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null)교육과정과 철학
2018101238 철학과 김민서
영 교육과정은 공식적 교육과정에 포함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지만 교육적 가치를 가진 것을 말한다. 공식적 교육과정과 같이 사전에 의도된 바를 내포하기에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등장하지만, 반드시 따라야하는 규범적 면모를 가지고 있는 공식적 교육과정과 비교했을 때 그 비중이 낮은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의도를 가지고 배제된 영 교육과정은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영 교육과정은 오히려 공식적 교육과정이 비추지 못하는 곳을 비추는 달빛이자 교사의 역량에 따라서 공식적 교육과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영 교육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러한 영 교육과정에서 철학이 앞서 말한 풍부하고 세밀한 조정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느껴 이것을 주제로 글을 작성한다.
이 수업을 받으면서 나는 그간 가지고 있던 의문점을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다. ‘과연 철학를 교과서화 시켜서 가르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하면 이는 올바른 철학 교술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있던 내게 이번 강의는 어느 정도 답을 제공했다. 철학은 교과서로 가르칠 수 있다. 교과서는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에서의 교과서는 학교에서 교과 과정에 따라 주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을 말한다. 해당 분야에서 가장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단어로도 사용되는 이 개념은 많은 학생들에게 정보를 왜곡 없이 평이하게 가르쳐야하기에 개념의 정형화가 이루어지지만 철학에 입문하는 산파의 역할로 사용할 수는 있다. 이번 강의에서 다룬 교과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학생들에게 철학이란 어떤 것이다 하고 정의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철학적 시각으로 다룸으로서 하나의 사물을 관찰하거나 이에 견해를 가지고 있어도 이를 다각도로 격물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생각의 자유’ 의 물꼬를 틀어준다는 긍정적인 면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며 다양한 학생들이 수업시연을 함에 따라 수많은 교사와 교수들이 붙어 만든 교과서임에도 불구하고 철학도의 눈으로 보기에도 오류라고 보이는 잘못 서술된 개념들이 속속들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때는 ‘철학을 교과서같이 긴 본문 정독 없이 소위 말하는 엑기스로 전달하기는 무리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영 교육과정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오개념에 대처하는 교수님의 자세에서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교과서에 쓰인 ‘오류’들을 이것이 이러한 방안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접근법을 제시하셨다. 교과서라는 공식적 교육과정의 큰 부분에서 오류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지식과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학생들이 잘못된 견해를 가질 수 있었던 사건을 수정하여 강의와 접근 방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신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영 교육과정의 연속이었던 교수님의 여러 수업에서 느꼈던 생각을 구체화하여 이 글을 적을 수 있었다. 사실 고민이 많았다. 어떤 글을 써도 맘에 들지 않을뿐더러 이번 강의에서 교과서에 대한 견해는 한없이 부정적으로 보였기에 더더욱 글 하나 쓰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이번 학기는 철학에 대한 회의와 그간의 대학 생활에 대한 자괴감으로 뭐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철학과에서 철학 수업을 듣는 것은 즐거웠다. 그러나 강의를 듣고난 뒤 나의 모습은 강의 시간에 생각하고 견해를 나누며 이를 습득한 모습이 아닌 이 강의를 듣기 전의 평상시의 김민서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본과 4학년인데 나의 삶 속에 철학이 녹아있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철학과목 자체의 어려움에 직면한 것이다. 그래서 고민했다. ‘철학 강의가 중요하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삶 속에 녹여내지 못한다고 했을 때 철학은 과연 살아있는 것인가? 죽은 철학의 시체를 만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는 고민이 이번 학기가 끝을 달리고 있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앞서 서술한 철학의 존속에 관한 의문은 한 명의 철학도로서 부끄러운 행동이다. 내가 내 삶 속에 배운 바를 실천하지 못한 것을 철학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냐는 점부터 내재되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한 채로 이를 쓸모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냐는 점이다. 공식적 교육과정에 잘못된 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전제가 잘못되는 상황은 일상에서 생각보다 부지기수다. 현재 대한민국의 2022교육과정 역시 이를 담고 있다. oecd 2030에서 주장한 핵심역량과 총체적 인간이라는 것에 매달려 이것이 실제 교육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 교육부 본인들도 해답을 내놓지 못해 이를 ‘핵심역량’이라는 단어로 규정한 채 이것을 달성할 방법을 제공하지 않으니 있으나 마나한 개살구가 되었음을 이를 공부했기에 안다. 전제부터 잘못되었으니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비관을 가지는 것이 과연 교육자로Jㅓ, 철학자로서 할 생각인가? 적어도 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직되고 딱딱한 공식적 교육과정을 보충하며 지식에 생명을 넣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영 교육과정이며 이것을 발위하는 교사의 역량으로 학생들에게 역량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진정한 의미의 훈육을 이룰 수 있을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밝혀본다. 영 교육과정의 역할은 사실 철학이 그동안 해오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철학 역시 여러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껏 철학이 이룩한 다른 것들을 부정하는 사람은, 적어도 지식인 측에서는 없다.
철학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서 주요하게 보던 입장과 현재로 넘어오면서 다르게 주목하는 측면이 있기에 2500년 전의 원시 유가를 아직까지도 공부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것처럼, 경직되어 교과서만 보고 수업을 하는, 발표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를 넘어서 연관된 다른 지식들을 활용하여 전반적인 것을 아우르는 역할, 이를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지금 나의 입장은 철학을 교과서로 가르칠 수 있지만 이를 강의하며 오개념은 철저히 집어주고 다양한 견해를 제공한다는, 영 교육과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전제 하에 철학은 교과서적인 것으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비가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고 해서 나비를 탓할 수 있는가? 영 교육과정의 역할은 공식적 교육과정을 보조하여 교육적 가치가 있는 내용을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에 있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교사의 주관이 지나치게 강요되거나 오히려 교사가 오개념을 가르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 교육과정을 경시하고 공식적 교육과정만을 강조하면 안된다. 적어도 철학에서는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철학을 공부하는 나와 다른 이들은 여기서 눈 돌리지 말고 보다 옳은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명백한 학습목표 뿐만이 아닌 의도되지 않는 목표를 고려하여 저 너머를 볼 수 있는 학생들을 길러보자. 그것이 철학의 역할이며 영 교육과정의 의도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