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이라는 책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총사령관격인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이 7년 전란을 온몸으로 겪은 후 집필한 전란의 기록이다. 누구보다 전란의 참혹함과 그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국정 책임자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미리 자강하여 환란을 경계해야한다는 메시지를 후세에 전하고자 피눈물로 쓴 기록이다.
지난 주 50회로 막을 내린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은 류성룡의 책을 토대로 했다.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벌어지는 당대인들의 고뇌와 잘못된 판단, 그리고 극복의 의지를 그려낸 드라마였다. 역사의 과오를 꾸짖고(徵) 미래의 위기에 대비(毖)하는 지혜와 통찰을 구한다는 게 기획의도였다.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한 고민을 돌아보게 했다.
| | | 사진 출처 = KBS 홈페이지 |
대하 사극은 대개 굵직한 영웅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잘 알려진 시대를 다룰수록 영웅과 악인의 대비가 선명해지곤 한다. 그런데 드라마 '징비록'의 진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책이다. 책을 통해 후손에게 전하는 교훈과 지혜가 주요 내용이다. 특정 영웅이 아니라 한 시대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이야기인 셈이다. 심지어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조차 당시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명량해전과 노량해전도 그저 기나긴 전쟁의 힘겨운 마무리 정도로 좀 냉정하게 바라보게 했다. 명량해전이나 노량해전을 이토록 흥분하지 않고 ‘한 사건’으로 지켜보게 했던 방식이 사실 드라마 '징비록'의 기획의도에는 맞았다. '징비록'은 영웅 한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한 시대 전체를 놓고 들여다보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수많은 배우들이 혼신을 다해 연기한 우리 선조들의 얼굴이 곧 우리의 얼굴이기도 했다. 너무나 많은 인간 군상들의 각축전을 보는 재미는 언제나 대하 사극의 가장 큰 재미이기도 하다.
| | | ▲ 서애 류성룡.(김상중 분).(사진 출처 = KBS 홈페이지) |
시청자들은 아마 "징비록"이라는 책이 서사의 바탕이 되는 방식을 기대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은 우리가 분명 ‘승전’했는데도, 우리는 왜 그 뒤 내내 그토록 비참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는가도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이었다. 정통사극이냐 아니냐 보다는, 얼마나 넓고 깊고 다양하게 그 시대를 그려내는가가 중요했다. 한두 사람의 힘이나 지략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역사적 비극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고, 그 당시에 과연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되짚으면서, 지금 우리의 시대와도 자연스레 비교하는 자체가 ‘징비’일 수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면서 시청자 스스로가 관점을 갖고 시청하게 했던 측면도 있다.
그런데 류성룡(김상중 분)을 독자적으로 '주인공'으로 삼기에는 극화에도 여러 가지 고민이 뒤따른다. 요즘 시청자가 생각하기에는 ‘영웅’도 아니고, 재상을 지냈으나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생소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을 정도다.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에피소드도 적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김석훈 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아마도 드라마를 만들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함부로 부각시킬 수도,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딜레마였다. 시청자는 이순신의 등장을 고대하는데, 이순신이 등장하는 순간 류성룡과 징비록은 사라지고 ‘난중일기’가 될 우려가 높았다. 서애가 남긴 징비의 비책은 곧 이순신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전에 미리 대비하고 마련해 둔 비책이 있었다면 이순신이라는 장수를 발탁한 일이다. 류성룡과 징비록을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선의 관료제도가 키운 인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말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보는 게 나을 정도다. 류성룡의 책 "징비록"에도 승전의 첫 번째 이유로 꼽은 것은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했다. 어쩌면 왜 우리가 이겼는지 모른다는 뜻일 수도 있다. 승전의 이유로 꼽은 나머지 두 가지 이유 또한, 당대 여느 유학자처럼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들이라 사실 교훈이랄 수도 없다. 얼마 뒤의 병자호란에 대한 대비도 될 수 없었다.
| | | ▲ 선조.(김태우 분)(사진 출처 = KBS 홈페이지) |
기획의도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애시당초 시청률을 포기해야 하는 드라마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도 사건도 아닌 "징비록"이라는 책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는, 흔한 드라마의 방식은 피하는 게 맞았다. 영웅과 악인의 대결, 선한 영웅에 대한 감정이입 등을 빼야 되는데, 시청률 또한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조(김태우 분)와 류성룡이라는 명확한 대립관계, 류성룡은 뭘 해도 올바르다는 식의 전개가 있어야 극적 긴장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새로운 시도가 기대되면서도 우려했던 부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대립 관계'쪽으로 기울었다. 책을 살리려면 영웅이든 악당이든 사람은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더 지루하고 딱딱한 편년체 역사 기술 같은 진중함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성우 김도현 씨가 맡았던 해설 부분도, 정말 책의 한 부분을 읽는 것처럼 배치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데 현실적으로 50회의 긴 이야기를 그렇게 끌고 가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서애 류성룡이 극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그 혼자 시대를 거스르는 영웅으로 거듭나야 하는 과중한 부담까지 졌다. 뒤로 갈수록, '징비'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특정 '사람'이고, 왕과 류성룡이 서로를 경계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 책이 후손인 우리에게 전하는 국난에 대한 진정한 '징비'의 교훈이 좀 더 절실하게 와 닿지 못한 점은 아쉽다. "징비록"이 진정 피로 쓴 피눈물 나는 전쟁 이야기라는 것만은, 우리가 언제나 뼈아프게 새겨야 할 진실이고 현실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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