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미라 동굴 벽화 이야기
미술사의 시작점에서 동굴벽화 이야기를 해보자.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동굴 벽화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라고 한다. 쇼베 동굴 벽화는 시기적으로 훨씬 더 빠르다. 그런데도 알타미라 동굴을 시발로 잡는 이유는 제일 먼저 발견했기 때문이다.
1879년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산스 데 사우투올라가 피레네 산맥의 자락에 있는 자신의 장원으로 내려갔다. 딸 마리아(당시에는 8세 1870-1946)는 농장의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다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속에서 마리아는 소리 질렀다.
“아빠, 여기 소가 있어. 소가.”
사우로투올라는 1880년에 이 사실을 고고학계에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의 고고학계은 아무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자들로부터 사기꾼, 사기에 자기 딸까지 이용하는 파렴치 범으로 몰렸다. 그는 동굴 입구를 폐쇄하고, 실의에 차서 10년 후에 죽었다.
(이때는 고고학이 따로 독립하여 학문 연구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거의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골동품 상이었다고 한다. 사우로투올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였으므로 아마 그런 취급을 받고, 학자들은 무시하였을 것이다.)
이후에 피레네 산맥과 프랑스 여기저기서 동굴 벽화가 발견되면서 알타미리 동굴을 새롭게 주목받았다. 1902년에서야 고고학계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인정했다. 사우투올라가 죽은지 14년이 흘렀다.
사우투올라를 앞장 서서 사기꾼으로 몰았던 프랑스 고고학자 카르타야크는 중진의 고고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1902년에 ‘한 회의주의자의 속죄’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사우투올라에게 사죄했다.
그가 알타미라 동굴을 찾아갔을 때는 마리아는 중년의 백작 부인이 되어 있었다. 카르타야크에게 동굴입구의 열쇠를 건네주면서 아버지의 말을 전해주었다.
“이 열쇠는 언젠가 동굴의 벽화를 인정하는 고고학자가 찾아오면 전해주라.” 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이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유로 존의 최대 은행인 산탄테스 은행의 총수였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은 진화이론이 사상계를 뒤덮고 있었으므로 이런 에피소드가 생겼다. 그림을 그리는 기능도 미개한 고대인은 형편없다. 오늘의 그림은 인간 기능이 진화한 결과이다. 구석기인들이 이렇게 사실적으로 잘 그리다니! 믿을 수 없다. 진화론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때의 학계 분위기가 구석기인이 그린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