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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디고 유니콘 원문보기 글쓴이: 봄날isu
왕, 전사, 마술사, 연인(5)
제2부 남성심리해독: 네 가지 성숙한 남성고태형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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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전사 (戰士)
우리는 남성 에너지의 전사 형태를 불편하게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특히 여성들이 불편하게 느끼는데, 이 에너지의 그림자 형태의 가장 직접적인 희생자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금세기 지구상에 참혹한 전쟁이 만연되어서, 공격적인 에너지 자체가 심각한 의심과 공포의 대상이다. 서구에서 금세기는 “유약한 남성”의 시대이며, 극렬한 여성운동가들이 전사 에너지에 대항하여 적대적인 목청을 높여가는 시대이다. 진보적인 교회에서는 “전투적”인 찬송가들 “그리스도 병사여 전진하라”-, 혹은 “공화국의 전투가” 등을 찬송가 책에서 삭제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적 공격성을 뿌리 뽑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고태형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면 흥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 전사를 투표로 간단히 뽑아 내버릴 수가 없다. 다른 모든 고태형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의식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이 고태형은 계속 살아 남는다. 다른 모든 억압된 고태형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지하로 숨어들어 있다가 결국은 정서적, 육체적 폭력의 형태로 다시 부상하는데, 마치 수세기 동안 눌려 있던 용암층이 폭발하는 화산과 같다. 만약 전사가 본능적인 에너지 형태라면, 계속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맞대면 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제인 구달은 아프리카에서 수 년 동안 침팬지와(침팬지는 유전적으로 우리 인간과 98% 같다) 살았는데, 처음에는 침팬지가 기본적으로 사랑을 알고, 평화적이며, 선의에 찬 동물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는 60년대에 크게 히트 하였는데, 당시 서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전쟁이 인간에게 그렇게 명백하게도 매력적인 오락이 되었으며, 대규모 분쟁의 대안책이 무엇인가를 모색하고 있었던 때 였다. 그녀의 최초의 보고서가 나온 몇 년 후, 그러나 구달 여사는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는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를 발표하였다. 그녀는 “평화스러운” 침팬지들 사이에서 전쟁, 유아살해, 아동학대, 유괴, 절도, 그리고 살생을 발견하였다. 로버트 아드레이는 역설적인 저서 두 권, “아프리카의 기원”과, “절대적 영토”에서 인간이 본능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다른 동물들의 행동과 느낌을 지배하는 것과 똑같은 본능에 의해 투쟁욕구는 말할 것도 없이 지배되고 있다고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더하여, 영장류 동물 행동학의 최신 연구에 의하면, 모든 범위의 인간 행동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에게서도 다 나타난다고 한다.
기업 간부들과 보험 판매원들이 주말이면 숲 속에 들어가 전쟁 놀이를 하고, 나무 뒤에 숨고, 물감총으로 공격하고, 생존 게임을 하고, 죽음과 위험의 경지에 처한 놀이를 하며, 서로를 “죽이려는” 전략을 짜는 놀이를 하는 이 현상은 무엇인가? 군대 노선을 따라 조직된 도시 갱단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 형태는 무엇인가? 전쟁 영화, 람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인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영화나 텔레비젼의 폭력을 개탄하기는 하지만, 이 전사는 우리들 내부에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우리 인간 종족의 역사를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역사는 크게 보아 전쟁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거의 모든 문명에서 전사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금세기에, 지구는 두 세계 대전으로 심한 진통을 겪었다. 최근의 동서 해빙에도 불구하고 제3의, 마지막 전쟁의 공포가 우리 머리를 괴롭힌다. 여기에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공격성이 유아 시기의 분노에서 일어난다고 보는데,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유아(남자․여자 모두 포함하여)학대. 앨리스 밀러는 이를 “독성적 교육”에 대한 아이들의 자연 반응이라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에 많은 진실이 들어있다고 보는데, 특히 앞으로 우리가 그림자 전사라고 부르는 것이 우세할 때에 비추어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전사를 어떤 식으로든 단순히 인간적 분노와 동일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으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는 또한 이 원초적 남성 에너지 형태가(여성 전사들에 관한 신화와 전통도 있다) 계속되리라고 믿는데, 이 전사는 남성 심리를 이루는 기초 골조로서 우리의 유전자에 확실히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사의 전통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것이 역사 속에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수세기 동안 평화스럽고,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민족이었다. 그들은 나일강 계곡에서 어떤 적들로 부터도 안전했었다;그들의 적들을 주위의 사막과 북쪽의 지중해가 막아주었다. 이집트인들은 현저히 안정된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물의 조화와 카트 신이 주재하는 우주 질서를 믿었다. B.C 18세기 경 용맹한 셈족, 하이크소스가 나일 삼각지대를 통하여 이집트를 침공한다. 이 하이크소스족 전사들은 말과 마차를 갖고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효율적이고 파괴력 있는 전쟁 기구였다. 이러한 공격력에 익숙치 못했던 이집트인들은 쉽게 넘어갔다. 하이크소스는 결국 이집트 대부분을 장악하고, 철권 정치를 수립하였다.
B.C 16세기에 이르러 단련을 받은 이집트인들이 싸움을 시작하였다. 새로이 발전한 전사 에너지를 가지고 타고난 왕 에너지를 통합한 새로운 파라오들이 남쪽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북쪽으로 쳐들어갔다. 하이크소스 세력을 분쇄하고, 이집트인들의 손에 이집트를 되돌리는데 그치지 않고, 계속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팔레스타인과 아시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집트인들은 예술, 종교, 사고(생각)를 포함한 이집트 문명을 거대한 영역에 걸쳐 전파하였다. 이집트인의 정복을 통하여 터트모스 3세와 람세스 2세는 이집트를 구한 것은 물론, 이집트 문화의 좋은 점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하였다. 이집트인들이 자신들 내부의 전사를 발견함으로써, 이집트인의 도덕과 윤리 및 사후 심판과 선한 영혼이 사후에 신과 합일하게 되는 천국이라는 본질적인 종교적 개념이 서구문명의 윤리와 영성의 일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는데, 전사의 정력적인 활동을 통하여 인간의 중요한 지식과 통찰력을 미래의 문명에게 전달하였다.
인도에서는,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인도 대륙을 평정하고 인도가 세계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을 성립하였다. 그들의 사촌격인 북쪽 페르시아 조로아스터의 전사 왕들은 조로아스터교를 근동지방 전역에 전파하였다. 이 종교는 근대 유대교와 기독교의 출현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으며, 종교 이후의 현대 세계의 기초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데도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그리고 서구 문명을 통하여,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변형된 형태로 현재에도 전 지구를 휩쓸고, 남태평양의 마을 생활과 개인적 도덕성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성경 속의 유태인들은 본래는 전사 민족으로, 전사 신, 유태인 성서의 신야훼의 추종자들이다. 전사 왕 다윗 치하에서, 이 새로운 종교의 특전이, 전사의 덕성에 기초한 진보된 윤리 체제를 포함하여 강화된다. 유태인의 전통에서 많은 유산을 받은 기독교를 통하여, 유태인의 사고와 가치들이 유럽의 전사 계급에 의하여 지구의 네 모퉁이로 전달된다.
로마의 황제전사들, 예를 들면 저명한 철학자요 도덕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이들은 게르만 민족이 반(半) 문명화되어 마침내 로마제국을 침공하고 계승하여 모든 유럽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 정도로까지 지중해 문명을 오랫동안 보존하였다. 이 다시 쓰여진 유럽의 역사는 15세기 이후로 세계 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스파르타의 소수 집단인 그리스의 뛰어난 전사들은 B.C 480년경 페르시아의 유럽 침공을 막아내어, 막 싹터오르는 유럽의 이상을 구해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미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전사 에너지로 살고 죽었으며, 엄청난 적에(백인 침략자들) 대항하여 자신의 민족을 방어하고, 지독한 고통, 고생을 견디는 능력과 용기를 가지고 숭고한 삶을 살았으며,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이다” 하고 외치며 전장에 뛰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선입견 없는 시선으로 20세기의 위대한 전사들을 바라 볼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그들 가운데, 패튼 장군과 맥아더 장군은 위대한 전략가로서, 위대한 용기를 가지고, 자기 개인의 생존보다 더 큰 목적에 헌신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과 금욕적이고 절제된,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남자들로 일본 국가를 세우고, 그 문화의 유지를 확보하고 오늘날 양복을 입고 전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남자들을 재평가 할 필요가 있다.
전사 에너지는, 그것이 다른 무엇으로 되든지 간에, 우리들 남자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창조하고, 보호하고, 확장해 가는 문명 속에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치명적 요소이며, 모든 인류에게 문화적 성취와 숭고한 인간 덕목의 특권을 확충하는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전사 에너지가 자주 비뚤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럴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하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것이 우리 내부에 실재하는지 자신에게 물어야만 한다. 인간 삶의 진화 속에 전사의 기능은 무엇이며, 개인 남성 심리 안에서 전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전사의 긍정적 자질은 무엇인가? 전사가 우리 남자들의 개인적인 삶과 일에서 우리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성숙한 전사
성숙한 전사의 특성은 삶의 총체적 방식이 되는데, 사무라이들이 하나의 “도(道)”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전사의 다르마, 마아트, 혹은 도(道), 삶을 통과하는 정신적 혹은 심리적 길이다. 공격성이 전사의 특성 중의 하나라고 이미 언급했다. 공격성은 삶에 대한 자세로서, 의식을 일깨우고, 기운을 북돋우며, 동기를 유발한다. 그것은 우리를 떠밀어 공세를 취하고, 수세에서 벗어나게 하며, 혹은 삶의 임무와 문제점들에 대해 “주저하고” 있는 자세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사무라이식 충고는 항상 잠재된 모든 기를, 혹은 “생명력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전투에 “뛰어”드는 것이다. 일본의 무사 전통에 따르면 삶의 전장을 대면하는 위치는 오직 하나이며 그것은 제일 선두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방향은 오직 하나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영화 ‘패튼 장군’의 유명한 시작 장면에서 패튼 장군은 자기 군대에게 사기를 고무하는 연설을 한다. 패튼은 자기 부대에게 전장에서 머뭇거리는 자세에 대해 경고한다. “나는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지 않겠다. 우리는 중단없이 전진한다. 우리는 그 아무 것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적만 빼놓고! 우리는 적의 코에 매달려서 적의 궁둥이를 두들긴다! 언제나 적의 혼쭐을 빼고, 거위 뱃속의 똥처럼, 적들을 뚫고 나간다!” 올바른 상황 하에서의 적절한 공격성은 가까운 목표에 전략적으로 이로운 상황 아래 전투의 반은 이긴 셈이다.
전사를 접한 남자가 상황에 따라 적절한 공격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명확한 사고와 분별력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전사는 항상 경계하고 있다. 그는 항상 깨어 있다. 그는 사는 동안 절대로 잠이 들어 있지 않다. 그는 자기의 마음과 몸을 집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사무라이가 말하는 “명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전통에서는 “사냥꾼”이다. 전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취할 지를 안다. 그의 마음이 명료하게 기능하므로, 그는 전략가이며 모사꾼이다. 그는 그의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으며, “지상의 사정”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그 좋은 예가 게릴라식 전투 현상으로, 고대로 부터 전해 내려 온 것이다. 18세기 이후 그 이용이 훨씬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독립 전쟁에서 반란군 식민 이주자들이 이를 이용했다. 중국의 공산당과 전략의 대가 호지명의 영도 하에 월맹군은 이를 이용하여, 훨씬 어려운 상대인 적을 물리쳐서 놀라운 승리를 쟁취했다. 가장 최근에는 아프가니스탄 지하 반군들이 이 전략을 이용하여 그들의 나라에서 소련군을 몰아냈다. 전사는 언제 자신이 종래의 수단으로 적을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언제 비 정규적인 전략을 채택해야만 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힘과 기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전면 공격이 먹혀들 것 같지 않으면, 적의 공격을 비켜나가, 적의 측면에서 취약점을 찾아낸 다음, 전투로 “뛰어”든다. 여기에 전사와 영웅의 차이가 있다. 영웅에 접한 남자(혹은 소년)은, 이미 말한대로, 자기의 한계를 알지 못한다;자기의 취약성에 대해 낭만적 생각을 갖고 있다. 반면에 전사는 명료한 사고를 통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성경에서 다윗 왕은 사울의 군대의 우월한 힘에 대항하여 일어나지만 처음에는 사울의 군대와 맞부딪치는 것을 회피하며, 사울의 군대가 자신을 추격하느라 지치게 만든다. 다윗과 그의 무리들은 게릴라로서 땅에 의지하여 재빠르게 이동한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한 후 사울의 왕국을 떠나, 팔레스티나 왕에게로 간다. 이 위치에서 다윗은 팔레스티나 군인 수천명을 후원 세력으로 갖게 된다. 사울과 견줄만한 위치에 자신을 갖다 놓았다. 그리고 난 후 당시 상황의 정확한 평가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의 왕국에 다시 들어간다. 자기의 군대를 소집하고, 사울의 멸망을 기다렸다. 때때로 최선의 “전진”은 전술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면도날 같은 판단으로 부터 나오는 전략의 융통성이다.
현대 펜싱은 이런 종류의 융통성을 사용한다. 펜서는 자신의 몸을 훈련할 뿐아니라 마음도 훈련한다. 번개와 같은 속도로 생각하는 법을 익혀서 적의 자세에서 허점을 찾아 공격하고, 공격을 받아 넘기고, 점수를 올린다. 한 젊은 대학생이 펜싱을 한 후에 성적이 올랐다고 보고하였다. 명료하고 신속한 사고로 복잡한 강의에서 주요 주제를 잡아내고, 논쟁의 허점을 파악한 후, 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감과 예민한 시각으로 상대의 말에 도전하며, 자신의 동료학생이나 교수들이 의미있는 말을 하지 않으면, 논쟁을 멈추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알게 되었고, 어떻게 그것을 취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훈련에 부가하여, 전사로 하여금 명철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자각심이다. 모든 무사 전통은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 전사는 생의 짧음과 나약함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전사의 지도 아래 있는 남자는 자기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다. 이러한 자각은 그로 하여금 우울증에 빠지게 하기 보다는 생명력을 쏟아 부어서 다른 사람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강력한 경험을 하도록 이끈다. 모든 행위가 의미가 있다. 매 행동은 마치 마지막이듯 행해진다. 사무라이 무사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처럼 살도록 교육을 받는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로 함께 살게 되면, 오로지 의미있는 행동 외에는 쓸 시간이 없게 된다고 카스타네다의 돈 쥬안은 가르쳤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임박한 죽음에 대한 감각이 사람으로 하여금 결단력 있는 행동을 취하기 위해 전사 에너지를 접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그가 삶에 몰두함을 의미한다. 그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너무 오래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오래 생각하면 의심이 들고, 의심은 망설임으로, 망설임은 무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무행위는 전장에서의 실패로 이어진다. 전사인 남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의식을 회피한다. 그의 행동은 제2의 천성이 된다. 그의 행동들은 무의식적 반사행동이 된다. 그러나 그의 행동들은 굉장한 자기 단련의 훈련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다. 이것이 해병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좋은 해병은 촌각의 결정을 내려 결단력있게 행동한다.
공격력, 명철한 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각과 함께, 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결단력 있는 행동에 필요한 또 다른 부분은 훈련이다. 전사 에너지는 기술, 힘, 정확도, 내적․외적 혹은 심리적 및 육체적 통제력에 관심이 깊다. 전사 에너지는 남자로 하여금 그들의 사고와 느낌과, 말과 행동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도록 훈련시키는데 관심이 깊다. 영웅의 행위와는 달리, 전사의 행위는 절대로 지나치지 않고 극적이지 않다;전사는 자기가 희망하는 만큼 능력있는 자로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행동하는 법이 없다. 전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이상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영화 “황야의 칠인”에서 율 부린너가 맡은 인물은 훈련된 자기 통솔의 연구감이다. 그는 말이 없으며, 약탈자의 육체적 통솔력으로 행동하며, 오로지 원수만을 공격하고, 자기 직업에 요구되는 기술을 완벽히 마스터 했다. 그것은 전사가 기술에 기울이는 관심의 또 다른 면으로, 기술의 연마는 그로 하여금 목표에 도달하도록 한다. 전사는 자신의 결정을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그의 통솔력은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통제한다;만약 마음과 태도가 옳다면, 그의 몸은 따라 올 것이다. 전사 고태형을 접한 남자는 소위 판매 훈련에서 말하는 “긍정적 정신자세”를 갖고 있다. 이것은 그가 무너지지 않는 정신과, 커다란 용기를 가지고 있으며, 두려움이 없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며, 자신을 절제하는 훈련이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절제란 자신의 마음과 육체에 대한 통솔력을 개발할 정열이 있다는 뜻이며, 육체적․심리적 고통을 견뎌낼 능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수고를 기꺼이 감래한다. “수고 없이 얻는 것은 없다”고 우리들은 말한다. 칼라하리 사막에서 추운 이른 아침에 사냥감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때 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리고 있는 문자 그대로의 사냥꾼이든, 삼종 철인 경기 선수이든, 의학도이든, 이사회의 그릇된 공격을 받고있는 기업 간부이든, 아내와의 불화를 극복하려 애쓰는 남편이든, 우리는 우리 마음과 몸을 단련하는 절제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안다.
전사 에너지는 또한 우리가 ‘개인을 뛰어 넘는 헌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여 준다. 그의 충성은 대의, 신, 민족, 임무, 국가와 같이 개인보다 큰 어떤 것에 바쳐진다. 이 ‘개인을 뛰어넘는 헌신’은 전사 에너지의 몇 가지 다른 특성들을 드러낸다. 첫 째로 그것은 모든 인간적 관계를 상대적으로 만든다. 즉 인간적 관계가 “개인을 뛰어넘는 헌신”보다 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전사 에너지를 적절히 접한 남자의 심리는 자기의 중심적 헌신에 따라 조직된다. 이 헌신은 많은 부분의 인간적 소소함을 제거해 버린다. 고상한 이념, 신과 같은 정신적 실재,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유, 혹은 다른 가치있는 개인을 넘어서는 헌신의 빛에 비추어 살면 남자의 인생의 초점이 변하게 되어 소소한 다툼이나 개인적 자아의 염려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대영주의 가신이었던 사무라이에 관한 얘기가 있다. 적대 가문의 남자에게 자신의 영주가 살해되자, 사무라이는 복수를 맹세한다. 오랫동안 암살자를 추적한 후, 수많은 고생과 희생 끝에 그 사무라이는 살인자를 찾아낸다. 그는 그를 죽이기 위해 검을 빼어 든다. 그러나 그 순간 암살자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사무라이는 물러나, 칼집에 칼을 넣고 돌아서서 가버린다. 왜? 그는 침뱉음을 당해서 화가 났기 때문에 물러났다. 그 순간 암살자를 죽이면, 자신의 영주가 대표하는 이념(이상)에 헌신하기 위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화풀이로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형집행이 내부의 전사로 인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와 느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사의 소임에 진실로 충성하기 위해서, 그는 물러나 살인자를 살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므로 전사의 충성심과 그의 의무감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관심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바쳐진다. 영웅의 충성심은 실제로 자신에게 바쳐지는데 자기 자신과 남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런 연관에서도 역시 전사를 접한 사람은 금욕적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과 정 반대되는 삶을 산다. 자신의 개인적 욕구와 소망 혹은 육체적 입맛을 맞추기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을 연마하여 능률적인 정신적 도구로 만들고, 개인을 넘어서는 목적에 봉사하기 위하여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는 훈련을 한다. 위대한 신앙, 기독교와 불교의 창시자들의 전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는 황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야 했으며, 부처는 보리수 밑에서 세 가지 유혹을 견뎌내야 됐었다. 이들은 정신적 전사들이다.
정신적 전사들은 역사 속에 풍부하다. 이슬람교는 전체적으로 전사 에너지 위에 세워졌다. 모하메드는 전사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규정한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성전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사 에너지를 끌어내고 있다. 이슬람의 신은 비록 “자비로운 분”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분”이라고 불리움에도 불구하고 전사 신이다.
똑같은 전사 에너지가 기독교의 예수회에서도 분명히 보이는데, 전 세계 곳곳의 가장 위험하고 적대적인 지역으로 신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자기 부정을 가르쳐 오고 있다. 전사인 남자는 자신의 대의, 신, 문명, 죽음에게 조차 자신을 헌신한다.
개인을 넘어서는 이상, 혹은 목표에 자기를 죽이기 까지 하는 헌신은 전사의 또 다른 특성으로 남자를 인도한다. 그는 자신이 전사인 한 정서적으로 냉정하다. 성숙한 전사에 접한 남자가 잔인하다는 뜻이 아니며, 단지 그는 자신의 이상을 제하고는 그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도 감정적 연계로 인하여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 그는 돈 쥬안이 말한대로 “이용되지 않으며” 혹은 “접근하기 어렵다”.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것은 자기 주위의 사물을 인색하게 정서적으로 유리되어 대한다는 뜻이다. 이 태도는 전사의 명철한 사고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임무와 결정과, 행동을 감정없이 냉정하게 바라본다. 사무라이 훈련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심리적 단련이 들어있다. 교육 중에 두려움이 들거나 낙담하였을 때, “나는 두렵습니다” 혹은 “나는 낙담하였습니다”하고 말하지 않고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낙담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하고 말한다. 위협적인 상황을 냉담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상황을 객관화시키고, 좀 더 자신의 느낌에 대해 부담을 덜 느끼면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그는 좀 더 강력하게, 신속하게, 그리고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능률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살다보면, 어떤 상황으로부터 “물러 설” 필요가 있을 때가 자주 발생한다. 그럼으로써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고 행동할 수 있다. 전사는 자신의 검을 휘두를 여유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는 바깥 세계에서는 적으로 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으며, 내부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다. 링 안에 있는 권투 선수들이 너무 밀착되어, 몸으로 뒤엉키게 되면 심판이 떼어 놓는다.
전사는 왕왕 파괴자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전사 에너지는 파괴될 필요가 있는 것만을 파괴하며, 무언가 새롭고, 신선하고, 살아있으며, 좀 더 덕성스러운 것이 나타나게 한다. 이 세상에는 파괴되야 할 것이 많이 있다. 부패, 독재, 억압, 불의, 정부의 쇠락한 독주체제, 회사 실적에 방해가 되는 기업 고위층, 충실치 않은 생활 방식과 고용 상황, 불행한 결혼 등. 그리고 파괴 행위 가운데에서 왕왕이 전사 에너지는 인류를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상업적, 예술적, 정신적 모험을 시도한다.
전사 에너지가 다른 성숙한 남성 에너지들과 연결될 때, 진실로 훌륭한 것이 태어난다. 전사가 왕과 연결될 때, 이 힘들을 접한 남자는 의식적으로 “왕국”을 관리하며, 그의 결단력 있는 행동, 명철한 사고, 절제, 용기는 실제로 창조적이고 생성적이 된다. 역사상 이 순간에 있어서 소비에트 체제의 타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전사이며 왕인 미하일 고르바쵸프를 생각해 보면 된다. 중앙에 서서 낡고 무능한 것과 전쟁을 벌이는 고르비가, 두 성숙한 에너지와 접속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지도력이 없이는 절대로 새로운 시대를 직면할 용기가 없는 국민들을 인도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술사 고태형과 전사의 접촉은 남자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의 “무기”에 대한 숙달과 통솔력을 성취하도록 한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힘을 조달하고 방향제시를 하도록 한다.
전사 에너지와 연인 에너지의 혼합은 전사에게 연민과 모든 사물과의 연결감을 준다. 연인은 남자로 하여금 모든 인간들과 그들의 약함과 취약성 안에서 연결되도록 하는 남성 에너지이다. 연인은 전사의 영향 하에 있는 남자가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동시에 인정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베트콩 마을에 포격을 퍼부은 후, 아이들을 등에 업어 나르고 부상한 적들에게 제일 먼저 구조활동을 벌이는 미국 군인들의 모습에서 이런 이미지를 볼 수 있다. 또 영화 「금속조끼」에서 베트콩 저격병을 쫓던 미군은 마침내 그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는데, 잡고 보니 자신의 동료들을 살해한 그는 여자였다. 미군 중 한 명은 몇 분 전의 적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여자 베트콩은 고통 속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고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을 쏘아,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미군은 그녀가 고통스럽게 죽게 놔두고 싶은 마음과 그녀를 도와 고통을 끝내주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그는 그녀를 쏜다. 화풀이가 아니라 동정심에 의해서다.
연인과의 동맹은 전사 에너지에게 다른 인간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자였다. 윈스턴 처칠은 화가였다. 일본의 예술가 전사 미쉬마는 시인이었다. 패튼 장군도 시인이었다;패튼 장군은 고대 북아프리카의 전쟁터에서 브래들리 장군에게 자신의 시를 읖는다. 그 곳은 이천년 전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인들을 물리쳤던 곳이다. 패튼 장군은 그의 시에서 자신이 이천년전 그 곳에 있었으며 싸움에 참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타 다른 고태형과 접속됨이 없이 전사가 혼자 움직일 때는 긍정적인 전사(성숙한 전사)를 접한 남자일지라도 그 결과는 재앙적이 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순수한 형태의 전사는 정서적으로 냉담하다;그의 초개인적인 충성심은 남자의 인간 관계를 철저하게 상대화한다. 이것은 전사의 여자에 대한 태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전사에게 여자들은 관계를 맺거나,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태도는 군대 주위에 창녀들이 창궐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또한 정복자가 여인들을 강간하는 끔직한 전통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가정이 있음에도, 전사의 의무에 대한 헌신은 결혼생활에 문제를 야기시킨다. 외롭게 버려진 군인 아내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두고두고 보는 예이다.
똑같은 일이 군대 밖에서도 일어나는데, 오랜 근무 시간과 자기 희생, 그리고 상당한 헌신을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남자들의 가정과 인간 관계에서 볼 수 있다. 목사, 의사, 변호사, 정치가, 헌신적인 판매원들은 왕왕 정서적으로 황폐된 개인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아내와 여자 친구들은 자주 소외되고 거부된 느낌을 받으며, 남자의 “진정한 사랑”인 일과 가망없는 경쟁을 벌인다. 게다가, 이러한 남자들은 전사의 성적 태도에 충실하게도, 그들의 보조 간호사, 사무원, 비서 그리고 안전한 거리를 두고서 남자 전사들의 능력과 헌신을 흠모하는 여인들과 성적 관계를 맺는다.
Nicholas Gunn - Daybreak at Timp Poi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