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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 1-5
어느 날 태양이 작렬하는 정오 무렵이었다. 양을 치는 모세는 애써 그늘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양들은 더위를 견디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호렙산 중턱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모세의 눈앞에 이상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떨기나무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난히 맹렬하게 타오르는 그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이상한 그 광경을 가까이 가서 보리라는 생각으로 모세는 그 불꽃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 불꽃 가운데서 음성이 들려 오고 있었다.
"모세야, 모세야"
그 예사롭지 않은 부름 앞에 모세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머뭇거리는 모세에게 조용한 그 음성은 다시 계속되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모세의 발걸음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 날,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사는 대 전환점이 만들어졌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개인과 인류의 역사에는 크다란 변화들이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다. 때로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다가 만나던, 하나님의 기습적인 출현으로 만나지던 간에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간섭과 계획이 없이 이루어지는 만남은 없다
.
떨기나무불꽃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발에서 신발을 벗으라"
하나님은 만남의 접촉점을 위하여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 하셨다. 모세에게 신발을 벗는 과정은 마치 나비가 고치에서 힘겹게 삐어져 나오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한 개인 모세의 거듭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한 민족의 새 역사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회개라고 말한다. 단순히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가 겹겹이 자신의 발을 동여매고 신고 있는 신발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다. 이 신발은 벗어야 하는 것이었다.
첫째, 죄책감이라는 신발이다. (출2:14)
40년 전의 일이었다. 바로의 궁궐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장성했던 모세, 그 나이 40세가 되던 해 비로소 바로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는 자기 동족 히브리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꿈을 펼쳐보려다가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히브리민족을 괴롭히는 애굽군인을 죽인 사건이 자기 민족으로부터 살인자로 고발된다. 그는 살인자로 이곳으로 도망해 온 지 40년이 된 것이다. 40년, 벌써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도 남을 그 긴 세월이었으나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선 모세의 모습은 살인자였다. 이 광야에 그를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의 양심이 여전히 자신을 고발하고 있었다.
"너는 살인자야!"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에는 무엇보다 이 신발을 벗어야만 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의 삶에 그대로 가져오게 하는 일에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은 죄를 사하는 일이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동네에 이르시니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나왔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이르셨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깜짝 놀랄 일이 순식간에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려 하노라"(마태복음9:1-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어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의 우선 문제는 당면 과제들보다 바로 죄의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건강의 문제도 해결해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죄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간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죄인들을 초청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말이다.
요한 사도는 이것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和睦祭)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한일서4:10, 17)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약 미가서 7:19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실 때에 40년 묵은 죄책감에 눌려있는 모세를 죄책감의 신발을 벗고,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하신다.
둘째, 열등감이라는 신발이다.(출3;11)
현재의 모세는 극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모습이었다.
한 때는 모세 스스로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애굽에서 그것도 바로의 궁궐에서 40년을 최고의 혜택을 누리며 교육받았다. 그의 영향력이면 고통 중에 있는 자기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생각함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광야에서 보낸 40년은, 그로 하여금 철저하게 낮아지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모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다. 만약에 이 광야에로 도망오기 전이었다면 또 몰라도 지금, 이 광야로 도망 온 지도 벌써 40년, 모세가 칼이라면, 이제는 무우 하나 시원스럽게 자를 수 없는 무디고 녹 쓴 칼과 같았다. 나귀 턱 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일 천을 쳐죽인 삼손의 손에 들린다면 몰라도 모세는 지금 아무 작에도 쓸모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 상태였다.(사사기15:16)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참으로 묘한 영적인 섭리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훈련은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부족함을 절감하게 하시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만 드러나게 되기를 원하신다.
이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대답은 바로 이러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내가 정령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셔서 그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가령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글씨를 배울 때에 연필을 잡는 방법도 재대로 알지 못하고, 글씨를 제대로 쓸 수도 없는 아이에게 글씨 쓰기를 가르칠 때에, 연필을 잡은 아이의 손을 엄마의 큰손으로 감싸 잡고 글을 쓰게 하는 것과 같다. 이 때에 아이는 되도록 손에 힘을 빼야 한다. 그래야 나를 통해서 엄마의 작품이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지도력과 기독교의 지도력 사이에 크다란 차이 하나가 있다. 기독교의 지도력은 자기를 과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을 통하여 주님의 하신 일이 들어 나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실패가 여기서 올 수 있다. 자기가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고 자기의 의지를 어떻게 해서라도 나타내서 그것이 자기의 작품이라고 고집해보기를 원하는데 있다.
오늘이 아시안 게임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운동에는 별로 재주가 없다. 그런데 시합을 해설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느 시합이든지 동일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저 선수가 실수하는 것은 잘해보려고 너무 힘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전 아직도 기가 펄펄 살아서 있을 때에 쓰시지 않고, 지금 80이 되고,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이 때에 민족의 지도자로 부르시는 것일까? 이것이 영적인 비밀이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적합한 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자의 외편 "달생達生"의 章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紀渺子가 왕을 위해 투계(鬪鷄싸움닭)를 키웠다. 열흘이 되어 왕이 물었다.
"닭이 이제 싸울 수 있겠는가?" "아직 안됩니다. 지금은 공연히 허세를 부리며 제 기운만 믿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아직 안됩니다.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모습을 보면 당장 덤벼들려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또 열흘이 지나 왕이 다시 물었다. "아직 안됩니다. 상대를 노려보며 성을 냅니다." 하고 대답했다. 열흘 후에 또 물었다. "이젠 됐습니다. 상대가 울음소리를 내도 태도에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그 德이 온전해 진 겁니다. 다른 닭이 감히 대응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하고 紀渺子는 대답했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사람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희노애락이 너무 커서는 안 된다. 쉽게 기뻐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변덕이 죽 끓듯 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떤 일 앞에서도 하나님만 바라고 묵묵히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전진할 수 있어야 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에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왔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출14:14)
시편46:10의 말씀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우리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아닌가?
로마서8:31, 35, 37의 말씀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협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열등감을 벗고,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 패배감이라는 신발이다. (출5:2)
이것은 앞으로의 모세의 모습이다. 모세는 사실 대단한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바로 왕 앞에 간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다 행한다. 그러나 바로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모세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알았는데, 세상의 힘을 가진 바로에게 형편없이 무시당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모세가 바로를 만난 이후 이스라엘의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마침내 자기 백성들 마저 모세를 거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백성들이 말한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이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5:21)
이러한 상황은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크고 작은 사건 앞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 속에서 모세는 그 많은 순간 벽에 부딪힌다. 한 고비를 넘기면 또 한 고비가 다가오는 현실 앞에서 그의 깊은 마음속에서는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 누가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이 삶 속에서 끊임없이 느껴지는 상황이다. 그것을 우리는 좌절이라고 한다. 역부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보아야 화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역경가운데서도 그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비록 돌아가게 하실지라도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승리를 위한 일시적인 후퇴일 뿐이다.
이제는 해도 안된다는 패배감을 벗고,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으로 출발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쉬 낙담하지 말라. 아직도 우리의 깃발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삶의 현장 속에 펼쳐지고 있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실망하고 낙심하게 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이기게 하신다. 그 속에서 역사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고야 만다.
모세, 그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신 하나님, 그를 뭇 사람들 가운데서 택하시고 그를 세우셨다.
나는 살인자입니다 라고 말 할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용서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할 때,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셨다.
하나님 해도 안 됩니다 라고 말할 때, 내가 반드시 이루리라 하셨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하신 주님
출 3: 1-5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반드시 오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고난 중에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며 살기 시작한 세월이 어언 40년이 흘렀습니다. 모세에게는 길고도 지루한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양떼를 건사하는 일이 왕궁 생활에서 뼈가 굵은 모세에게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지 않은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광야의 삶을 살고 있는 모세와 또 애굽에서 여전히 학대를 받고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역사적인 기록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양무리를 이끌고 광야 서편으로 자리를 옮겨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 없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사롭지 않은 불인 줄 알고 이상하게 여기며 가까이 갑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사전통보가 없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나타내실 때에도(사6:1-5절),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타나실 때에도(마1:20절), '내가 너에게로 갈 터이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라'는 언질이 없으셨습니다.
오늘 [모세]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예고 없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어제와 같이 양떼를 치는 평범한 하루, 평소와 다름없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아마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좀 더 빨리 시간을 앞당겨서 오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오심은 사람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 천안에 있는 망향 기도원에서 어느 장로님이 가슴치며 울고 계셨습니다.
내용인즉 어느 날 가정예배를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대문 밖을 나가니 대문 앞에 한 나그네가 지쳐 쉬고 잇는데 장로님은 너무 좋은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기뻐하며 집안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발씻을 물을 주고 방으로 안내하여 음식을 차려놓고 "이렇게 잘해주신 하나님께 우리 함께 기도 하십시다"하고 기도를 함께 하기를 권했습니다.. 그 나그네는 "나는 불교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며 기도 하기를 거절 했습니다. 몇번 권하며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거절당하자 화를 내며 식사도 하지 않은 나그네를 쫓아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야 김장로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글세, 저놈이 하나님을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몰라서 제가 쫓아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조용히 김장로에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그를 위해 50년을 참았단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네게로 인도했는데 네가 그만 10분을 참지 못해 일을 망쳐 버렸구나!" 이 음성을 듣고 다시 찾을 수 없는 나그네를 생각하며 주님께 회게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33년간의 삶을 비추어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정에 계셔야 했던 시간이 있었고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실 시간이 있으셨으며, 세례 받으실 시간이 있으셨고 제자들을 모으실 시간이 있으셨던 것이며, 기다리셔야 할 시간이 있으셨고 예루살렘에 올라갈 정해진 시간과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COLOR="#0000CC"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준비할 바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오시는데, 사람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에 예고 없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 모세에게 오시는 본문의 사건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도 은혜로 담아봅시다.
첫째, 주님은 떨기나무같은 심령에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불이 붙었던 [떨기나무]는 정확히 학명으로 말하면 '아카시아 닐로티카'라는 나무입니다. 시내 광야와 같은 사막지대의 경사지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인데, 키가 2~3m 정도로 자라며 밑동에서부터 잔 줄기가 많이 뻗어나는 '가시덤불나무'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주변의 주위의 고상하고 당당한 나무들과는 대조적으로 앙상하고 아주 볼품이 없고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보잘것없는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 떨기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땅 애굽에서 노예로 전락하여 아무런 주권도 없이 착취와 혹사를 당하며, 고단한 생활 가운데 구부러질 대로 구부러지고, 갈라질 대로 갈라졌으며, 보잘 것 없고, 쓸모도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하고많은 멋지고 괜찮은 나무들을 놔두고 보잘것없는 떨기나무에 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 위에, 고단한 인생 가운데에, 구부러지고 갈라진 삶 속에 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누구든지 자신이 부족하고 볼폼없는 쓸모없는 존재임을 알고 겸손히 엎드리면 주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임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위에 머물러 있던 모든 고통의 멍에를 끊고 해방과 기쁨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하신 뜻이 배어있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떨기나무에 임하신 여호와의 사자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본문 2절에 '사자'로 번역된 '말라크'라는 히브리어는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파송된 '특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서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육신 하시기 전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을 전달하는 가장 완벽한 메신저는 그리스도밖에는 아니 계십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압제받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떨기나무에 임하신 것입니다.
※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인정을 받고 있는 젊은 변호사가 사람들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받아 본 선물들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것은, 제가 어릴 적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작은 상자였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면서 그 안에 어떤 선물이 들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이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아, 나는 새해 365 시간을 네게 선물로 주겠다. 매일 저녁 후 한 시간이 너의 것이다. 그 한 시간동안 나는 너를 생각하며 너를위해 기도하며 너의 장래를 염려 할 것이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자신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매년 같은약속을 되풀이 하셨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진 선물이 되었고, 그 결과로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의 손을 잡고 주님이 함께 해주시도록 이번 집회때 한번이라도 여러분의 옆에않혀놓고 기도해주며 기도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함께 해주시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 훌륭한 아버지는 하루에 한 시간씩을 아들을 위해 시간을 투자 했지만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하루 24시간 전체를 함께 해 주십니다. 전에도, 이제도, 또 앞으로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시다.
세번째로, 떨기나무의 불꽃은 보혜사 성령의 보호하심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2절上) 떨기나무는 이스라엘이요,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시라면, 그렇다면 불꽃은 무엇일까요?
불꽃은 보혜사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세상의 불꽃은 태워 없어지게 합니다. 불이 닿는 곳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맹렬히 타는 불은 쇠를 녹이고 바위도 태워 버립니다. 이것이 불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떨기나무에 붙어있는 불은 나무를 태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사자가 임하시는 자리를 마련하고 떨기나무를 보호하며 떨기나무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떨기나무 같은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지금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이 그 불꽃을 사르시며 감히 악의 세력과 악한 사람들과 악한 생각까지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역사 하심을 믿고, 그 앞에 신을 벗어 순종의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이 해는 주님의 임재 하심이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임하셔야 합니다. 먼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모두 자신이 떨기나무처럼 쓸모가 없음을 자인 합시다.
그리고 남을 해치며 성격 날카로운 가시임을 고백하며 겸손해 지십시다.
주님의 임재만 기다리며 주어진 사명만 충실 하십시다. 주님이 여러분 가운데 임재하시고 성령의 불꽃이 여러분의 어두운 길을 밝게 해 줄것이며 사탄 이 틈타지 못하도록 빛으로 막아 줄 것입니다.
이제 출발이 되었습니다. 우리모두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과 삶에 현장에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는 기적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사라지지 않는 불!
(출애굽기 3:1-5)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를 만나서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인물, 성격, 체질, 습관 모든 면에서 자기가 알든 모르든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만남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만남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내 생에 결정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모세라는 사람을 봅니다. 모세는 부모로부터 남다른 영향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 요게벳에게서 신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태어난 레위 족속은 혈통이 좋았지만 그는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당시에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학대 속에서도 번식하고 창성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도 남자 아이로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어머니가 죽일 수 없어서 석달동안 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로 상자를 만들어 나일강에 띄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에 목욕을 하러 왔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히브리인의 아이인 줄을 알면서도 이 아이의 용모가 준수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궁궐에 데리고 가서 기르게 됩니다. 데리고 가서 보모를 찾는 중에 모세의 어머니를 보모로 택하여 기르게 됩니다.
모세는 어렸을 때 그 어머니 품속에서 자라면서 어머니의 깊은 기도와, 사랑과, 정신을 잠재하게 됩니다. 그 어머니는 모세를 품에 안고 "모세야, 네가 비록 궁궐에 살지만 너는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히브리인이다. '너는 네 백성의 신음과, 탄식과, 눈물을 항상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장차 이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가 되라' 하는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어머니의 눈빛속에서 히브리인의 정신을 받고 자랐습니다.
모세가 학문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간적으로 성숙한 40세 되던 어느날 자기 동족들의 고달픈 고역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순간 '내 백성들이 너무 고생하고 헐벗고 굶주리는구나!' 하는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히브리 자기 동족이 애굽인에게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가슴속에 타오르는 분노로 애굽인을 쳐 죽입니다. 좌우를 살펴볼 때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그를 쳐서 죽여서 모래 속에 숨겨둡니다. 그는 마음속에 '분명히 내 동족들이 내가 하는 것을 보았으니 나를 지도자로 인정하겠지' 그런 생각과 꿈에 부풉니다.
다음날 또 고역의 현장에 나갔는데 이번에는 자기 동족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왜 동족끼리 싸우느냐'고 말릴 때 저들이 그럽니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14절). 그때 모세는 자기가 애굽인 죽인 것이 탄로난 것을 알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무리를 이끄는 머슴살이 목동이 되어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호렙산 기슭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종종 사막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나고 확 타버리는 것을 보았지만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어서 사라지지 않고 불이 계속 타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됩니다. 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고난의 역경 속에서 불타 없어지지 않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 속에는 가시떨기 나무와 같이 쓸모없고 보잘것 없는 초라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불이 임하는 계시적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모세의 생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는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은 사건을 통해서 자기 존재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다. 여기에서 모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시떨기는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쓸모없는 존재, 죄인된 인간의 가련한 모습, 이것이 바로 가시떨기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가시나무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할 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18)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짓고 난 이후에 나온 것입니다. 가시떨기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땔감도 못되고, 재목으로 쓸 수도 없고, 관상으로 쓸 수도 없는 아무런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오히려 가시나무는 등산객들의 옷을 찢고 상처를 냅니다. 그래서 가시는 곧 인간의 타락한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떨기는 모세입니다. 애굽인을 쳐 죽인 살인자의 존재, "네가 이 민족을 구원한다는 정의감은 있지만 가시돋힌 존재다."
모세는 광야에서 가시떨기 나무에 종종 불타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빛이 정오에 비쳐올 때 사막이 달아오르면서 갑자기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연기가 나고 금방 하나의 잿더미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모세는 호렙산 기슭에서 연기가 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불을 볼 때 불은 불인데 연기나는 불이 있고 연기나지 않는 불이 있습니다. 완전히 소화될 때는 연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 탈 때는 연기가 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은혜를 받기는 받지만 은혜가 잘못되어 연기나서 남들의 옷을 더럽히고, 집안을 어둡게 하며, 남의 눈에서 눈물을 빼는 신자가 있습니다. 이런 신자를 연기 신자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을 사랑해서 애굽인을 쳐 죽일 정도로 그 속에 타올랐던 민족에 대한 애국심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생활하면서 하나의 잿더미와 같은 존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하여 종종 놀라는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열심을 냈는데 지금은 다 꺼져버렸습니다. 어느 때는 내게 타오르는 첫 열심도 있었고 충성스러운 열심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열심이 꺼진 것을 보게 됩니다. 불이 꺼진 잿더미로 남아있는 모세와 같이 자기 자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인을 쳐 죽이면서 좌우를 살폈습니다.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12절)
모세는 어머니의 믿음으로, 어머니의 기도로 자랐지 자기 신앙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고백하고 만난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옆으로 사람만 보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위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좌우로 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좌우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좌우에 부모가 있습니다. 좌우에 친구가 있고 인도자가 있습니다. 좌우에 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한 때 우리는 타올랐습니다. 열심히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사람 때문에 시험들고 낙심되고 목사 보다가 시험들고 그래서 다 식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보지 말고 위로 하나님을 보십시오.
교회를 처음 개척해서 규모가 작을 때는 사람이 없으니까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지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목사도 나를 안알아주지 전에 개척할 때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은데 내가 필요하나' 그러면서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그러면서 낙심이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한 때 인간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으로 안됩니다. 위에서 타오르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불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2절)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3절)
모세는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합니다. '어찌하여 사라지지 않는가' 그리고 자기 속에 타던 불이 다 꺼졌던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렇게 타올랐던 정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 박력도 있었는데 모세는 40년동안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면서 다 꺼져버렸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이 늙고 초췌하고 애굽의 모든 학문이 사라진 그 시간,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본 것입니다.
나의 생애 속에서 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곁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전에는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시들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예수님은 초대교회 사도와 성도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이 3년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기적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없었습니다. 배울 때 뿐이었습니다. 들을 때 뿐이었습니다. 기적을 볼 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불이 임하고서야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불이 속에 임한 것을 느꼈습니다. 저들은 약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비겁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담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불은 감옥에 가도 꺼지지 않았으며 핍박과 환난이 와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저들은 가난해도 그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시들지 않았습니다. 누가 자기들을 괴롭혀도 이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불은 인간의 것이 아니요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이 불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 이 불을 받아야 됩니다.
베드로는 민족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세와 같은 자였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코자 하는 민족적 의협심과 정의감이 타오르듯 베드로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칼을 품고 예수님의 뒤를 열심히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종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들을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할 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장담을 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그는 장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은 하룻밤도 지나지 못했습니다. 하루 밤도 가지 못해서 꺼졌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멀찍이 따랐고 모닥불 옆에 있던 연약한 소녀 앞에서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장담하던 불이 꺼져버렸습니다.
장담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의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하늘로부터 불을 받아야 됩니다. 잿더미처럼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성령의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이 사라지지 않는 불 때문에 환난이 오나, 핍박이 오나 로마에 가서 거꾸로 매달렸으나 그 불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필요에 의해 열심내는 불은 언제든지 타버리는 잿더미가 됩니다. 사람 때문에 열심내는 것은 사람 때문에 꺼집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내는 것은 사람 때문에 시듭니다. 목사님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을 내는 것은 목사님이 조금만 인정하지 않으면 꺼져버립니다. 하늘로부터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4절)
여기 돌이켜 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았습니다. 돌이켜 온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사라지지 않는 불은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와야 보는 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제 발로 다녔습니다. 제 혈기로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누구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이 임합니까? 돌이켜 오는 자에게 임합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회개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메타노이' 방향을 돌이켰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편으로, 내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나를 위해 살던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은 내 정열입니다. 내 감정입니다. 내 의욕입니다. 내 욕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이켜 올 때 하나님께서 사라지지 않는 불을 주십니다. 이 불이 내 속에 타야 합니다. 이 불이 탈 때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형제들아 어찌할꼬" 할 때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했습니까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기도를 회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했습니까 이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열정으로 타올랐던 한시적인 불이 꺼진 이유가 뭡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차지도 아니하고 덮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은 회개할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하면 열심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모세가 보았던 자리는 보잘 것 없는 땅이었습니다. 돌작밭입니다. 나무 한그루 살 수 없는 사막입니다. 더군다나 가시나무가 불타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곳을 가리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삶의 현장을 거룩한 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가정도 직장도, 일터도 거룩한 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거룩한 땅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한 곳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40년동안 헤맸던 그 자리, 그 광야, 가시떨기 나무 있는 곳, 그는 거기에서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이켜 그곳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사라지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사라지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입니다.
모세가 이 은혜를 받은 이후에 가나안 복지 귀한 성을 향하여 광야 길을 40년이나 줄기차게 전진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했으나 모세는 한번도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쳐 죽이려고 몇번씩이나 달려들었으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향하는 소망의 불은 느보산에서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으면서도 가나안 땅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 믿음의 불이 타기를 바랍니다. 내 이웃을 사랑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불, 그리고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의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전날 볼 수 없었던 사라지지 않는 불, 연기도 없고 가시도 없는 불로 내 가정의 식구와, 이웃들과, 형제들에게 나타날 때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땅이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