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환 黃玘煥(1886~1923)】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위원 자격으로 유럽지역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
1886년 4월 4일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황기환(黃杞煥, 黃紀煥, 黃琪煥, 黃忋煥)을 썼고, 영어 이름으로 Darl K. Whang, Earl K. Whang, Earl Whang을 사용하였다.
1904년경 미국으로 건너가, 1906년 6월까지 공립협회(共立協會)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7년 자원병으로 참전하였고, 9월 이후 유럽으로 건너갔다. 1918년 11월 11일 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고, 미군 지휘관에게 허락을 얻어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후,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의 원동지역(遠東地域) 대표 김규식에 의해 한국대표부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김복(金復)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사무에 협조하였으며,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힘썼다. 8월 8일 김규식이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파리강화회의 및 홍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난 후 파리에 남아 실질적으로 한국대표부를 이끌었다. 8월 23일에는 현지 신문인 『라 쁘띠 르쁘브리끄(La Petit Republiqu)』와의 인터뷰에서 1919년 만세운동 이후의 국내 상황을 알리고, 일제의 완전한 철수와 강탈한 주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양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의 공식 발표만을 보도하던 해외신문의 보도와는 정반대의 내용이었다. 해당 기사는 미주에서 간행된 『신한민보』에 소개되었다. 아울러 만세운동 이후 일제가 조선 총독의 무관 임용 자격 제한을 철폐하고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한 이른바 ‘문화통치’의 허구성을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이후 주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인 이관용(李灌鎔)과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프랑스어 책자를 간행하였으며, 『자유한국 (La Coree Libre)』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여 세계에 한국 문제를 알렸다. 뿐만 아니라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부당한 침략 상황을 폭로함으로써 한국문제를 국제여론화 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 8월 25일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김규식이 같은 날 설립한 구미위원부의 위원장에 임명되면서, 파리위원회 서기장에 정식 임명되었다. 부위원장이던 이관용이 사임한 이후 파리위원부의 일을 맡으라는 김규식의 편지를 받았다.
1920년 2월 11일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와의 담화에서 한국문제는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고, 한국인은 자유와 자결을 위해 제국주의와 싸우는 중이라고 인터뷰하였다. 1920년 9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주차영국런던위원(駐箚英國倫敦委員)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26일 영국 런던에서 멕킨지(Frederick A. McKenzie)와 윌리엄스(W. L. Williams)가 발기하여 대영제국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the Korea in Great Britain)를 조직할 때 조소앙(趙素昻)·오철은과 함께 참여하였다. 창립대회에서 종교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그 어떠한 자유도 없는 한국인이 영국의 도움을 요청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1921년 2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한국』이라는 팸플릿을 발간하여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 비판하였다. 6월 12일 영국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수상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사람의 청원(The Appeal of the Korean People for Liberation From Japan)」이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배부하였다. 이와 함께 파리로 오는 한국인 노동자를 돕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있던 한국인 노동자 500여 명을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 1919년 10월 4일 프랑스 노동부와 교섭을 시작해 구두로 승낙을 받았으나, 35명만 구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