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나는 그녀를 생각한다. 몇 시간을 장승처럼 서서 그 남자를 기다리던 그녀. 상심 어린 눈빛으로 남자가 있을 창을 하염없이 돌아보던 그 여인은 처진 어깨로 가을의 어둠을 이고 쓸쓸히 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서있던 은행나무를 서글프게 바라봤다. 그녀의 사연을 아는 모두가 남자에게 마지막 기회가 돼버릴지 모른다고 훈수를 두었다. 눈이 멀어 가는 상황을 이해하고 빈털터리 신세까지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고 떠들어 댔다. 그러나 남자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얼굴 한번 보여 달라고 애원하는 여자에게 티끌만 한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땐 나도 아저씨의 행동이 무척이나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한없이 따듯한 그였기에 그토록 차가운 면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장애인학교에서 만난 한 학년 위 선배였다. 나보다 스무 살 정도 많았고 뒤늦게 장애인학교에 입학한 늦깎이 학생이었다. 나와 같은 병을 앓아 실명하고 있었고 법대를 졸업해 오랜 기간 사법고시를 준비했다고 했다. 그러다 시력이 점점 흐려져 몇 해를 허송세월 보내다가 재활교육을 받기 위해 맹학교에 입학한 참이었다. 그는 용모도 언행도 깔끔한 사내였다. 특히 아저씨가 환히 웃으면 그 미소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정도로 외모가 특출났다. 나는 아저씨에게 반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는 다재다능했다. 학교 강당에 그랜드 피아노가 한대 있었는데 아저씨는 불 꺼진 강당에서 혼자 피아노를 쳤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 음악을 감상했다. 클래식에 무지한 나였지만 그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멋져 보이는 순간은 진학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수학 문제를 가르쳐 주면서 미적분을 척척 풀어낼 때였다. 내가 아저씨를 졸졸 따라다니며 멋있다 칭찬하면 환하게 웃으며 멜론맛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같은 질환으로 실명하는 나를 그는 무척이나 애틋하게 여겼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가 졸업반이 되었다. 맹학교 졸업반은 임상 경험을 쌓기 위해 오후 시간에 외부 손님을 받아 안마 실습을 시켰다. 아저씨는 진로를 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면서 학교 스케줄표대로 실습에 참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성 두통으로 고생하던 여성이 그에게 배정됐다. 성실한 아저씨는 열과 성을 다해 시술을 진행했다. 다행히 증상은 점차 호전되었고 여성은 아저씨에게 매료돼 호감을 키웠다. 결국 그녀가 아저씨에게 고백을 했다. 그녀의 마음은 절절했다. 아저씨의 모든 결핍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 장담했다. 아저씨도 조금은 흔들렸을 것이다. 미래는 불투명했고 현실은 불안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을 테고 자신을 좋아하는 여인은 매우 유혹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점잖은 사내였고 정직했다. 감정 없는 여인에게 곁을 내줄 만큼 계산적이지도, 약지도 못했다. 아저씨가 여자를 피하자 그녀는 기숙사 앞에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그를 기다렸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여인의 발밑에 한숨처럼 쌓여갔다. 나는 며칠간 은행나무 아래서 아저씨를 기다리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끝끝내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았다. 며칠 사이 그녀는 가을 낙엽처럼 변했다. 매시간 빛바래지고 메말라갔다. 그러다 어느날부턴가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는 앙상해진 은행나무만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서있게 됐다. 아저씨는 졸업과 함께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 사정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기에 야속하진 않았다. 다만 가을날이면 나는 아저씨보다 그녀를 더 자주 떠올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창공을 올려다본다. 가을 하늘은 시리게 푸를 것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에 기대 하늘을 상상한다. 내 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빛과 어둠뿐. 발에 채는 낙엽을 내려다본다. 노란 융단 위에 내가 서있다. 나는 오랜만에 너를 기다려 본다. 너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우리는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다. 너는 항상 도서관에 있었고 나는 슬쩍 네 가슴에 달린 명찰을 훔쳐보며 이름을 알았다.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네가 반납한 책을 뒤이어 대출해 읽었다. 덕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파울로 코엘료를 알게 되었다. 나는 너의 무심한 눈빛이 좋았다. 책에 얼굴을 묻고 오직 활자에만 집중하던 그 모습이 나를 설레게 했다. 나는 책보다 너를 보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우리는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너는 입구에서 가까운 창을 등진 테이블을, 나는 서가의 가장 안쪽 창을 바라보는 테이블을 차지했다. 우리 사이에는 대여섯 개의 빈 의자가 있었다. 그 거리는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었다. 너는 항상 나보다 오래 자리를 지켰다. 나는 해가 긴 여름에는 여섯 시까지 자리에 앉아 책을 보았고 해가 짧아진 겨울에는 다섯 시까지만 앉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야맹증 때문이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했다.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나는 한정된 시간 동안에만 너와 한 공간에 있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네 손이 닿았던 책장을 넘기며 나는 너를 생각했다. 네 눈길이 멈춰 섰을 문장이 궁금했다. 검은 뿔테 안경 속 눈동자에 담긴 너의 세상을 나도 함께 보고 싶었다. 너를 향한 마음은 깊어지고 해가 저무는 시간은 점차 빨라졌다. 애달픈 마음을 네 옆에 두고 난 말없이 돌아서야 했다. 어느 날부턴가 네 옆자리에 주인이 생겼다. 나는 너희가 수시로 눈을 마주치고 슬며시 웃다 얼굴을 붉히는 순간을 자주 포착했다. 그쪽을 보고 싶지 않아 펼쳐 놓은 책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전혀 없었다. 의지와 다르게 자꾸 둘에게 시선이 향했다. 이글거리는 해를 올려다본 것처럼 눈가가 시큰했다. 서가 사이에 몸을 감추고 책을 찾는 척하며 화끈한 감정을 다스렸다. 눈이 멀어 가는 나는 너를 감히 욕심내지 못했다. 흐르는 감정을 단단히 잠그고 아무 책이나 뽑아 다시 책상에 앉았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다. 도서관 나무 벤치에 너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을볕 아래 너희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몸이 의자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릴 것 같았다. 질투 대신 가슴속을 채우는 감정은 체념이었다. 나는 너희가 떠난 나무 벤치에 앉아보았다. 노란 은행잎이 내 머리며 어깨 위로 떨어지며 다독거렸다. 가을이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앙상해진 은행나무 옆에서 나는 시련을 견뎌냈다.
은행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남자를 기다리던 여인의 마음에 공감한 것은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 일과 별개로 아저씨의 마음도 나는 이해했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 여인을 거절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때의 나는 의외로 금세 감정을 정리했다. 마음이 싸늘히 식자 한 공간에 있더라도 더 이상 의식되지 않았다. 그 애가 읽었던 도서들도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나는 섣부르게 감정을 내뱉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차갑게 식은 감정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아저씨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지금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큰 불안을 짊어지는 오류를 범할 순 없었을 거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마음을 거절한 것이리라. 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아저씨의 근황을 전해 들었다. 그는 절에 들어가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소식을 듣고 아저씨가 제대로 자기 삶을 찾아갔음에 안도했다. 글 조승리(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열다섯 살 때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었다. 손끝으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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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기온차 큰 변절기
감기 유의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동트는아침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