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시> 연재 칼럼 6 (2024년 2월)
퇴고
지금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이미 입춘이 지났으니 봄비가 맞겠지. 어쨌든, 내가 사는 우이동 근처 내 작은 서재의 창밖으로 실비가 뿌리고 있다. 실비를 맞으며 작은 트럭에 고구마를 실은 아저씨가 분명 녹음한 목소리를 틀고 있겠지만, 꿀맛 같은 고구마를 외치고 있다. 평소에 입안이 자주 건조해서 고구마는 잘 안 먹지만, 갑자기 고구마를 구워 먹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래, 충동이 있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 사랑하고 싶은 충동, 또 이렇게 써놓고 보니 민망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충동이 있다는 것은 좀 위험하지만,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일 터. 그래, 오늘은 충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나의 충동이 혹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는지. 이렇게 생각하면 또 지나치게 도덕적이라 재미가 없어진다. 도덕적인 것은 늘 재미가 덜하다. 아니 거의 위선에 가깝다.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이글의 제목은 <김민홍의 나쁜 생각>이니까. 감안하면서 읽어주길 바란다.
난 가끔 이 <김민홍의 나쁜 생각>의 원고가 한 400편쯤 모아지면 잘 다듬어서 출간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성격상 퇴고는 잘하는 편이 아니다. 왜냐하면, 퇴고하는 순간에 원래의 정서도 퇴고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서가 퇴고 된다는 것은 결국 독자를 의식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주제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 퇴고하는 과정이 내겐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더 정직할 것이다. 혹자는 글을 너무 경솔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냐고, 질타할 것이다. 물론 퇴고는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경솔한 나의 성격을 다듬어 주기도 하니까. 그러나 잘 다듬어진 성격들은 대부분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난 너무 자주 보아왔다. 당연히 다듬어진 성격들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일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잘 다듬어진 성격들과 있을 때 편안하다. 그러나 다듬어진 내부를 열어보면 한결같이 냉소가 흐른다. 이는 이름이 좀 알려진 지성인이든, 종교가이든, 달변가든, 공통적으로 지닌 속성처럼 보인다. 그런 성격들은 쉽게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때론 필자 같은 성격과는 오랜 기간 평행선으로 달리게 된다. 그렇다고 못되고 모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다듬도록 애써야겠지. 원래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만 가슴을 열면 따스한 인간애가 느껴지던, 그리고 잘 우시고, 스스럼없이 웃으시던 내 유년의 이웃집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동네 삼촌 같은 사람들이 그립다. 그래 어쩌면 이분들도 어린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래 보였고, 지금 다시 본다면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고 잔머리를 굴리던 사람들일지 모른다. 그래도 안 그럴 거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2005년 2월 15일)
나는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이름이 없다. 나는 산맥의 신선한 산들바람과 같다. 나는 은신처가 없다. 나는 떠돌아 다니는 물과 같다. 나에겐 어두운 신들 같은 성소가 없고 나는 깊은 사원의 그림자 속에 있지도 않다. 나는 높은 제단의 향 속에도 장려한 예식 속에도 없다. 나는 조상(彫像) 속에도 없고 선율 좋고 고귀한 송가 속에도 없다. 나는 교리에 묶이지 않고 신앙에 속박되지도 않는다. 나는 종교의 노예나 성직자들의 경건한 고뇌에도 갇히지 않는다. 나는 철학의 덫에 걸리지 않고 그들 학파의 힘에 갇히지도 않는다. 나는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나는 예배하는 자이며 예배받는 자이다. 나는 자유다. 나의 노래는 열린 바다를 희구하는 강의 노래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이름이 없는 산맥의 신선한 산들바람과 같다. / 나는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내 이름은 김민홍(본명 김재홍). 물론 유명한 인간이 아니다. 나는 결코 산맥의 산들바람과 같지도 않다. 나는 은신처는 없지만, 평생 일해 얻은 조그만 서재가 있다. 나는 떠돌아다니는 물과 같고 싶지만 그럴 용기와 능력이 없다. 나는 간혹 미신에 의지하고 깊은 사원의 그림자에 압도당한다. 나는 물론 조상(彫像) 속에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다만 몇 장의 사진으로 내 가족 사진첩에 남을 것이다. 나는 교리를 잘 몰라 얽매이진 않으나 관습의 죄의식에 갇히곤 한다. 나는 철학의 덫을 잘 모르니 걸릴 이유가 없고 그들 학파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하염없이 낮기만 하며 한 번도 높아진 적도 높아지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간혹 기복(祈福)을 위해 예배를 드리지만, 결코 예배받을 일은 없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지만 결기가 없었다. 나의 노래는 열린 바다를 희구한 강의 노래처럼 스케일이 크지 못하다. 그저 일상의 나를 노래할 뿐. 나는 그저 부끄럽고 민망해 본명을 숨기고 김민홍이란 필명을 지녔을 뿐이고, 신선한 산들바람의 세례를 받고 싶었을 뿐, 산들바람이 될 순 없다. 그리고 나는 아직 세상에 있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머잖아 지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