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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일의 영화황제가 한국인 인 것을 아나요!!
중국영화박물관(www.cnfm.org.cn)은 중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서 정부가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 만든 곳이다. 중국 영화의 탄생이 ‘정군산’이 만들어진 1905년이니 2005년에 완공해야 했지만 형식적인 준공을 마치고, 최근에야 제대로 기능을 시작했다해서 일요일에 다녀왔다.(졸저 ‘베이징 네 멋대로 가라’에서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중국영화박물관 전경
영화박물관이 있는 곳은 중국의 소호로 불리는 798 따산즈(大山子)에서 공항 쪽으로 10분쯤 더가면 있는 추이꺼좡(崔各庄) 인근이다. 402번 버스가 인근을 다니지만 내려서 10분쯤 걸어야 하는 불편이 있어 택시를 이용하는 게 무방하다.(택시 기사에게는 치창푸루(機場輔路) 난까오루(南皐路)라고 말해야 알 것이다)
김염을 소개한 내용
내 머리 안에서 영화박물관이 떠나지 않은 이유는 박물관이 개장하면 그곳에 있는 김염(金焰)의 흔적들을 한번 살펴보기 위해서 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염은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하게 ‘영화 황제’로 추대받는 인물인데, 서울 출생으로 위대한 우리나라 사람이다. ‘영화 황제’라면 좀 감이 안올텐데 중국 영화계에서 이후에도 다양한 유명 배우들이 나왔지만 그에게만 유일하게 영화황제란 칭호가 주어주니 우리나라로 치면 ‘국민배우’라는 칭호를 휠씬 넘어서는 절대적인 표현이다. 김염(1910~1983)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상하이 올드 데이스’(박규원 저/민음사 간)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김염의 인생이 너무나 드라마틱한 것에 놀라게 된다. 김염의 아버지는 김필순으로 세브란스 의대 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일제의 손에 들어가자 독립운동을 시작해 중국으로 건너가 일제의 손을 피해서 치치하얼까지 한인마을인 이상촌을 건설하다가, 일본인 간첩에 의해 독살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분이다. 김염은 김필순의 셋째 아들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톈진 등을 전전하다가 주위의 추천으로 상하이에 가서 최고의 배우로 등극한다. 김규식, 김마리아 등 독입운동사의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는 가계사를 갖고 있다.
김염의 출세작 야초한화 소개보드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9년부터 주연 배우로 출연하기 시작해 1932에는 롼링위와 주연한 ‘야초한화’로 최고의 배우의 반열에 오른다. 서구적인 마스크에 이지적인 연기는 당시 사람들을 울렸다. 이후 그의 이름을 단 영화야만이 히트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배우로 떠올랐다. 장만옥이 주연한 ‘완령옥’을 본 이들이 있을텐데, 그녀 영화의 상대는 대부분 김염이라고 봐도 된다. 1934년에는 역시 최고 여배우인 왕런메이와 결혼한다. 이후 항일운동 영화들을 만드는데,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해서 합작영화를 제안하자 거부하고 홍콩으로 피신한다. 1947년에는 역시 중국 해방후 가장 위대한 배우명단에 있는 친이(秦怡)와 재혼하고, 상하이 영화제작소 극단장을 맡기도 한다. 마오쩌둥도 그를 장관급에 해당하는 일급배우로 임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1962년 위 수술의 후유증으로 대부분의 생활을 침상에서 보내는 처지가 되고, 1983년 상하이에서 영면한다.
영화박물관 내부 박물관 부분의 메인 홀 모습
영화박물관(입장료 성인 20위안/학생 10위안)에 들어가면 너무 쉽게 그의 흔적들이 나온다. 영화박물관은 왼쪽에 박물관이 오른쪽에 아이맥스영화관 및 일반 상영관이 갖춰어져 있다. 시설로 말하지만 우선 중국 답게 사람들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높이 50여 미터를 통으로 트고, 원형으로 4층에 걸쳐서 전시관을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실은 총 20개관으로 영화 역사관을 시작으로 애니매이션, 특수분장, 촬영등까지 세세하게 분리해서 영화에 관한 것을 모두 살필 수 있다. 1전시관에 들어서면 뤼미에르 형제부터 시작한 간략한 영화의 초기역사에서 ‘정군산’이 만들어진 1905년까지의 흔적이 있다. 이후 곧바로 중국 영화의 전성기인 1930년대 부분이 나오는데, 그곳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김염으로 부각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김염은 영화 여제로 불릴 만한 롼링위와 함께 인물로도 소개되어 있고, 작품에서도 주연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의 소개를 읽어봤다. “김염(1910~1983) 조선인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우. 1912년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건너온 후 중국적이 되다. 1929년 영화계에 입문해 ‘야초한화’ 등의 배우로 다수 작품에 출연해 관중들에게 ‘영화황제’로 칭해졌다. 신중국 건립후 상하이영화제작소 배우단장을 지냈으며 ‘대지중광’ 등에 출연했다” 주변에 전시되어 있는 많은 영화에서 주연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상하이 올드 데이스에 의하면 김염은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쪽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연기자가 분장으로 역사 인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모습
김염의 흔적이 있는 1전시관을 지나면 이후 다양한 중국 영화의 흔적이 펼쳐진다. 일단 공산화 이후의 중국 영화는 ‘옌안 문예 좌담’ 등에서 강조된 사회주의 예술론과 대약진, 문혁 등의 시간으로 인해 그다지 큰 성과가 없다. 그래도 살아난 것이 씨에진 등 명 감독들이 좀 있었기 때문에 큰 선을 이어간다. 문화대혁명이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장이모, 첸카이거 등을 부르는 5세대 이후에는 국제적인 주목도 받고 있다. 지금도 이 맥은 지아징커나 왕샤오수아이 등을 통해서 계승된다. 일반 전시관은 부러울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특수 효과 등을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시설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주라기 공원에서 나오는 우스운 도망 씬을 촬영했다.
박물관의 오른쪽은 아이맥스 영화관을 비롯해 다양한 상영관이 있다
1전시장부터 천천히 돌아보면 하루 정도를 돌아봐도 전혀 시간이 아깝지 않을 듯 했다. 영화를 통해 중국 현대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중간에 영화관에서 각종 영화를 볼 수 있기도 하니 더욱 그럴 것이다. 정확한 역사에 대한 정리가 없이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중국 영화사는 이 한곳을 통해서 거의 완벽하게 정리된 느낌을 받았다. 돈이 있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닐텐데 어찌보면 중국의 콘텐츠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넓은 가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됐다.
글쟁이 조창완(www.aljatour.com)
촬영전시관에는 영화 초기부터 다양한 촬영제가 전시되어 있다
주라기 공원의 특수 촬영을 시연하는 코너
터치스크린으로 박물관이 안내되어 있다. |
http://blog.naver.com/chogaci/39837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