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 경북 연합회 총회를 다녀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갈 때 저희들의 대화를 주관하여 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주님이 주인공이 되시는 대화는
우리들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뛰어넘어 늘 하나가 되게 하시니
찬양받으실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저희들을 주장하셔서
마지못해 맡은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 생명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큰 은혜의 줄기를 보지 못하게 불쑥불쑥 치솟는 부정성을 십자가에 처리하오니
정결한 마음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하여 주실 때
나의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본문 주해)
16~22a절 :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이제 아버지가 계시는 헤브론으로 가려고 할 때 두 가지 아픔을 겪는다.
첫 번째 아픔은, 네 아내 중 야곱이 가장 사랑한 라헬이 죽는 사건이다.
헤브론으로 가는 길에서 라헬이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다.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일생을 보면 그 외모와는 달리 아름다운 것이 없는 여인이었다.
무섭게 질투하면서 야곱을 독차지 하려고 하였던 라헬, 남편을 조르던 라헬, 아버지의 집에서 남편을 따라 도망을 칠 때도 드라빔을 훔쳐서 떠나는 라헬은 하나님보다 우상이 앞섰던 그런 여인이었다. 또 우상 드라빔을 훔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서 거침없이 거짓말을 하는 라헬이었다.
이러한 여인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어미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후손인 야곱에게 편입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룻4:11)
라헬이 죽으면서 낳은 아들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 불렀지만, 야곱이 이 불길한 이름을 즉시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으로 바꾼다. 오른손은 힘과 권세와 주권과 영광을 나타낸다.
야곱은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한다.
특이한 것은 라헬을 그토록 사랑한 야곱인데 그 죽음에 대한 야곱의 마음이 생략되어 있는 것인데, 이는 고통을 대하는 야곱의 마음이 어느 정도 달라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 아픔은, 장자인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한 것이다.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고 우상을 묻고 떠나왔지만 죄는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이는 야곱의 가정이 세상정신으로부터 온전하게 훈련되지 못한 모습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야곱이 이 일에 대해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이 일로 르우벤은 후일에 아버지의 저주를 받고 장자권을 잃게 된다.
22b~26절 : 야곱의 열두 아들이 후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완성된다.
이 열두 지파의 생성은 이들은 인간들의 온갖 죄악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사람의 자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있음을 보여 준다.
27~29절 : 이삭이 자신의 수명을 다하고 180세에 죽어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장사 지낸다. 야곱과 에서가 함께 아버지를 장사하고서는 서로 따로 살게 된다.
창세기 36:6~7절에 보면 에서가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간다. 소유 재산이 너무 많아서 야곱과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에서가 떠남으로 야곱이 아버지 살던 곳에서 살게 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연결되는 언약의 흐름이 된다.
이삭은 죽었지만 그 언약은 야곱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에서는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나의 묵상)
벧엘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은 후 ‘믿음으로 살리라’ 하는, 전에 없던 결단을 야곱이 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좋은 일만 이어지면 야곱을 읽어가는 우리 마음도 안심이 되고 좋을 텐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믿음으로 살고자 해도 괴로움과 고통의 일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의 죽음과 장자인 르우벤이 자기 아내와 통간했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는 아픔과 치욕스런 가족사를 야곱은 감당해야 했다.
성경은 야곱이 라헬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표현하지 않는다.
또 르우벤의 행악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말이 없고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라고만 표현한다.
다른 종교를 가지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 땅의 삶에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당할 어려움은 다 당한다.
그런데 믿는 자에게 그 어려움은 단순한 삶의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게 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니 그저 그 고통을 꾹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야 할까?
주님께서는 그 고통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참고 살라고 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과 함께 죽었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야곱은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잠잠히 무덤으로 들어가야 했고, 치욕의 아픔을 가지고 잠잠히 무덤으로 들어가야 했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 앞에 절망하고 낙담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에 마음이 묶여 있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 무덤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 그분께서 먹여주시는 말씀을 받아먹으며 주님께서 새롭게 세워주시는 성소 안에 거한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 영생임이 증명된다.
영생은 아들의 생명이며 현재 이 땅에서 누리는 생명의 은혜이다.
단순히 장차 천국 들어갈 것을 소원하기에 이 땅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고 또 참는 일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천국을 누리는 삶인 것이다.
벧엘의 은혜를 누렸다면 십자가에 연합되는 삶을 살며 또한 기꺼이 무덤에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무덤은 나만 있는 어둡고 침침한 죽음의 무덤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곳, 부활의 소망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라헬의 죽음 앞에 가슴이 무너지지만 침묵하는 야곱, 르우벤의 비행에 또 가슴이 무너지지만 침묵하는 야곱이 속히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나의 삶 속에 맞이하는 어려움과 고통 역시 나를 주님 계신 무덤으로 인도할 것을 기대하며 그를 통해 주님을 더 잘 알아가는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길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벧엘의 은혜를 누린 자는
무슨 일을 맞이해도
속히 십자가로 달려가고
속히 무덤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연합되는 삶이요, 주님과의 진정한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돌보아 주옵소서.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