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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시설장애인자립생활지원네트워크는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살던 장애인이 탈시설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도록 지원하는 주거복지사업을 지난 2010년부터 3년 동안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2일 이번 사업을 마무리하는 보고대회를 열고 이날 총 16명의 자립생활 과정을 생생히 담은 인터뷰집 '나 자립했다'를 발간했다. 이번 책에 실린 이들의 인터뷰를 연재한다. _ 편집자 주 |
아름다운 한때는 지금. here and now(여기 그리고 지금)
그녀는 원룸아파트에서 경남 씨와 함께 생활한다. 겨울비 내리는 날, 역시나 그녀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날씨 탓인지 날개를 이야기하던 그 여름의 생기발랄함이 촉촉이 젖어 있는 듯했다. 경남 씨는 깍두기공책을 펼치고 한글 공부를 하고 희영 씨는 전국노래자랑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은 시간이 멈추는 날이다.
“자립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날개?’ 자유의 의미이기도 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요. 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그런 거요.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고 해보고 싶은 것을 하나씩 할 수 있는 가능성.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녀는 자립생활 이후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졌다.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시설에 갇혀 지낼 때는 계절의 변화가 그리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이제는 달라졌다. 여름에는 햇볕 쨍쨍한 한낮이 두렵고, 겨울엔 꽁꽁 얼어버리는 발을 어쩌지 못해 난감하다. 하루가 다르게 근육의 힘은 없어지고 홀로 외출할 때 운전대를 놓치는 손 때문에 당황스러운 때가 있다.
물론 그때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난관을 극복해왔지만 말이다. 도움받는 그녀만의 노하우라면, 관상이다.
젊고 예쁜 아가씨, 여학생, 청년 등에게 도움을 청하면 거의 대부분 친절하게 도와준단다. 하지만 홀로 이동할 때 가장 난감한 것은 무엇보다 용변의 문제. 1주일에 1~2회 관장을 하기 때문에 자주 겪지는 않지만, 집회에 참여했다가 용변문제로 집으로 가야 하는 상황은 말하기도 쉽지 않고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그렇게 자립생활은 계절과 용변에 맞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사회적 편견, 이동권 등 정책적 과제 등 고차원적 이야기를 예상했으나 우리는 삶의 저차원적 이야기로 수다를 열었다.
“로또에 당첨된 기분? 원룸아파트 계약이 이달 말까지인데 그 시기에 맞춰서 저랑 경남이랑 모두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한곳은 너무 멀어서 길음 쪽으로 가기로 했지요. 주거문제로 걱정했는데 이렇게 행운을 잡다니. 너무 좋아요.”
욕실이 너무 작아서 누워서 목욕할 수 없는 것 빼고는 임대아파트가 맘에 든다고 한다. 하나씩 꿈을 이뤄가는 그녀에게 행복은 뭘까?
“행복요? 인생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시설에서 나오기 바로 전에 전 남편이 왔었어요. 저는 끝까지 자립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요. 걱정 끼치고 싶지도 않았고. 부담 주기도 싫었어요. 딸이 보고 싶기도 하지만 아직 아이가 어려서 이해할 수 없을 거 같기도 하고. 들쑤시고 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 지금이 좋아요. 아직 만날 마음이 없어요. 서로 안 보면 무뎌지고 그러면 그냥 잘 지내려니 생각하고 사는 거죠. 일 년에 한두 번 엄마를 만나러 고향에도 간답니다. 고향이 홍천인데 가장 가까운 역까지 기차를 타고 움직인답니다. 그러면 엄마가 마중을 나와 있어요. 이동문제 때문에 집까지 가지는 못하지만 엄마랑 2~3시간 동안 만나고 돌아와요. 시설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죠. 내가 이렇게 홀로 엄마를 만나러 지방까지 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이에요. 엄마도 이렇게 살고 있는 저를 보며 안심하시죠. 이런 날들이 좋아요. 딱,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꿈이 현실로, 연극배우가 되다
장희영. 그녀는 장애인 극단 ‘판’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잠시 쉬는 중이다. 자립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한 일이 장애인 극단에 가서 면접을 본 일이라고 한다.
“다른 인물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시설에 있을 때도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다른 이미지, 다른 인물로 사는 일은 매력적이에요. 여러 가지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배우는 가난해요. 돈이 안 돼 돈이…. 하하하. 돈이 팍팍 들어오면 좋은데. 아직은 힘들어요. 거의 조금의 활동비 정도만 나옵니다. 그래도 저는 연극을 너무 좋아하니까요.”
연극배우를 꿈꾸었고 자립생활하면서 연극배우가 됐지만 지금은 쉬는 중이다.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뇌성마비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근이양증 판정을 받았다. 지난겨울, 정기공연이 있었는데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손이 얼면 전동휠체어 운전대 컨트롤이 되지 않아서 움직이기도 쉽지 않은데 공연 전에 매일 연습을 해야 하니까 엄청난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연극을 잠시 쉬기로 했다. 의지가 체력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섭섭해요. 작년만 해도 내가 운전을 해서 공연연습에 나가곤 했는데 올해는 힘들 거 같아요. 몸이 점점 나빠져요. 그래서 고민 끝에 쉰다고 이야기했는데. 뭔가 내 자리를 잃어버린 느낌 약간은 섭섭하지. 체력이 가장 걱정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쉰다고 했는데 영영 쉬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도 들고. 근데 노는 것도 힘드네? 하하하…”
그녀는 전국순회공연하던 때를 추억하며 정말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눈은 반짝였다.
“연극 덕분에 전국을 찍고 다닌 적도 있었어요. 공연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대표님께 연락이 왔어요. 빨리 오라고. 연습해야 한다고. 이게 뭔 일일까 싶어서 부랴부랴 갔었어요. 그냥 갑작스레 연습 한 달도 안 되어 공연했는데 군산에도 가고 양양도 가고 듣도 보도 못한 부안, 목포 찍고 제주도까지 날아갔다 왔어요. 뭔 일일까 싶기도 하고 이젠 진짜 나한테 벌어진 일인가 싶기도 하고. 10년 동안 갔다 올까 말까 할 거리를 한 달 동안 다 돌아다녔거든요. 지금은 진짜 너무 후유증이 커요.”
연극을 이야기하면 여지없이 생기가 돈다. 그러나 점점 나빠지는 체력 때문에 영영 연극을 쉬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도 숨길 수 없다. 그녀는 길음으로 이사하면 재활치료나 물리치료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순조롭게 흘러가 준다면 오죽 좋겠느냐만은 생각지도 않은 걸림돌 때문에 쉬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지 않는가. 지금은 잠시 쉬는 시간, 그녀는 자립생활에 적응하고 사회생활 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몸을 돌보고자 한다. 그녀가 다시 무대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
그녀의 성장, 낙관의 밑거름은 ‘내공’
짧은 시간이나마 그녀와 함께 있으면 5분 안에 빵 터진다. 분명치 않은 발음은 뇌성마비 장애의 기본 장벽임에도 그녀는 말을 갖고 노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궁금했다. 수선스럽지 않은 열정과 꾸미지 않는 낙관. 그것은 ‘역경’이나 ‘고난’을 딛고 넘어선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내공이다. 난 그녀의 내공이 궁금했다.
“나는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잖아요. 걸어 다녀도 봤고, 결혼도 해봤고, 아이도 낳아봤고, 일반 학교도 다녀봤고, 이혼도…. 시설에도 있어봤고. 그래서 그럴까요? 뭐랄까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해봐서 그런가?”
그녀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1살을 살아오면서 많은 고비를 겪어왔다.
그녀는 어려서 장애인임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았다. 홍천의 농가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도 듬뿍 받고 살았다. 학교에 들어가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저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공부도 웬만큼 했고. 시험 때가 되면 악착같이 밤새워가며 시험 준비도 했지요. 중학교 때까지 시골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혼자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저는 그때도 장애가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이렇지만 그때만 해도 괜찮았어요.”
“어렸을 때 6살 때까지는 엄마 등에 업혀서 지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걸어 다닐 수 있었어요. 집안일도 거들었으니까요. 시골에서 부모님께서 농사짓고 힘드시니까 밥도 해놓고 청소도 했어요. 고등학교 때는 이모님 댁에서 살았는데…. 아 참, 저희 집은 아주 시골이라 중학교까지밖에 없어서 고등학교는 시내로 나가야 했어요. 이모님 댁에서 생활하면서 이모님 일을 도와드리며 학교에 다녔어요.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었지만 괜찮았어요.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하고 싶었어요. 부모님께 죄송해서 돈을 벌고 싶었지요. 결정적인 것은 오빠 때문이기도 해요. 오빠가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고 군 면제를 받게 됐어요. 허리랑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지팡이를 써서 걸어 다닐 정도였어요. 가족이 아프다 보니 가정불화가 생기고 그게 너무 싫어서 빨리 나오고 싶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자발적으로 독립을 결심했고 일산의 직업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웠다. 장애로 인해 컴퓨터로 사회생활을 하기는 힘들어서 국립재활원에서 양재를 배웠다. 양재를 배우고 일하면서 그녀는 인생의 항로를 돌리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사랑, 신파를 걷어낸 담담한 추억
사람은 살면서 관계를 통해 삶이 변화하고 성장하게 된다. 한 남자를 만나고, 그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 것.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따뜻한 사람이죠.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일산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웠어요. 그리고 국립재활원에서 1년 코스로 양재과를 다니게 되었는데 섬유관련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의류 관련 회사에 다니던 그 사람은 정기적으로 공장을 방문하게 되었고 저는 자연스럽게 그와 여러 가지 사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말이 잘 통하는 남자였지요. 그게 사랑인지 잘 몰랐지만, 왠지 자꾸 그가 기다려졌어요. 그가 언제나 올까 기다리게 되고 그가 오면 기분이 좋았어요. 그는 아주 친절했어요. 저를 잘 이해해주었지요. 저는 하루빨리 그와 가정을 꾸리고 싶었어요. 지루하고 힘든 생활이 별로였거든요. 그리고 재단 일을 도와주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그와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숟가락만 들고 오라고… 부모님 반대가 무척 심했지만 우리는 결혼에 골인했어요.”
그녀는 행복했다. 남편은 비디오 가게를 하면서 열심히 생활했고 부지런한 성격의 그녀는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나갔다. 별로 싸우지도 않고 금실 좋게 살다 보니 아이도 태어났다.
“아이 생각만 하면 미안해요. 잘해주지 못해서. 그때는 제가 어렸었나 봐요. 저는 임신하게 되었고 아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서 몸이 더욱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직장도 그만두게 되었지요. 병원에서는 신경성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혹시 오빠처럼 근육병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힘이 점점 빠지고 걷기도 힘들었어요.”
그녀의 몸은 출산하면서 더욱 나빠졌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데 이유식도 만들어주기 힘들고 아이가 위험할 때 번쩍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남편은 퇴근하고 다시 희영 씨와 아이를 돌봐야 했고 자존심 강한 희영 씨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게 힘들어서 남편에게 짜증도 많이 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되게 미안해요. 마음처럼 몸이 따르지 않으니 화가 나고 짜증도 많이 났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무기력해지고요. 결혼했으면 살림도 해야 하고 아이도 돌봐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제가 남편이나 아이에게 피해만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제 뜻대로 몸도 안 움직이고, 자꾸 이런 상황이 짜증이 나서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어요. 남편이 힘들다는 생각도 그때는 못했어요. 그래서 남편과 싸움도 많이 했어요. 자꾸 남편이 섭섭해지고, 아이가 울고 떼쓰면 힘들어서 저도 화내고 소리 지르고 그때는 참 힘들었어요. 그때는 왜 이렇게 자존심이 셌는지 몰라.”
그녀는 남편과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가 싶어서 시설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때는 시설생활이 어떤지 짐작도 못 했고 그냥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게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렇게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에서 시설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시설행, 엄마에서 시설장애인으로
“저는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장애가 심해지면서 짐이 되는 것도 싫고 해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설에 보내달라고 부탁했어요. 남편이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제가 워낙 고집스럽게 시설에 가겠다고 하니까 보내줬어요. 저는 그때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렸어요. 제 꿈이 현모양처인데 알콩달콩 살고자 하는 꿈이 다 깨진 거죠. 그냥 시설에서 인생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은 저를 시설로 보내는 것을 힘들어했어요.”
그녀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이를 생각해서 스스로 시설행을 선택했지만 사실 자신을 위해서도 시설행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설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참, 너무 비인간적이더군요. 지적장애인이 많은 시설이었는데 먹는 것도 장애인을 대하는 사회복지사도 봉사자도 비인간적이었어요. 내가 살던 시설은 요양원이었는데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하나같이 짧게 잘려 있고 남자는 파랑, 여자는 분홍색, 똑같은 나일론 추리닝을 입고 있더라고요. 생각보다 충격이었어요. 제가 간 곳은 철원에 있는 요양원이었는데 머리도 그렇고 단체복 입혀놓은 것도 그렇고 직원들 편한 데로 만들어놓은 것 같았어요. 이렇게 처박혀 살아야 한다니 절망했지요. 그리고 15년 정도 살았는데 돌아보니 너무 외로웠던 기억밖에는, 기억이 별로 없어요. 왜 이렇게 빨리 세월이 지나갔지?”
정기적으로 남편은 면회를 왔다. 그러나 그녀는 사무치는 외로움과 비인권적인 시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와 남편이 편안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냥 잘 지낸다고만 이야기했다는 것. 아주 좋고, 괜찮다고, 가끔 찾아오는 남편에게 아이 소식을 들으며 시설의 힘겨움과 외로움을 견디는 수밖에…
그러나 남편의 면회는 뜸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나서 같이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직접 찾아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남편이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희영 씨. 원망스러웠던 순간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잘됐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그래도 그때를 생각하면 갇혀 지내는 육체적 고통보다는 심정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저는 천장만 보며 누워만 있는 자신이 두려웠어요. 이렇게 삶을 마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무섭기도 했지요. 그러던 중에 시설 안에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점점 새로운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남은 인생 더 늦기 전에 도전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그 두려움은 우연히 본 TV 프로에서 자립생활을 하는 장애인 소식을 들으면서 희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누워만 있다가 죽을 수는 없지.”
시설에서 지역사회의 구성원 장희영으로 살다
역전만루홈런이란 말 들어봤니?
맞아. 누구나 짜릿한 역전 드라마를 꿈꾸지 않니? 1루 2루 3루 그리고 홈
담을 넘으면 홈에서 일루 이루 삼루를 지나 다시 홈으로 돌아와 일 점을 획득하는데 바로 홈런,
투아웃 세이브
여기서 홈런을 때리면 역전인데 과연 역전의 드라마를 써낼 수 있을까요?
○○○선수. ○○○선수 담장, 담장, 담장 넘겼습니다.
홈런, 홈런, 홈런, 만루홈런 공포의 외인구단 10:9로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 짓습니다.
지난 10월, 내 안의 역사쓰기 프로그램 ‘화양연화’ 행사에서 희영 씨는 역전만루홈런이라는 짧은 연극을 선보였다. 홈런, 홈런을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행사장을 울렸고. 다시 꿈을 가지라고 관중에게 재촉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그리고 객석에 있는 우리에게 소리친 것이다. 홈런이라고.
홈런은 타석에 서기까지의 도전이 필요하고 용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녀의 도전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시설에서 만난 사람들이 하나 둘 시설을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서도 자립생활하는 사람이 나오고 스스로 독립해서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았어요. 그러다가 장애인 인권단체를 알게 되었고 주거지원사업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어요. 시설 안에서는 꿈을 갖기가 힘들어요. 시설은 자신의 권한이 너무 제한되어 있어서 싫었어요. 맨날 도와주는 사람에게 내 몸을 맡기고 편안하게만 생활하는데 익숙해졌지요.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무섭고 두려웠지요. 아! 이렇게 인생이 끝나는구나. 그리고 나 자신이 너무 불쌍했어요. 어렸을 때는 공부도 곧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살아오면서 학교, 직장, 결혼, 육아 등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져왔듯이 자립생활 또한 자신이 선택하고 준비했다. 비인권적인 시설의 행태보다도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타인에게 맡겨진 삶이었다. 내 삶이 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던 시설에서의 삶에서 탈출해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
“시설이 아닌 곳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자유롭게 문화생활도 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내가 내 삶을 사는 거죠. 내 맘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녀는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성격을 고치고 싶어했다. 자신을 개방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도 사귀지 못했다고 한다. 누구나 갖고 있는 낯가림을 기피증이라고 표현하다니,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구가 큰 친구(공교롭게도 장희영 씨와 나는 동갑내기다)구나 싶었다.
“말해버리면 별거 아닌데 사람들에게 다가가기가 힘들어요. 조금씩 바꾸려고 하고 있어요. 이렇게 편한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데 안 그러면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해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어요. 편하게. 지금은 좀 나아졌지요.”
그녀는 자신을 개방하고 유연하게 살고자 한다. 이미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은 걸 보면 이미 마음의 벽을 허문 것은 아닌지.
이제 그녀는 좋아질 일만 남았다. 집도 생겼고, 이젠 그 집에서 안정적으로 몸을 관리하고 자립생활을 하는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자립생활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친구들을 위해 할 일이 남아 있다.
“사실, 장애인 인권운동에 생각만큼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어요. 체력적으로 힘들고. 대인기피도 있고요. 몸이 안 좋아서 6시 이후에는 무조건 집에 와야 할 정도예요, 체력이 좋아지면 연극도 다시 하고 운동에도 참여해야죠.”
희영 씨는 하루에 8시간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나눠서 시간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함께 생활하는 경남 씨 치과 진료를 받을 때 일이다. 입을 벌리지 않아서 경남 씨 치료가 어려워지자 동부시립병원에서 서류를 떼어 와야 했다. 경남 씨 옆에 활동보조인을 있게 하고 혼자서 병원에 가서 서류를 떼어와야 했는데 이동하는데 많이 두려웠다고 한다. 휠체어 운전하다가 손이라도 떨어지는 날엔…
자립생활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그녀는 월 100시간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하루 24시간 중 3시간만 쓸 수 있었다는 것. 그 3시간은 시장 한번 다녀오고 목욕 한 번 하면 끝나는 시간이다. 나머지 21시간은 꼼짝없이 누워 지내야 할 상황인 것이다. 혼자 문지방을 넘기도 힘든 상태에서 고작 3시간이라니…
“24시간 활동보조가 가능했으면 좋겠어요. 자립생활을 하더라도 활동보조를 받을 수 없으면 항상 위험하거든요. 먹고 싸고 씻고 하는 것도 힘들지만 불이라도 나는 날엔… 목숨 거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수급비(현금급여)도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임대아파트 들어가면 월 관리비만 13만 원 정도 내야 하고, 물가는 오르고 걱정이에요. 지난번엔 경남이 겨울옷을 사주려고 동대문에 나갔는데 옷값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 두 가지만 바뀌어도 좋을 텐데…”
어느덧 그녀와 장애인 정책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고, 자립생활은 장애인 정책과 떼려야 뗄 수 없고 장애인 정책은 투쟁과 맞닿아 있다. 이사 후에 체력을 회복하고 그녀의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 다시 연극을 시작하고, 그녀의 삶이 보통스러운 삶이 되기 위해 장애인 정책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실하다.
“처음 자립생활을 시작하면서 멘토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연결해서 멘토하고 주민센터도 같이 가고 은행도 갔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신청도 해야 하고 통장도 개설해야 하니까. 그리고 재활의학과 가서 전동휠체어 신청해서 휠체어도 받았어요. 사실 시설에 있을 때는 자립생활센터가 뭔지도 몰랐는데. 자립생활에 필요한 부분을 하나하나 연결해주더라고요. 자립생활센터가 있다는 것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에서 알려주었어요. 장애인이 처음 자립생활을 할 때는 장애인인권단체와 그 지역의 자립생활센터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예요.”
하지만 장애인자립정책 관련해서 세심하게 안전망을 촘촘히 만들 필요는 있다. 활동보조시간이 너무 적다 보니 황당한 경험도 했다고 한다.
“경남이랑 나갔다가 집에 오는데 집에 못 들어갈 뻔 했어요. 경남이는 당시 숫자를 몰랐는데 우리 집은 번호키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었어요. 내가 0을 누르라고 하는데 경남이는 0을 찾지 못해서 번호키를 못 눌렀지요. 그래서 바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해서 들어갔어요. 경비아저씨는 남자니까 혹시 위험할 수도 있어서 지나가는 연인한테 도와줄 수 있냐고 해서 응해주더라고. 같이 와서 0을 눌러주고 갔어요.”
꼼짝없이 바깥에서 노숙할 뻔한 아찔한 사건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님이 반찬을 해오셨다고 한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경비실에 맡기고 가겠다고 해서 와보니까 반찬이 없어진 것.
“전도사님이 경비실에 맡기려고 하니까 안 받아서. 앞에다 놓고 가라고 했는데 그게 감쪽같이 없어진 거야. 청소 아주머니는 그 반찬 통을 봤다고 하는데 아직도 미스터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