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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 의성김씨 후손들의 근대정신과 전통건축문화유산(글/사진/정연상_안동대 건축공학과 교수) |
의성김씨종택 이후 내앞마을의 전통건축문화유산 의성김씨 후손들은 임하면 임하리 중촌(中村)과 추월 등에 터를 잡고 세거하였다. 중촌은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로서 절터와 탑 등의 불교유적이 널리 분포하고 있다. 추월은 운암 김명일이 처음 분가한 곳으로 현재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마을 앞 안산 아래에는 반변천과 길안천이 합수하고 있다. 그리고 의성김씨는 임동면 망천리, 지례리, 국란리, 지례 2동 등에 터를 잡았었다. 망천리는 귀봉 김수일의 후손들이 세거하던 곳으로 17세기 중반 이후 마을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지례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정도로 살기 좋은 복지(福地)로 지촌공 후손들이 세거 하였다고 한다. 내급은 마을 앞 냇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 ‘내비구’ 혹은 ‘천곡(川曲)’이라 불렸으며, 이곳에 김원중(金遠重)이 분가하면서 의성김씨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국란은 김원중의 후손들이 세거했던 곳으로 국탄 김시정(菊灘 金始精)이 지은 국탄댁과 김시정의 셋째 아들 김영운(金永運)이 지은 치헌(恥軒)이 남아 있었다. |
1991년 임하댐 건설로 안동시 임하지역과 임동지역 의성김씨의 여러 세거지는 물속에 잠기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들 지역의 의성김씨 후손과 그들의 건축문화유산은 임하지역과 임동지역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임하댐 건설은 천전리 주변 도로와 마을안길과 골목길, 하천 등의 모습을 바꿔 놓았다. 현재 마을 앞을 지나는 34번 지방도로도 임하댐 건설 이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감싸 지나고 있다. 일부 후손과 전통건축물은 임하리와 천전리로 이사를 왔다. 김영운이 지은 국란리 치헌은 이때 천전리로 이건 되었다. 치헌이 자리한 곳은 내앞종택과 귀봉종택의 동측지역으로 고택은 북측의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치헌 서측에는 최근 조영한 전통한옥 김도련(金道鍊)가옥, 제산고택, 백하구려, 백인재 등이 북측 산을 기대어 동서방향으로 난 마을안길을 향하고 있다. 이외에 내앞에는 의성김씨종택 앞 추파고택과 남북으로 흐르는 건천 북측에 자리한 운곡서당과 만송헌 등이 있다. 이들 전통가옥은 의성김씨 내앞마을을 구성했던 중요한 전통건축문화유산으로 조선조말기 주거양식을 이해할 수 있는, 그곳에 살았던 인물사와 사회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가치가 있는 전통건축물이다. 현재 이들 전통건축물은 조선 말기부터 근현대사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내앞마을의 건축문화유산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와, 헝클어진 기와골 백인재 현재 김창정 가옥인 백인재는 백인재 김헌수(百忍齋 金憲壽: 1803~1869, 雨澗 金虎運의 둘째)의 고택으로 우곡길 33(천전리 259번지)에 있다. 이 가옥의 정확한 조영연대를 알 수 없지만 마을사람들은 약 210여년 정도 된다고 한다. 사랑채에는 ‘百忍齋’ 편액이 붙어 있다. 이 가옥은 북측 산자락에 자리하여 정남향을 하고 있으며, 남측의 시멘트블럭담장과 서측의 시멘트판넬담장, 동측의 판축담장으로 감싸여 있다. 가옥의 출입은 동서방향 마을안길에 면한 시멘트블럭담장을 터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을 이용한다. 이 가옥은 기본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하고 있으며 정면의 사랑채와 대문사이에는 잔디를 깔은 넓은 마당이 있다. 넓은 마당은 전에 텃밭으로 사용하였으며, 그전에는 행랑채, 머슴방과 마구간, 솟을대문, 일각문이 있었다고 한다. 행랑채는 사랑마당 동편에 있었고, 머슴방과 마구간은 서편에 있었다. 솟을대문은 사랑채 정면 남쪽에 있었으며, 동측과 서측에는 일각문이 있다고 한다. |
안채와 사랑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 배치를 하고 있으며, 사랑채는 동쪽에 작은사랑을 꾸며 놓았고, 서측에 큰사랑을 꾸며 놓았다. 이들 사랑은 동측과 서측으로 돌출하였다. 안채로의 출입은 큰사랑과 작은사랑 사이에 위치한 중문간을 이용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실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꾸미고, 전면 열에 부엌과 광 등을 꾸며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였다. 안채의 기둥은 사각기둥으로 주초는 다듬은 방형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사랑채는 정면만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가구는 3량가다. 지붕형태는 맞배지붕방식과 추녀를 사용하지 않고 모서리부분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꾸몄다. 이런 모습은 경상도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다. 백인재의 지붕은 다양한 지붕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가옥 입면은 안채의 좌우측 익간의 용마루 높이가 정면 큰사랑과 작은 사랑 용마루보다 높기 때문에 전면으로 합각면이 생겼다. 그리고 큰사랑에 비하여 작은사랑 측면 주간이 반칸 작기 때문에 작은사랑은 큰사랑에 비해 용마루선이 낮고 합각이 조금 큰 편이다. 작은사랑의 용마루 선 너머로 안채의 지붕면과 용마루가 보인다. 이런 모습은 가옥의 입면이 단조로워지는 것을 피하면서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안채가 원근감을 갖도록 한다. 큰사랑은 툇마루 정면에 마루를 연장하고 끝에 평난간을 꾸며 놓았으며, 풍판에 풍혈을 뚫어 장식하였다. 그래서 툇마루는 일반적인 툇마루보다 넓다. 창호는 띠살문을 달아 놓았는데, 큰사랑 마루 정면에는 4짝 들문을 달았고 서쪽과 북쪽에는 두짝 판문을 달았으며, 사랑방쪽에는 맹장지 미서기문을 달았다. 백인재는 사랑채 앞에 있었던 여러 채의 건물들이 사라지고 휑하니 넓은 잔디 마당만 있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리고 백인재는 기존 전통가옥이 지닌 모습을 유지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살아남아 후손들 앞에 서있다면 건축적 가치가 한층 높았을 터인데 안타깝다. |
20세기 초 안동의 근대정신을 강학했던 백하구려 백하구려(白下舊廬)는 백인재 동측에서 남향을 하고 있으며, 등을 북쪽 산자락에 기대고 있다. 고택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후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택은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과 아들 월송 김형식(月松 金衡植)이 만주 서간도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살림집이다. 고택은 김대락 부친인 김진린이 금부도사를 지냈기 때문에 ‘도사댁’으로 불리었다. 또한 고택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이라 하여 ‘삼천석댁’으로 불렸으며, 이는 고택이 경제력과 학문 등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
김대락은 내앞마을 입향조 청계 김진의 둘째 아들 귀봉 김수일의 후손이다. 김대락은 1909년 초 협동학교 운영에 앞장서 안동지역 근대교육과 개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이상룡과 김동삼 등과 뜻을 같이하여 서간도 삼원포로 떠났다. 이후 김대락은 젊은 청년에게 독립운동사상을 가르쳤고, 한인들에게 전통과 근대적 가치관을 제시했다. 김대락은 1909년 초 사상적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는 근대교육과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자신이 거처하던 사랑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때 사랑채는 4칸을 확장하여 임시교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사랑채는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본채의 정면부분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는데 사랑마루방 2칸은 1925년 제청을 옮겨다 지었다고 한다. |
백하구려는 현재 동서방향 마을안길인 우곡길의 북측 산자락에 기대어 남향을 하고 있다. 출입은 우곡길에서 북측으로 난 진입로를 따라 진입하며, 좌우에 텃밭을 일구고 있다. 출입은 남측의 판축토담 일부를 쌓지 않고 대문을 꾸며 사용하고 있다. 진입로 좌우에는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판축토담 안쪽에는 장방형의 사랑마당이 있으며, 출입문 서측의 안쪽에는 화장실이 있다. 백하구려는 동측과 서측에 판축토담을 쌓아 백인재와 제산고택과 경계로 삼고 있다. 백하구려의 평면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하고 있으며, 현재 사랑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랑채는 동측으로 한간이 돌출하고 서측으로 2간이 돌출한 날개집 모양을 하고 있다. 고택의 정면 서측에는 큰사랑 마루와 큰사랑방이 있으며, 중문간 동측에는 작은사랑을 꾸며 놓았다. 안채는 3간 대청을 중심으로 동측에 안방이 있고 서측에 상방이 있다. 안방 남측에는 부엌을 꾸며 작은사랑방과 연결되어 있고, 상방 남측에도 부엌과 광을 꾸며 큰사랑방과 연결하였다. 현재 낙향을 하여 고택을 지키고 있는 후손은 상방의 아궁간과 광을 입식부엌으로 개조하여 사랑방을 주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
현재 가옥의 정면에 자리한 사랑채의 기단은 큰사랑 정면과 작은사랑 정면이 다르다. 큰사랑 정면 기단은 세벌대 자연석기단과 이벌대 자연석기단의 2단 구조를 하고 있다. 작은사랑 기단은 사벌대 자연석기단으로 되어 있다. 큰사랑 정면과 작은사랑방과 마루 정면의 기단 위에는 긴 쪽마루만을 달아 외부에서의 출입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큰사랑마루 정면은 툇마루 끝에 쪽마루를 꾸며 놓았기 때문에 마루간의 4짝 들문을 들어 열면 마루공간이 확장된다. 이런 모습은 기존 사랑채가 사라진 후 이곳에 큰사랑 마루를 덧달아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랑 기능을 수용하도록 한 것이다. |
안채의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면의 2개 기둥은 원기둥이며, 주간과 기둥 높이의 비례는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하고 있다. 3량 가구가 훤히 보이는 대청마루는 좌우측 안방과 상방쪽 간에 디딤돌 하나씩을 놓아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안방은 대청에 면한 띠살의 외여닫이문으로 출입하거나 안마당 기단쪽에 달아놓은 두짝 여닫이문을 이용한다. 상방은 띠살의 외여닫이문 2개소로 출입을 하는데 이중 하나가 작은 창문의 기능을 한다. 대청의 북측은 각간에 머름을 꾸미고 두짝 판문을 달아 놓는다. 상방 부엌 위에는 다락을 꾸며 찬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출입은 대청에서 걸쳐놓은 사다리를 이용하고 있다. 상방 부엌은 안마당쪽에 판벽을 꾸미고 판문을 달아 마감하였는데, 안방 부엌도 상부에 다락을 꾸며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락 밑 부엌쪽으로 쪽문을 달아 놓았다. 부엌의 출입은 작은사랑과 연결된 간을 터 사용하고 있으며, 옆간은 중방과 상방 사이를 열어 맞은편 부엌과 큰사랑 굴뚝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동측의 벽은 판벽으로 꾸며 놓았다. |
백하구려의 안채와 사랑채 처마는 홑처마구조로 마구리기와는 와구토로 마감을 하였으며, 지붕은 안동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맞배지붕과 모서리에 추녀를 사용하지 않은 구조로 마감하였다. 사랑채의 긴 처마와 용마루의 수평선은 고택의 입면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안채와 연결된 익랑으로 사랑채 용마루에는 삼각형의 합각이 지루해질 수 있는 용마루에 리듬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수평적 이미지는 짙은 회색 바탕에 흰색의 와구토가 더욱 강조하고 있다. |
조선후기 후학을 양성한 우곡초당과 제청, 그리고 제산종택 제산 김성탁 종택은 임하면 천전리 빗골(우곡길 39-1)에 자리하고 있다. 김성탁은 조선 후기 문신이며 문장가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제산종택은 조선 후기 유학자 제산 김성탁(霽山 金聖鐸)이 18세기 초에 건립하여 살던 살림집으로 제산의 맏아들 구사당 김락행(九思堂 金樂行)이 대를 이어 살았으며, 이후 1850년대에 김진성이 중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안채의 막새 명문을 보면 종택은 1814년에도 중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종택의 동측 담장 너머에는 우곡서당(雨谷書堂)이 있다. 우곡서당은 1718년에 건립하여 가헌(可軒)이라는 편액을 걸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별도로 사당을 꾸밀 수 없어 종택은 서당에 불천위를 모시기 위하여 제실을 꾸며 놓았다. |
제산종택의 출입은 우곡길에 면한 철제 대문을 이용하며, 좌우에는 조형물을 세워 종택의 대문을 꾸몄다. 대문을 들어서면 서측에 이웃가옥이 있고 동측에 최근에 파놓은 연못이 있다. 현재 고택의 진입 축은 종택과 서당 중간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꺾어 진입해야 한다. 우곡서당은 남측에 난 협문으로 출입을 한다. 종택과 서당사이에는 협문을 꾸미고 판축담장을 쌓아 두 영역을 분리하였으며, 서당 동쪽과 종택 서쪽에도 남북을 긴 판축담장을 쌓아 이웃과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서당은 북측에도 판축담장을 쌓아 사면이 담장으로 감싸여 있다. 종택은 동측과 서측에 동서방향으로 담장을 쌓아 외곽담장과 서당 담장과 연결하였다. 따라서 종택 주변은 판축담장을 쌓고 영역을 분리하여 독특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종택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안마당을 중심으로 정면에 사랑채가 있고 배면에 안채가 있다. 사랑채는 동측부터 사랑마루 1간, 사랑방 2간, 중문간 1간, 마구간 1간이 서측으로 나열되어 있다. 사랑방 윗목간의 정면 띠살문 위에는 ‘九思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 정면의 이벌대 자연석 기단 위에는 쪽마루를 달아 출입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
두짝 판문인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과 대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채는 대청 2간을 중심으로 서측에 상방 1간이 있고 동측에 안방 2간이 있다. 상방 전면에는 통래간(아궁이간), 고방, 감실이 있는데, 안마당쪽에 대청과 연결된 긴 쪽마루를 달아 공간 이동을 원활하도록 하였다. 안방에 따린 부엌은 바닥에 타일을 깔고 입식부엌으로 꾸며 놓았다. 이런 모습은 이 종택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고택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추운 날 우연히 종택에서 나는 종손을 만났다. 수도가 어를까봐 수도를 열어 놓았는데, 하수구부터 어르면서 부엌은 바닥 전체가 두꺼운 얼음판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택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설비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대청은 2간으로 정면에 원형의 디딤목 2개소를 놓아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디딤목은 외지에서 돌아가신 선대의 시신을 운구했던 마차의 바퀴었다고 한다. 바퀴를 처마 밑에 놓으면 도난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후손들은 디딤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마루귀틀 밑의 고막이부분은 원래 트여 있었는데, 최근에 보수를 하면서 미장하여 마감하였다고 한다. 마루 밑은 과거에 유용한 수장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종택의 종손은 고막이 일부를 터 마루 밑을 수장공간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중앙의 기둥 상부에는 커다란 외등이 달려 있는데, 전통가옥이 갖고 있는 맛을 떨어트리고 있다. 이는 전통건축과 관련한 산업의 움직임이 더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가옥에 맞는 다양한 조명설비 방법을 개발하여 보급할 필요가 있다. 이 종택의 지붕형태는 규모만 다를 뿐 이웃에 있는 백하구려와 거의 같다. |
우곡서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중앙간과 동측간 정면에만 툇마루를 꾸며 놓았으며, 동측간에는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서측간은 온돌방으로 정면 기단에 아궁이를 꾸미고 상부에 쪽마루를 꾸며 놓았다. 벽면에는 머름을 꾸미고 두짝 띠살창호를 달아 놓았고, 처마 밑에는 ‘可軒’이라는 편액을 달아 놓았다. 굴뚝은 배면 기단 위에 있다. |
내앞마을로 이건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치헌 제산종택의 우곡서당 동측에는 김도련 가옥과 치헌(恥軒)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두 건물은 내앞마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배치평면을 하고 있지 않으며, 두 건물의 조영 배경 또한 다르다. 치헌은 내앞마을 우곡길을 따라 있는 전통건축 중에서 가장 동측에 위치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국탄 김시정(國灘 金始精)의 셋째 아들 치헌 김영운(恥軒 金永運)이 1785년 분가하면서 건립한 살림집이었다. 고택의 당호는 김영운의 호를 따라 ‘치헌’이라고 했다. 원래 치헌은 임동면 지례동 국탄댁 옆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립으로 1988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55-1(우곡길 45)로 이건 되었다. 치헌은 우곡길 북쪽의 산자락에 등을 기대고 있기 때문에 대문이 안길에서 떨어져 있으며, 길과 대문사이에는 장방형의 바깥마당을 꾸며 놓았다. |
단간의 대문을 들어서면 잔디가 깔린 사랑마당이 있고, 안쪽에 일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뒤에는 일자형 안채가 동남향을 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동측에는 별채가 서향을 하고 있다. 이들 세 채와 화장실은 토석담장으로 감싸여 있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도 토석담장을 쌓아 안마당을 감싸도록 하였다. 치헌은 이건하면서 사랑마당에 잔디를 심어 놓았고, 안마당에는 보드블록을 깔은 후 기단에 붉은색으로 칠한 철제 경사로를 만들어 기단으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이런 모습은 문화유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모습이다. 따라서 건축물의 증개축은 전통가옥의 이미지와 경관을 훼손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디자인하는 사람이, 잘 아는 사람이 도와주면 어떠할까? 안마당으로의 출입은 사랑채 주간에 꾸며 놓은 중문을 이용하며, 중문 좌우측 사랑방의 아궁이는 정면 기단 위에 꾸며 놓았다. 아궁이와 기단 위에는 쪽마루를 달아 사랑마당에서 출입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안마당의 서측 담장에는 장독대를 구며 놓았다. 장독대 앞에는 서측 사랑방의 굴뚝이 있는데, p. v. c 파이와 펜을 달아 마감했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는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처마 끝에 붉은 칠을 한 철제 물받이와 물받이홈통을 달아 높았다. 이런 모습은 치헌이 내앞마을로 이사와 적응해나가는 모습이지만 문화유산의 경관을 훼손하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굴뚝과 물받이, 물받이홈통 등은 전통가옥에 어울리는 디자인과 제작이 필요하다. 따라서 문화유산의 경관을 고려해 오늘날의 요구를 적용해 나갈 때 치헌은 내앞마을의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본다. |
내앞마을에 새로운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전통건축 본채는 기본적으로 H자형 평면을 하고 있는데, 정면의 좌우 익간이 정면으로 3칸 돌출하였고 배면의 익간은 1간정도 도출하였다. 본채는 정면으로 열려 있으며,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방과 서재와 누마루, 화장실, 부엌과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엌과 화장실 등은 오늘날의 삶의 방식을 수용하기 위하여 현대식으로 꾸며 실내에서 사용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이런 모습은 기존의 고택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 전통가옥은 기존의 전통적 시공방법과 현대식 시공방법으로 조영하였다. 목구조 부분은 전통적인방식으로 치목하고 창문을 달아 마감하였고, 난방 효율성이 떨어지는 창호는 현대식의 유리 창호를 첨가하여 내부공간의 열효율을 높였다. 지붕과 처마는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방식을 취하였지만, 겹처마와 추녀 및 선자서까래를 정면에 구성하고 막새기와를 사용하여 전통가옥의 멋을 한 것 뽐냈다. 실내에는 현식 등을 달아 내부를 좀 더 밝게 처리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가옥의 모습은 기존의 전통가옥들과 다른 모습의 등장이다. 이는 오늘날 현대한옥, 신한옥, 새로운 전통건축의 시작이다. 새로운 형태의 전통을 만드는 것은 의성김씨 후손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건축적으로 잘잘못을 논하기 전, 그 곳에 살면서 과거 전통을 유지하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후손들이 전통문화를 계승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 것은 자랑할 필요가 있다. 이 집을 지으면서 힘들었던 일, 재미있고 즐거웠던 일을 이야기하는 집 주인은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서 자신감이 배어 나온다. 손자들이 와서 마당에서, 마루에서, 방에서 뛰 노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주인어른은 기쁘다고 한다. 주인어른은 며칠 있으면 설인데 하시면서 손주와 아들 내외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즐겁다고 하신다. 설이 다가온다. 자연스럽게 나의 발걸음을 고향으로 재촉한다. 집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잊고 있었던 나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런 전통건축, 과거와 현재, 미래가 통하는 건축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지어 놓는 것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 관리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 때가 되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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