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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머리말 Ⅱ. 출생과 국내활동 Ⅲ. 망명과 대종교 활동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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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대종교는 구한말 국가와 민족의 멸망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구국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탄생된 민족종교이며, 민족의 시조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내세움으로써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대종교가 그동안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점은 많은 궁금증을 낳게 하였다. 하지만, 이번 과제를 준비하면서 그 의문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다.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인한 일제의 대대적인 대종교 탄압과 함께 상당량의 대종교 관련 자료가 압수당한 이후로 자료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1) 하지만, 최근에《애국지사 단암 이용태 선생 문고》2) 가 간행되면서 대종교 관련 인물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3) 일제강점기의 대종교가 행한 항일운동의 전반적인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대종교인으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단암 이용태의 생애와 그가 일제에 대항하여 전개했던 활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출생과 국내활동
이용태는 1890년 8월 12일(음력)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광동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字)는 백삼(白三), 호(號)는 단암(檀菴)이다.
5세가 되던 해인 1894년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로 이사하였고, 연당(連堂) 이선춘(李善春)에게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00년에는 같은 면의 주론리(酒論里)로 이사한 후 길현리에 사는 신당(愼堂) 임의상(林宜相) 문하에서 박제덕 · 임병필 · 임병문 · 이석대 · 강규희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1903년에는 동리의 원선생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후 왕당리로 이사한 후 1904년 충북 괴산군 장연면의 최씨와 결혼하였고, 연당 이선춘에게서 다시 수학하였다. 1905년 중원군 근좌면(현재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로 이사하였고, 1906년 동리에 사는 홍성훈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이용태가 살던 제천은 의병의 메카로 의병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1907년 그가 18세가 되던 해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4)
5월에 접어들면서 각지에서 의병이 떼를 지어 일어나고 인심은 몹시 어지러워지니 이는 곧 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모든 일이 날로 그릇되어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임금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려 있는 까닭이라. 7월 14일 밤에 의병의 부대가 마을 앞길을 지나서 충주방면으로 갔는데 밤이 깊어서 일본 군대들이 노략질을 하면서 쳐오는데 길가의 집들을 모두 불 지르고 마을사람 네 사람이 총살을 당하였다. 그 처참한 형상이 이에 이르러 심신이 아울러 놀라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1908년 이용태는 근좌면 공전리에 사는 화서 이항로의 연원인 성재 유중교의 문인이었던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 이명 이직신)5) 문하에서 이량우 · 윤창호 · 홍기오 · 정해문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이용태는 21세가 되던 해인 1910년 4월 서울로 상경하여 이종두와 양약국을 경영하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당시의 심정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6)
시국의 변천이 날로 심하고 나랏일은 점점 위태로워지니 사람마다 통분하지 않은 이 없고 뜻있는 사람 치고 분하고 의기심에 한탄하지 않는 이 없으나 나라의 운수가 장차 쇠하니 인도에 바름이 없어지고 밖에는 침략해 오는 적이 있고, 안에는 나라를 파는 도둑이 있으니 어찌 오래 갈 수 있으랴. 슬프다! 7월 25일에 이르러 한일합병의 유고가 선포되니 온 나라 안은 피눈물이 더하여짐을 깨닫지 못하겠고 정성스러운 마음에 통분을 아로새김을 누르기 어렵도다. 슬프고 원통하다! 어찌하여 하늘은 이 백성을 근심하여 건지지 아니하고 장차 나라의 운명을 오랑캐의 손에 떨어뜨리려 하는고? 이천만 백성이 통곡하는 소리는 중천에 사무치는데 삼천리의 넓은 국토는 문득 임자를 잃었도다. 이 날을 당하여 우리 조선민족이 된 사람이라면 그 누가 불공대천의 원수임을 가슴 깊이 새겨 두지 아니하랴. …(중략)… 대개 오늘의 시국형세를 말하자면 나라는 망하고 임금은 없어지고 세상은 쇠퇴하고 도덕은 잦아들어 천운의 비색함이 그 극도에 다다랐는데 하물며 집과 내 몸이 극도에 달한 것을 다시 말해 또 무엇하랴. 지난날이 멀고 오래되어 상고할 수 없음은 운세이니 쫓는다 하더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요. 앞날을 계승함은 무궁한 이치라. 순하면 반드시 이르나니 스스로 사람의 도리를 닦음만 같지 못하고 세상일을 갈아 다스림만 같지 못하므로 드디어 옛일을 상고할 마음을 끊어 버렸다.
이용태는 당시 국제정세의 인식과 서양의 근대적인 학문과 기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계몽주의로 전환하게 되었고, 정치혁신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계몽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용태의 시대인식과 사상전환은 그가 남긴〈행년략기(行年略記)〉7) 에 잘 나타나 있다.8)
가만히 세계의 대세를 미루어 생각하고 돌이켜 우리나라의 운명을 생각할 때 내가 고집을 가짐은 옳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무엇인가 하면 시간에는 예와 지금의 차이가 있고 학문에는 새 것과 낡은 것 곧 신구의 분별이 있으며 하늘에는 봄과 가을의 변천이 있고 해에는 낮과 밤의 나뉨이 있어 사람이 이 가운데 났으니 임기응변은 이치에 당연한 바라. 가을을 맞아 곡식을 거두어들이지 아니하고 씨뿌리는 봄철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 일이 과연 될 것인가. 여름날에 시원한 삼베옷을 입지 아니하고 솜옷의 겨울옷을 입고자 한다면 적합하다고 할 것인가? 애달프다. 우리 반도국가의 쇠망함은 정치를 혁신하지 아니함에 있고, 민족이 고통을 당하고 압박을 받는 것은 교육을 받지 못한데 있다. 이제 국원의 회복을 바라고 시급히 민족의 자유를 구할진대 무릇 우리 이천만 동포가 반드시 분발하여 용감한 마음을 떨쳐 일으키고 교육과 실업 등을 먼저 급속히 개혁함으로써 열혈과 적성을 마음속에 쌓아 두고 몸을 복수하기 위한 적과의 싸움터에 희생물로 바치며 세계의 앞선 문화를 수입하여야 한다.
장래에 나라를 위하고 집안을 위한 정치를 행한다면 가히 망국의 치욕을 씻을 것이요, 가히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을 것이요, 가히 생활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시급한 일이 아니며 어찌 각성하지 아니하랴. 비록 이 세상에 빌붙어 사는 하나의 식충으로서의 생각으로도 이에 이르러서는 정신이 크게 변하여 다리를 속세의 풍조에 물드는 마당에서 빼고, 몸을 혁신하는 곳에 내던질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옛을 그르다고 하는 마음이 아니어서 그러함인가, 또는 오랑캐로 화하는 마음이 아니어서 그러함인가?
애달프다, 하루아침에 오래 사귄 친구들의 자취가 끊기고 중화를 높이던 의리가 이 몸에서 사라져 가고, 중화와 오랑캐와 사람과 짐승을 판단하는데 만약에 혹시 그 옳고 그름을 알지 못했다면 반드시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요, 이미 그름을 알고 행하였다면 마음에 스스로 부끄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사우의 죄는 남이 먼저 비루며 죄인은 먼저 역사를 기록하는 붓끝으로 그 죄를 성토하여 굴복하여야할 것이나 사는 것이 불의인지 죽은 것이 의인지 모르겠고, 한 때에 권세를 부린 것이 4천년의 나라 원수로 갚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도다. 내 몸이 죽어 간 뒤에 사우들의 죄를 논한다고 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용태는 1913년 4월 20일 충청북도 중원군 근좌면(현재 제천시 봉양읍) 면서기로 임명되어 근무하였다. 1915년 4월 군 동리의 통폐합규정이 발포되어9) 근우면과 근좌면을 1개의 면으로 통합되어 근우면사무소로 옮겨 근무하였다.10)
이용태가 면서기로 근무하던 이 시기에 1919년 4월 17일 충청북도 제천에서 대규모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3 · 1 만세시위가 일어난 1919년은 이용태가 30세가 되던 해로 당시 국내정세를 그는〈행년략기〉에 기록하고 있다.11)
이 해의 물건 값은 아주 비싸서 쌀 한 섬의 값이 60웜이요, 콩 한 섬 값이 25원 광목 한 자 값이 50전이요, 솔가지 나무 한 짐 값이 3원을 헤아리니 이것은 고금에 처음 보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기가 어려움을 또한 헤아리기 어렵도다. 여름철에 가뭄이 매우 심하여 비가 40여일 동안 오지 아니하여 오곡이 모두 타고 온갖 풀들이 다 말라서 인심이 몹시 어지럽더니 마침내 큰 비가 내려 얼마간의 곡물이 소생은 하였으나 한해가 심한 논은 거두어 드리지 아니하고 버린 것이 없는 곳이 없다. 수해도 또한 매우 심하여 얼마간 남은 곡물도 또 손해를 보아 수해와 한재가 아울러 극심하였으니 가히 흉년이라 하겠는데 유독 치우치게 피해를 본 곳이 황해도와 평안도와 함경도와 경기도와 충청남도들이다.(이하 줄임)
당시 제천군은 강원도 남부지방과 연결되는 교통 요지에 위치하여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고, 또한 개항 이래로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벌어진 항일투쟁의 본거지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이후에도 일제관헌의 경계가 가장 심하였고, 3 · 1운동이 일어난 뒤에도 일본군 수비대가 들어와 엄중하게 경계하던 지역이었다. 이와 같이 일제가 사전에 철저하게 이 지역을 단속하였음에도 제천 공립보통학교(堤川公立普通學校) 졸업생과 중퇴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4월 17일 제천읍내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는데 주동 인물은 의림리(義林里)의 이범우(李範雨)였다. 이범우는 3 · 1운동이 일어나기 전 서울에서 최린(崔麟)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얻어 제천으로 돌아온 후 권종필(權鍾弼) · 이기하(李起夏) · 전필현(全弼鉉)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다가 보통학교 학생들의 검거 사실에 격분하여 즉석에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격문을 준비하여 4월 17일 제천 시장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다. 100여 명 이상의 군중이 모인 17일 대규모 시위는 경찰서를 3차례나 습격하는 등 무력시위 양상을 띠었고, 그 결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제천지역 3 · 1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된 이범우 · 권종필 · 이기하 · 전필현 등은 각각 8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다음 날 4월 8일에는 송학면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청풍(淸風)에서도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있었다.12)
3 · 1운동 당시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이용태는 동생 이용준(李容俊)13)이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자신도 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14)
1920년 이용태는 봉양면 청년회장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봉양모범사당을 설립하여 교육에도 전념하였다.15)
2년 뒤인 1922년 1월 1일 이용태는 농민들을 위해 ‘봉양면 소작인회’를 발기하여 소작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봉양면 소작인회 발기취지서는 다음과 같다.16)
시절은 봄과 가을의 다름이 있으나 그 성취하는 공업은 한 가지요, 사람은 가난하고 부자 됨이 다르나 살아가는 형세는 마찬가지다. 하늘이 공정하여 삶을 좋아하는 덕이 없다면 만물을 길러내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능히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십팔 세기 이전에는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가난하면 부자에게 붙어서 서로 즐거워하고 서로 사랑하되 서로가 조금도 사이가 벌어지지 아니하고 각각 생활을 유지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풍속이 무너지고 인심이 각박하여져서 형이 잘 살고 아우가 가난하여도 못사는 것을 좋아하되 애호하거나 위급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아우가 강하고 형이 약하더라도 한갓 억센 팔 힘을 준 것만을 한탄하되 사람의 도리로써 정의를 생각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떳떳한 사람의 도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이를 분개하지 아니할 것인가.
슬프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모골이 송연하고 온 몸이 아프도다. 역사가 있는 민족이요, 성인 기자의 뒤를 이은 백성으로서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애달프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고생하여 일 년 동안 힘써 농사지은 것을 모두 도조로 바치고 남는 것이 없으니 풍년에도 마침내는 몸만 고생하고 흉년에는 굶어 죽음을 면하지 못함이 오늘날 세상의 소작인들의 처참한 정상이다. 그러하니 우리들이 살아남아 있을 날이 어찌 오랠 것인가? 지난 대정 6년(1917년 정사) 이후로부터 토지에 부과하는 공과금이 해마다 높게 오르고 들어감은 피하지 못할 시국 형세라 다만 백성들이 마땅히 바쳐야할 것이다. 그 공과금을 부담할 의무는 국가 법률에 소유자로 지정되어 있으나 제천 고을에 이르러서는 몇 사람의 자선가를 제하고는 법령의 어떠함에 구애됨이 없이 다만 옛날의 습관에 의지하여 거의 모든 것을 소작인에게 부담하게 하니 이것이 어찌 소작인을 애호한다는 본뜻일까 보냐. 해마다 이와 같이 과거처럼 되풀이 한다면 구렁창과 언덕으로 굴러 떨어짐이 십 중에 팔구나 되리니 어찌 한심치 아니한가.
본 회의 취지는 한갓 제 몸만을 위한 계책이 아니요, 실로 우리나라의 전체 국민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발기하오니 뜻있는 여러분께서는 모름지기 서로 돕고 서로 붙들어 동포들의 생활을 온전하게 한다면 천만다행한 일이 되오리다.
봉양면 소작인회 발기취지서에서 그는 일제의 잔혹한 수탈로 인한 당시의 각박한 사회상과 그 중에서도 소작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 국민을 위한 동 소작인회를 발기하고 우리 동포들이 서로 도와 어려움을 극복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당시 일제는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우리의 토지를 수탈하고, 일본인 농민을 이주시켜 우리 농업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1912년 ‘토지조사령’이라는 법률을 제멋대로 만들어 1918년 소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는 결국 현실적 토지경작자들의 전통적 경작권의 상실을 초래하고 그들로 하여금 반봉건적 영세소작농으로 전락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자작농의 사유지까지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17)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 일본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전쟁 경기로 인한 공업화만이 진전되어 이에 따라 식량 부족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지주 · 소작제도를 강화하여 종래의 소작료를 더욱 고율화하여 우리 소작농들을 더욱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당시 소작료율은 총생산량의 평균 55%에 달하였고, 소작료 형태도 현물소작료가 제일 많았다.18)
봉양 소작인회가 결성된 1922년은 일제가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제1차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던 시기로 일제는 우리나라를 상품판매시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업원료 · 식량공급지로서 수탈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전형적인 식민지 경제구조로의 재편성을 추진하였다. 이런 재편성으로 우리 농민들의 생활고는 말할 수 없는 곤궁에 처하게 되었다.19)
이용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제의 잔혹한 수탈상을 지적하고, 소작인들의 권익보호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위해 상부상조하는 동포애를 호소하기 위해 봉양면 소작인회를 발기하여 운영한 것이었다. 또한 1922년 8월에는 봉양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농민들을 위해 활동하였다.20)
1924년 1월 9일 이용태는 봉양면장에 임명되었다.21) 이용태는 봉양면장직에 있으면서도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소작인회를 결성하여 수탈당하는 소작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앞장섰으며, 국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용태의 국내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시대변천을 직시하고 신학문과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농민들을 계몽하고 아울러 생활향상을 꾀하기 위해 앞장선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1924년 6월 3일에는 산업조합을 설립하여 산업조합장에 선출되었고,22) 1928년 3월 3일에는 대동회23)를 발기24)하였고, 1929년 12월에는 대동흥업사를 발기25)하여 산업진흥, 풍속개량, 문화향상을 꾀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용태의 사상은 ‘대동회’ · ‘대동흥업사’ 등 계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의 명칭뿐만 아니라 발기취지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동사상’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26)
그 후 이용태는 광산업에 착수하여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힘썼으며, 1932년에는 농산물품평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33년 제천군 위촉으로 유림순회강연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4년 1월 30일에는 백운면장에 임명되었으며, 덕동간이학교(德洞簡易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에 앞장섰다.27)
Ⅲ. 망명과 대종교 활동
이용태는 1919년 3 · 1운동 이후 대종교가 만주로 이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1928년 3월 20일 서울로 가서 대종교 남도본사를 찾아 입교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로 가서 대종교 남도본사를 방문하여 신가 · 개천가 · 단군교포명서 등을 입수하였고, 또한《삼일신고》·《신단실기》등 대종교 관련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하였다.
1930년 이용태의 동생 이용준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1939년 1월 동생의 체포 소식을 듣고 이용태는 동생을 면회한 후 4월 21일 중국 북경 · 봉천 · 신경 · 하얼빈 · 목단강 · 동경성 등을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1939년 7월 3일 백운면장을 사직하고 10월에는 전선유도대회(全鮮儒道大會)에 군(郡) 대표로 참가하였다.28)
마침내 이용태는 1939년 10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영안현 동경성 대종교총본사로 가서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을 만나 여러 차례에 걸쳐 대종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큰 감화를 받았다. 이용태가 대종교에서 활동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윤세복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대종교총본사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용태는 1940년 1월 참교(參敎)가 되어 찬범(贊範)에 취임하고, 같은 해 7월에는 지교(知敎)로 승진하여 경의원(經議院) 참의(參議)에 취임하였다.
만주국이 성립된 후 일제는 유화책으로 1934년 대종교 포교를 형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일제가 대종교 포교를 승인한 이유는 지하에 숨어있는 대종교계의 독립운동가들의 실태 파악이 그 목적이었다. 당시 대종교는 북만지역에 남겨진 유일한 항일세력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는 매우 심하였다.
1940년대에 들어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국주의적 침략야욕을 전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 입장에서는 북만일대에 항일민족세력을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만지역에서 일제가 주목한 점은 첫째,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 내에 있는 대종교계 3 · 1학원의 민족교육29) 둘째, 안희제(安熙濟)의 발해농장의 경제활동30) 셋째, 발해국 궁궐터에 대종교 교당 천진전과 대종학원 설립 넷째, 일제 밀정들의 대종교 지도자 언행에 대한 조사보고 등이었다.31) 일제는 이와 같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종교를 탄압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국내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순수한 한글연구마저 독립운동으로 간주되어 한글학자들이 대대적으로 탄압을 받고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날조한 증거를 바탕으로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혀오던 대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임오교변이다.
임오교변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서울에서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던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널리 펴는 말’32)이란 제목의 원고를 일제가 검열과정에서 조작하여 일으킨 것이다. 이극로의 원고 중에서 ‘널리 펴는 말’이라는 제목을 일제가 ‘조선독립선언서’로 바꾸어 붙이고, 내용 마지막 부분의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라고 날조하여 대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빌미로 삼았다.
이 사건으로 1942년 11월 19일 만주와 국내에서 제3세 교주 윤세복 · 이용태를 비롯하여 21명의 대종교 간부들이 동시에 검거되었으며 대종교총본사의 각종 비품과 서적이 압수당하였다. 일제는 북만과 국내에서 대종교 간부들을 동시에 체포하였고,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검거장소도 북만 지역의 신안진(新安鎭) · 하얼빈 · 목릉(穆陵) · 영안(寧安) · 돈화(敦化) · 밀산(密山), 동만과 남만지역은 연길(延吉) · 반석(盤石) · 장춘(長春) · 영길(永吉) 등지와 국내였다. 당시 대종교 지도자들은 넓은 지역에서 동시에 체포되었으며, 대종교총본사는 일제에게 신간서적 2천여 권, 구존(舊存)서적 3천여 권, 천진(天眞) 및 인신(印信), 각종 도서와 교단 서류 600여 종을 압수당하였다.33)
일제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 · 이용태 등 25명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다.34) 그들이 1942년 11월 19일 각지에서 체포한 대종교 지도자 중에서 성하식 · 김진호 · 안용수 · 이종주 등 4명은 혐의사실이 없어 즉시 석방하였다. 일제는 영안현 경무과에 특별취조본부를 설치하여 고문과 악형을 가하고 4개월 간 심문을 계속하였다. 권영준은 당시 72세의 고령으로 면소(免訴)되어 1943년 10월 1일 석방하였고, 김진호 · 김두천 · 이성빈 · 서윤제 등 4명은 교무무책(敎務無責)으로 1944년 1월 2일 모두 출옥하였다. 1차 심문 후에는 목단강성 경무청 특무과에서 2차로 3개월 간 심문하였다. 1944년 4월 27일 목단강고등법원 제1호실에서 윤세복 · 김영숙 · 윤정현 · 이재유 · 이용태 · 이현익 · 최관 등 7명에 대한 공판이 개최되어 윤세복은 4일간, 그 외 2일에 걸쳐 심문하였다. 공판과정에서 일제 측의 심리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35)
대종교는 조선고유의 신도중심인 단군문화를 다시 발전한다는 표방하에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 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인 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종목표요, 따라서 반도와 만주를 탈취하여 배달국 재건의 음모를 가졌으니 이것이 어찌 종교를 가장한 정치운동이 아닌가?
이에 대해 법정에서 대종교 지도자들은 아래와 같이 항변하였다.36)
대종교의 敎源은 神降太白이요, 敎義는 弘益人間이요, 교리는 三眞歸一이요, 敎政은 振興文運이요, 究竟는 化成天國이다. 그런데 조선독립은 국민운동에 속할 것이요, 倍達國 재건은 곧 천국건설이니 대종교인의 이념이다.
일제는 대종교를 국권회복을 위한 종교를 가장한 정치운동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1944년 5월 13일 윤세복 무기징역, 김영숙 징역 15년, 윤정현 징역 10년, 이용태 징역 10년, 최관 징역 10년, 이현익 징역 7년, 이재유 징역 5년형을 구형하였다. 다음달 6월 26일에는 치안유지법 제1조 위반으로 윤세복 · 김영숙 · 이현익 · 이재유 등은 원심대로 확정하고, 윤정현 · 이용태 · 최관 3명은 징역 10년에서 8년으로 감형하여 판결하였다.37) 조사과정에서 일제의 고문과 악형으로 10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7명은 목단강고등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목단강(牧丹江) 액하(液河)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검거된 사람 중 10명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1943년 5월부터 1944년 1월 사이에 모두 순국하였는데, 대종교에서는 이들을 ‘임오십현(壬午十賢)’ 또는 ‘순교십현(殉敎十賢)’이라 칭하였다.38)
이용태는 이번 사건으로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조국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그는 수감 생활을 하면서〈구금고황(拘禁苦況)〉39) 이라는 옥중 일기를 남겼는데 검거 당시 상황과 순교십현의 최후상황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임오교변 당시 일제의 탄압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또한 이용태는 옥중에서 시 4수를 남겼는데 당시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40)
광복 이후 이용태는 대종교 활동을 지속하면서 해방 이후 한국의 심각한 정치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한국식 민주주의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우리나라가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처음으로 제시한 홍익인간의 이념을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41) 대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던 그는 1964년에 생애를 마쳤으며 1990년에 동생 이용준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Ⅳ. 맺음말
많은 시문과 글과 저술을 남긴 사상가이며, 농민운동 · 청년운동 · 민족산업 진흥운동 등 다양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대종교에 입교하여 단군의 신앙을 바탕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용태의 가치를 결코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용태와 관련된 여러 논문들을 검토해 본 결과, 단순한 종교 활동이 아닌 나라를 구하기 위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그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이 매우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대종교뿐만 아니라 당시에 일제에 저항하던 여러 종교 단체들의 항일운동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어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사실이 많이 밝혀지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1) 1915년 일제의 종교 통제안으로 대종교 탄압이 본격화되자, 비밀리에 활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록이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일부 개인전기와 당시 신문기사만이 남아있다.
2) 박달재수련원, 1997,《愛國志士 檀菴 李容兌 先生 文稿》, (東禾書館)
3) 대종교 관련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연구성과가 있다. 몇 편을 소개하겠다.
이동언, 1994,〈백산 안희제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이동언, 1999,〈홍암 나철의 생애와 구국운동〉《대종교 중광 90주년 기념학술회의 발표문》 ; 김종성, 1999,〈단애 윤세복의 생애와 사상〉《대종교 중광 90주년 기념학술회의 발표문》 ; 김동환, 2000,〈백산 안희제와 대종교〉《국학연구》5, (국학연구소) ; 김동환, 1999,〈백포 서일의 생애와 업적〉《대종교 중광 90주년 기념학술회의 발표문》 ; 강맹산, 2001,〈대종교와 이수원 선생〉《일제하 만주지역에서 대종교의 항일운동 한중학술회의 발표문》 ; 정영훈, 2001,〈홍암 나철의 사상과 현대적 의의〉《홍암 나철정신의 현대적 조명을 위한 학술회의 발표문》, (보성문화원) ; 서굉일, 2001,〈단애 윤세복과 독립운동〉《단애 윤세복선생 추모공훈 선양 학술강연회 발표문》
4)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 989.
5) 이소응은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꺼리어 청풍헌병대에서 검거하자, 같은 해 류의석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다. ;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 991.
6)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991-994.
7)〈행년략기〉에는 이용태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뿐만 아니라 농사의 풍흉과 국내외 정세 모두가 기록되어 있다.
8)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994-996.
9) 일제는 1910년 6월 구한국 경찰업무 일체를 빼앗아 1914년 지방 행정개편에 맞춰 헌병경찰의 관할 구역을 조정하여 거의 1군에 1경찰서 또는 경찰업무를 취급하는 1헌병관서를 설치함으로써 일반 행정과 경찰업무를 연결시켜 식민지 통제를 강화하였다.
10)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996-997.
11)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998-999.
12) 국사편찬위원회, 1966,〈3 · 1 운동사(하)〉《독립운동사》제3권 , pp. 71-75 ; 충청북도도지편찬위원회, 1992,《忠淸北道誌》
13) 이용준은 1925년 제천공립학교를 졸업한 후 신간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30년 동아일보 봉천지국 보급원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무정부주의 · 남화한인청년관맹 · 흑색공포단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에는 상해에서 일본공사 암살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37년에는 중경에서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18일 일본공사 암살계획 혐의로 북경에서 체포되어 1940년 11월 20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4) 충청북도, 1987,《人物誌》 p. 380.
15)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 1120.
16)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450-451.
17) 박경식, 1986,《日本帝國主義의 朝鮮支配》, (청아출판사) pp. 63-74.
18) 신용하, 2002,〈1920년대 일제 식민지정책과 한국농촌사회〉《日帝强占期 韓國民族史(중)》, (서울대학교출판부) pp. 39-40
19) 박경식, 1986,《앞의 책》 pp. 221-230.
20)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 1121.
21) 위와 같음. 이용태는 봉양면장으로 재직하다가 2년 후인 1926년 10월 6일 사임한다.
22)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459-460.
23) 대동회는 촌락사회의 자치적인 운영을 위한 집회조직으로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의 회의체이다. 촌락 구성원들이 새해의 생산활동에 앞서 당면한 현안문제와 공동관심사를 논의하여 참여의식을 높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확인하고 상호부조 정신을 함양하여 사회적 협동을 증진케 하는 기능을 가진다.
24)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456-458.
25)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461-462.
26) 원래 대동사상은 ‘만인의 신분평등과 재화의 공정한 분배’를 통해 ‘大同’을 추구한 정치사상으로 ‘중국적 유토피아사상’이었다. 대동사상의 기원은《禮記》의 예운편에 나타나 있는데 백암 박은식(1859~1925)의 대동사상은 공자의 대동사상과 양명학, 강유위의 대동사상에서 유래하였다. 박은식은 일제가 한국 유교계를 친일화하자 이에 대항하여 ‘대동교’를 창설하여 투쟁하였다. 또한 유서에까지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27)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 1122.
28)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 1123.
29) 1934년 대종교총본사를 발해진으로 이전한 후 대종교총본사 건물에 3 · 1학원을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대종학원으로 개명함. 대종학원은 일제의 탄압으로 1941년 봄 초등부가 폐지되었고, 다음해 봄 중등부와 여자 야간부가 폐지되었다.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2002,《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Ⅰ》 pp. 120-121.
30) 안희제가 설립한 발해농장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논문에 나와 있다. ; 이동언, 1994,〈백산 안희제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8집
31) 박영석, 1982,〈대종교의 민족의식과 항일민족독립운동 : 임오교변을 중심으로〉《건대사학》6 pp. 37-41.
32)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pp. 458-461.
33)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앞의 책》 p. 464.
34) 당시 체포된 25명의 명단은 다음의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앞의 책》 pp. 462-463.
35)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앞의 책》 p. 498.
36)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앞의 책》 pp. 498-499.
37)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앞의 책》 pp. 497-500.
38) 순교십현의 순교실황과 약력은 다음의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앞의 책》 pp. 464-489. ; 대종교총본사,《임오십현 순교실록》, pp. 33-44.
39)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1971,《앞의 책》 pp. 491-497.
40) 옥중시 4수는 영안현 유치감에서 지은 2수와 액하감옥으로 이감되어 지은 1수, 그리고 판결서를 받고 난 후 지은 1수이다. 그중에서 판결서를 받고 난 후 지은 시 1수를 소개한다. ; 박달재수련원, 1997,《앞의 책》 pp. 126-127.
서너해 갇혔으니 오랜 세월에 얼마나 많은 취조 받아 왔던가.
이제야 끝났다고 알려 오는데 액하의 감옥에서 갈라고 한다.
일생을 마칠 것을 각오한 이몸 무엇을 바라고 기대할건가.
팔년 형 받았다고 근심을 할까 마음은 거울같이 고요도 하다.
41) 오영섭, 2004,〈일제강점기~제1공화국기 대종교인 이용태의 민중계몽활동과 한국식 민주주의론〉《국학연구》9 , (국학연구소)
첫댓글 수진비록을 쓴 분입니다. 생각보다 좋아서 생애를 올립니다.
충북대학교 역사학 카폐에서 가져왔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더불어 살지 못하는 현실은 지금이나 100년전이나 별반다를게 없는듯 합니다.
저도 그게 제일 안타깝습니다. 더불어 사는세상이 올까요? 어우러져 웃으며 사는세상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