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신 요셉 신부
연중 제28주일
이사야 25,6-10ㄱ 필리피 4,12-14.19-20 마태오 22,1-14
온전한 신앙
가을! 눈부신 푸른 하늘에 서늘한 바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고 은혜로운 시월, 로사리오 성월이자 전교의 달을 지내고 있는 가운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성대한 잔치에 비유하는 말씀을 듣는다.
잔치라고 하면 흥겨움과 풍성함이 먼저 떠오르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초대하는 종들을 반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난 주일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말씀이 떠오른다. 포도원 소작인들이 밭 주인이 보낸 종들을,
심지어 상속자인 아들까지 매질하고 죽였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오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도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통째로 차지하려는 탐욕을 부렸지만,
오늘 잔치 초대 거부는 좀 다르다. 탐욕이라기보다는 단순한 거부에 가깝다.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이나 포도원의 주인이 모든 걸 다 준비했다는
점이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한 잔치는 말할 것도 없고, 포도원 주인도 큰일은 다 마친 상태에서
소작인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잔치에 가서 먹고 즐기면 되고, 또 포도 열매가 달리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아주 사소한 준비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소작인이 주인 재산을 노린 것이 탐욕이었듯이,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는 것도 욕심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일상적인 경우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당연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오히려 앞세운다면 욕심이자 잘못이 될 수 있다.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의 첫 자리는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소작인들이 그 짧은 기다림(수확)을 견디지 못해서, 또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예복을 갖추는
그 어렵지 않은 일이 귀찮아서(?)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멀어져 어둠 속을 헤맨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생각해 본다.
하느님의 잔칫상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 이고, 그 잔치 초대에 응하는 것은
그 사랑에 참여함을 뜻한다. ‘내 코가 석 잔데 어떻게 한가하게 잔치에나 갈 수 있냐?’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더라도, 희생하고 봉헌하고 버리지 못한다면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일상 안에서 신자답게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산다는 건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늘 말씀을 차분히 묵상하면서 우리 모두 세속적인
의미의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금부터라도 ‘예복’ 을 준비하는 데 인색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춘천교구 김현신 요셉 신부
2023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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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28주일
이사야 25,6-10ㄱ 필리피 4,12-14.19-20 마태오 22,1-14
저희의 빛이신 주님, 찬미받으소서
성경은 “인간은 살아서 하느님을 뵐 수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여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빛 앞에 인간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스스로의 어둠에
절망한 인간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칩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사야 예언자가 뵙고 엎드려 떨었던 하느님, 길 가던 바오로 사도를 땅바닥으로 내리꽂으며
두 눈을 멀게 했던 그 강력한 하늘의 빛은 모두 하느님의 위용 앞에 선 인간의 허약함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하여 인간은 다만 주님 앞에 꿇어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거꾸러지고 엎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할 데 없이 강력한 빛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어둠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시커먼 어둠밖에 없다는 사실에
진저리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주님 앞에 벌거숭이가 되어, 오직 자비에 기대야 했던 며칠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 제 안의 어둠은 두려움이었고 그에 따른 떨림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겁먹은 제 초라함을 아프게 바라보며 마음이 꺾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볼품없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이 힘이 됐습니다. 친히 그분께서는 제 모든 죄의 너울을 찢어주셨고
환한 빛으로 인도해 주고 계심을 절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정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는 말씀에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죄인”임을 상기하되 “하느님께서 굽어 살펴주시는 죄인이며
또한 주님의 돌봄을 받는 죄인”임에 감격하는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갖은 비판을
감내해야 했고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죽임을 당하는 순교자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오직 자신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훼손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힘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단속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
(1베드 2,9)인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 분명해집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왕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의 뜻에만 집중하였던 사람, 마침내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던 이사야 예언자에게
건네는 ‘선물’로 오늘 독서말씀을 건네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사야 예언자가 살아낸 믿음의 삶이 너무나 고마워서, 그날 회당에서 세상을 향해 선포하신
첫 말씀으로 이사야서를 고르셨던 것이라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또한 오늘 제2독서를 고르시면서 얼마나 신바람이 나셨을까 싶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이
다만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임을 가르치는
바오로 사도의 지혜로움에 박수를 치셨을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로써 우리는 빛이신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빛의 자녀가 됐습니다.
어둡고 죄 된 마음은 주님의 빛으로 환해졌습니다. 세상의 맹목적인 욕망을 주님께서 주신 빛으로
밝혀 이겨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뵙는 주님께서는 내 얼굴의 눈물을 손수
닦아 주실 것입니다. 손수 내 얼굴의 너울을 찢어내고 환히 웃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 잔치에 어울리는 언어와 행동과 표정을 요구하십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잔치에 참석하는 이들이 그 자리에 걸맞도록 자신을 치장하는 것은
마땅한 예의이니까요. 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주인과 하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처되는 것이 맞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삶이란 잔치의 주최자이신 하느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꾸고 단장할 수 있는 절호의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치장하는 시간이 곧 인생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생명의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의 문제가 지닌 실체를 낱낱이
밝혀주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알고 있는 우리이기에 죄로 얼룩진 옷을 벗을 수 있습니다.
변명에 급급하고 책임을 남 탓으로 돌리던 궁색한 삶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향해 큰 걸음을 내디딜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이정표가 되어주신 모든 성인의 도움으로 우리는 천국을 향한 길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천국 잔치에 초대된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았으며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음에 환호하고 소리 높여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의 심지는 천국에서 아버지를 뵙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만날 때를 기억하여
살아가라는 당부라 믿습니다.
늘 말씀에 빗대어 삶을 돌아보며 고쳐 살라는 부탁이라 새깁니다. 아멘.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신문 202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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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호 윤호요셉 신부
연중 제28주일
이사야 25,6-10ㄱ 필리피 4,12-14.19-20 마태오 22,1-14
고해성사가 어렵다고?
연중 제28주일인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혼인 잔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었습니다. 손님도 아무나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하여
초대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에 거절한다는 것은 초대자에 대한 무시이며 존중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초대를 받으면 응당 응해야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인의 주최자는 혼인 잔치를 위해 최고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석하는 이들도 그에 걸맞은 예의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혼인 예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처음 초대받은 이들은 임금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너그러운 임금은 또다시 그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가관입니다.
다시 한번 임금의 청을 거절한 것도 놀라운데, 개인적인 일을 하러 떠납니다.
임금이 재차 요구한 사항을 가볍게 무시하며,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에 진노한 임금은 그들을 처형하게 됩니다.
복음의 '혼인 잔치'는 이런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초대 받은 이들은 유다인이며 혼인 잔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임금이신 하느님께서 수차례 혼인 잔치에 초대하는 것은,
수많은 예언자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의미합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수많은 부름에 응답하지 않은 이들은, 누리기로 약속되었던 천상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타는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임금의 행보는 놀랍습니다.
이제 임금은 혼인 잔치 초대 대상자를 '아무나'로 확대합니다. 유다인에게만 유보되었던 구원이
'모든 이’에게로 확대되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때 임금은 참석한 사람들 각자와 인사를 나누다
어떤 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은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가 초대받았지만,
최소한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 사람은 이전의 초대를 거부한 이들과 같은 처사를 받게 됩니다.
교회는 이것을 미사에 비유해 설명합니다. 혼인 잔치는 미사이며 혼인 잔치의 주최자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약속인 혼인 예복은 고해성사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초대해주시고, 부족한 모든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하지만 단 하나, '혼인 예복'만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 혼인 예복은 고해성사입니다.
어쩌면 가장 작은 약속이지만 신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이 고해성사이고,
반대로 가장 쉽고도 최고의 준비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고해성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죄인이 되어 판사' 앞에 나아가는 마음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고해성사에 임하면 좋겠습니다.
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
2023년 10월 15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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