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박 선 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사월, 나는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을 찾아갔다. 붉은 벽돌 건물이 아름다워 마치 유럽의 오래된 성당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교정은 대학생들의 풋풋한 분위기가 연둣빛 잎사귀들과 잘 어울려 보기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대학생들이 모여 서로 얘기하는 소리가 흡사 봄의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는 교정의 건물 사이 공간 한편 작은 정원 안에 한글로 된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넓고 화려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한 시인의 대표작 <서시>가 육필 원고 그대로 새겨져 있는 시비를 만날 수 있었다.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청년 윤동주를 만나기 위해 낯선 이국땅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 타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찾아온 수고가 반가움으로 목이 메는 순간이었다. 詩碑는 1995년 시인의 영면 50돌을 맞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국 유학생들에 의해 세워졌다. 시비 앞에는 일제 강점기를 지내면서 시인이 늘 가슴에 품고 다녔을 것 같은 작은 태극기 한 개가 있었다. 그 옆으로 고등학교 수학여행단이 다녀가면서 두고 간 꽃바구니와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자신을 그린 시 <자화상> 밑에 사각모를 쓴 윤동주의 얼굴 스케치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내게 말을 걸어 올 것 같았다.
단지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들어가 알 수 없는 주사를 맞다가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윤동주의 서시를 조용히 읽어본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라는 마지막 구절까지 읊고 나니, 반갑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엉켜 눈물이 흐른다.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저 하늘에 별이 되고 말았구나. 바로 옆에는 그가 흠모하던 한국 근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먼저 세워지고, 10년 후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윤동주는 정지용을 스승처럼 존경했고, 정지용은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써 주기도 했다.
두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니, 후쿠오카 감옥에서 고독하게 죽어간 윤동주 시인이 이제는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마음 한편 안도감이 생겼다. 유난히 하늘은 푸르고, 바로 옆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벤치에는 학생들이 점심으로 빵을 먹고 있었다.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사실이 죄가 되는 시절의 가슴 아픈 역사는 이제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으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도시샤 대학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오늘의 추천 메뉴는 하이라이스다. 나물 무침 한 접시 추가로 챙겨 자리로 가져왔다. 곳곳에 대학생 윤동주가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시인이 다녔던 대학 구내식당에서 시인의 후배 학생들 사이에 섞여서 먹는 점심은, 그 자체만으로도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점심을 든든히 먹었으니 이제는 또 다른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가기 위해 도시샤 대학에 다닐 때 묵었던 하숙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시샤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 건물을 나서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 풍경은 나지막한 건물들이 정겹게 지붕을 맞대고 이어져 있었다. 이 거리를 시인 윤동주가 걸어서 오갔을 생각을 하니 괜히 정겹다.
윤동주가 묵었던 하숙집은 화재로 소실되어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고, 지금은 교토 조형대학의 캠퍼스가 있었다. 그 건물 밖 출입구 벽에 서 있는 시비 명은 <윤동주 유혼지비 尹東柱留魂之碑>였다. 나무에 가려 자칫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 같다. 검은 대리석에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진 윤동주의 육필 원고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을 사랑한 시인은 이곳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눈을 감고 과거로 돌아가서 본 그날의 처참한 장면이 일그러진 청년 동주의 얼굴에서 고뇌가 보인다. 이 시비는 단순한 돌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처절하게 주옥같은 시로서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며 저항하던 시인의 영혼이 녹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했다. 해마다 이월, 이 시비 앞에서 윤동주 추모제가 열린다고 한다.
교토 시내에 있는 숙소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배차 시간표를 보고 있는 앳된 여대생이 말을 걸어온다. 한국에서 유학 온 도시샤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묻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윤동주 시인이 겹쳐 보임은 왜일까.
일본에는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시비가 세 개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나 본 도시샤 대학의 시비와 옛 하숙집터에 세워진 시비 이외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교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골 마을, 녹차의 고장이라고 알려진 우지 宇治에 있다. 윤동주가 잡혀가기 전 급우들과 함께 소풍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시인이 마지막 으로 사진을 찍은 장소다. 우지강변에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이 마음을 모아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시비이다.
다시 한번 교토에 와야 할 나름의 이유가 생겼다. ‘기억과 화해의 비’를 찾아보기 위함이다. 일본인이 사랑하고 흠모하던 윤동주는 아이러니하지만, 과거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문학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라 여겨진다. 한국과 일본의 지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채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 간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고, 평화가 당연한 것으로 누리고 사는 오늘의 나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가깝고도 먼 일본, 교토에서 윤동주 시인을 만나기 위한 여정은 어두움 속에서 희미해진 기억들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 같은 푸릇푸릇한 봄날의 발걸음이었다. 이제 그 길은 예순이 훌쩍 넘어 접어든 문학의 길에서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또 다른 나의 ‘가지 않은 길’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