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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빌립보서 2:12-18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X7_qkQEqPMU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기 때문에 본문을 이해하려면 본문 앞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앞에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서 시작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어야 할 위대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본문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것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으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 구원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미 빌립보 교우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했습니다. ‘이루라’라는 말은 이미 받은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2:2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갓난아이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으로 기본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 받았는데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본 구원 말고 또 다른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 앞에서 전율하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다리가 후둘 거릴 정도로 떨렸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런 의미입니다. ‘이루라’라는 말은 지금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라는 말입니다.
이를 해석하는 일반적인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세 가지 차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구원이 시간적으로 세 가지의 차원입니다. ➀과거적 의미의 구원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칭의를 말합니다. ➁현재적 의미의 구원입니다. 이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미 받은 구원을 자신의 삶에 실제로 드러내며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화입니다. ➂미래적 의미의 구원입니다. 이는 천국에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다른 말로는 영화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우들은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칭의의 단계는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성화의 되어야 하고 나중에 부활과 함께 영화롭게 되어 구원을 완성해야 합니다. 저는 이 3단계 구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구원을 3단계로 보는 해석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겠습니다.
저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존재도 하나님이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요 10:28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누가 감히 주님의 손에 있는 구원받은 사람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주님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고, 자신이 믿음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 3:12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님 믿어 기본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에게 붙어있는 상태는 구원을 받은 상태이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상태는 구원을 잃은 상태입니다.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막 살아서는 안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딤전 4:1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후일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기 전에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음에서 떠난 후에는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미혹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렘 17:13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기 보면 여호와를 버리는 자와 여호와를 떠나는 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생수의 근원에서 끊어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구원의 주를 버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좇아가다가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는데, 바울 자신도 그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고전 9:27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절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가는 버림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은 자기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살지만 만약 육신대로 살면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경건함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마 7:21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영화입니다. 주님에게 주여 주여하는 자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주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이후에 보면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7:23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주님을 믿고 능력을 행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못하고 불법을 행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은 체험했으나 성화되지 못했고 영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면 과거적인 구원 즉 칭의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성화 되어가다가 궁극적으로는 영화로운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도 바울과 같이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고전 9:27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2. 하나님이 주신 소원대로 행하라
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이 마음에 주시는 소원대로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시고 우리가 그 소원을 따라서 행하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이루시기 때문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토인비 박사가 런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역사의 주역’이라는 부분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너희는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어라.” 이 세상에는 역사에서 주역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창조적 소수이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더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토인비 박사의 역사관은 세계 젊은이들에게 거룩한 사명의 불을 지폈습니다. “너희가 어떤 면에서 창조적 소수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라”
창조적 소수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 마음에 주신 소원을 따라 행하므로 역사를 발전시켰습니다. 에디슨은 창조적 소수에 속합니다. 그는 전기와 전구를 발명하여 온 세상을 밝히고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디슨은 그리스도인이며 그는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행하므로 세상을 밝힌 것입니다. 라이트 형제도 창조적 소수입니다. 그들은 비행기를 발명했으며 그 결과 지구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그들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원대로 연구하고 연구하다가 비행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에 속하는 사람으로 윌리엄 윌버포스를 소개하겠습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을 따라 행하다가 노예 해방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25세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빛 된 삶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흑인 노예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노예들의 고통이 그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노예 해방이 정치인으로서 자기의 사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27살 때 노예폐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국가재정 수입의 3/1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노예문제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16세기 이후 아프리카에서 서구로 끌려온 흑인 노예의 수는 약 1,500만 명을 넘습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까지는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가 별로 없었습니다.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사람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동료인 돌벤이 제안한 1년 동안 노예무역선의 운송을 제한하자는 법안이 1788년에 통과되었습니다. 1792년에는 노예상업의 폐지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서서히’라는 말을 넣음으로 법의 실효성 없이 유야무야되기도 했습니다. 또 1804년에는 노예상업금지법이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 부결되기도 하였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이렇게 20년 동안 노예무역폐지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는 동안 회유도 당하고 협박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외롭고 고된 싸움을 하던 중 1807년 2월 4일 새벽 4시에 노예상업폐지 법안이 상원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24일 밤에는 하원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윌버포스가 노예제도폐지를 위해 싸우기 시작한지 20년 만에 얻은 소득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윌리엄 윌버포스는 은퇴할 때까지 또 20년 동안을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운동을 폈습니다. 그리고 1825년에 은퇴하였습니다. 그의 노고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은퇴한 지 8년 후인 1833년에 노예를 해방하는 법안이 통과되어 노예제도가 완전 폐지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윌리엄 윌버포스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돌아온 주일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평생 노예들의 해방을 위하여 외롭고 어려운 싸움을 다 싸우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소원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한 창조적 소수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 중에 중요한 방법이 마음의 소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분별하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3.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4절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은 ‘불평을 품고 투덜대는 것’을 말합니다. 시비는 ‘악한 의도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망과 시비가 일어났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목회학 책에 나오는 말인데요. “교회는 큰 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더라.’는 가십(gossip)으로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쓸데없고 부정적인 말들로 무너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교회 일이나 목회자 그리고 성도 개인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과 추측성 발언들은 삼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추측성 가십거리들이 돌기 마련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혹시 여러분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돌고 돌아서 여러분의 귀에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모세와 같은 자세를 취하십시오. 모세는 백성들이 원망하고 반역할 때마다 백성들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항상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어느 교인 집에 기거했습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그 집 부부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여자집사님이 옷을 차려입고 나왔는데 가슴에 멋진 목걸이가 .번쩍번쩍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목걸이를 보고는 “그 목걸이 꼭 진짜 같네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말이 입에서 나간 순간 ‘실수했다.’ 싶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집사님에게 “목사가 이런 농담하면 안 되는데... 진짜 같다는 얘기는 그 목걸이가 가짜라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사님은 화를 안내고 웃으면서 “목사님! 가짜인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남편이 사준 값진 보석은 외출할 때 안 해요. 진짜 보석은 집에 그냥 두고, 나갈 때 하는 것들은 다 가짜에요”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은 그 여집사님이 자기 말에 상처를 받을 줄 알았는데 전혀 상처를 받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진짜를 가진 자는 상처받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상처를 잘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에도 상처를 받고,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의 말 한 마디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웬만한 일에는 상처를 받지 마시고 다 그러려니 하시고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상처를 받거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믿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원망과 시비는 공동체를 힘들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중에도 가장 문제 되었던 것이 원망과 시비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 안에서도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니 하시고 당당하게 승리합시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하는 일도 많으니 당연히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 없이 하면 좋은 결과를 얻어냅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결과를 말합니다.
➀세상의 빛이 됩니다. 15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우리가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면 그런 세상에 빛들로 나타납니다. 즉 세상의 빛이 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는 싫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 좋다.”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싫은 이유는 예수라는 이름이 고대 사회에서는 듣보잡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좋은 이유는 그들의 인격이 이방인이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고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예수는 좋은데, 예수쟁이들은 싫다.”는 비판을 종종 듣습니다. 예수님이 좋은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의 삶과 사상이 얼마나 고상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쟁이가 싫은 이유는 그들의 인격이 너무 실망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 때문에 복음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링컨은 절실한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다는 것이 확인 될 때까지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세상을 더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기분 나쁘고 불편해도 원망과 시비를 그친다면 우리는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면 나타나는 또 다른 결과는 ➁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됩니다. 16절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목회자의 자부심은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앞에 섰을 때에 여러분은 저의 자랑거리입니다.
어떤 거지 아버지와 아들이 불난 집 앞에서 불구경을 했습니다. 거지 아들이 불난 집 주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불고 하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집이 없으니 저런 불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지요?” 그랬더니 거지 아버지가 “그게 다 이 아비 덕인 줄 알아라!”라고 했답니다. 이건 자랑거리도 아니고, 자부심을 가질 일도 아니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우이교회 김진홍목사님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날에 주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실 때 그 판단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해서 믿게 된 사람, 우리가 가르쳐서 성숙해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교회에 정착하도록 붙들어주고, 갈등하는 청소년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번민하고 회의하는 청년들의 손을 붙잡아 믿음으로 세워주는 교회학교 교사들의 사역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고 해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유명한 목사님 한 분이 은퇴했습니다. 기자가 그 은퇴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46년간 긴 시간 목회를 하셨는데, 은퇴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과연 무엇이 남았습니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남습니다. 그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름이요? 그거, 금세 지나갑니다.” 그 목사님은 한국교계에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그분은 명예를 얻은 분인데 명예도 금세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성도가 자기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존귀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한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4. 자신을 제물로 드리라.
17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의 제물이 되고 자기는 그 제물 위에 전제로 드릴 지라도 기뻐하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하나님께 헌신하자고 촉구한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의 제물이 되어라. 나는 너희 위에 전제로 부어지겠다는 것입니다. 전제는 제물 위에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붓는 제사입니다. 전제의 의미는 양을 끌어다가 목을 치고 피를 붓듯이 그렇게 목숨까지라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상영된 ‘순종’이라는 기독교 영화의 리뷰를 보고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평신도 선교사들은 마치 전제처럼 하나님께 부어지고 있었습니다. 영화는 레바논 난민캠프에서 난민들을 섬기는 김영화선교사 부부와 우간다 딩기리 마을에서 선교를 하다가 하늘로 떠나가신 아버지 고 김종성선교사의 딸 김은혜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난민캠프에서 사역을 하는 김영화 선교사는 한국에 부모님과 동생이 살고 있습니다. 평생을 슈퍼마켓을 운영하셨던 부모님께서는 슈퍼마켓을 그만하게 되면서 아버지는 폐지 줍는 일을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병들었고, 동생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김영화 선교사가 아버지와 통화할 때, 아버지는 “폐지 줍는 일을 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버지께 드려야 할 말을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들으며 그는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을 떠나 레바논으로 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여기에 있는 것을 알기에, 그 마음에 순종할 뿐이다.” 그러면서 김영화 선교사님은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면서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영화 마지막 부분에 순종의 정의가 나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내가 있는 것이다. 내 생각, 경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선교사로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믿음의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롬 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들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말은 “당신들은 당신들의 삶 속에서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렇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의 간증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일깨워주는 간증입니다. “오늘 차로 접촉사고를 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가려는 그 순간, 예수님이 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주인에게 연락을 했더니 차 수리를 해 달란다. 이참에 다른 부분까지 다 수리하려는 속셈이 환히 보였다. 몇몇 주변 분들은 본 사람도 없는데 왜 자기 발로 찾아가 문제를 만들었냐고 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때 보셨다! 나는 바보다. 예수님만 아는 바보다.” 짧은 간증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몇 번 간 옷 수선점이 있습니다. 바지의 밑단이나 양복 소매를 줄이려고 가는 곳입니다. 주인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가게 문 앞에 ‘주일은 쉽니다’란 푯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약속을 잘 안 지킵니다. 월요일에 해놓기로 하고 찾으러 가면 안 되었답니다. 수요일에 찾으러 오랍니다. 수요일에 가니 아직 가게 문을 안 열었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에 찾았는데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습니다.
수선집 주인은 손님이 목사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 게으름을 부립니다. 목요일에 옷 수선을 맡기니 토요일까지 해놓기로 했습니다. 토요일에 가니까 안 되어 있습니다. 저녁에 오랍니다. 원래 토요일까지 하기로 한거니까 저녁도 토요일이니 그때까지 주면 약속을 어기지 않는 거랍니다. 그러더니 다시 말이 바뀝니다. 월요일에 오랍니다. 이런 일이 잦았습니다. 장사가 잘되는 곳도 아닙니다. 당연히 시간이 모자랄 리가 없습니다. 툭하면 문을 닫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다음부터는 가지 말까 생각 중이랍니다. 이런 삶의 자세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중심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1.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대로 살면 버림받을 수 있으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소원대로 행하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3.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됩니다.
4. 자신을 재물로 드리라. 삶이 재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