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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묵상글 (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모든 위로의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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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모든 위로의 하느님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남이 잘될 때 시기하는 사람은 있어도
남이 잘못되었을 때 위로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혹 위로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위로치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위로할 수 없는 사람입니까?
자기도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까?
제 생각에 아닙니다.
동병상련이라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위로를 더 잘합니다.
서로 위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울어짐 없이 서로 위로합니다.
그러니까 위로를 할 수 없는 사람은 동병상련을 모르는 사람,
다시 말해서 아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너무도 부족함이나 어려움 없이 자라서 위로받을 일이 없었던 거지요.
배고픈 적이 없는 사람은 ‘배고프다는 것이 뭐야?’하고 의아해하겠지요?
그런데 반대로 위로가 정말 필요한 사람인데 위로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생 위로는커녕 질책이나 꾸중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위로도 꾸중도 다 차단하고 무통증 환자처럼 삽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무통증인 것이 아니라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무통증이고
그래서 남을 위로할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위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지 못해 위로할 줄 모르는 것.
하느님은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신데 그 하느님 위로를 찾지 않고,
받지 않고, 나누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위로의 하느님인데 왜 하느님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까?
조금 궤변 같지만 제 생각에 모든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일부 위로, 어떤 위로만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애정 결핍증 환자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어떤 사람의 위로만 받고 싶고 그래서 그에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위로는 원치도 않고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못하여 마다합니다.
왜냐면 위로받고 싶은 그 특별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해준 위로는 하느님의 위로가 아니라 그의 위로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통해서 위로하시는데
그 특별한 위로만을 원하니 다른 모든 위로는 위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시고,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모든 선이시며,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모든 위로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슬퍼하는 사람이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틀림없이 하느님의 위로일 것입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역으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위로를 하느님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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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오늘은 ‘참 행복’이 담고 있는 영성적 특징의 두 기둥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곧 ‘존재론적 영성과 실천적 영성’, ‘됨’(being)의 영성과 ‘함’(doing)의 영성입니다. 전자는 우리를 ‘꼴 짓는 영성’이고, 후자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로서의 영성’은 우리의 존재의 틀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며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영성이요, ‘실천적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 살이 입혀진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성이 내면의 성숙이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위와 실천으로 살을 입고 구체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현실에서 육화 될 때 비로소 살게 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가 변화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요, 변화된 존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변화를 토대로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존재가 새로워졌다면, 그 새로워진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양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변화된 새로운 존재인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창조세계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운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영성, 곧 ‘됨의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 행복’에서는 어떤 윤리적 행위를 위한 실천덕목들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와 변화된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외향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존재됨’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행위가 이 둘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양식에서 있어서 둘은 구분됩니다. 그러니 ‘참 행복’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아니라, 총체적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며, 그것에 따른 영성생활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됨’의 영성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개선하거나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촉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전 존재에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단지 여덟 가지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여덟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참 행복’은 존재론적 영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곧 존재 변화로서의 ‘참 행복’은 삶의 실천적이고 활동적인 측면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됨’의 영성은 ‘함’의 영성으로 육화하게 됩니다. 곧 존재의 영성은 실천적 삶의 영성으로 이어지고, 또 실천적 영성은 존재의 영성으로 맺어지는 과정으로 계속 순환, 반복하게 됩니다.
이를 ‘참 행복’에서는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됨’의 영성은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고난)로, ‘함’의 영성은 하느님께 예속(의탁), 치유, 섬김, 해방, 용서, 회개, 비폭력, 인내로, 그리고 그 복은 하늘나라, 위로, 땅, 채워짐, 자비,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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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여라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채워지길 원하여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서 헤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는데 특징을 보면, 복의 근원을 현재 상태가 아니라 다가올 새 나라 새 질서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은“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종국에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그리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으로 행복한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공명’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어떠한 처지나 환경,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것으로 친절과 너그러움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은 사랑에서 나온 의로움이어야 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몽땅을 내어주는 베푸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 완전함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외적인 안전함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함에서 오는 내면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은 목숨을 바치면서도 하늘의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박해나 모욕도 달게 받으면서 그 자체가 하느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사도들은 최고 의회에 끌려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막연한 기대를 접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 겪는 고달픔과 시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눈물로 씨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했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모셨다고 하면서 두 마음을 품게 되면 불행합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습니까? 세상의 풍요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차지한 사람은 비록 지금 세상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해도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기 빕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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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남을 비난하거나, 험담하는 말은 삼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희망의 말은 주저하지 말고 하라는 의미입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글은 가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역사라는 시간에서 글은 수천 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글 중에 경전은 인류의 지혜와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 사서삼경, 불경, 꾸란’이 있습니다. 제가 선택한 서품성구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뻐하며 곡식을 얻으리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고한 사람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정했습니다.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에서 정했습니다. “인생삼락과 사단칠정”은 유교의 가르침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은 불교의 깨우침입니다. “가장 완성된 인간이란 이웃을 두루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이웃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는 이슬람의 지혜입니다. 소위 ‘악플’이라는 글로 선한 마음에 상처를 주기보다는 ‘선플’이라는 글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LA 레지오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인 형제님이 제게 인사하였습니다. 매일 저의 ‘묵상’을 읽는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LA에 피정 강의를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형제님은 아내와 함께 왔고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은 쓰는 사람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글은 쓰는 사람의 철학을 드러냅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설법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의 말과 부처님의 말을 기록한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지하철에는 없지만 서울의 지하철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옮겨 놓은 글입니다. 지하철이 떠났어도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글을 읽는 것은 기쁨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인데 지금도 생각나는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말라. 그래야 하늘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춤추는 꽃을 볼 수 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쓰레기통을 비우듯이 욕심과 욕망을 버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런 행복을 말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 발전과 성장이 모든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겁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음을 알았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암인 줄 알았는데 오진이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오늘 새벽에 눈을 뜬 사람들,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하루였습니다. 행복하여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행복선언’을 하신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는지요? 예수님의 행복선언과 여러분의 행복선언을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 비슷한지, 어떤 점이 다른지도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비움, 나눔, 희생, 봉사, 평화, 가난’입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에 채울 것은 적어지지만 하늘나라에 많은 것들을 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초의 불을 다른 이웃의 초에 옮겨 주어도 내 초는 잃은 것이 없지만 세상은 더 밝아지듯이 우리의 희생, 나눔, 헌신, 비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만큼 더 환해지고 밝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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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살아가며 마주치는 세 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나 자신과의 문제.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문제.
셋째는 사물, 사건(일)과의 문제.
이 세 가지 문제로 우리는 세상 안에서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하면 이 문제들의 해결책은 이미 내 안에 있었습니다. 먼저 나 자신과의 문제는 자기 조절력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대인 관계력을 키워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물과 사건(일)과의 문제는 지기 동기력(동기 부여를 할 수 있는 힘)으로 풀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해결책은 자기 안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안에 있는 그 해결책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해결책이 외부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상황이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되고 그래야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일들이 언제나 내 뜻대로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평불만이 등장하면서 자기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이는 행복과 불행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에 달려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박해받는 이들이 현실 속에서 행복해 보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고,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행복할 수 없는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을 생각하고, 사람들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 뜻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이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좇으며 세속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보다 분명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족함을 느끼면서 불행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인데도, 남들이 자신을 그 자리로 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문제보다 외부 상황의 문제만을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이들은 현실에서 겪는 일들에 집착하지 않고, 작은 일에서도 행복을 찾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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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자기만의 개성을 얻는 것도, 그것을 발휘하는 것도 전부 유대를 통해서다(존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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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덕(聖德)의 여정
-진복팔단(The Beatitudes)의 실천-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2.6)행ㅂ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힘들고 험한 광야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성인들입니다. 1년간 휴간했던 <녹색평론> 계간지가 도착하니 참 반가웠습니다. 20년이상 고정 독자로서 정독하는 잡지입니다. 기후위기를 맞이하여 생태적 회개와 생태적 혁명을 위해 필히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요즘 쓰레기 나가는 것이 예전과 비교하면 너무 많습니다. 수도원 초창기때는 거의 없었는데 택배가 있고 부터는 쓰레기가 정말 많이 나옵니다.
어제만 해도 고마운 분의 선물로 자녁식사시 돼지 족발을 형제들이 잘 먹었는데 나오는 1회용 플라스틱, 아깝게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정말 많았고 마음이 내내 편치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전국적 현상이라면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성덕의 실천도 이런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참 대책이 묘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레기 덜 내도록 정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가능한 내외적으로 쓰레기를 적게 내고 사는 삶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옛날 농촌에서는 쓰레기가 전무했습니다.
아직도 병원에 입원중인 교황님께서 노벨상 수상자들 30명 모임에 보낸 6월10일 메시지 내용에 공감했습니다.
“천국(The heaven above)이 서로 형제자매로서 새롭게 발견하고, 우리 순례 여정의 기초로서 형제애를 믿으면서 우리 함께 걷도록 초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천상을 향한 순례 여정의 동반자들인 도반들이요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형제애요 영적우정입니다. 저는 이런분들을 만나면 참 반갑고 감격스러워 안아드리고 격려하기도 합니다. 이런 심정을 담은 다음 고백글입니다.
-“사랑합니다!”
감동에 벅차 당신을
안을 때마다
주님을 안 듯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을 안 듯
주님의 살아 있는 성경을 안 듯
당신을 안는다
가슴 벅차 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다.-
잘 살고 못살고 관계 없이 힘들고 험한 광야 세상 포기하지 끝까지 바르게 살아왔다는 자체가 구원이요 성인입니다. 제 주변에는 외롭고 힘들어도 이렇게 분투의 노력을, 책임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살아 있는 성인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한분한분이 살아 있는 성경책 같은 분들이라 마음 속으로 윗 시를 읽으며 안아 드리곤 합니다. 굿뉴스에 날마다 제 강론을 정성을 다해 올려주는 형제도 제가 볼 때는 성인입니다. 어제 나눈 카톡 대화입니다.
-“굿뉴스 강론 글자가 크고 시원해 읽기가 좋습니다. 정성껏 올리시노라 참 수고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최원석 요한 형제님! 수도원의 천국문 축복선물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마침 수도원 수도원 입구에 곱게 핀 덩굴장미꽃들로 장식된 아치형의 입구문이 아름다워 나눈 사진과 더불어 보낸 감사메시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늘 천국의 문 열어 주셔서 고맙고 사랑합니다.”
저의 날마다의 강론이 정말 천국문을 열어주는 역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 사랑이 가득 담긴 메시지가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이렇게 최선을 다해 치열히 살아가는 형제가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도 제1독서도 성덕을 향한 여정에서 성인이 될 수 있는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십계명은 기본으로 하고 우리 삶의 중심에 담고 살아가야할 복음의 참행복, 진복팔단입니다. 부정적 금령의 닫혀있는 십계명과는 달리 늘 천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성덕의 지침들입니다.
늘 새롭게 살아가야할 성덕의 지침들입니다. 아무리 실행해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게 하는, 참으로 겸손하게 하는 진복팔단의 가르침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대부분 영성가들이 격찬하는 산상설교의 참 행복, 진복팔단입니다. 간디는 물론이고 성철 스님도, 법정 스님도 감복하고 공감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이대로 살려 노력했습니다.
여러분의 성덕점수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도 했던 일입니다. 참으로 천상을 향한 순례 여정에서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이미 지금 오늘 여기서부터 천상의 등정길에 오른 이들로 천국의 삶을 살기시작한 분들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바로 이렇게 사는 이들이 이미 오늘 지금 여기의 천국에서 성인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은 상이 크다.”
주님의 결정적 말씀이 우리를 격려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친히 이들의 보상이 되어 주십니다. 모세의 십계명과 차원이 다른 십계명을 훨씬 능가하는 새모세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느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진복팔단 가르침입니다.
주로 금령으로 이뤄진 닫힌 십계명대로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면 현재와 미래로 활짝 열린 성덕의 여정에 진복팔단은 끊임없이 우리를 분발하여 실천을 시도하게 합니다. 해도해도 끝없이 해야 할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게 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활짝 열린 진복팔단 지침들입니다. 한번 성덕점수를 계산해 보세요. 각항목당 10점 만점에 80점, 기본점수 20점, 도합 100점 만점에 내 성덕 점수는 몇점쯤 되는가 한 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복팔단을 구체화한 성덕중 하나가 위로입니다. 제1독서 2코린토서에 무려 위로라는 말이 10회나 나옵니다. 정말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많은 이들이 바라는 바도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참으로 슬퍼하는 연민의 사람들, 자비의 사람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진정 이웃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위로의 사도 바올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많습니다.”
날마다 한밤중 저절로 눈떠서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주님의 넘치는 위로 덕분입니다. 우리가 수행생활에 항구할 수 있음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힘 덕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진복팔단을 살게 하시며 성덕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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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나지막한 산으로 오르십니다. 아마도 바람이 산에서 바다로 불었나 봅니다. 많은 이들에게 잘 들리도록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진복팔단’을 군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그 상황 안으로 들어갈 볼까요! 주님께서는 수많은 군중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군중을 찬찬히 바라보는 주님의 눈 안에 연민이 가득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군중은 부유하고 여유가 있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외받는 이들이었습니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고 다른 이들에게 멸시 받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군중들 사이에 그들을 도우려는 온유한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천천히 힘주어 ‘진복팔단’을 말씀합니다.
진복팔단은 위로의 말입니다. 희망의 말이고 격려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하느님 백성을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확신입니다.
진복팔단은 지금 우리에게도 희망과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주님의 시대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대로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천천히, 주님의 음성을 느끼며 다시 한번 읽어 보세요. 다른 사람이 아닌 지금 나에게 말씀해 주심을 느끼며 다시 잃어보세요. 그리고 들으세요.
내 안에서 진복팔단이 만들어 내는 희망과 격려와 위로, 그리고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소리를 말입니다.
주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예로니모 성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각종 좋은 책들과
유익한 미디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도 유익한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 유익한 것들이
성경을 우리 손에서, 눈에서, 입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중심일 때 그 유익함은 유익함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까이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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