸입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테살로니카 전서 5장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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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22-30: 성령을 거슬려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예루살렘에서매일미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하느님의 은혜로 인정하기보다는 마귀의 짓이라고 헐뜯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 하신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성령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모아들이신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서로 맞서 갈라진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해진 사람들 안에 사신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27절) 여기서 ‘힘센 자’는 악마로 그에게서 털 세간이라는 것은 갖가지 죄와 불경으로 그자가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며, 장차 그리스도 신자가 될 사람들을 가리키고자 한 것이다. 악마가 인간을 포박했던 것과 똑같은 사슬로 악마를 묶어야 했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을 옭아매었던 죄의 사슬을 악마에게 남겨 둔 채, 주님께 돌아갈 수 있게 된다.(로마 5,18 참조) 악마는 단단히 묶였고 그의 재물인, 악마가 자기의 목적을 위해 불의하게 이용해 온 묶였던 인류가 하느님의 자비로 자신을 속박했던 악마의 권력에서 해방되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충만하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에 참여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은총에서 등을 돌릴 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토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도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지내면 눈은 보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누워있는 사람은 걸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너무나 오래 거절한다면 하느님의 진리를 보게 되더라도 그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 사랑이시며 진리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되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악의 상태에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보다도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믿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그분 앞에 나 자신이 부족하고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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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일부의 사람들은 그분께 악령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업적이 일상 안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업적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그것이 악의 힘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일은 바로 악의 힘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감하면서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모든 죄와 신성을 모독하는 어떤 말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표현이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오늘 복음의 28절과 관련되어 보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업적을, 모든 죄와 모독하는 말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탈출기에 나오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다음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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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죽을 죄를 짓고 죽음을 맞는 불행은 없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3,28-29)
신성모독죄와 성령모독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신성모독이란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죄악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거나 온갖 선(善)을 그분께 되돌리지 않는 일반적인 죄를 말합니다.
세례를 받고 살면서 다른 이들에게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죄악을 저지르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잘못을 일컫습니다.이런 죄는 용서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한편 성령모독죄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죄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성령께서 하신 일임을 알고도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합니다.(3,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맹목적인 완고함을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한 까닭이지요.
성령을 거역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느님의 진리와 성령께서 하신 일을 끝까지 완고하게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번 빛을 받아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과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힘을 맛본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회개하도록 만들 수가 없습니다.”(히브 6,4-6)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일을 마귀의 일이라 고집한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활동을 악령화 하지 말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며 그분의 활동에 집중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려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사업 모두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벌하시려다가도 뉘우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완고하게 하느님의 용서를 거부한다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랑을 부정하면 바로 그것이 하느님을 부정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결과를 초해하는 것이니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하느님을 거부함으로써 용서받지 못한 채 그 죄악 속에 영원히 머무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있을까요?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불행하옵니다. 죽을 죄를 짓고 죽는 이들이여! 복되옵니다.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실천하며 죽음을 맞이할 이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리이다.”(태양의 노래, 29-30절)
예수그리스도를 믿도록 재촉하시는 성령을 완강하게 거절하다가 죽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성령께서 하시는 사랑과 선과 정의와 창조를 마귀의 일로 단정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불쌍한 행동을 멈추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교만과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용서를 청하며 복된 죽음을 준비하는 회개의 날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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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
마르코 3,22-30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선>
선은
악과 다투려
스스로를 악의
곁에 두지 않으며
오롯이
스스로를 늘
고이 지님으로써
그렇게 악을 사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은 선이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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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때가 되면 거짓은 드러납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 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릇된 열심은 많은 상처를 만듭니다. 혼자만 잘난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는 소문이 돌고 혹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하게 알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아우구스티노) 얼마나 속이 깊고 마음이 넓은지, 생각하는 차원이 높은지 상대를 통해 알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3,30)
물론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지 않는 행위,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마음이 비뚤어져 하느님께 속한 자비와 사랑, 용서를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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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프랑스어로 헐렁한 옷이라는 뜻의 블루즈(Blouse)가 변형된 옷인 블라우스는 청순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옷입니다. 그런데 이 블라우스를 남자인 제가 입는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옷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니스커트는 어떨까요? 이는 블라우스보다도 더 보기 싫은 모습이겠지요. 이제 아름답고 화려한 파티용 드레스는 어떨까요? 분명히 그 자체는 아름답지만 제가 입는다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옷이라 할지라도 옷을 입는 사람에 따라 옷의 가치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가치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를 더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합당한 자세를 갖춰야만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 들고서는 오히려 주님 사랑이 끔찍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의 모습에 따라 세상에서 환하게 또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 주님 사랑을 드러내고 있었을까요? 나의 많은 죄로 인해 주님 사랑을 끔직해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영광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내가 받을 사랑만을 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변화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늘 변함없이 내 곁에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내가 그 사랑을 거룩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온전히 사랑을 전해줘서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의를 표현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만 키우고 있었지요. 그들 자체가 변하지 못하니, 주님 사랑이 그들 안에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루카 3,28.29)
주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을 끔찍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이라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세상에 아름답고 멋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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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적 식별을 한다면>
공생활 초기 예수님은 비정상적인 존재로 계속 의심받습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잡으러 왔고, 이어서 어머니와 형제들도 예수님을 만나러 왔으며, 오늘은 드디어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까지 와서는 악령 들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는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았고 특히
오늘 복음에서처럼 교회 기득권층에게는 더 많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보면서 율법 학자만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영적 식별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는 어떤 영이 있는지, 나는 어떤 영에 이끌리고 있는지, 내가 지금 하는 것은 어떤 영에 이끌려 하는 것인지 등.
북한 일이든 해외선교든 살아오는 동안 많은 일을 했고 어려움도 많았는데 사실 그 일의 어려움보다 더 큰 어려움은 이 일이 과연 하느님 일인지, 하느님께서 시작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일인지 식별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런 식별의 경험들을 통해 이제는 제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이 일을 하는지 아니면 성취욕 때문에 하는 것인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는지 나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인지
-나의 비판이 시기 질투에서 비롯됐는지 정의에서 비롯됐는지
-나의 중재가 일치를 지향하고 일치를 낳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그리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식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소분류 하지 않고 대분류적으로 식별한다면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사랑이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이 아닌 것에 이끌리는 것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단순화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렇게 질문하게 되겠지요? ‘성령이 아닌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들은 ‘육의 영’이거나 ‘더러운 영’이거나 ‘악령’일 것입니다. 늘 자기를 향하게 하는 ‘육의 영’이요, 늘 세상을 향하게 하는 ‘더러운 영’이며, 늘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선들을 파괴하려는 ‘악령’입니다.
이런 영들이 성령을 도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지금까지와 다른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늘 무엇을 하며 그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인지 아닌지 그 점에 대해서 식별했는데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성령에 이끌리는 것인가?
게으름의 영, 무기력의 영, 무관심의 영, 이런 영도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 그래서 무사안일하려는 영에 이끌리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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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질투는 선의 이치를 모름의 소치>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그제 연중 2주 토요일 “미쳤다”는 소리를 친척들에게 들으신 주님께서 오늘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신다는 말을 들으십니다.
지금의 우리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정말 그런 말을 들으실만한 구석은 없으셨는지 합리적인 의심도 하고, 율법학자들은 왜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는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엄청난 열광을 보내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의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수상쩍게 보입니다.
앞에서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동서남북에서 모두 변방지역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만 몰려왔는데도 헤로데가 위협을 느끼고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예수님께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열광적으로 몰려드니 위협을 더 크게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전통과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고, 병과 마귀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주는 행위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정복자 로마의 부역자인 헤로데에게는 로마에 대항하고,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종교 전통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신천지로 사람이 몰리는 것을 우리가 우려의 눈으로 보듯이.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의 측면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함의 측면도 있을 겁니다.
합리적인 의심이 예수님을 정당한 질서의 파괴자로 보는 사람의 것이라면 터무니없는 모함은 예수님을 자기의 적대자로 보는 사람이 하는 짓이지요.
나에게로 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몰려가면 그 사람이 내게 아무 짓 안 했어도 내게 적대자가 되는, 그런 현상이지요.
그런데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미움이 보통 적대자, 곧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사람을 악으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하는 그가 선이고 그의 행위가 선이라면 그것은 아니 되지요. 그리 되면 내가 악하고 내가 하는 짓이 시기질투와 미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팥쥐에게는 콩쥐와 콩쥐의 행위가 선이 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런데 실은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주 좋은 사람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선을 칭찬하기에 질투하는 것이고 그가 하는 일이 너무도 훌륭하고 좋은 일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행위를 칭송하기에 시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선을 보고 시기질투하고 그래서 그의 선을 악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선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8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이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선을 시기 질투하여 그 선이 악령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이라고 모함하는데 시기 질투는 모든 선이란 다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모름의 소치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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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사랑의 전사>
-성령의 사람-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하느님의 전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을 따라 사는 모든 이들의 신원입니다. 하느님의 전사를 더 분명히 하면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진리의 전사, 기도의 전사, 평화의 전사등 끝이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전사가 바로 예수님을 닮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먼저 세상 한 복판에서 성인처럼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 성령의 사람 세분에 관한 감동적 일화를 소개합니다.
“1.존경하는 이수철 신부님, 안녕하세요. 가톨릭신문 박지순 시몬 기자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찾았던 ‘둥근마음, 둥근 삶’을 얼마 전에 한권을 구했습니다. 분도출판사에서 모르고 있었던 재고가 분도출판사에 있어서 바로 주문해서 소장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어제 새벽미사에서 하신 불광불급(不狂不及)을 듣고 저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제대로 미쳐서 성인이 되겠습니다.”
즉시 ‘여섯 자녀를 정성과 사랑을 다해 키우고 있는 형제님은 지금도 성인이다’ 화답하며 격려했습니다.
2.어느 수녀님이 소개한 치과의사에 대한 소개입니다. 말그대로 숨겨진 미담인데 수녀님의 자전적 일기를 보며 발견한 것입니다. 이 치과의사 하치양 프란치스코 형제님은 제가 25년 동안 제 치아를 전담하고 있는 분인데 섬세하고 친절하고 한결같기가 성인같은 분입니다.
“제 담당이 아니었던 봉사오셨던 치과 선생님이 저의 사진을 보고는 저에게 다가와 귀속말로 ‘수녀님, 제가 하는 개인병원에 오세요. 제가 임플란트 해드릴께요. 이곳에서는 임플란트까지는 못해 주거든요.’ 예수님! 저는 선생님의 이 말을 듣고 정말 감동했어요. 한 5년전부터 선생님 개인치과병원에 다니는데 어금니 2개씩이나 임플란트 해주었어요.
세상에 이런 치과가 어디 있겠어요. 선생님은 조용하고 꼭 수도승같아요. 아무튼 저에게 치료비 한푼 안받아요. 또 들은 이야기지만 여기 말고 수원 어디에 있는 에이즈 환자들에게도 봉사하러 나가신다고 했어요. 하느님 아빠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아야 할 분인 것 같아요.”
무려 치과의사 선생님에 대한 미담이 대학노트 4쪽에 걸쳐 감동깊은 내용이 전개되어 있기에 즉시 복사하여 카톡으로 그 치과의사에게 전송했습니다.
3.그 수녀님이 교정사목에 함께 할 때 만났던 사형수들에 관한 내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아! 이들이 과연 사람을 살해한 일이 정말인가? 저 환하게 웃으면서 저 아름다운 미소가 어디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갈 때마다 이 질문이 저에게 던져졌어요. 사막의 은수자도 그렇게 아름답게 미소를 짓지 못할거예요. 프란치스코, 토마스 형제예요. 이들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해요.
제가 질문을 가끔해요. 방의 크기는 어느 정도예요? 방 가운데 서서 두팔을 벌리면 양쪽 벽이 손가락에 딱 닿아요. 변기도 그 안에 있고요. 어째서 변기가 고장나면 그 악취가 대단해요. 벽꼭대기에 작은 창문이 하나있고 작은 선풍기 1개, 작은 TV 한 대 있고, 24시간중 낮에 1시간만 운동하러 나오고 그외 시간은 독방에 있어요.
이들이 하루 1시간 그 짧은 운동시간에 운동장 땅을 파서 채소 씨를 심어요. 그리고 짬방등 거름을 주고 길러서 이웃 재소자들에게 주고 자기들도 먹고, 우리가 미사갈 때 그 농사지은 것을 우리에게도 줄려고 갖고 나와요.”
이 치과의사 선생님이나 수녀님이나 성인같은 사형수들, 제가 볼 때 참 치열하게 제 삶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사는, 참으로 하느님만이 아시는 주님의 전사들이요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전사로 살아가는 어느 50대 초반 자매님이 보내준 메시지도 감동입니다.
“신부님, 오늘 강론 주제가 넘 멋집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오늘 내일 숯가마에 알바를 하러 갑니다.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합니다. 다만 하느님께 대한 첫마음 잃지 않도록 감사 겸손 깨어살기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가열加熱차게 알바하고 오겠습니다.”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저희 수도승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고 부단한 도전이 되는, 또 깨어 분발의 노력을 다하게 하는 세상 곳곳에서 주님의 전사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는 성인聖人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자들뿐 아니라 예외없이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전사의 원조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바리사이들과의 영적전투가 참 치열합니다.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들면서 보기 좋게 이들을 제압합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영리한 사탄은 절대 일치하지 자기들끼리 분열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선의 연대 못지 않은 악의 연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분열하기 잘하는 사람은 사탄만도 못합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힘좋다 하는 마귀들을 제압할 수 있는, 참으로 성령의 힘으로 무장된 힘센 분은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깊은 묵상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떨어지게 된다.”
너무나 누구에게나 명명백백한 성령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활동을 악령의 활동이라 왜곡하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을 부인함으로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고집스런 편견으로 이렇게 안에서 닫아 걸고 있으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도움을 주시는 분이 새계약의 중개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이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효과는 영속적입니다. 늘 새계약의 중개자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대사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성령충만한 당신 사랑의 전사로 백절불굴(百折不屈),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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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3,29)
<성령을 모독하는 자?>
오늘 복음(마르3,22-30)은 '예수님과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말합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22)
그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의 우두머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런 악담을 퍼붓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떤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3,28-29)
'성령을 모독하는 자?'
그들은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구원 행위를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새 계약의 중개자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단 한번 당신 자신을 바치시려고 이 세상에 첫 번째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땀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은 지금도 사제들과 너를 통해서 이 구원 행위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구원 행위를 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만약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처럼, 그 구원 행위에 못 마땅해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라면,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너와 세상을 바라보면 기적들이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시편 저자처럼 이렇게 기뻐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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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마르 3, 23)
예수님을
사탄의
우두머리로
몰아갑니다.
입술을 떠난
말들은 다시
주워 담을 순
없습니다.
반복되는
어리석고
더러운 말장난을
멈추고 삼가해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은
혀와 돈으로
우리를 더럽힙니다.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왔는지를
묻게 됩니다.
사탄을
쫓아내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도
사탄이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사탄의 운명은
끝내 끝장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갈라서고
거스르고
돌아서는
분열의 관계를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둠의 시간을
벗어나면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간섭과 참견을
멈추어야 합니다.
잘못된 사랑을
몰아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시대의
사탄을
쫓아내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마침내 사랑이
다시 온전한
우리로 바꾸어
줄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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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 29)
생명 속에서 성령을 체험합니다.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우리가 모독한다는 것은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분명히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을 지탱하고 지켜주시는 분 또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존재의 존귀함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의 역사를 써 내려가시는 성령의 힘을 믿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믿는 그만큼 하느님의 일을 존중하고 찬미할 수 있습니다. 결코 막을 수 없는 생명의 힘이 성령이십니다. 뜨거운 생명의 탄생과 다시 부활하게 하시는 성령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이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생명의 길로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님 믿습니다.
성령을 모독해서는 그 어떤 것도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생명을 던져 생명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성령이심을 믿습니다.
다시 시작할 힘을 주시는 성령님의 힘을 빌어 다시 일어납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끝까지 완주할 힘을 성령께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생명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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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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