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공중전의 냉혈과 공포
KAL기 격추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본 전자 전쟁과 요격 전술의 모든 것
소리 없이, 국경 없이, 밤낮도 없이 범 지구적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전파의 전쟁은 인간을 전쟁의 본질로부터 소외시키고 인간성마저 황폐시키고 있다.
<1983년 10월 마당>
침묵 속의 전쟁
승객 2백69명을 죽인 KAL점보기 격추 참사는 소리 없는, 싸늘한 전자 전쟁의 모습을 그 일부나마 극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들부수고 찌르고 피 흘리는 열전(熱戰)은 아니지만 이 전자 전쟁은 국경을 아랑곳하지 않는 전파와 최신 과학기술을 무기 삼아 더 치열하고 집요하게, 더 넓고 깊게, 또 밤낮도 없이 가슴 죄는 냉전(冷戰)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생존 또는 파멸이 이러한 전자 전장에서 결정될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예측이 되고 있다. 이 글은 전자 전쟁과 요격에 대한 것으로, 많은 관계 전문가들과의 면담, 그리고 관계문헌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KAL기 사건 이후의 많은 글들이 전자 병기의 기능을 강조하려다가 자칫 전자전의 양상을 환상적으로 그린 경향도 있어 기자는 가능한 한계 안에서 사례중심으로 실증적인 기사를 쓰려고 한다. KAL기 사건은 그러한 전자 전쟁의 실제를 이해하게 하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KAL기의 항로이탈 이유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겠지만 우선 격추되기까지의 과정을 드러난 자료에 근거하여 '전자 전쟁과 요격' 의 측면에서 복원함으로써 레이다와 전투기가 연출하는 전자전의 윤곽을 더듬어본다.
전자전의 지뢰밭으로
KAL기 사건의 무대가 된 북태평양 상공은 세계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자 전쟁터다. 미국과 소련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맞보고 있는 곳이며 핵미사일의 공격 예상통로이기도 하다. 미·소·일의 육해공군 기지와 갖가지 전자 감첩졔湧?밀집해 있고 끊임없이 고공 전자 정찰기들이 선회하고 있는 긴장?연속선상이다. 지난9월1일 새벽1시 무렵 KAL기는 안전한 민간 항로를 이탈, 전파의 그물이 지뢰밭처럼 조밀하게 깔려있는 소련 방공식별 경계선을 넘어 소련령 캄차카 반도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양쪽에 병력이 매복, 대치하고 있는 지뢰밭으로 길을 잘못 든 이 어린 아기에게 어느 쪽도 경고를 하지 않았다. 경고한다는 것은 '모든 교신은 최악의 배반이다'는 전시의 금언대로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행위다. 오히려 숨을 죽이고 지뢰밭의 어린 아기를 지켜봄으로써 지뢰가 어디에 깔려있고 그것이 터지면 적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가를 살피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소련 레이다는 KAL기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그 소련 레이다를 미국 레이다가 또 쫓기 시작했다. 또 다른 구경꾼이 있다. RC-135 전자 정찰기였다. 이 정찰기는 북태평양 공해상공을 정기 정찰 비행 중이었다. KAL기와는 한때 1백20 킬로미터까지 접근해 있었다. RC-135기는 어떤 비행기인가? 수송기 C-135기를 개조한 이 대형 정찰기의 통상 임무는 소련 군사 기지의 통신, 레이다·항공기·미사일의 관제 전파 등을 감청하는 것이다. RC-135를 약간 개조한 EC-135는 전력공군 사령부가 파괴되었을 때 그 기능을 대신하는 공중 사령부의 임무를 띠고 있다.
세계 각지와 즉시 통화가 가능한 통신 시설, 원자력 잠수함에 지령할 수 있는 초장파 통신기, 지상 미사일 발사를 통제할 수 있는 발사관제 장치 등을 갖고 있다. EC-135나 RC-135는 초정밀 전자첩보 장치를 싣고있기 때문에 소련의 영공을 침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지난 68년 동해에서 북괴에 의해 격추된 EC-121도 동해 상공을 정기적으로 누비던 전자 정찰기였다. 이들 전자 정찰기들은 대체로 체공시간이 길고 고공 저속비행을 하며 레이다로 관측하면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항로를 따라 움직인다.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레이다 관측병이라면 이것을 여객기와 혼동하지는 않는다.
공중이란 3차원의 공간, 맹속도로 움직이는 비행 물체, 제한된 시간과 시야―요격은 바로 공간과 시간속을 흐르는 두 직선의 싸움인 것이다.
캄차카 상공-1차 요격 실패
소련 레이다는 정체 불명의 항적을 포착, 일단 미식별기(Unknown)로 분류했을 것이다. 자유 세계에서는 방공 식별지역으로 들어온 미식별기는 반드시 확인하여 적기(Hostile)로 식별되었을 때만 공격하게 되어 있다. 식별의 방법은 세 가지다. 레이다 사이트에 통보된 그날의 비행 계획서와 대조하거나 피아 식별 장치(IFF : Identification Friend from Foe)를 작동, 레이다 스코프상의 항적 반응을 살피거나 요격기를 띄우는 것이다. 소련 레이다는 캄차카 반도의 어느 비행장에 스크램블(scramble: 비상 출격)을 걸었다. 5분 대기 중이던 조종사는 눈을 비비며 활주로로 뛰어나갔으리라. 자유세계의 통상적인 원칙은 미식별기의 대수에 두 곱의 요격기를 출격시키는 것이다. 소련 발표문은 이 때 전투기 수대를 띄웠다고 만 언급했었다. 그 가운데 한 대는 공해상을 날고있던 RC-135기를 제어했다고 한다.
'제어'라는 낱말은 애매한데 아마도 RC-135기를 바짝 뒤쫓으며 정찰 비행을 모니터했을 것이다. 우리 동해로 소련 정찰기가 내려오면 미 공군은 두 대의 전투기를 보내 소련기를 양쪽에서 꼭 끼는 형태로 감싸고 줄곧 비행을 같이하는데 소련기도 RC-135에 대해서 그런 진로 방해를 한 듯하다. 소련 정부는 '제2의 소련기는 침범기(KAL기를 뜻함)의 비행 지역(캄차카 상공)으로 접근한 뒤 소련영공 침범사실을 알렸으나 경고는 무시되었다'고 했다. 'RC-135를 제어했다'면 KAL기를 사할린 상공에서도 RC-135로 오인했다는 소련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접근하여 '경고했다'는 주장도 경고할 정도라면 그 때 이미 KAL기를 식별했을 터이니 뒤에 '모르고 쏘았다'는 건 이해가 안가는 이야기다. KAL기가 캄차카를 통과 뒤에도 전혀 향로를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소련기는 캄차카 상공에서의 1차 요격 시도에 실패했음이 분명하다.
캄차카·사할린에 기지를 둔 소련 요격기는 모두 레이다를 달고 있다. 미그 23의 경우, 기상(機上)레이다는 관측 반경이 85킬로미터다. 즉 미식별기로부터 85킬로 떨어진 상공까지 미그23을 육상 레이다가 유도해 주어야 그 다음부터 미그기는 독자적으로 요격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소련 레이다 기지의 관제 장교는 스코프상에 나타난 두 작은 점, KAL 기와 요격기를 85 킬로미터 이내로 접근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KAL기는 요격하기에 가장 쉬운 코스를 날고 있었다. 항로는 약2백40도로 고정되어 있었다. 고도는 3만2천 피트, 순항 속도도 변함이 없었다. 주로 바다 위를 날고 있었으므로 레이다에 선명하게 잡히고 있었다. 더구나 소련 요격기들은 음속 2배 이상의 최고속도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요격은 실패했다. 이것은 분명히 관제사의 책임이다. 요격기 조종사에게 잘못 계산된 요격 방향이나 속도를 지시했으니까. 조종사와 관제사에게 가장 큰 수치는 영공 안에 들어온 미식별기를 놓쳐버리는 일이다. 소련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공군에서도 이것은 문책감이다.
관제사- '마하의 조련사'
아무리 레이다가 최첨단의 과학으로 무장되어 있다 해도 수천 리나 떨어져 있는 두 점을 맞닥뜨리게 하는 요격 관제는 동전 한 닢으로 수십만 점을 올리는 갤러그 전자 게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중이란 3차원의 공간, 맹 속도로 움직이는 비행물체, 제한된 시간과 시야- 요격은 바로 공간과 시간 속을 흐르는 두 직선의 싸움인 것이다. 레이다 관제사에 의한 순간적 판단착오, 예컨데 요격 방향이나 속도 지시에 있어서의 사소한 계산 착오는 하늘에선 수십 킬로미터의 어긋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조종사를 조종하는 관제사는 마감 시간 안에 두 직선을 접점시켜야 하는 '마하의 조련사'인 셈이다.
캄차카에서 KAL기에 요격을 시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련 전투기 수호이 15의 행동 반경은 7백25킬로미터, 미그 23은 1천2백 킬로미터다. 팬텀이나 F-15에 비해 매우 짧은 항속 거리다. KAL기가 캄차카를 통과, 오호츠크 공해상으로 빠져나가자 이들 전투기는 항속 거리의 제한으로 KAL 기를 더 추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그나 수호이의 전투 비행가능 시간은 1시간 남짓하므로 목표물과 한 번 어긋나버리면 그 수정이 무척 어렵다.
ECM 대 ECCM
이 때쯤 소련 레이다 기지는 미식별기가 적어도 군용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당초 의심했던 RC-135 같은 최신 전자 정찰기였다면 소련 레이다와 요격기의 추적을 받고 있다는 것을 훤히 알았을 터이고 그에 대한 방어책을 그 때쯤엔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었을 것이니까. 미국의 최 신예 군용기는 레이다 교란장치는 물론 꼭 '레이다 추적 경보 장치'를 달고 다닌다. 이것은 자신을 추적하는 적 레이다 전파의 주파수, 출력, 전파 폭, 안테나 주사(走査)방식, 레이다 위치 등등을 즉각 탐지, 적 레이다를 교란시키는 전자 대응 조치(ECM=Electronic Counter Measures)를 취하게 한다. 가장 역사가 오래고 지금도 널리 쓰이는 것은 채프(Chaff)뿌리기다. 채프는 금박지, 플라스틱, 알미늄 조각 따위를 가리킨다. 공중에 뿌려진 채프에 반사된 레이다 전파로 해서 레이다 스코프에는 미 식별기의 항적 주변이 하얗게 되어버린다.
연막을 뿜고 달아나는 군함과 같은 꼴이다. 이에 대항하여 레이다 기지에선 비행물체만 잡아내는 운동 표적 표시기(MTI=Moving Target Indicator)를 작동시킨다. 채프가 만든 하얀 전자 구름은 이에 의해 스코프에서 말끔히 씻겨 나가고 미 식별기의 항적이 별처럼 다시 드러난다. 이 채프 살포는 2차 대전 때 영국과 독일 공군이 즐겨 쓴 전술이고 지난 68년 8월 소련군이 체코로 침략군을 공수할 때 나토군의 레이다에 대해 써먹기도 했다. 항공기의 ECM에 대한 레이다 측의 대항 조치를 ECCM(Electronic Counter-Counter Measures)이라고 부른다. ECCM에 대해 비행기 쪽에선 다른 교란 전법을 또 쓸 수 있다. 적 레이다 주파수에 맞춰 전자 재밍(Jamming), 즉 방해전파를 쏘는 것이다. 레이다 스코프는 온통 허옇게 되거나 번개 치듯 금이 쭉쭉 가게 되어 항적 포착 기능이 마비된다. 그러면 레이다 기지에선 재빨리 레이다 주파수를 바꾸어 전파 교란을 피한다.
여기에 비행기 쪽에서 또 다른 카드를 던진다. 허수아비를 발사하는 것이다. B-52 폭격기의 경우, 디코이(Decoy) 라고 불리는 소형 무인 비행기를 네 대 달고 다닌다. 5백 킬로그램밖에 되지않는 꼬마들이지만 표면이 전파 반사를 잘 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레이다 스코프에서는 폭격기처럼 크게 나타난다. B-52가 사방으로 이 허수아비를 발사하면 레이다에서는 한 점의 항적이 갑자기 다섯 개로 갈라져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어느 놈이 진짜 적기인지 분간을 못하고 허수아비를 행해 요격기나 지대공 미사일을 공격하게 할 수도 있다. 더구나 이 디코이는 날아가면서 채프 살포, 전파 교란도 함께 하게 되어있어 레이다를 정신 못 차리게 한다.
이러한 ECM이나 ECCM 장비는 이미 2차 대전에서 월남전까지 실전 사용된 기본적인 것이다. 그밖에도 적의 레이다 전파를 받아 이를 왜곡, 변조하여 돌려보냄으로써 레이다 스코프에 자신의 거리와 각도를 엉터리로 나타내도록 하는 기만 장치도 개발되어 있다. 소련 요격기들이 요격 목표로 선정했던 KAL기는 이런 ECM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고 유유히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날고 있었다. 그래도 소련 레이다 기지가 KAL기를 계속 첩보기나 전자 정찰기 따위로 오인했다면 그들이 전자 정보 수집능력이 약하다는 것을 반증하며 이것이야말로 이번 격추 사건에서 미국이 얻어낸 가장 큰 수확이었을지도 모른다.
관제사는 드넓은 하늘을 축소시킨 큰 접시 만한 무대, 곧 레이다 스코프 위에서 요격기라는 꼭두각시?조종한다. 소련기의 조종사에겐 행동의 자유 재량권이 거의 없다.
| 소련 조종사는 관제사의 꼭두각시
요격의 두 주역은 관제사와 조종사이다. 미국을 비롯, 자유 세계에선 요격이 있어서 조종사의 발언권을 중시하고 있다. 요격 훈련에서 요격 실패가 되었을 경우, 그 책임을 따질 때도 명백한 파일로트 실수를 관제사 실수로 뒤집어씌울 수도 있을 만큼 관제사는 조종사에 대해 종속적인 입장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전투기 자체의 레이다가 성능이 좋아 지상 관제에 소련 조종사들처럼 크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소련에선 관제사의 권한이 강력하다.
관제사들이 조종사 출신인 데다가 전투기들의 레이다 성능이 좋지 않아 지상 관제에 크게 의존하게 되고 행동 반경이 짧아 늘 지상 레이다 감시망 안에서 놀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조종사의 외국 망명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고 또 전체주의 국가의 특징인 중앙으로부터의 일사불란한 명령 시달이란 측면에서도 조종사에 대한 관제사의 통제가 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요격 관제에는 F-86F나 F-5A처럼 레이다를 갖지 않은 전투기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 레이다 관제사의 책임은 이들 요격기의 조종사가 육안으로 목표를 볼 수 있는 위치까지 근접시켜 주는 일이다. 조종사가 목표를 육안으로 목격하면 '텔리호(Tallyho)!'라고 하는데 그 이후의 성패는 조종사의 책임이 된다. 낮에는 보통 4∼6킬로미터 이내로 접근시켜야 '텔리호!'소리를 듣게된다 (레이다가 없는 전투기는 거의 야간 출격을 못한다).
팬텀과 같은 레이다있는 전투기의 경우, 지상 관제사는 조종사가 전투기 자체 레이다로 적기를 확실하게 포착할 때까지 유도한다. 전투기 레이다에 목표가 나타나면 조종사는 '주디(Judy)!' 라고 한 뒤 요격에 돌입하며 그 이후의 요격 성패에 책임을 지게된다. 팬텀기의 경우, 자체 레이다의 탐지가능 반경은 1백 킬로미터를 넘지만 실제로는 목표에 20∼30킬로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않으면 조종사는 '주디!'란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주디!'는 뒤에 책임소재를 따질 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 무기 체제를 받아들인 나라의 경우이고 소련에선 조종사의 임무가 완료될 때까지 관제사의 철두철미한 통제를 받으며 자유 재량권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관제사라는 연출가는 드넓은 하늘을 축소시킨 큰 접시만한 무대, 곧 레이다 스코프 위에서 요격기라는 꼭두각시를 조종한다. 이 꼭두각시놀음이 성공하기 위해선 스코프 화면이 맑아야 한다. 짙은 비구름이 끼면 스코프가 부옇게 되어 비구름 속에 들어간 항공기를 못 알아보게 된다. 비행기의 교통량이 많아도 곤란하다. 스코프에 항적이 바글바글하면 자신이 관제하고 있는 항공기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엉뚱한 항적을 자신의 항적으로 착각, 관제를 하다가 얼토당토 않는 곳으로 비행기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풍선이나 새떼의 항적을 미식별기로 착각, 출격 명령을 내리는 촌극도 자주 빚어진다. 그러나 노련한 관제사는 이물질이 많은 스코프에서도 자신의 꼭두각시와 표적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표적물이 레이다 전파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저공 비행해 들어가면 스코프에선 항적이 잠시 사라진다. 그럴 때는 침착하게 예상항로를 그려 가다가 그 항적이 재출현하면 정확하게 잡아내곤 한다.
요격전의 중계방송
9월1일 새벽2기께 캄차카 상공에서 오호츠크 공해상으로 빠져나갔던 KAL기는 서남서 방향의 항로를 수정하지 않고 새벽 3시 직전 이번엔 소련령 사할린 상공으로 진입했다. 소련은 '이 때 방공 사령부의 요격기들이 출동, 국제 비상 주파수(121.5메가 사이클)로 침범기와 교신을 시도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발표했었다. 이 비상 주파수는 세계 공용으로소 민간, 군용을 막론하고 모든 레이다 기지, 항공기, 선박에서24시간 개방, 모니터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소련이 과연 이 주파수를 사용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인지 그것은 이 부근의 레이다·통신 기지의 모니터 녹음자료가 입증할 것이다. KAL기가 사할린 상공으로 접어들 무렵엔 이미 소련 요격기들이 그 예상 항로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미식별기를 그들의 영공에서 요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미국 정부가 UN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공개한 소련 조종사의 관제사 사이의 교신 녹음 내용은 KAL기 격추 상황을 드라이하게 묘사한 하나의 중계방송이었다.
이 녹음 내용은 소련의 요격, 관제 전술을 그림 그리듯 자세하게 보여 주었다. 역설적이지만 일본과 미국은 KAL기 사건으로 하여 소련 공군의 전술사례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를 얻은 셈이다. 실전을 관찰하는 것만큼 좋은 정보수집은 달리 없다. KAL의 영공침입을 레이다는 얼마나 빨리 포착했고 비상 출격엔 몇 분이 걸렸으며, 어느 기지에서 이륙했고 어떤 요격방법을 썼으며 관제사와 조종사들은 어떤 행동양식을 보였는가,
요컨데 소련 방공망은 비행 물체의 영공 침범이란 비상사태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그 취약점은 무엇인가? 미국 전자 정보 기관은 두 시간동안 그들의 전자 눈과 전자 귀를 총동원, 소련 군사기구의 실전 체제를 예의 분석했을 것이다. 이 교신 내용을 분석해 보면 소련 요격기들은 1대1로 레이다 관제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관제사가 한 조종사를 맡아 관제하면서 요격기의 행동지침 하나 하나를 세세하게 지시하고 있다. 네 대의 요격기 상호간의 교신이나 협동 작전은 전무한 형편이다. 월남전에서 미그 조종사들이 1대1로서는 잘 싸우는데 복식 공중전에서는 약하다는 평을 들었던 것도 공산국 공군에선 관제사―조종사의 종적 지휘계통만 너무 엄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전적인 측면공격 후의 후미요격
네 대의 전투기 가운데 요격전의 주역은 맨처음 KAL기를 레이다로 포착했던 호출부호 805기(수호이 15)였다. 805기는 KAL의 뒤에서 같은 비행 방향(2백40도)으로 진행하면서 '레이다 포착'에 성공한 것이다. 요격이나 공중전에서는 해를 등지는 것과 적기의 꼬리를 무는 것이 성공의 조건이다. 805기는 가장 고전적인 요격방식인 '90도 측면공격 및 후미추적'의 원칙대로 했던 것 같다. 이것은 미식별기의 항로와 90도로 접근, 측면을 향해 1차 공격(또는 식별)을 한 다음 90도 회전하면서 적기의 꼬리를 무는 방식이다. 805기는 레이다 포착 6분14초 뒤(3시12분10초)에는 KAL기를 육안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다(이 때 805의 고도는 8천, KAL기는 1만 미터). 육안 포착직전 조종사는 '무기통제 계기를 꺼야 하나?'라고 테푸타트 관제소에 물었다(응답은 녹음 안됨). 그 때가지도 조종사는 발사 여부에 대한 명령을 받지 못하고 있었음이 이 것으로 분명해진다. 3시13분5초에 805기는 록온(Lock On)에 들어간다.
록온은 말 뜻 그대로 목격기가 표적을 자물쇠 채우듯 꽉 물어버린 상태다. 즉, 요격기 레이다와 무기 관제 장치가 표적 하나만 추적하도록 된 상황으로 이 때부터 표적은 요격기에 '전자의 밧줄'로 묶여버린 처지가 된다. 요격기는 록온 이후에는 언제든지 미사일을 발사, 명중시킬 수 있고 표적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3시13분26초에 805기는 피아 식별기(IFF)를 작동시킨다.
이것은 미식별기가 소련기가 아니라는 사실만 알려 줄 수 있을 뿐 어떤 비행기라는 것까지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3시18분34초에 805기는 KAL기의 운항 등을 확인하고 20분17초에는 미사일 조준 장치를 켠다. 21분35초엔 KAL기로부터 2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 깜박이는 전자 등을 확인한다. 이 거리에서 KAL기가 민간 여객기인 줄 정말 확인할 수 없었을까? 아니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일까? 22분, KAL기는 속도를 줄였고 805기는 더욱 거리를 좁혀 목표와 직각 방향, 즉 KAL기의 측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805에 주어진 임무가 식별이었다면 이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이 순간 관제사도, 조종사도 그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듯 '다른 다급한 임무'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23분10초에 805기는 목표물의 고도가 1만 미터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KAL기는 일본 나리다 관제소에 '고도를 3만2천 피트(9천7백50미터)에서 3만5천 피트(1만6백 미터)로 올렸다'고 보고했었다.
이 날 KAL기의 다른 위치보고와 마찬가지로 고도 변경보고도 엉터리였다는 얘기가 된다. 23분37초 805기는 미사일 발사 명령을 받고 25분16초엔 뒤로 8킬로미터쯤 물러나 록온 상태에서 조준한 뒤(25분46초)26분20초에 2개의 미사일을 동시 발사, 2초 뒤 KAL기가 파괴되는 것을 확인, 보고하였다. 805기 주변에 있던 3대의 전투기들은 KAL기가 추락한 해상을 선회 비행하면서 정확한 추락 지점을 확인하려고 했다.
현대 공중 전자 전쟁의 주역은 레이다와 비행기다. 레이다는 방패, 비행기는 차의 역할을 하며 경쟁적으로 기량을 연마해 갔다. 레이다의 '전자눈'과 전투기의 교란 장비의 대결-.
당혹감과 공포에서 나온 발작적 반응?
이 녹음 기록을 읽어보노라면 소련기는 KAL기를 발견한 뒤 요격의 본업무인 식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격추에만 전념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미식별기를 일단 적기로 분류한 다음 공격한다는 요격의 원칙은 무시되었다. 소련 관제사는 소련 요격기가 표적을 발견하기 이 전에 이미 격추 명령을 받아 놓고, 즉 식별 결과에는 상관없이 대응 조치에 대한 결론을 이미 갖고 있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뉴욕 타임즈"의 고정 논평란에서 제임스 레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발사 명령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방 세계에서의 추측은 그 동기가 오랜 소련역사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에 대한 공포, 서방과 일본의 컴퓨터 사회에 대한 당혹감, 자유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전자 장비를 갖춘 인공 위성과 정찰기들이 소련 내 전략 요새에 대해 벌이는 첩보 활동에 대한 공포 등등. 이 같은 공포와 불신 분위기 아래에서 소련의 영공으로 들어온 KAL기가 소련 측에 대해 혼란과 대 실수를 유발시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격추 명령을 내린 소련인의 마음을 지배한 것으로는 레스턴이 열거한 공포와 당혹감 이외에도 캄차카 상공에서의 1차 요격 실패에 대한 당혹감, RC―135의 근접 비행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KAL기가 곧 공해상으로 달아나 버릴 것이라는 조급함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소련 상공을 넘나들다가 격추된 U―2기, 지금도 손을 못 쓰고 있는 SR―71 정찰기에 대한 무력감과 열등감,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들을 담 넘어보듯 날고 있는 RC―135에 대한 증오감, KAL기의 태연 자약한 비행…
이런 것들이 뒤섞여 소련 지휘부로 하여금 미식별기에 대해 폭발적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아닐까? 소련의 비이성적 대응은 요격이 본질적으로 제한된 시간, 제한된 공간, 맹 속도의 비행 물체를 상대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냉정한 사고를 할 여유가 없는, 초읽기에 몰린 상황에서 본능적 반응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 본능적 반응은 소련이라는 체제 속성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것이리라. KAL기 사고와 비슷한 가정을 우리는 할 수 있다. 핵미사일로 보이는 미식별 물체가 소련으로 접근한다면, 거기에 대응할 시간이 30분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면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KAL기 사건은 하나의 암시를 던지고 있다.
C I
최근 군사 용어로 C I라는 말이 새로 유통되고 있다. C 는 지휘(Command)·통제(Conttol)·통신(Communication)을 가리키며 I는 정보(Intelligence)를 뜻한다. C I는 '전략·전술 정보를 수집, 정리, 교류하여 전술·전략을 통제, 지휘할 수 있도록 하는 군사 기술'로 정의된다. E-3A기와 같은 전자 통제기가 이 네 가지 기능을 두루 갖추고 있다. C I는 기술 측면에서는 전자 장비를 그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전자전쟁'(EW=Electronic Warfare)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이 C I나 전자전쟁은 평화시에, 소리도 없이, 국경도 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 내막은 푸에블로호와 같은 전자 정보함이 나포되고 U-2기나 EC-121기와 같은 정찰기가 격추될 때만 약간의 속을 보여 줄 뿐이다. 전파 감청, 레이다 경계, 전자 정찰 비행, 레이다 교란 등등으로 나타나는 전자 전쟁은 평화시의 기본적인, 또 기계적인 군사 활동이다.
여기에선 C I의 발상지이며 지금도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되고 있는 공중전 부문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KAL기 사건에서 드러나듯 현대 공중 전자 전쟁의 두 주역은 레이다와 비행기다. 레이다는 방패, 비행기는 창의 역할을 하며 모순(矛盾)의 순환 나선을 따라 경쟁적으로 기량을 연마해 갔다. 2차 대전 때 독일 공군의 대량 폭격에 대항하여 영국이 레이다를 등장시킨 이래 전투기는 이 '전자 눈'을 멀게 하기 위한 갖가지 수법(ECM)을 써 왔다. 고추가루(채프)를 뿌리고 허수아비(디코이)로 현혹하고 눈동자를 찌르고(전파교란)…. 이런 새 수법이 개발될 때마다 레이다 쪽에서도 방어책(ECCM)을 하나, 둘씩 강구하여 대응함으로써 막상 막하의 전자 게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의 레이다 기능 마비전술이 ECM, 이에 대한 레이다의 방어책이 ECCM등 두 주력 종목과 함께 최근 각광을 받고있는 제3의 공중 전자게임은 ELINT(Electronic Intelligence)라고 불리는 전자 정보 수집 부문이다. 미국과 일본이 KAL기를 격추시킨 소련 요격기의 교신 내용을 녹음, 이를 공개함으로써 소련의 변명을 반박하도록 만든 것도 이 부문의 성과 였다. ECM이나 ECCM은 실전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ELINT는 평화시의 주된 전자 전술이 되고 있다. 전자정보 수집의 주인공들은 R(Reconnaissance의 약자. 정찰을 뜻함)과 E(Electronic의 약자)자 부호가 붙은 RF-4C, EC-121, RC-135, E-3A등과 같은 전자 정찰기 또는 조기 경보기들이다. 이들 비행기는 정교한 최첨단 전자 장비로 무장한 대형 항공기로서 대당 가격이 억 달러가 넘는 것도 있다.
'ELINT는 평화를 위해 전쟁에 대비한다'는 목표 아래서 레이다, 미사일 발사장치 등 전자 장비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수집, 분석, 보존하는 전자전의 기본 작업이다. 요격이나 전자전의 승패는 평화시에 이 전자 정보 수집을 얼마나 면밀히 하여 많은 자료를 축적했느냐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훈련 비행중인 적 전투기 조종사들의 대화를 일일이 녹음, 분석하여 인사 이동이나 개별 조종 특징까지 알아내는 일 따위는 이미 기본적인 ELINT업무로 되어있다. KAL기 격추에 동원 된 소련 요격기의 호출 부호만으로도 미국은 기종이나 조종사의 신원을 파악했을 것이다.
| 전자 교란 작전의 덕을 본 한국전의 B-29
전자병기의 발달은 폭격, 요격, 공중전의 양상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왔다. 6·25전쟁에는 제트 전투기끼리의 공중전이 처음으로 벌어졌고 ECM(레이다 교란)전문 비행기가 최초로 등장했다. 한국 전쟁에서 B-29폭격기는 총2만1천 회의 출격을 했는데 34대가 적 포화에 격추 되었다. 약 0.16퍼센트의 낮은 피격률은 B-29가 ECM장비를 달고 다니며 적의 고사포 유도 레이다를 교란시킨 덕분이었다. 미 공군의 계산에 따르면 ECM이 아니었다면 격추율은 3배로 늘었을 것이라고 한다. 미 공군은 2대의 레이다 교란용 비행기, 3대의 레이다 파괴용 비행기로 1개 편대를 구성, 폭격기들을 엄호했었다. 한국 전쟁에서 공중 격투전은 주로 미그 15기와 F―86세이버 전투기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 최종 스코어는 미그 15기가 7백92대 격추 된 데 대해 세이버는 78대 격추되어 10대1로 세이버의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67년의 3차 중동 전쟁은 흔히 개전 1시간만에 실질적으로 끝났다고 한다. 1백96대의 이스라엘 미라즈 전투기들은 6월5일 아침 7시45분∼8시45분 사이 열 군데의 이집트 비행장을 기습, 활주로에 있던 전투기 3백38대를 파괴했다. 이로써 이집트 육군은 공군력의 엄호를 받지 못하게 됐다. 사막전에서 공군의 엄호를 못 받는 지상군은 우산 없이 빗속을 걷는 사람과 같은 신세다.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은 공격 편대가 통신을 완전히 끄고 저공 비행으로 이집트 레이다망을 우회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보통 가장 적합한 공습시간은 상오 5∼6시께인데 이스라엘은 그 시간을 피하여 적에게 일?긴장 해이를 유발한 뒤 이집트 공군 지휘관들이 비행장으로 출근할 무렵에 기습을 단행, 지휘 계통이 가동하고 있지 않은 상태의 적 공군을 괴멸시켰던 것이다.
ECM편대가 활약한 월남전
월남 전쟁에선 월맹군의 레이다망과 지대 공 미사일(SAM)에 대한 미 공군의 전자 방해 작전과 미그 21대(對) 팬텀의 격투전이 기존의 공중 전쟁 양상을 크게 바꿔 놓았다. 이 전쟁에서 미 폭격 편대는 저공에서는 대공포, 고공에서는 지대공 미사일 공격을 받아 고전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개발한 것은 '철권'(鐵拳)으로 별명 붙여진 ECM편대였다. 이 편대는 4대의 ECM전문 전투기로 구성되고 조종사로는 최우수 파일로트들이 선발되었다. 이 편대는 폭격기들 보다 5분쯤 먼저 적진으로 들어간다.
편대가 레이다 추적 경보 장치를 작동시키면 그들을 쫓고 있는 적의 조기 경보 레이다와 미사일 유도 레이다의 주파수 등이 파악된다. 그러면 레이다 전파를 따라가는 미사일을 쏘아 이들 레이다를 파괴한다. 또 채프 뿌리기 레이다 전파 교란 작전 등을 써 적의 방공망을 크게 혼란시켜 놓으면 그 뒤를 따라 폭겨기 본대가 입장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월맹 방공 부대는 폭격 편대를 향해 미사일을 집중 발사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폭격기들이 미사일을 피해 흩어지면 일시적으로 레이다에 대한 ECM이 약해지는데 이 때를 틈타 미사일을 조준 발사, 각개 격파하는 전술이었다. 미군 폭격기들은 또 미사일 발사 준비를 알리는 유도 레이다의 전파 신호를 미리 감지하여 미사일 발사 직전에 이미 대피 비행을 하기도 했다. 월맹 측이 이것을 알아차리고 허위 신호를 조작, 미군 폭격기들을 달아나게 만들기도 했다. 미 공군 측의 ECM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월맹 미사일에 의한 미군기 격추율은 '67년의 1대 격추에 미사일 50발 발사에서 '72년에는 1대 격추에 1백50발 발사의 확률로 떨어졌다. 월남전에서 공중전 주역은 미그 21과 F-4팬텀기였다. 당시 두 전투기는 동서양 진영을 대표하는 최신예기였다. 이들의 공중전은 전자 시대 공중 전투전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고 그 교훈은 그 뒤의 전투기 개발이나 공중전 전술 발전에 큼직한 영향을 미쳤다.
월남전에서 한계 드러낸 팬텀기
미국 맥도넬 다글라스사에서 1959년에 만든 팬텀기는 2차 대전 이후에 나타난 전투기 가운데서는 두 번째의 베스트셀러였다. 당대의 하늘을 주름 잡았던 팬텀기는 지난 20년 동안 5천57대가 제작되었는데 이것은 F-86세이버 전투기(6천2백27대)에 다음 가는 생산량이다. 팬텀은 비행기 자체만의 무게는 14톤이지만 연료와 무장을 완비하면 28톤이나 된다. 이렇게 무거운 삼각형 비행기가 음속 2.3배의 최고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경이적인 상승력을 아울러 가졌으며 기상 레이더와 연결된 화기 통제 장치는 목표 발견, 조준, 발사를 자동화시켰다. EMC장비도 두루 갖추었다. 조종사 이외에 그 뒷자리에는 무기 통제장교가 타고 앉아 화기 발사를 책임지게 되어있었다.
팬텀은 그러나 공중전을 위해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요격 및 폭격기용으로, 그것도 기동함대 보호용으로 미 해군이 먼저 개발한 것이었다. 이 기종을 공군에서 채택하면서 근접 공중전에도 쓸 수 있도록 약간 변형을 했다. 요격과 공중전의 차이는 이렇다. 폭격기 편대의 침입로를 차단, 공격하는 것이 요격이고 전투기끼리 꼬리를 물며 격투를 벌이는 것은 공중전이다. 팬텀은 맞상대인 1인승 미그 21보다 세 배나 무겁고 세 배의 행동 반경을 가졌으며 세 배의 제작 원가를 먹고 있었다. 월남전에서의 정확한 공중전 스코어는 발표된 바 없으나 2대1, 또는 3대1로 팬텀이 미그 21에 우세했다는 게 정설이다. 팬텀의 판정승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에서는 격추로 인한 금전적 손실을 계산하면 사실상 팬텀 측이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평가를 내렸다.
미국 상원 소위원회에서 한 팬텀 조종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공중전은 보통 고도 1천5백∼6천 미터 상공에서 음속 이하의 속도로 벌어졌다. 미그 21은 작지만 더 작은 원을 그리며 선회할 수 있는 회전력에선 팬텀보다 앞섰다. 이 선회력은 근접 공중전에선 극히 중요한 장점이 된다. 팬텀은 미그보다도 가속력과 상승력이 좋고 무기 체제도 뛰어났다. 미그기는 히트 앤드 런 전술을 즐겨했다. 그들은 낮게 떠서 우리의 꽁무니를 물고 열추적 미사일을 쏜 뒤 이탈하는 전법을 썼다. 근접 공중전에서도 그들은 지상 레이더 관제사의 통제를 받았다. 언제 외부 연료탱크를 버리고 가속 장치를 가동시키며 언제 미사일 발사 준비를 하고 언제 이탈하고 어디에 착륙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들은 관제사로부터 일일이 지시를 받았다. 미그 조종사들은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도록 교육받지 못했다. 이 점에서 팬텀 조종사들은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미 해군은 처음에는 팬텀기에 기관포를 설치하지 않고 미사일과 폭탄만 실었다. 그들은 팬텀기의 정교한 전자화기 통제가 재래?공중전의 양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적기의 근접 전투를 벌일 필요도 없이 10여 킬로미터쯤 거리에서 기상 레이다 유도에 의해 미사일을 쏘면 만사가 끝나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팬텀이 개발한 공중 전법은 재래식 관점에서 보면 금기로 하는 정면 접근법이다.
1백80도 정면 접근법(Head On Approach)이란 게 그것인데 적기를 향해 약 6백 미터 저공에서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레이다 유도 미사일을 쏘고 급상승하여 U턴하면서 적기의 꼬리를 물고 열추적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실전을 해보니 미사일이 결코 백발백중이 아님이 밝혀졌을 뿐 아니라 혼전상태에서 열추적 미사일을 쏘면 아군기가 맞아떨어질 수도 있음이 확인되었다. 재빠른 미그21이 바짝 붙었을 땐 역시 기관포가 더 쓸모가 있음이 드러났다.
일찍부터 기관포를 달았던 미 공군 소속 팬텀기는 5백 미터 이내에선 1분에 6천 발이 나가는 20밀리 불칸 기관포를 사용했으며 제한된 수의 미사일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무기임이 분명해졌다. 월남전 결과는 팬텀과 같은 공중전-폭격 겸용의 대형 전투기에 대한 불신감을 높였으며, 아무리 전자 장비가 발달되어도 근접 공중전은 본질상 1차, 2차 대전 때처럼 '하늘의 결투'로 남아 있을 것임을 입증했다. 그런 공중전에선 경량의 기동성 있는 전투기가 우수한 장비를 갖춘 무거운 비행기보다 유리하다. 이런 교훈에서 미국이 개발한 것은 F-15와 F-16과 같은 근접 공중전 전문 전투기였다.
| 링 사이드의 트레이너, 조기 경보기
'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한 전투기 격추의 위력을 새삼 실감케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공중전에선 미라즈기를 몰고 나와 아랍 측의 미그 21을 압도했다. 그 스코어는 미그 3백30대 격추, 미라즈는 6대 격추였다. 이것은 미그 21의 성능이 나쁜 것을 보여 준다기보다는 아무리 최신 전투기라도 조종사의 질이 승패에 더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지난해의 레바논 전쟁은 공중전의 새로운 주역들을 선보였다. 이스라엘은 미국에서 사들인 F-15, F-16을 시리아의 미그 23 및 21과 맞붙었다. 그 스코어는 미그기 80여대 격추에 이스라엘기 2대 격추였다. 이 공중전은 월남전을 웃도는 고도의 전자전이었다. 이스라엘기는 미그기 뿐 아니라 시리아 측 지대공 미사일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F-15, F-16의 ECM 장비는 우선 지대공 미사일 유도 지상 레이다에 전다 방해 작전을 펴 그 기능을 마비시켰다. 그래도 미사일이 발사되면 이 미사일 유도장치에도 전파교란 신호를 보내 빗나가도록 했다. 시리아 미사일 기지는 레이저 폭탄 등 스스로 목표물을 찾아가는 폭탄세례를 받고 파괴되었다. 이스라엘기 조종사는 레이다에 나타난 적기의 항적을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분류, 위협도에 따라 공격 우선 순위를 매겨주는 대로 조준점을 맞추어 미사일이나 기관포 발사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되었다. 이 공중전에서 이스라엘은 전자 통제기(E-2C)의 막강한 도움을 받았다. 이 통제기는 반경 5백 킬로미터 안의 적기를 2백50대까지 동시 추적할 수 있는 공중 지휘소다. E-2C는 정교한 전자 장비로 수집한 적에 대한 정보를 이스라엘 조종사들에게 시시각각으로 공급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공중전에서 이런 전자 통제기는 승패를 가늠하는 요인으로 등장할 것 같다. 이 전자 통제기는 앞으로 지상 관제소를 대신하여 공중전의 현장 가까이 상공에서, 마치 권투 선수를 조종하는 링 사이드의 트레이너와 같은 기능을 할 것이다. 미국이 자랑하는 1억 달러 짜리 E-3A조기경보 겸 전자통제기는 육상 레이다보다 3백 배나 더 넓은 공간을 감시할 수 있다. 그 전자 장비는 현대의 ECM장비로는 교란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미 공군의 훈련결과를 보면 공중 사령탑 E-3A의 도움을 받은 1백34대의 전투기는 그 배가 넘는 2백74대의 가상 적기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일본의 카데나 공군기지에는 E-3A가 4대있는데 극동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공중전의 승패는 쇼트펀치(기동력)가 결정
나경민 선수를 KO시킨 것은 박종팔의 쇼트 블로우였다. 공중전에서도 짧고 빠른 펀치는 승부를 결정짓는다. 전투기에서 그런 펀치는 바로 빠른 회전력, 가속력, 상승력 등등으로 표현되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동력이다. 그 가운데서도 누가 짧은 원호를 따라 빠르게 선회할 수 있느냐, 그래서 누가 먼저 상대의 꽁무니를 물 수 있느냐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아웃복싱의 요격에선 기상(機上)레이다나 전자 장비의 능력이 더 중요하지만 파이팅인 공중 격투전에선 역시 펀치의 빠르기가 중요하고 그것은 비행기 무게 대(對)추진력의 비율로 나타난다. 이 비율에 있어서 F-15는 세계의 현역 전투기 가운데 으뜸이다.
상승력(일정한 시간에 얼마나 높이 오를 수 있는가 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F-15, F-16, F-14, F-4, 미그25, 수호이15, 미라즈F-1E 차례다. 곧 근접 공중전에서 F-15가 최고라는 이야기다. 요격이나 원거리 공중전에서는 레이다나 미사일 장비능력이 앞서고 보다 크고 2인승인 미 해군용 F-14가 최고라는 평가다.
항공 전문가들은 수많은 세계 전투기들 가운데서도 현재의 주전선수들을 여섯 기종으로 꼽고 있다. F-16, 15, 14, 4, 그리고 미그 23과 수호이 15. 미그 25는 고공요격 전문이므로 공중전 주문에선 제외된다. 전투기의 기동력이 발달함에 따라 조종사들의 체력에도 큰 부담이 가해지게 되었다. 급상승이나 급회전 때 가속도가 가해질 때마다 조종사들은 중력(G)의 압력을 받는데 3G(중력의 3배)에 노출되면 눈앞이 캄캄해져버리고 6G가 되면 보통 사람들은 기절한다고 한다. 팬텀 이전의 전투기는 8G이상의 압력을 내는 급선회를 하면 날개가 떨어져 나가버렸다. 지금은 동체에 특수 금속을 사용함으로 8G의 비행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 때 조종사의 몸이 순간적으로 오그라들거나 구겨진다. 이를 막기 위해 공기팽창 비행복을 입고 다닌다. 한국 공군이 곧 갖게 될 F-16전투기는 경량급(무게는 팬텀기의 반)의 전투기다. 선회 반경이 세계에서 가장 짧은 전투기로 근접전에선 적기의 품안에 재빨리 파고들어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인파이터다. 대 당 가격은 2백억 원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3분의 1은 전자장비 값이다.
전투기의 제작비가 엄청나가 높아진 까닭도 전자 장비 개발 및 제작비용 때문이다. 미국의 B-1폭격기 제작비는 B-29의 2백 배, F-14는 2차 대전 때 콜세어기의 1백 90배다. 현대 전자기술의 최첨단은 모두 전투기에 집결되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의 공중전은 어떤 양상일까? 지금 미국, 소련이 연구하고 있는 원격조종 무인전투기(RPV=Remotely Piloted Vehicles)가 하늘의 꼭두각시처럼 쇳덩어리끼리의 공중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인가? 지상 관제소의 지시대로, 조종사의 체력한계를 걱정할 것도 없이 절묘한 공중곡예를 벌여 그들은 인간이 조종하는 전투기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많은 과학자들이 그런 가능성 을 받아들이고 있다. 월남전에서 미국은 무인기로 2천5백 회의 정찰비행을 기록했다. 무인기에 의한 폭격도 전쟁말기에 고려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무인기가 우수한 조종사가 모는 전투기에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로봇에게 전쟁을 맡기고 인간은 그 로봇트를 감독하는 그런 시대가 오려면 인간은 아마도 자신보다 더 뛰어난 로봇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페일 세이프(Fail Safe), 안전 장치 고장나다.
-미국의 전략 폭격기 편대는 이날도 정례적인 초계 훈련비행을 하고 있었다. 핵 폭탄을 가득 실은 B-52 폭격기 편대는 미국 본토에서 소련의 캄차카 반도쪽으로 비행한다. 베링 해를 가로질러 소련 쪽으로 가다가 전략폭격사령부로부터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으면 기수를 돌려 귀환하는 것이 이들 폭격기 편대들의 훈련 과정이었다. 이날 폭격기 편대가 반환점에 도달했을 때 전략사령부로부터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전달된다. 미국의 레이다망이 소력의 미사일 공격을 알려온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레이다망의 조기 경보장치가 고장나 엉터리 경보를 했음이 밝혀졌다. 미국은 이미 소련으로 진입한 폭격기들을 되돌리려 한다.
그러나 이들 편대 조종사들은 평소부터 이런 비상사태 하에서의 행동요령에 대하여 철저한 교육을 받아놓고 있었다. 그것은 일단 소련 영공으로 침입한 뒤에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육성 명령 이외에는 어떤 명령도 일체 듣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 일정시간 비행한 뒤에는 비행기에 보관된 특별 명령서 봉투들을 차례로 개봉, 그 지시에만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미군 기지에서는 조종사의 아내까지 동원, 돌아올 것을 조종사에게 호소하지만 조종사는 '목소리가 조작이다' 면서 임무수행을 위해 매진한다. 대통령이 직접 통신하려고 했을 때는 조종사들이 이미 봉투 명령서를 개봉한 뒤였다. 그 명령서에는 '지금부터는 대통령의 명령도 듣지 말라'고 씌여 있었다. 미국 정부는 소련 정부에 이 편대를 격추시켜 줄 것을 부탁하면서 격추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소련은 이 정보에 따라 한 대, 한 대씩 차례로 격추시키지만 마지막 한 대의 격추에는 실패한다. 이 최후의 폭격기는 모스크바로 접근한다. 소련 정부는 이 모든 것이 미국 측의 고의적인 연극이라고 항의하면서도 소련도 그 보복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위협한다. 미국 측은 핵전쟁을 막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핵 폭탄을 실은 B-52한 대를 뉴욕시의 상공에 띄워 놓는다. 고장난 최후의 미국 폭격기가 모스크바에 핵 폭탄을 떨어뜨리는 순간, 미국도 경고 없이 뉴욕에 핵 폭탄을 투하한다…. 이것은 10여 년 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페일 세이프(Fail Safe) 라는 공상 소설의 대강이다. KAL기 격추사건은 완전 무결하게 보이는 전자 장비가 인간을 배신할 때, 또 그런 고장에 상대가 신경질적으로 대응할 때 "페일 세이프" 에서와 같은 대 재난이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었다. 이번에 소련 영공으로 들어간 것이 여객기가 아니라 핵 폭탄을 만재 한 고장난 전폭기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전자 과학의 진보는 인간들을 기계화시키고 있다. 비행기는 자동항법 기계가 몰고, 슈퍼벙커는 며칠 동안 브리지에 사람 하나 없어도 자동 항해장치의 지시대로 간다. 비행기의 항법사나 선박의 항해사는 항해나 비행을 직접 관장하는 기계장치의 작동을 감독하는 제2선으로 물러 나버렸다. 고참 선장들은 수동 항해시대를 동경하는 향수어린 말투로 말한다.
"요즘 항해사들은 1주일에 한 번씩 하는 천측도 귀찮아한다. 기계에 맡겨 놓으면 될 터인데 그런 걸 해서 무엇하느냐는 식이다. 그런 기계가 다 없어진 상태, 예컨대 표류 항해 중에도 뱃사람에게 방향과 위치, 그리고 갈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는 것이 천측(天測)인데도 말이다. 천측은 인간이 최후에 기댈 수 있는 방도이며 뱃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 온 기본적인 슬기인데도 말이다." 기계화는 인간들을 일의 본질로부터 멀리 소외시키고 있다. 이번 KAL기 참사의 발단도 그 현란한 자동 항법 장치라는 기계를 너무 믿은 때문은 아닐까? 항공 전문가들마다 '관성 항법 장치의 고장은 절대로 생각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 기계는 결국 인간을 배반하지 않았던가? 이번 사건의 특징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일이 두 차례나, 즉 항로이탈과 격추로서 일어났다는 데 있다.
소설 "페일 세이프"가 보여 주는 것도 절대 안전하다는 안전 장치의 사소한 작동실패가 인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암시일"것이다. 전쟁 무기의 지나친 전자화, 기계화는 또 인간을 피투성이 전투의 현장에서 소외시킴으로써 오히려 더 잔인하게 만들고 있다. 2백69명을 죽인 소련 요격기 조종사는 단추를 누르는 극히 사무적인 동작을 취했을 뿐이다. 사람을 향해 칼을 찌르는 일이었다면, 총을 쏘는 일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사무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가 미사일 단추를 누른 동작은 칼이나 총을 쓴 것과 같은 결과를 불렀지만 그 의식(儀式)은 자못 전자 문명적이었고 그로부터 양심의 고민을 면제시켜 주었을 것이다. 전자 전재의 진짜 위험성은 기계에 의한 이러한 인간성의 황폐인 듯하다.
출처:조갑제 홈 페이지 편집(정리):가우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