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 46 오후11:21~00:20 1부 ~3부
인류최초의 여왕 토미리스의 대전투/
토미리스 : 전쟁의 여신 리덕스
https://youtu.be/JQRu2shiUOY?si=pYVajx6ZGx514cjN
■토미리스(Tomyris)[1]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키루스 2세를 죽였다고 전하는 스키타이 족 일파 마사게타이족의 여왕이다.
토미리스는 후대 그리스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며, 그녀의 남편, 이름은 밝혀진 바 없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키루스 2세가 마사게타이 정벌 당시 그녀의 아들을 포로로 잡았고, 그녀의 아들이 수치심에 못이겨 자살한 것에 격분해 토미리스 여왕이 키루스 2세를 죽여 피가 가득찬 주머니에 그의 머리를 담갔다고 전한다. 연대적으로 세계 최초의 여왕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녀의 정확한 나이, 이름 등은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그리스 역사가들은 그녀가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의 창시자로써 그녀의 나라를 정복하려 했던 키루스 대왕을 죽이고 효수했다고 기록했다. 기원전 484년경부터 425년경까지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토미리스가 살았던 시절보다 거의 100여 년 뒤에 살았으며 그녀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한 최초의 고전 작가였다.
https://ko.m.wikipedia.org/wiki/%ED%86%A0%EB%AF%B8%EB%A6%AC%EC%8A%A4
토미리스
대왕 키루스 2세가 구혼 요청을 빙자해서 사신을 보내자 마사게타이의 왕위를 노리는 것을 알아채고 거절했다. 이에 키루스 2세가 마사게타이를 여러차례 공격하면서 약사르테스 강을 건널 다리, 뗏목, 탑 등을 만들었다.
토미리스는 키루스 2세에게 마사게타이를 시험하는 것이라면 자신들이 강에서 3일 거리만큼 물러날 것이니 건너오라고 하면서 그대의 나라에서 맞이할 것이라면 그대가 3일 거리만큼 물러나라고 제안했다. 이에 키루스 2세는 고민을 하게 되었고, 크로이소스의 제안대로 마사게타이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키루스 2세가 강을 건너기로 하자 토미리스는 약속대로 군대를 3일 거리만큼 퇴각시켰다.
크로이소스는 또 넘어가서 하루 거리에 부대의 일부만 주둔시키고, 그곳에 산해진미와 포도주를 쌓아두도록 하며 강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키루스 2세에게 조언했다. 그가 이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고 물러나자 토미리스의 아들이 이끄는 부대가 공격하여 키루스 2세의 남겨진 부대를 도륙하고 남겨진 포도주에 취해 잠자던 중 포로가 되었다.
키루스 2세에게 아들인 스파르가피세스가 사로잡히자 토미리스는 아들을 돌려준다면 아무런 대가없이 나라를 떠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태양신의 이름으로 그대가 좋아하는 피를 실컷 맛보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키루스 2세에게 포로가 된 스파르가피세스는 묶여진 몸을 풀어줄 것을 애원했고, 이에 키루스 2세는 스파르가피세스를 풀어주었지만, 그는 포박을 풀어주자마자 자살해버렸다. 이에 광분한 토미리스는 페르시아군을 공격했고 다수의 공방을 거치며[3] 전투를 이어나가던 와중에 결국 토미리스가 승리하게 되었다.
토미리스는 온 사방을 뒤져 키루스 2세의 시신을 찾아냈고 가죽 부대에 사람의 피를 가득 담은 뒤 키루스 2세의 머리를 거기에 담가 조롱하면서
"그대는 계략으로 내 아들을 사로잡으면서 나를 망쳤지만, 나는 위협했던 대로 그대가 피에 물리게 해줄 것이오."
라고 말했다.
실제 이름은 불분명하고,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식으로 변형시킨 이름이며, 이때의 키루스 2세의 죽음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헤로도토스는 이 이야기가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역사, 1권 214장
3. 미디어에서[편집]
문명 6에서 스키타이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6 스키타이 참조. 마침 문명 6 페르시아에서 키루스도 나온다. 둘의 문명 특성은 완전히 극과 극. 서로의 문명에 관련된 도전 과제도 있다.
2019년에 개봉한 카자흐스탄 영화 <토미리스: 전쟁의 여신>은 제목처럼 그녀를 주인공으로 했다.
https://namu.wiki/w/%ED%86%A0%EB%AF%B8%EB%A6%AC%EC%8A%A4
■키루스 2세 보졸그(고대 페르시아어:
𐎤𐎢𐎽𐎢𐏁, 페르시아어: کوروش دوم بزرگ, Kurosch-e bozorg)는 테이스페스(Teispes)의 증손자이며 키루스 1세의 손자이자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며 샤한샤이다. 그는 이란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다. 성경에는 히브리어 발음에 근접한 고레스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태어나기 230여년 전, 남유다 왕국의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그 이름과 사역이 예언되었다.
페르시아인의 지도자로서, 그가 다스리는 동안 페르시아는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메디아, 신 바빌로니아, 리디아를 굴복시켰다.
키루스는 종교적 관용과 다른 민족에 대한 배려가 뛰어난 관대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구약성경 에스라(공동번역 에즈라)(1:1~4)에는 "고레스"로 나오는데 바빌론 유수로 바빌로니아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제2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 이사야(45:1~4)에도 등장하는데,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라는 구절을 통해서 키루스를 움직여 여러 나라를 정복한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키루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게 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키루스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물론이고 그리스에서도 이상적인 군주이자 자비로운 대왕으로 존경을 받았는데 크세노폰등 많은 그리스인들이 그를 군주의 모범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메디아 황제 아스티아게스로부터 고난을 받아 양치기에게 길러졌으며 폭군인 외할아버지를 타도하고 대 제국을 세운 그의 일대기는 전형적인 영웅신화로 각색되어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저서 《키루스의 교육》에서 그가 그의 외삼촌이자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인 키악사레스에게서 메디아의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그가 정통성을 물려받은 군주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키루스의 이야기를 크세노폰의 가치관에 따라 변화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그는 다민족국가인 페르시아 대제국의 융화를 위해 종교적 관용정책과 포용정책을 표방했으며 피정복민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정부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는데 이것이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등에게까지 전해져서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저술 《키루스의 교육》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혔기 때문에, 크세노폰에 의해 다시 서술된 그의 일대기는 근대에까지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근대에 와서도 키루스는 마키아벨리에 의해 자신의 실력, 즉 무력으로 군주가 되었던 군주의 전형적인 사례로 인용된 바 있다.
키루스 리더십에 대한 저서도 한국에 출판될 정도로 키루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는 상황이다.[6]
https://ko.m.wikipedia.org/wiki/%ED%82%A4%EB%A3%A8%EC%8A%A4_2%EC%84%B8_%EB%B3%B4%EC%A1%B8%EA%B7%B8
키루스2세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316?svc=cafeapp
https://aboutcyrus.com/%EA%B3%A0%EB%A0%88%EC%8A%A4-%EC%99%95/
페르시아왕들
고레스왕 이후 10대 왕들
https://m.cafe.daum.net/b-3927/D1c3/60?svc=cafeapp
출처 https://story.kakao.com/ciri7080/JUgrNTPvR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