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6일(주)
* 시작 기도
주님...
판교에 있는 카카오톡 데이터 센터 화재로 인하여 SNS가 먹통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동안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SNS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는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 역시 당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의 대가로 오는 것임을 확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약함이 주님의 강함으로 이어지게 하시어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가 되게 하소서.
오늘도 공동체로 모이는 주님의 날이오니 한 자리에 모이는 주의 백성들이 하늘의 기쁨으로 모여서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35:16-29
제목 : 심판을 통하여 벤오니에서 베냐민으로 승화되다.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 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180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 나의 묵상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가나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땅인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한다.
세겜의 정착된 도시생활은 매번 유목생활을 해야 하는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매력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야곱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제단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곧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언약을 벗어나서 자의적 신앙은 결국 징계와 심판을 면치 못한다.
그로 인하여 세겜에서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은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저지른다.
더욱이 그 복수극도 그렇지만 그들이 행한 복수극의 사실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이용하여 그들을 살육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야곱은 결국 세겜을 떠난다.
심판의 상황은 이처럼 비참하고 참담하지만 실상은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의 폭풍우이다.
따라서 야곱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한 야곱에게 먼저 찾아오시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들은 야곱은 말씀대로 자정(自淨)의식을 먼저 행한다.
그리고 모든 일행을 이끌고 말씀대로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는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주신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번성할 것을 말씀하시고 이에 야곱은 돌기둥을 세워 이를 기념한다.
이제 야곱은 벧엘을 떠나 아버지 이삭이 있는 고향 헤브론으로 간다.
벧엘에서 조금 이동하여 에브랏에 이르기 전에 라헬이 해산을 한다.
라헬은 난산 중에 죽어가는데 산파가 그녀에게 힘을 불어 넣어준다.
(17절, 표준새번역) 두려워하지 마셔요. 또 아들을 낳으셨어요.
하지만 라헬은 급기야 죽으면서 ‘또 득남’한 아들의 이름을 벤오니(고통의 아들)라 부른다.
하지만 남편 야곱은 평생 사랑해온 아내의 죽음 앞에서 ‘또 득남’한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능력의 아들)으로 바꾼다.
야곱은 라헬을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하고 그녀의 묘비를 세워주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보낸 후에 슬픔을 추스르고 길을 나선다.
그리고 에델 망대를 지나서 장막을 쳤다.
그곳에서 레아의 장자 르우벤이 야곱의 첩인 빌하와 동침한다.
야곱은 임종의 자리에서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장자인 르우벤의 능력을 깎아내린다.
(창 49:4, 표준새번역) 그러나 거친 파도와 같으므로, 또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와서 네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네가 으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로 인하여 르우벤의 장자권은 유다(창 44:14, 18; 46:28)와 요셉(대상 5:1)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야곱의 아들들은 열두 명이다.
레아에게서 6명, 라헬이 2명, 라헬의 여종 빌하가 2명, 레아의 여종 실바가 2명, 모두 12명을 낳았다.
야곱을 비롯한 이들 일행은 마침내 헤브론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살던 곳이다.
그 때 이삭의 나이가 180세가 되었고 늙어서 힘이 빠져 결국 죽어서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이에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막내를 낳다가 난산으로 인하여 죽는다.
라헬은 죽으면서 자신의 난산의 고통으로 인하여 그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 또는 고통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벤오니로 짓는다.
하지만 그의 남편인 야곱은 그 아들의 이름을 벤오니가 아니라 베냐민으로 바꿔부른다.
베냐민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이며 오른손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임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적 이름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 여정은 한 마디로 자신의 이름이 말해주듯 속이는 자와 같은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내아들을 낳으면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 라헬까지 잃으면서도 그가 놓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르우벤의 빌하와의 동침사건도 그렇고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한 사건도 그렇고 크고 작은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야곱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막내아들의 이름이 고통과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부어지는 아들이었음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로 작정하셨다.
(벧전 1:20) 그(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20, 쉬운성경)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택하시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보내 주셨습니다.
(벧전 1:20, 공동번역)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창세전에 말씀으로 계셨지만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렇게 오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고 또한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다.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 곧 택함 받은 자들이 지은 죄를 심판하신 것이다.
그 심판만이 이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판 없는 구원은 가짜 구원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했지만 정작 이런 심판을 두려워하여 꺼리는 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저 지식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 나는 진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여 나는 예수를 믿는 것이 관념적이고 지식적인 술수에 빠져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라헬이 자신의 육신적 고통과 아들로 인하여 죽는 것에 대한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슬픔과 고통을 아들의 이름에 새기려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음을 고백한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숱하게 많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다.
물론 그 때 당하는 아픔이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많이 자책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내가 복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깊은 고통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셨고 무엇보다 내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 복음을 통하여 나는 벤오니(슬픔과 고통의 아들)에서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하나님의 능력의 아들)으로 승화되었다.
오늘은 주일이다.
이 하루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날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비록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숫자는 몇 명 되지 않지만 숫자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성령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사람의 연약함은 자신을 고통과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연민에 빠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들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그 마음은 믿음 없음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 앞에서 아픔과 슬픔을 내보이려는 이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오직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게 하옵소서.
나의 인생이 벤오니와 같은 아픔과 고통의 삶일지라도 거기에 치심하지 않게 하시고 눈을 들어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나도 함께 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 주소서.
오늘 성도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 성령님 함께 하여 주시고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붙잡아 주옵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