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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과장, 아니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이 드디어 낮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간혹 몇몇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가 반주 삼아 낮술을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 와 잽싸게 양치질을 하고 정색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이 그런 다는 것은 도무지 예상 밖의 일이다.
게다가 동 과장의 경우에는 양치질도 하지 않아 주변에 앉아 있는 동료 직원들에게 술 냄새를 풀풀 풍기기도 했고, 적어도 낮술이라면 소주 반병 정도 반주 삼아 가볍게 마시는 정도인데, 한 병은 족히 마셨을 것 같은 불콰한 얼굴로 자기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부하 직원이 결제를 받으러 올 때는 얼떨결에 서류를 읽어보고, 그 답지 않게 대충 자기의 결제 란에 도장을 꾹 눌러 주기도 했고, 국장이나 구청장의 호출이라든가 간부 회의에 참석해서도 낮술 때문에 핀잔을 듣기가 여러 번 이었다.
구청의 전 직원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래도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똥 과장, 요즘 왜 저래?"
"어이, 김 주사, 아무래도 똥 과장, 저 인간 요즘 뭐 잘못 먹었나 본데"
"똥 과장, 아무래도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똥 과장, 저 인간 아무래도 실성했나봐"
이런 말들이 동 과장 주위에서 수근 거려졌지만, 그는 그 사실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침묵을 지키기만 했다.
여전히 그는 점심시간이면 모든 직원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을 마다하고 혼자서 슬그머니 구청 건너편 골목길에 있는 '미자네 식당' 으로 향했다.
미자네 식당은 골목길에서도 사이 길로 비집고 들어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간판도 붙어 있지 않고 식탁 세 개를 놓고 장사하는 집이다.
주인 여자 딸 아이 이름이 미자라서 그냥 사람들이 미자네 식당으로 부르는 정도다.
주인 여자는 가게에 붙어 있는 골방에서 중학생인 딸 아이 하나를 키우고 사는 과부다.
말이 식당이지 저녁이면 술도 팔고 주인 여자가 손님들 틈에서 같이 술도 마시고 떠들다가, 그러다가 주인 여자가 취해서 떨어지고 손님들이 알아서들 돈을 식탁에 놓고 가면, 어린 딸아이가 어머니 대신에 가게를 치우는 것도 여러 번 목격된 바가 있다.
여느 식당처럼 메뉴도 없다. 되는 데로 아무 반찬이나 푸짐하게 내 놓고, 주인 여자의 헤픈 웃음과 사람 좋은 인심으로 겨우 장사를 이끌어 간다고 보면, 거의 들어맞을 듯싶다.
술안주도 대중이 없다. 철 따라 안주의 내용이 바뀌고 심하게는 일주일 단위로 미자네의 술안주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가격도 멋대로다. 그 날 시장에서 지출한 돈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그러니 메뉴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안주 가격은 다른 술집에 비하면 엄청나게 싸고, 밥값도 볼품없는 내용에 비하면 의외로 맛도 있고 저렴하다. 미자네 식당은 그러한 이유로 구청 직원들에게 제법 소문이 난 집이다.
우리의 동 과장도 미자네 식당의 단골 고객이다. 동 과장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퇴근길에 들러서 가볍게 한잔 씩 하고 가는 애주가다.
그런 동 과장이 드디어 근무도 끝나지 않은 낮 시간대에 미자네 식당에 진출을 한 것이다.
"미자 엄마, 여기 소주 한 병 줘."
"똥 과장, 요즘 무슨 일 있어?"
주인 여자가 식탁에 반찬과 밥그릇을 내려놓자 동 과장은 술을 주문하고, 주인 여자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에게 말을 붙여온다. 우리의 동 영철 과장에게 대놓고 똥 과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미자 엄마뿐이다.
구청 내 직원들이야 안 보이는 곳에서 쉬쉬하며 자기들 끼리 수근 대는 눈치였지만, 미자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똥 과장이라고 부른다.
이상하게 아무리 근엄한 동 과장이지만 미자 엄마의 그 소리는 전혀 기분 나쁘게 듣지 않는다. 아마 이 십 년 넘게 쌓아 온 두 사람 사이의 단골손님 이상의 인간적인 신뢰가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휴........죽을 맛이다.“
"............"
동 과장은 잔에 소주를 따르며 미자 엄마의 물음에 겨우 대답을 하고, 그녀는 그러는 동 과장을 말없이 걱정스러운 듯 쳐다본다. 동 과장은 말없이 밥그릇에는 숟가락도 주지 않고 소주잔만 입안에 털어 넣고 있다.
미자 엄마는 동 과장 옆에 다소곳이 앉아 마치 마누라라도 되는 듯, 가만히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고 있다.
아무래도 이 십 년 동안 꿋꿋이 지켜 온 그의 행복한 가정생활이나 청렴한 공직 경력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좀처럼 자신을 표현하지 않았던 동 과장이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인 다는 것은, 심각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밖에 짐작할 수 없다.
미자네서 돌아 온 후, 사무실로 들어 가 동 과장은 책상 위에 있던 몇 가지 서류를 대충 결제 하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요즘 와서 그는 옥상에 올라가는 일이 많았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 자기 자리를 지키던 동 과장으로서는 그것도 의외의 일이다.
옥상에 올라가서도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별다른 일이 없다. 멍하니 서서 구청 건너편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피고 미친 사람 모양 뭔가를 중얼거리고 오는 것뿐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오늘도 역시 동 과장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리고 있다.
그의 눈에는 건물 아래 주차장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건너편 방송국 건물의 높다란 안테나에 걸터앉아 있는 까마귀들도 보인다.
비가 오려는 듯, 멀리 얕은 산허리에는 구름도 걸쳐져 있다.
도시의 소음은 기압골로 인해 내려앉은 구름에 의해 더욱 그의 귀에 크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듯, 마치 고독한 성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옥상에 서 있다. 그리고 마냥 중얼거릴 뿐이다.
"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유심히 들어 보니 국민교육헌장임이 틀림없다.
아,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이 옥상에서 매일 같이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던 것은 바로 국민교육헌장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 사실도 구청 직원들이 안다면, 놀림감이 되기 십상일 것이다.
다행히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누구라도 그 소리를 듣는다면 순식간에 구청 내에 소문이 퍼질 것이 틀림없다.
"김 주사, 똥 과장 미친 것이 틀림없어."
"똥 과장 그 사람,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어?"
아마 이런 말들이 직원들 사이에 흘러 다닐 것이고,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혹시 그가 진짜로 미친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이 십 년간의 단단한 공직 생활로 미루어 볼 때, 비록 요즘같이 사면초가에 빠져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그렇게 쉽게 미쳤을 것이라고는 보기가 어려운 구석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사실 똥 과장, 아니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은 요즘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대학에 진학을 못하고 시작한 공무원 생활에 일대의 위기가 닥쳐 온 것이다.
비록 강직하고 주변머리 없는 성격 때문에 별 볼일 없는 한직만을 떠돌아다닌 그였지만, 이 십 년간의 공직 생활에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있음 직한 사소한 입소문이나 작은 부정조차도 없었던 그였다.
혹시 그가 유혹에 넘어가서 민원인에게 어쩌다 돈 봉투라도 받았고 그것이 도청 감사반에 의해 조사를 당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동 과장을 가까이에서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라면 가당치도 않는 말이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그가 왜 옥상에 올라가서 삼 십 년도 넘은 초등학교 시절에 외운 국민교육헌장을 혼자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지에 대해서 말해 보기로 하자.
아마 그 이유는 우리의 동 영철 과장 자신도 잘 모를 것이다.
아니, 지금의 그로서는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쓸 정신적 여유가 없다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동 과장이 옥상에 올라가 미친 사람처럼 국민교육헌장을 중얼거릴까?
박정희 군사 정부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던 골치 아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근엄한 얼굴로 했던 말을, 지금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대통령께서 국민들을 위한 좋은 말씀을 만들었으니, 여러분들도 이것을 꼭 외워야 한다. 이번 주까지 외워 오지 않는 사람은 변소 청소를 시킬 것이니 틀림없이 외워오도록 해야 한다. 알겠나?"
선생님의 느닷없는 얘기에 우리는 뜻도 모르고 그것을 강제로 외워야 했다.
그렇다면 사십대 중반의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의 경우에도 여기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을 터이니, 그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면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보기로 하자.
정확히 삼 십 오 년 전, 우리의 동 과장이 초등학교 4 학년 시절, 그 당시 초등학교가 다 그러했듯이, 그가 자란 시골 학교도 여느 학교와 다를 바 없이 일제 시대에 지은 검은 판자 건물에 복도의 마루 바닥에는 양초가 칠해져 있었고, 천장에는 쥐 오줌으로 얼룩이 져 있었을 터이고, 구멍 뚫린 마루 바닥은 쥐새끼들의 전쟁터 겸 놀이터였다.
항상 배고팠던 아이들에게는 보리밭에 깜부기는 먼저 보는 아이가 임자였고, 고무신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벌겋게 달아 오른 통나무 난로 위에는 아이들의 도시락에서 냄새 나는 김치 와 누룽지의 구수한 냄새가 교실 안에 가득할 때쯤, 월동 준비 명목으로 수업을 빼먹고 산으로 전교생 전부가 솔방울 따러가기도 했었고, 모래가 얼기 전 냇가에 철봉대 주변에 깔 모래를 공수 해 오던 시절이었다.
주인공은 그 해 동 과장의 담임선생이었던 홍문시 선생님이었다.
우선 그의 외모부터 살펴보면, 키가 훤칠하게 컸으며 눈은 부리부리하고 코는 주먹 코였다.
그 주먹코에 주독이 올라 항상 빨개 있었고, 아이들은 그 모양이 웃겨서 담임선생님 이름, 홍문시 대신에 코가 빨간 문어 대가리를 닮았다고 해서 홍문어 라고 불렀다.
목소리는 아주 저음에, 처음 듣는 사람은 그 목소리에 단번에 거부감이 느껴질 만한, 뭐랄까 깨어진 징을 치면 나는 그 둔탁하고도 쉰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반 아이들이 그런 선생에 대해 느끼기에도 현실에 대한 불만과,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음이 확연하게 느껴졌으니, 가르치는 선생이나 아이들이나 수업에 흥미를 읽어 버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 담임선생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라면 바로 낡고 오래된 풍금을 치면서 부르는 '갑돌이와 갑순이' 였다.
점심 때 반주로 낮술을 마신 선생은 늘 학교에서 하나 밖에 없는 풍금을 남학생 서너 명이 힘들게 옮겨 놓으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예의 그 노래 "갑돌이와 갑순이'를 풍금 반주에 맞추어 쇳소리 나는 둔탁한 목소리로 부르곤 했었다.
그 사건이 난 발단은 대구에서 살다가 할아버지 고향으로 전학을 온 아이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담임선생은 점심 때 반주로 막걸리를 한 잔 했고, 붉어진 얼굴과 함께 한껏 고무되어진 기분으로 아이들에게 풍금을 가져오게 했다.
"너거들 오후에는 수업이 엄따. 그러니까 전부다 책 보따리 싸라.
"
아이들은 웬 횡재냐 싶어 주섬주섬 책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고, 담임선생은 그의 영원한 십팔번 인 갑돌이와 갑순이를 소리도 올바르게 나지 않고 바람 소리가 휙휙 빠지는 풍금을 두드리며 부르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킥킥 홍문어”
하는 비웃음 소리가 하교준비로 웅성웅성 하는 분위기와 풍금소리 사이에서 들렸었다.
"어느 놈이야"
순간, 선생의 불호령에 일순간 동작 그만이 되어버린 교실은 살벌한 적막감이 흐르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거의 공포감에 온 몸이 굳어버렸다.
"어느 놈이고? 킥킥 웃은 놈이?“
선생의 돌아보았던 얼굴표정으로 보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를 것 같았다.
긴장감과 공포감에 아이들은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전학 온 그 아이가 조용히 선생 앞으로 조용히 나왔던 것이다.
"니가 웃었나?"
선생은 먹이를 앞에 둔 솔개처럼, 그 둔탁한 목소리로 열 살짜리 아이를 노려보며 물었다.
겁에 질린 아이는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마음과는 달리 입만 달싹거릴 뿐 급기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채근하는 선생의 고함소리에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급기야 하교를 명하였던 좀 전의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태도를 백 팔 십도 전환하여 예전과 같이 절대주의자 폭군으로 다시 변하고 말았다.
"너거들 책 보따리 다시 풀고 지금부터 국민교육헌장 외운다, 못 외우는 놈은 다 외울 때 까지 화장실은 물론 집에도 못 간다. 알것나?
다 외웠다고 생각되는 놈은 손을 들어 반장한테 검사를 받고 합격해야만 갈 수 있다 지금부터 외운다. 시작!"
겁에 질린 아이들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절대군주는 예의 그 풍금에 매달려 못 다한 갑돌이와 갑순이를 연주하였고, 공포심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아이들은 허겁지겁 책 보따리를 다시 풀어헤친 후 독재자의 명령에 따라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기 시작하는데, 풍금소리와 아이들의 조잘거림이 마치 시골장터를 방불케 하였다.
그런데 정작 난처한 입장에 처해진 사람은 반장이었던 우리의 동 과장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 외우면 검사를 해야 하는데, 그 검사라는 것이 그가 책을 들고 있으면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걸 확인해야 했었다. 그 자신도 다 못 외우는 판에 그걸 검사해야 했던 그의 마음!
한글도 다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이 절 반 이상이었는데 어떻게 국민교육헌장을 줄줄 외울 것인가?
56명의 아이들 중, 문제를 일으킨 그 아이와 2명의 계집 아이 만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교실 문을 빠져나갔으나 나머지 아이들은 해 질 때까지 남아서 지겹도록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다.
그리고 늦게까지 집으로 오지 않는 아이들의 부모님이 학교로 왔다가 창문너머로 기웃거리던 장면, 그것을 알고도 못 본체 했던 담임선생의 무표정 했던 얼굴.
혹시 동 과장에게도 아련한 이런 기억들이, 끝내는 국민교육헌장을 다 못 외우고 초등학교를 졸업 했던, 그래서 6 학년까지 줄 담임이었던 홍문시 선생에게 툭하면 혼이 나야 했던 기억이, 그가 낮술을 마시고 국민교육헌장을 중얼거린 이유는 아닐까?
그 날 어찌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기억이 오늘 날 우리의 동 영철 과장으로 하여금 그런 얼토당토한 행동을 하게 한 것은 아닌지.
어쨌거나 지금 우리의 동 과장의 마음이 심란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기반이다 기반이다 기반..........."
계속해서 국민교육헌장 막바지를 중얼거리던 우리의 동 영철 과장님께서 드디어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기 시작한다.
다음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굳이 끝까지 외울 필요는 없지만, 동 과장은 마치 초등학교 시절 선생 앞에서 어떻게든 다 외우고 집에 가서 엄마 품에 안기고 싶은 철없는 아이처럼, 막힌 부분에서 더듬어 대는 모습이 안쓰럽게도 보인다.
아! 가엾은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이여. 아마 직원들 중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기가 막혀 했을 것이고, 드디어 우리의 동 과장은 참으로 불쌍하고 한심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똥 과장님! 구청장님이 부르십니다."
중얼거리는 동 과장 뒤에서 한참을 이상한 듯 쳐다보던 김 주사의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것은 오늘 따라 김 주사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똥 과장'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동 과장은 그 소리를 굳이 따지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슬며시 김 주사의 뒤를 따라 구청장 방으로 향할 뿐이다.
"자네 요즘 왜 그러나?
노조 아이들 잘 구슬리라고 했더니, 그게 뭔가? 점점 더 거세지기만 하니........자네 낮에 술 먹고 다닌다면서?
자네의 성실함을 믿고 중책을 맡겼더니 몹시 실망일세. 나에게 무슨 불만이 있나?
있으면 말해 보게."
"..........."
"그 놈들 요구 사항이 뭔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간부들 짤라서 자기들 인사 숨통을 트자는 속셈인 걸 자네도 잘 알잖은가? 이번 일 잘못되면 자네도 여기서 나가야 할 걸세"
"면목 없습니다."
구청장의 따가운 질책에 우리의 동 과장은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사실 동 과장으로서도 딱히 구청장의 말에 대꾸 할 어떤 말도 없다.
그도 최선을 다해 몇 번이나 전에 같은 과에 데리고 있던, 구청 공무원 노조 위원장 최 계장을 만나, 구청장 말대로 구슬리고 애원하기도 해 보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어쩌면 주변머리 없는 동 과장에게 그런 임무가 주어졌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공무원 생활 내내 자기 일 이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던 순박한 그가, 그런 복잡하고도 어려운 일을 해결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생각해도 그에게 그런 임무를 맡긴다는 것도 상식 밖의 일이다.
그것은 동 과장이 노조 간부들을 만나 설득을 했을 때, 그들의 반응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동 과장님, 동 과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이러는 지는 누구보다도 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 동 과장님이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동 과장님이야 말로, 저희들은 우리 편인 줄 지금까지 알고 있었는데, 진짜 너무하십니다."
"동 과장님이 이러시면 아마 제일 먼저 동 과장님께서 나가실 지도 모릅니다.
동 과장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그래, 자네들 말 잘 알겠네. 그렇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이......."
노조 간부들의 무례한 협박성의 막말에도 우리의 가엾은 동 과장은 그렇게 밖에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한참을 동 과장을 다그치던 구청장이 마지막으로 혀를 차며 나가라고 하자, 동 과장은 구십 도로 머리 숙여 인사를 한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 나가는 그의 뒤에서, 희미하게 웃음 짓는 구청장의 얼굴을, 동 과장이 볼 수가 없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오늘 따라 동 과장은 퇴근길을 걸어서 집에 가야 한다.
"여보! 오늘 당신 버스 타고 오면 안돼?"
동 과장은 아내의 전화에 아무 소리도 않고 끊고 말았다.
거의 매일 승용차로 태우러 오는 그의 부인이, 동창을 만난다는 이유로 버스를 타고 오라고 했으나, 동 과장은 그냥 걷고만 싶다. 얼마 전부터 그의 부인은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차가 필요하다고 했고, 마음 착한 동 과장은 아내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고, 그의 아내는 마치 자신의 승용차처럼 끌고 다니면서 퇴근길의 동 과장을 태우러 오게 된 것이다.
이제 독자 여러분께서는 사람들 틈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퇴근 길의 우리의 동 과장을 볼 수가 있다.
그의 어깨가,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부딪혀도 개의치 않고 걸어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는 동 과장, 어깨가 부딪혀 뒤에서 욕설을 퍼붓는 싸가지 없는 젊은 것들에게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불쌍한 우리의 동 과장, 그의 발걸음은 힘없이 허공을 밟고,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그의 입에서는 연실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 소리는 물론 국민교육헌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기반이다 기반이다 기반이다 기반이다............"
아무래도 동 과장은 이 부분에서 막혀 영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한다.
그리고 그 시각, 이제 독자 여러분께서는 우리의 동 과장을 더욱 불쌍하게 만드는 두 장면을 보시게 된다.
직원들이 거의 퇴근한 후, 구청장 실에 노조위원장 최 계장과 구청장이 앉아있다.
이상한 것은, 두 사람 사이가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생각해도 적대감을 가지고 인상을 쓰거나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기애애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세 명으로 하세. 짜를 사람이 어디 있나?”
“어쩔 수 없죠. 그나마 구청장님이 성의를 보여주시니 직원들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할 거 같군요.”
“구청장 해먹기 힘드네.”
“미안 합니다. 그럼 누구를........”
“작년에 부동산 투기의혹으로 신문에 났던 건설국장하고, 저 번 달에 음주운전에 걸렸던 행정자치국장.........그리고 동과장이네.”
“네? 착한 동과장님은 왜.........명분이 없잖습니까?”
“그깟 명분이야 만들면 되지”
“만들다니요?”
“요즘 동 과장, 근무 시간에 술 먹고 돌아치잖아. 아무리 반주라지만 얼굴이 벌개지도록 마셔서야 원.........”
“그래도 그건 너무하지 않을까요?”
“나도 마음이 아프네. 그렇지만 자네들 비위에 맞추자면 어쩔 수 없잖은가?”
마음이 아프다고 이야기 하는 구청장의 얼굴은 슬며시 웃고 있다.
그것은 최 계장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두 사람은 이미 동 과장의 사퇴를, 서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기정 사실화 했고 묵시적으로 공감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가여운 동 과장은 그것도 모르고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꼭두각시 노릇이나 했고, 지금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사실 노조에서 목표로 한 것은, 회계과장 포함 5명이었다. 구청장의 자금줄이자 오른팔로 알려진 회계 과장이야 말로 노조의 가장 큰 적이었다.
그러나 구청장은, 몇 몇 노조 간부들을 특유의 친화력과 진급보장을 미끼로, 회유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의 동과장이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그 놈의 낮술 때문에 말이다.
“누님, 어디 불편하세요?”
우리의 동 과장 사모님, 박화자 여사는 조금 전부터 심기가 불편하다.
교외로 빠져나가기 위해, 시내를 지나다 남편 동 과장을 본 것이다.
그때, 조금 있으면 벌어질 애인 양명수와의 육체의 향연에, 그녀의 몸은 이미 달아 있었고, 애인 양명수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애간장 타는 시점에서 우리의 동 과장이 그만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순간, 박화자 여사는 운전대를 잡은 손이 움찔 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내 평정을 되찾았지만 불편한 심기만은, 옆에 앉은 양명수가 눈치 챌 정도로 어쩔 수 없는가 보았다.
박화자 여사가 동 과장을 만난 것은 그녀 나이 스무 살 때, 동 과장과 나이차가 열 살이나 났지만 사람 착하고 점잖다는 주위의 평판에 덜썩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동 과장은 착하긴 하지만 그것이 도가 넘쳐 사람이 조금 모자라고 우유부단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더 화가 났던 것은 남편이 남들이 다 기피하는 별 볼 일없는 직책만 맡는 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편이 못난 때문이라고 여겨졌고 그때부터 박화자 여사는 남편을 깔보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구박까지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요즘 와서는 삼십대 중반 한창 좋은 나이에 잠자리 맛을 알아가는 그녀의 몸을, 남편 동 과장은 거의 찾지 않는 것이다. 구청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 없는 박화자 여사가, 바람을 피우게 된 것은 당연한 일.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미용실 남자 미용사 양명수를 유혹하게 된 것이다. 노총각이지만 여자들에게 나긋나긋했던 양명수를 꼬시는 일은, 박화자 여사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만난 지 한 달도 안돼 그들은 모텔을 들락거리며 몸을 섞었다. 요즘 와서 박화자 여사는 남편을 깔보는 일이 더 잦아졌다.
그렇게 박화자 여사가 막무가내로 나가도 동 과장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역시 우리의 동 과장은 사람이 좋고 점잖은 것이 틀림없는 모양이다.
“누님, 제가 위로해 드릴 테니 말씀 해 보세요.”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니야”
“진짜 괜찮으세요?”
“으응...........멍청 인간..........”
“네?”
아! 이제 우리의 똥 과장, 아니 동 영철 과장은 그의 아내 박화자 여사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독자 여러분께서 보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을 태운 차가 교외 한적하고 분위기 좋은 모텔로 들어가고 있는 장면이다.
그 다음, 두 사람이 벌이는 뜨거운 장면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인파 속을 헤매던 동 과장은, 방금 전 언뜻 자기의 승용차를 본 것 같다.
운전석에는 틀림없이 아내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머리 모양으로 보아 여자는 분명 아니었다.
순식간에 옆을 스쳐갔지만, 자신보다는 젊은 남자였다.
동창을 만난다던 아내가 젊은 사내라니.
아내를 태운 차가 지나친 후, 동 과장은 전화기를 들었지만 이내 전화기를 쥔 손에 부르르 힘을 한번 주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인파 속을 헤매고 걸어간다. 그는 계속해서 국민교육헌장을 중얼거린다.
그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
동 과장은 골목 안 어느 허름한 막 술집으로 들어간다.
아직 토요일 오후 한 낮인데도, 동 과장은, 아침을 먹지 않고 나온 대신에 미자네 식당에서 아침 겸 반주로 마신 낮술이 다 깨기도 전에, 또 낮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쯤에서 삼 십 오년 전, 동 과장의 담임 홍문시 선생의 낮술과 동 과장의 낮술에 대해 집어 보기로 하자.
독자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동 과장이 초등학교 시절은 정치적으로는 독재자의 권력으로 살벌했지만, 서민들이 사는 사회 특히 시골구석에서야 낮술은 별로 흉이 되는 행동이 아니었다.
홍문시 선생은 동네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동네 어른이 주는 막걸리를 얻어 마셨거나, 그가 밥을 대놓고 먹던 구멍가게에서 막소주라도 한 사발 반주로 마셨을 것이다. 그걸 가지고 동네사람 누구도 얘기 하지 않았을 터이고, 학교에서도 교장이나 다른 선생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또, 그 당시 선생의 지위는 지금 같지가 않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 과장이 살던 시골 동네에서야 오죽했을까?
그런 홍문시 선생에게 낮술은 그 자신도 아무런 흉이 아니었고, 학부모들로서도 자신들 집안의 어른이 마시는 반주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 과장의 요즘 낮술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우리의 똥과장은 홍문시 선생처럼 동네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구청의 부하 직원들에게 조차도 업신여김을 당하고 그의 아내 박화자 여사까지도 우습게 알고 있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놈의 낮술 때문에 우리의 동 과장은 이 십년의 공직 생활을 마감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침에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잠이 깼을 때, 동 과장은 자신의 방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오래되고 작은 비키니 옷장이 한 개 구석에 놓여 있고, 작은 방에는 빨랫줄이 쳐져 있고, 그 위에는 여자들의 빨래가 걸려 있다. 반대편 벽 위로 난 작은 창문으로 빛이 간신히 들어오고 있다.
동 과장은 늘 하는 버릇대로 물을 찾아 머리맡을 손으로 휘저었고, 그때 누군가가 그의 손에 물그릇을 쥐어 준다. 그러나 그의 손에 물그릇을 쥐어 준 손은, 아내의 손은 틀림없이 아니다.
아내의 그런 서비스는 신혼을 지나 사라진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누구일까?
공 과장은 잠시 혼란에 빠진다.
"동 과장님, 일어났어? 물 모자라면 더 떠다 줄까?"
귀에 익은 목소리다. 동 과장은 잠시 난감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린다.
평소 하던 데로 늘 '똥 과장'이라고 부르던 미자 엄마가 웬일인지 그 날 아침은 동 과장이라고 부른 것도 이상하고, 그 목소리에 참기름이라도 두른 듯 매끈거리고 심지어는 느끼하기까지 하다.
그는 개의치 않고 아침을 먹고 가라는 미자 엄마의 말을 뒤로 하고 미자네 식당을 황급히 나온다.
그러나 우리의 동 영철 과장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집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구청으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동 과장님! 점심 때 밥 먹으러 와. 기다릴께”
뒤에서 미자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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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다가 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