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서 장하 치명한 하느님의 종 구한선 타대오의 묘
구한선(具漢善, 1844~1866, 타대오)은 1843년 경남 함안 미나리골의 중인 계급 출신으로 출생하였으며 신심이 돈독하고 믿음에 충실해 1866년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 활동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그해 진주 포교에게 잡힌 그는 인정사정 두지 않는 혹독한 매를 맞고 겨우 풀려나왔다. 하지만 장독으로 풀려나온 지 불과 7일 만인 1866년 2월 27일에 선종하였다. 그의 순교는 장하치명(杖下致命)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나리골은 현재의 경남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다. 이곳은 남강 하류로 늪지대였고 낙동강을 만나는 지점과 가까웠다. 여름이면 넘치는 물 때문에 살기를 꺼려했고 미나리꽝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높은 둑을 쌓아 옛날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구 타대오는 피난 교우의 후손이었다. 하기리에서 남강을 건너면 의령군 동부 지역이다. 이곳의 유곡면과 지정면에는 오래된 교우촌이 있었다. 훗날 덕천 성당 공소의 모체다. 그의 가족은 이 지역에서 대산 쪽으로 건너왔을 것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능성 구(具)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가 언제 누구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 입교 영세했는지는 잘 모르나. 1866년 병인박해 전에 경상도 남부 지역 담임이던 리델(李)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 활동을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던 그해 봄에 리델 신부와 전교를 마치고 서로 헤어져, 신부는 대구를 거쳐 충청도 공주 ‘진밭’ 본댁으로 가고, 타대오는 진주 본집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진주 포교에게 잡혀 매를 많이 맞고 다행히 석방되었으나, 7일 만에 결국 매 맞은 상처로 말미암아 23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리델 신부의 상무 복사가 아니고 지역적 전교지의 임시 복사였던 것이다.
구 타대오는 선종 후 대산면 하기리 새대(新垈) 마을 입구 신(愼)씨들 묘소 내 구석진 곳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이 박해 때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묘를 확인하게 된 것은 함안 본당 대산리 공소 회장인 윤 바오로가 구 타대오의 처조카인 최성순을 통해 그의 묘가 “신(愼)씨라는 사람의 묘벌 안에 있다.”는 증언과 관내 대산면 하기리에 사는 한 노인의 증언, 즉 “신(愼)씨 묘소 안에 진주 옥에서 풀려나와 그 장독으로 죽은 사람의 묘가 있다.”고 하는 말과 완전히 일치하여 신씨 묘소를 살펴본 결과, 신씨네 묘 우측에서 봉분이 거의 없어진 묘를 발견하게 되었고 발굴 결과 구 타대오의 묘소임을 확인했다. 순교자의 묘는 1976년 9월 현재 장소로 이전하였고, 2002년 5월 성역화 작업을 실시하였다.
▒ 리델(Ridel, Felix Clair, 李福明, 1830~1884, 펠릭스) 주교
리델 주교는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이다. 1861년 3월 31일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충청도 공주의 진밧 지방을 맡아 전교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병인박해로 두 주교와 5명의 동료 신부를 잃게 되었으나 리델 신부는 다행히도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가 있었다.이에 살아남은 리델 신부는 1866년 7월 7일 중국 치푸에 도착해서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를 만나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를 구출코자 로즈 제독은 3척의 군함을 이끌고 9월 20일 인천 앞바다에 이르니 이것을 병인양요라 일컫는다.1869년 6월 25일 조선교구의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을 떠난 지 11년, 주교로 임명된 지 8년 만에 서울에 들어온 주교는 감시의 눈을 피해 가면서 전교에 전심하였다.
■ 순교자
◆ 복자 구한선 타데오(1844∼1866년)
구한선 타데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 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글을 많이 읽었는데,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 즉시 이를 받아들여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거제도 전교에 동행한 적도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였다.
타데오의 글을 읽은 그 부인은 관장에게 그를 석방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이 말을 들은 관장은 화가 나서 그를 옥에서 끌어내도록 하여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다. 이처럼 모진 형벌을 당한 뒤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그 형벌로 인해 7일 만에 선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는 ‘품’(品)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고향 인근에 안장하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