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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디시하다가 이 글을 퍼왔는데 반론이 필요합니다 정말 이 시대에 사신 분 전두환이 중산층과 중소기업을 육성했나요? 좀 경제에 지식이 박식하고 이 시대를 경험한 분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나는 전두환 정권을 무조건 찬양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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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전두환 정권의 최대 과오는 12.12사태와, 5.18 광주 시민 무력 진압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사에 큰 상처를 남겼으며,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을 무조건 폄하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선례를 참조하여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과거 정권의 업적 또한 탐구하여 온고지신 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본다.
1.물가안정
전두환이 그냥 3저라는 환경 빨로 운좋게 무임승차 했다고 생각하시는 분 많은데
그 당시 경제상황을 잘 모르는 소리이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은 OPEC석유감산으로 연결되고 제2오일쇼크가 한국을 강타하였다
1980년 경제성장률은 -4%로 10%이상 후퇴했고 유가는 50%이상 급등했으며,물가는 40%를 넘었다.
한마디로 전두환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최악의 조건에서 경제를 시작한 대통령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정부 이래 계속 추진된 고성장 정책을 포기하고 물가 안정을 바탕으로 한
안정정책으로 기조를 바꾸게 된다. 여기서 전두환이 독재자인데 강제로 물가 때려잡는것 누구나
할 수 있을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그게 순식간에 이뤄낼 수 있었던 게 아니다.
70년대 말부터 경제관료들 사이엔 격렬한 물가논쟁이 벌어져 왔다.
62년부터 고도성장 위주로 추진해 온 경제개발 계획의 틀을 전면적으로 바로잡아
내실지향의 안정정책을 써야 한다는 안정론자와 실업문제 때문에 고도성장을 늦출 수 없다는 성장론자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이 당시에도 재계와 함께 인플레의 단맛을 맛보던 부동산 투기꾼 등의 불로소득자들도 합세하여 성장론자들의 논리를 더 지지했으며. 성장률을 높이려면 계속 통화증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이론을 갖고 경제부처에 대한 로비 활동을 계속했다.
논쟁은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로 확산하여 쉽사리 결론이 나질 않았다. 이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전두환 대통령의 인플레 10%이하 달성 명령이었다.
개도국에서 물가를 잡으려면 공공부문의 축소와 통화량 남발 억제 그리고 민간부문은 가격지도책이 필수적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물가 안정을 위해 예선을 전년 대비 동결시켰고,
통화량 관리를 훌륭하게 잘 해냈다.(전두환 시절에 사회간접시설에 투자를 별로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은 워낙 물가가 급상승하던때라 사회간접시설투자를 했다면 물가는 더욱 치솟아 한국 경제는 이미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사회간접자본시설에 투자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단적으로 85년경 한전의 전력예비율은 무려 50%나 남다돌았기에,
그 당시엔 사회간접자본시설을 투자한다는 것은 무리있는 일이었다.
사실 3저 현상이 났을때도 당국의 예상 경제성장률은 7%대에 불과했었다.80년대 3저 호황을 맺었을 때 투자하지 않았냐는 반론도 있을 것이지만,
당시 우리는 흑자로 벌어들인 달러를 외채를 갚는데 썼고, 정권 말기라서 그런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회간접자본시설이 6공 시절에 부족하게 된 큰 이유는 예상치 못햇던 호황 덕택에 늘어난 국민들의 과소비 열풍이 컸다.
소득이 급속히 늘어나면 여유가 생긴 중산층이 자동차를 구입하면서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자 ,
5공시절에는 전혀 문제 없었던 도로사정이 순식간에 정체현상이 빚어지면서
물류비용이 치솟게 된 것이다. 요약하면 6공 시절 부족한 사회간접인프라는 전두환 정권이 시설 투자를 소홀히 해서 빚어졌기 보다는 예상치도 못했던 경제호황으로 인한 수요 증대가 큰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초고속 국민소득 상승은 국내외의 어떠한 경제 전문가들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실이고,
소득증가에 따른 마이카 열풍,전자제품 수요에 따른 전력의 급수요 등은 5공 시절 중반만 하더라
도 생각치도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두환이 당시에사회간접자본투자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은 시대적 배경은 생각지도 않고 현재적 관점에서 성의없이 내린 배부른 소리이다.)
결국 81년 소매가격 13% 도매물가 11%, 82년 소매 4.8% 도매 2.4%83년 소매 2% 도매 -0.8%를 기록하면서 집권 내내 저물가 안정 경제를 이룩하게 된다.
물가가 안정되자 기업들도 더 이상 과거의 인플레에 편승한 경영방식을 포기하고, 저물가에 적응하여 나름 체질개선을 꾀하였고, 물가안정은 여타의 거시 경제 부문에 안정을 가져오면서 다시 한국 경제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서민들은 이때가 되어서야 안정된 물가를 바탕으로 생필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중산층의 확대를 불러왔다..
김만제 부총리가 IMF회의에 참석했을 때 세계 각국의 관리나 경제인들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한국이 물가를 잡은 비결이 무엇이냐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냐고 물었을때,
김 부총리는 바로 전두환 정권의 예산동결책이었다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고성장 저물가 현상이 개도국 경제에 있어 신화적인 것있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사실 고도성장,안정물가,국제수지흑자 이 세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매우 보기 힘들다.)
2.부동산을 잡은 유일한 정권
또 하나 전두환은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부동산을 잡은 대통령이다.
우리나라 부동산 역사에 있어 부동산 폭등기는 총 네 차례가 있었다.
첫 번째는 70년대 말에 있었고,
두 번째는 80년대 초반에 있었고, 세 번째는 80년대 후반에 있었고,
네번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다.80년에 침체되었던 경제가 다시 회복하면서, 83년 경에는 경제성장률이 10%를 넘는 호황을 기록하게 된다.
이제 맞춰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내놓자 부동산이 다시 폭등하였다.
그러자 한은은 83년부터 통화증가율을 크게 낮추고 금리를 인상해 시중유동성을 적극 흡수하는 등 1차 폭등기에 비해 신속히 대응하였고, 정부도 아파트 재당첨 금지기간을 연장하고 양도소득세, 탄력세율 적용 시한을 단축하는 는 등 강력한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부동산값을 잡는 데
크게 기여 했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시의적절하게 제대로 맞아들어간 경우는 이때가 유일하다.
또한 개포개발 고덕지구 공영개발 착수,목동지구 개발,주택공사가 중심이 된 상계단지 개발로 신규단지가 형성되어 집값 안정이 커졌고, 미분양된 매물이 오히려 남아돌기 시작한다.
1986년 경의 경우 잠실 주공1단지 13평 아파트 시세가 1300만원, 전세가 1200만원했는데 전세를 안고 단돈 100만원 정도면 구입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전두환 시절은 난개발이 비교적 없었던 시절인데, 그것은 전두환 본인이 성장률보다는 물가를 중시하였기에 물가안정을 해칠 난개발은 과감히 억제하였기 때문이다.
3.무역흑자와 고도성장
또한 전두환 정권이 잘한게 있다면 경상수지 관리를 잘 했다는 것이다.
70년대 초반에 육성된 중화학공업은 투자의 특성상 10년간 무역적자를 감당해야 할 정도로 외채가 크게 늘어나게 마련이다.(여기세 70년대 말에 터진 2차 오일쇼크가 위기를 더더욱 부추긴다). 한때 한국은 세계4위의 외채대국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이 외채를 줄이기 위해 과거의 물량수출방식에서 경상수지 적자 억제책으로 대외거래 기조를 바꾸게 된다. 80년-85년부터 점점 경상수지 적자폭이 줄어들었고,3저를 맺기 전인 85년엔 단 7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한다.
그러다가 3저를 맺으면서 경상수지는 대폭 흑자로 전환되었고 86년 40여억 달러 87년 99억 달러 88년 145억 달러 89년 6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면서 순식간에 외채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86-89년 사이에 외채는 무려 170억 달러가 줄어들었고, 순외채는 40억 달러로 사실상 채권국의 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혹자는 전두환은 3저(저유가,저이율,저환율)라는 운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3저 호황도 그 관련 기반 산업이 육성되지 않으면 맺기 힘든것이다.
게다가 3저 호황 당시 전세계 경제성장률은 지금의 성장률과(2005-2007년) 비교하면 오히려 더 낮은 수준이었고, 남미와 필리핀은 3저를 맺었음에도 외채를 갚치 못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을 정도 였다.
86년 46억불의 무역흑자를 거두었을 경우를 살펴보면,(이것은 85년 9억불 적자에 비해 무려 55억 달러가 개선된 것이다) 당시 원유가 하락으로 인한 원유수입대금은 26.6억 달러 절약되었으나 중동지역 해외건설 수입 감소로 4.5억 달러 하락으로 22.1억 달러 효과를 보았다.
국제수지 금리 인하로 인한 차관이자지급 부담금이 2.2억 달러 줄어들었으나 강세통화표시차관의 이자지급은 오히려 증가했으므로 1.3억 불 정도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또한 엔화강세 등 국제통화가치 변동은 대일 가격경쟁력을 제고하여 수출을 증대시켰으나, 중화학 공업 제품의 수출이나 시장 다변화 노력 등과 복합되어 그 효과를 분리하여 계산하기 어렵고 엔화강세에 따른 일본에서의 원자재 수입대금은 오히려 증가했다는 점에서 엔화강세(저달러)가 국제수지 개선에 미친 효과를 분석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따라서 대외여건 개선 효과는55억달러 중 23.4억 달러로서 전체의 43%에 해당하면 나머지 57%인 31.6억 달러는 전두환 정권의 경제체질 개선 강화에 따른 국내적 여건 덕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저 호황을 맺었을때 우리가 주력으로 수출한 물건들이 중화학공업이었고,
그러한 관련 산업을 육성하지 않았다면 3저가 와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전두환이 단순히 참모의 의견을 무작정 받아들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김재익은 철저한 시장주의자로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중화학공업 대폭지원 축소를 주장하여, 사실상 폐기할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이자.
실제로 국보위 시절 중화학 공업을 포기 할 것을 검토 해봤지만,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리 하여 80년대 중반에 대박을 터뜨리게 된 것이다.
또 전두환 시절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8.7%였고, 경제가 본궤도로 들어선 82-87년간 경제성장률은 10.2%로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거기에 물가는 5%이내로 안정되었기에 서민들에게는 매우 살기 좋았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4. 전자정보통신사업 육성
또한 전두환 정권은 미래를 위한 산업정책도 충실하게 수행했다.
지금의 it산업의 초석을 만든게 전두환 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을 충실히 이어 받아 계속 육성했으며,
미래를 위한 산업으로 전자산업과 정보통신사업을 육성했다.
이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과 오명 장관, 전두환 대통령이 3명이 의기투합하여 전자와 통신사업 육성에 힘을 올렸고,
브라운관 산업 유선전화용 교환기 통신케이블 전자교환기 광통신인프라 분야는 비약적으로 이 때 성장을 하게 된다. 81년 전기통신 사업법을 고쳐 모든 통신사업자는 수입의 3%를 위무적으로 연구개발비에 쓰도록 법제화 하여서, 연간 7-800억원이 통신사업개발비로 투자된다.
이 당시 청와대는 반도체 컴퓨터 전자교환기 부문을 3대전략산업화하고 5년이내에 전자부문의 생산및 수출을 2.5배로 늘리겠다고 발표를 하였다.
하지만 발표 당시엔 정부관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비웃음을 받았다.
그러나 86년부터 전자사업은 우리나라 최대 주력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자 사업의 주력 업종은 가전제품이었다.
그러나 기술축적과 각산업분야에 파급효과가 큰 산업전자에 초점을 두고 통신장비 개발에 눈을 돌려서 전전자식교환기(tdx)개발에 성공하여, 국산 tdx가 86년에 드디어 개통.... 세계20번째 자체개발에 성공한 나라가 된다.
tdx국산화 성공으로 전화가설이 손쉬워져, 누구든지 원하는 장소에서 전화기를 시장에서 마음대로 사서 이용가능하게 된다. 결국 전화기 수출 세계 1위로를 기록하였고 후에 팩시밀리,컴퓨터,정보통신이 가능해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육성과 전두환 정권의 전자정보통신사업의 육성으로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100여개의 신생국 중 유일하게 자국소유하의 종합적 공업화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90년대 들어 중국이 있긴 하지만,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로 육성된 것인 반면, 한국은 한국인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형태로 산업화가 형성된 것이다.
5.건설개발주의의 종식과 선진국형 경제체제를 설립
전두환 정권은 건설개발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건설업이 전체국민생산에 차지하는 비율이 20%로 유난히 높은 편이다.
건설로 경기부양을 하게 되면 장기적으로 경제에 해를 준다는 것은 상식이 아닐 수 없다. 박
정희 정권 때 형성된 토건개발주의가(사실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개발이 필요한건 맞지만..) 70년대 말부터 극에 달하면서 82년엔 건설액/gdp 비율이 25%로 사상 최고조에 달한다.
그러나 이후 전두환 정권의 꾸준한 건설업 구조조정책으로 5년내에 이 비율은 급격히 떨어지면서
88년 9월엔 11%를 기록하면서 선진국 수준인 8-13% 적정 수준에 맞춰지게 된다. (물론 그 후 노
태우이후 정권이 다시 건설업에 열을 올리면서 20%대로 올라가지만.) 즉 한국은 이제 더 이상 건
설업에 의존하지 않고 중화학 공업과 전자정보통신산업을 주력으로 먹고 살아 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선진국형 경제구조였고 전두환 정권은 이 구조를 창출한 것이다.
항간에는 전두환 정권 때문에 외환위기가 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 89년에 우
리는 순외채 40억달러로 사실상 채권국으로 전환되면서 매우 튼튼한 경제를 이뤘다. 문제는 94-
97년사이에 김영삼 정권의 무리한 자본시장 자율화 정책이 시행되면 93년 순외채70억달러,총외
채 400억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경제는 94년 부터 외채가 순식간에 불어나고, 97년엔 1500여억 달
러를 기록하면서 단기외채의 회수연장불가로 유동성 위기가 심화되면서 달러고갈 사태를 맺은 것이 외환위기이다.
그러기에 외환위기의 주범은 김영삼 정부의 준비안된 세계화와 갑작스런 국제패닉사태가 1순위
로 꼽히며,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주범으로 꼽는 학설은 세계적으로도 소수설로 전락해버렸다.
한국 경제를 요소투입형 경제(사실 이 주장은 많은 반론을 갖고 있다)라고 비판했던 폴 크루그먼
도 외환위기가 터지자, 나는 동아시아가 서서히 요소 투입에 한계를 보이면서 망할 것이라고 생각
했지, 이렇게 급작하게 터지리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오히려 반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꼽은
주원인은 금융경색과 고정환율제를 들고 있다
6.단임제 실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우리 근현대사는 지도자의 헌법개정을 통한 장기집권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였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새로이 헌법을 개정하여 단임제 조항을 넣고 스스로 단임을 실천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비록 쿠데타로 집권하긴 했지만, 전세계 수많은 독재자와는 다르게 단임을 실천하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것은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후에도 여러 차례 본인은 단임제를 스스로 실천할 것이며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위해 헌신을 다하겠다고 강조한바 있다.
7.스포츠 육성
전두환 정권기에는 유독 한국 스포츠 사에 금자탑이라고 벌어질 대형 업적들이 무척 많았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의 스포츠 육성 정책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81년 88올림픽 유치,82년 프로야구 창설,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우승 83년 세계 청소년 축구 4강,
프로축구 창설,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사상 첫 10위,86년 멕시코 월드컵 32년만의 진출, 86년
서울아시안게임 개최 등등... 한국이 세계 스포츠 10대 강국으로 발돋움 하게 된 것이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는 두말할 것 없는 소리이다. 전두환 스스로 스포츠 대통령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스포
츠에 있어선 매니아 수준의 열성적인 집착을 보였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틈만 나면 자주 태릉선
수촌을 방문했고, 퇴임을 앞둔 88년 2월 24일에는 태릉선수촌에 아스팔트를 깔아달라고 부탁했으
며 여러 가지 국제 스포츠 행사에서 성과가 나오면 선수들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스포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투자는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격상 시켰고,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 코리아라는 결실로 귀결된다.
8.과도한 사교육비와 입시열기를 해소하고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를 부여함
전두환 정권은 과외를 금지시키고 본고사를 폐지하여 내신과 학력고사를 통한 대학진학조치를 실시하여,
일반 서민들에게 사교육비 부담을 대폭 덜어주었다.
당시의 과외금지조치는 물가안정을 위한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대신, 사교육비를 감소시킴으로서 실질소득을 증가시키는 보완장치였던 셈이다.
그로 인해 비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학생들도 꾸준히 공부만 하면 명문 대학에 진학하여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마련되었다.
실제로 지방에서 서울대 두어명 정도 배출하던 평범한 고등학교가 이 조치 이후로 50명이 넘는 서울대를 한 해 배출하여 단 숨에 지방명문고로 발돋움 하기도 하였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지금은 사실상 이뤄지기 힘든 상황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고 또 많은 가난한 수험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꿈을 이뤘던 시대였다.
반면에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15년을 살펴보라.
과거의 신분상승 계층 통로였던 교육은 이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조장하고 있고,
사교육은 기록적으로 증가하면서 가계를 짓누르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을 독재체제라고 욕하지만, 그것은 일부의 정치적 권리를 억압한 것이었지 그당시 아이들은 실컷 밖에 나가 뛰어놀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시대에 들어서 지금은 금전과 교육의 독재가 일상적으로 자행되면서 아이들은 어렸을때부터 학원 여러개를 다녀야 하고 ,
가계는 늘어나는 사교육비 증대에 신음을 앓고 있지 않은가?
9.중소기업 육성
전두환 정권이 재벌만 키워주고 중소기업 육성은 내팽게 쳤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헌법에 최초로 중소기업육성을 국가적 과제로 규정하였고,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서 강조한 '균형'을 달성하기 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어느 정권보다도 중소기업 육성에 매달린 정권이 바로 5공화국 정부이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중소기업 장기 플랜은 1982년부터 1991년까지 계획된 중소기업진흥장기10개년 계획이었다.
전
두환 정권은 고도산업화에 따른 부품산업의 기반 확대와 신규고용인력의 대거 흡수 그리고 분업과 전무성의 보편화 경향에 대비하기 위해 중소기업을 대폭적으로 육성하게 된다.
지금은 어디서나 들어 볼 수 있는 `유망 중소기업'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된 것은 전두환 정권 때부터이다.정부는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금융기관에게 두 달에 한 번씩 유망 중소기업 지원실적 보고 대회를 열게 하였고,이러한 유망 중소기업제도는 우리나라 부품 소재 기업을 키우는 데 아주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87년 정부는 지방은행의 중소기업의무대출비율을 80%이상으로 인상하였고, 한국은행이 서울
소재 중소기업 취급액의 20% 지방소재 중소기업 취급액의 60%이상을 지원하도록 규정하였다.
시중은행의 경우 서울소재 중소기업 취업분은 10%, 지방중소기업취급분의 50%를 한국은행이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육성자금의 수도권 역류 방지를 위해 단자회사의 지급준비금 90% 이상을 지방은행에 예치하도록 독려하였고, 공업기반지원개발사업의 추진과 기업의 단독 개발이 어려운 기술과 공통애로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지원을 강화한다.
그리하여 중소기업 업체수는 1980년 31446개에서 85년에는 44803개로, 고용비중은80년 49.4에서 85년 55.9%로 생산액은 80년 32%에서 35.6%로, 부가가치는 31.1%에서 37.7%로 증가하게 된다.
10.중산층의 탄생
박정희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전두환의 안정화 시책-노태우의 중산층 육성 정책으로 인해 한국은 중산층이 탄생하게 된다.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중산층의 시위 가담은 바로 전두환 정권의 경제 호황으로 빚어진 산물이었다.
경제에 있어 중산층은 국가 경제의 기본을 형성하는 든든한 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를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고 할 수 가 있다.
분배지수도 전두환 정권의 말기때부터 서서히 좋아지면서 김영삼 정권 말기때는 세계적으로 소득분배 만큼은 우수한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마이카 시대와 해외여행 자유화 시대가 도래한것도 바로 전두환 시절 대폭 늘어난 중산층의 탄생에 기인한 것이다.그러나 경제성장의 열매를 먹고 자란 중산층의 지지를 얻고 탄생한 민주화 세력의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집권기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섣부른 세계화 전략에 따른 imf 국가부도사태-단기적인 내수 활성책이었던 카드대란으로 인한 신용불량자 증대-부동산,전세값 상승과 비정규직 증대로 점점 양극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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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개인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장관이나 관료들이 모조리 예스맨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자쿠워리어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사실 5년만에 뭔가 뚝딱 해내서 결과를 보고, 수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죠. 저도 어떤 정책을 추진할때 최소한 10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두환의 가장큰 업적은 모르는건 잘 아는 사람에게 맡겼다는 겁니다. 김재익 경제수석을 믿고 전권을 위임한건 정말 잘한 짓이었죠. 개인적으로 김재익 수석이 아웅산테러때 사망한게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맘에 드는건 그거 밖에 없네요.
전두환을 인간적으로 혐오하시는 분들도 그건 인정하시더군요. 확실히 잘한 짓이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두환을 혐오하지만, 사교성이나 능력은 인정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인(선배, 친구, 후배 등)을 철저히 챙기고 말단 부하의 자녀 일까지도 신경써 주고, 한번 인정한 사람에게 끝까지 믿음을 주고, 단호한 결단력하며.. 이런 능력을 국민과 나라를 위해 쓰는게 아니라 개인적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걸보면.. 광주 시민 학살도 학살이지만, 20년전에 (검찰이 밝혀낸것만) 뒤로 수천억을 해먹고, 앞으로는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자기 명의의 집을 국가에 헌납했죠.(밝혀진 것만 저정도면.. 그리고 20년전에 저 금액이니 20년간 물가 상승률을 감안을 하면..)
인사가 만사라는 이념으로 모르는건 잘아는 사람에게 맡겼던 사람도 있죠 영삼이라고....역시 누구에게 맡기느냐가 더 중요한거 같아여 ㅡ.,ㅡ
굳이 큰 반론이 들어갈 것이 없는 개념글이군요. 다른 정치적 문제는 제외하고, 순수하게 경제적 측면을 봤을땐 전두환은 나름 잘해나갔으니 말이죠.
개인적으로 스포츠의 대부흥기라는 점에서는 그닥.. 저는 스포츠의 경우는 3S정책의 일환으로 봅니다요.....
스포츠(프로축구,프로야구), 셲스(성인영화), 또 한가진 뭐였죠??
스크린(영화)입니다.
자쿠워리어님 정말 감사합니다 박식한 지식 존경합니다
전두환은 욕먹을게 많지만 부하들 잘 대해주는거랑 역시 부하들 잘 믿어주는것만 이 부하 관련 능력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때 노조가 좀 많이 죽어나갔다는거 빼고는 경제에서는 '신'급으로 불려도 손색없을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의외로 저때 부의 분배가 잘되었습니다. 돈을 은행에 넣는 것만으로도 큰 목돈을 만들 수 있었던 시절이니 말입니다. 저는 요즘 박정희보다 전두환 대통령이 더 생각납니다.
제가 항상 하는 말인데 운도 그사람의 실력입니다. 뭔가 성공적으로 했다면 그사람의 치적이고 잘못이 없어도 실패했다면 책임을 져야하는게 지도자입니다.
경제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것임을 감안할때, 경제 관료들이 어쩌고 저쩌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전두환이 잘나서, 유능한 관료들을 배치해서 경제가 잘나간 게 아니니까요.
그 세계적으로 잘 나가던 시절에 필리핀 등 우리보다 잘 나가던 국가들이 판판이 쓰러진걸 봐선 지휘자를 완전히 무시하긴 무립니다.
, 박정희도 미리있던 경제계획을 이름만 바꿔서 자기가해먹고, 전두환은 다된밥만 첫번째로 개봉해서 쳐먹은 인물로 보는데.
그게 노태우죠.^^
전두환이 또다른 업적이라면 국방이 아닐까요? 기존의 수세일변도에서 치고 올라간다로 바꾸고 TS를 수시로 해서 북한을 매우 괴롭혔다는 점에서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