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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원사 전경. |
내원사는 금강산만큼이나 주변경치가 빼어나 제2의 금강산 또는 소금강산으로 불리는 천성산 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 주변은 병풍을 두른 듯한 암벽, 작은 폭포와 소(沼)가 어우러진 계곡이 이어져 있어 절경을 담아낸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1300여 년 전 원효대사는 중국 태화사(太和寺)에서 건너온 1천 명의 대중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들어와 대둔사(大屯寺)와 89개의 암자를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의 암자 가운데 상ㆍ중ㆍ하 내원암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발생한 큰 수해로 대둔사와 89암자 대부분이 유실되고 하내원암만 남아,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내원사로 법등을 잇게 된 것이다.
(문헌참조)
초가을이라 아직 단풍은 서툴러도 오리길 걸어 오르는 동안 맑은 물소리 끊이지 않았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 우거진 나무숲길에 맑은 공기 청아했다
수많은 인파들이 붐볐어나 그리 경망하지 않았고 등산객들의 품세도 의연하다
높은 곳 넓은 곳을 보았음직한 여유가 땀에 젖은 얼굴에 가득하니 모두 천성산과 이 내원사의 품세가
만들었다고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는 산사 길과 다르게 소담스럽고 선하게 가꾸어진 도로가 편안했고 곳곳에 불거진 나무를 비켜간 하심에
오르내리는 차들도 바쁠 것 없이 교행 한다
물은 옥같이 맑고 수도자의 서슬 같은 고행의 눈처럼 짙푸름에 편리와 성과위주의 속세를 떠난 이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젖어 들었다
옛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아쉬움도 잠시 스쳐가고 천년의 사지에 가람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기운과 기품은
살아 있었다.
내가 느껴 마음속에 담으면 그 또한 천년을 맞은 인연인 것을.
내원사 계곡의 이모저모.
출입금지 구역에서도 동심은 크게 나무랄 수 없다.
그들은 호기심으로 즐길 뿐 사악함과 욕심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심과 어른, 중생과 수도자의 삶,그것은 용서 받을 수 있는 잘못과 아닌 것의 차이는 아닐까.
설화.
양산의 천성산(千聖山) 일대의 사찰들은 대체로 같은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까닭은 송(宋)의 찬영(贊寧, 919~1002)이 저술한 『송고승전(宋高僧傳)』의 내용에서 절의 시초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원효스님이 태화사(太和寺)의 대중을 구한 일화와 내원사 창건설화가 전한다.
기장의 담운사(淡雲寺:擲板庵)에 주석하고 있던 원효스님은 어느 날 중국 태화사에 산사태가 나 공부하던 스님들이 매몰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판자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는데, 이 판자는 태화사까지 날아가 마당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자 이를 보고 법당 등에서 수도하던 많은 대중들이 놀라 모두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때 갑자기 산사태가 나서 법당 등의 건물들이 묻혀버렸다. 놀란 대중들이 땅에 떨어진 판자를 보니 거기에는 ‘해동의 원효가 판자를 날려 대중을 구하노라(海東元曉擲板而救衆)’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 후 원효스님의 법력(法力)으로 구출된 천명의 태화사 대중들이 도를 구하여 성사를 찾아왔다. 스님은 그들을 데리고 머물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중방리(지금의 용연리)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원적산(圓寂山) 산신령이 마중을 나와 "이 산에서 천명이 득도할 것이니 청컨대 이곳으로 들어와 머무소서"라고 하여 스님은 산신령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지금의 산령각 입구까지 스님 일행을 인도한 원적산 산신령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에 산령각을 짓게 되었는데, 따라서 유독 내원사 산령각은 큰절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게 되었다.
또한 원효스님은 천성산 산신령의 인도대로 이곳에 대둔사(大屯寺)를 창건하고 상ㆍ중ㆍ하 내원암과 아울러 89개의 암자를 창건하여 1천명의 대중이 머물며 수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대중을 산 정상에 모이게 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므로 지금도 그곳을 화엄벌이라 칭한다. 이후 988명이 이 산에서 득도하였고, 나머지 12인 중 8명은 팔공산(八公山)에서, 4명은 사불산(四佛山)으로 가서 도를 깨달았다하여 이후로 원적산을 천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도 속세 인연에 얽매여 상념의 희나리를 뒤적이다 산사를 거닐며 우연히 주워 든 작은 이쑤시개 같은
염원으로 기약 없는 발원을 하고 데울 수 없는 가마솥에 불을 지핀다.
젊은 날 산을 메우고 무쇠를 녹여 못할 일 없었건만 정작 솥은 달구었어도 하얀 밥 한 공기 퍼내지 못했다
삶이 구름 한 조각 피어오르는 것이고 죽음은 그 구름조각이 사라지는 것이라 했건만
퍼질러 잠들었던 무지의 안락한 시간들이 안타까우나 지금인들 무엇이라 이룰 것 있으랴만
작고 가는 장작으로 불을 지핌에 솥은 비웃지 않을 것이니 법당에 엎드린 두 그림자
저 구름 속 구름 같은 짧은 이 순간이나마 다행으로 여겨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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